박종화목사/영생에 이르는 물 (왕하 5:15-19/행 10:39-43/요 4:7-14)
여러분들은 자주 외국을 여행하거나 방문하실 테니까 잘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나라 수도나 큰 도시에 가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도시에 강물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강이 도심을 가로질러서, 도시를 남북으로, 또는 동서로 나누면서 흐릅니다.
파리에 가면 세느 강이 흐르고, 런던에 가면 템즈 강이 흐르고, 우리 서울에는 한강이 흐릅니다. 제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가보았는데, 거기에도 강이 흐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뉴브 강, 자기네들 말로는 도나우 강입니다. 그 강은 도시를 남북으로 나눕니다. 북쪽의 부다와 남쪽의 페스트 사이를 흐르는 이 강은 서유럽까지 이어져 흐릅니다.
오늘 구약성서 말씀에 보면, 강은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강은 도시를 살립니다. 도시의 젖줄이 되고 도시의 모든 오염물들을 씻어 냅니다.
구약의 말씀을 따라서, 오늘 요단 강 얘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 준비를 끝내고서, 설교 후에 요단 강 찬송을 불러야 하겠다싶어서 찬송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요단 강에 관한 찬송은 다 죽어 천국 가는 찬송밖에 없었습니다. '천국 가는 얘기가 아니라, 병 고치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거 찬송가 다시 만들어야 되겠구나.' 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요단 강 건너면 바로 하늘입니다. 우리 찬송가를 만든 분들이 너무 감격해서 그런 찬송만 만들었겠습니다만, 오늘 성서 본문은 요단 강을 건너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요단 강에서 실제로 병을 고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스라엘의 옆에는 시리아라는 큰 나라가 있었는데, 그 시리아에는 나아만이라는 군사령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왕으로부터의 신임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나아만이 소식을 듣자하니 시리아와는 비교도 안될 소국(小國), "이스라엘에 한 선지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병을 잘 고친다더라" 하는 소문을 듣고, 보좌관들을 파송했습니다. "문둥병에 걸렸으니 고쳐 주십시오." 그리고는 먼길을 와서 엘리사를 찾는데, 정작 엘리사 선지자는 대국(大國)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을 영접하기는커녕 나타나지도 않고서 자기 하인을 시켜서 치료방법을 지시합니다.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그러면 나을 것이요."
나아만은 화가 났지만 병이 낫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부하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고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문둥병이 다 나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다 낫고서, 대국 시리아의 군사령관 나만 장군이 보잘것없는 나라 이스라엘의 한 종교 지도자인 엘리사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약속을 합니다.
"이제야 나는 온 세계에서 (물론 시리아를 포함하여)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번 현실화시켜 생각해 보십시다. 막강한 힘을 가진 대국의 총사령관이 소국의 한 종교 지도자 앞에 무릎을 꿇고서 "우리 대국을 포함하여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저의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선물을 받아주십시오." 엘리사는 거부했습니다. 또 간청합니다. 선물을 받아주십시오. 나만의 간청에 엘리사는 또 거부합니다. 여기서 타협안이 생겼습니다.
"제가 나귀 두 마리에 가득 선물을 싣고 왔습니다. 이 선물들을 내려놓고 거기에 대신 당신 나라, 병 고치는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 흙을 가득 담아가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십시오. 내 몸이 당신 나라의 물로 씻어서 성하게 되었으니, 흙을 가져다가 (설명은 없습니다만, 흙을 가져다가 그 흙 속에 병든 나뭇가지를 꽂으면 살아날 것 아닙니까? 나병환자인 내가 이 요단 강에서 낳게 되었는데) 썩어빠진 나라를 그 흙 속에 심으면 나라가 살아날 것 아닙니까? 제가 흙을 가져가겠습니다. 그 대신에 제가 돌아가서 절대로 다른 신에게는 번제나 희생물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야웨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다만 제가 섬기고 있는 왕이 림몬 성전에서 림몬 신을 섬기는데, 왕이 그 성전을 찾을 때 왕을 부축해야 하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갈 때 허리를 굽히게 되는데, 그건 예의상 에스코트하는 것이니, 그것을 보고 벌하지 마시고, 다만 저는 하나님만 섬길 테니 흙 좀 주십시오. 물로는 이미 씻었습니다."
엘리사의 답은 이렇습니다. "좋소. 안심하고 가시오."
사실 병 고침을 받고서 선물을 주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엘리사는 거부하다가 선물을 싣고 온 꾸러미에다가 흙을 가득 채워 주었습니다. 흙을 채워 주지 않고 선물을 받으면 안 됩니다. 나중에 엘리사의 시종인 게아시라는 사람이 너무 억울해서 뒤따라가서 나만 장군한테 "옷 한 벌 하고, 달란트 하나 주십시오." 하고 청했더니, 나아만이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흙도 안 주고 선물만 받은 시종 게아시는 돌아오자마자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제가 요단 강 얘기를 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요단 강과 같은 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 나라를 지금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라에도 요단 강이 필요합니다. 많은 권력자들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돈을 가진 수많은 부자들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부패라 이름하는 병에 걸렸는데, 어디 가서 씻어야 됩니까? 우리 한강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한강에 독극물이 없습니까? 한강은 썩지 않았습니까? 한강에는 오수가 흐르지 않습니까? 어디 가면 됩니까? 섬진강에 가면 됩니까? 영산강에 가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평양 대동강에 갈까요? 이 땅을 우리가 얼마나 오염시켰는지, 가서 씻으면 병이 낫기는커녕 다른 병까지 생길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타락은 반드시 씻겨져야 하는데, 씻길 강이 없다고 하면 그렇게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나라나 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땅에, 오염과 타락이 씻겨지고 맑은 정의의 강물이 흐르게 하려면, 영적인 요단 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곳에 가면 반드시 부패는 없어집니다, 그곳에 가면 반드시 회개하고 용서함 받습니다 하는 정신적, 영적, 도덕적 요단 강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동교회여, 21세기 이 땅의 요단 강이 될 수는 없는가?" 사랑하는 경동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은 작은 요단강은 될 수 없습니까? 나만 장군이 와서 치료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강물에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나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치유하는 맑은 강물은 강 주위에 생명의 나무를 길러줄 수 있습니다.
자연만 오염 안 된 땅과 물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인간도 오염 없고 죄 없는 영혼의 물과 흙이 필요합니다. 나아만은 누구입니까? 시리아의 장군만이 아닙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다 나아만일 수 있습니다. 다 문둥병자일 수 있습니다. 어디 가서 목욕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하십니다. 일곱 번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목욕하라고 싶은데, 목욕할 강이 없습니다. 사람을 찾는 게 아닙니다. 강을 찾습니다. 강 좀 만드십시다! 그리고 흙을 찾습니다. 생물이 자라야 한답니다. 흙을 찾습니다. 강과 흙을 찾아가는 사람, 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오늘 나아만을 통해서 주는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만이 요단 강에 몸을 씻은 뒤 수많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예수께서는 요단강 건너에 있는 한 땅에 도착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땅, 이름하여 사마리아, 이 사마리아는 여러분이 많이 들어 아시는 대로, 본래 유대 땅의 한 부분입니다.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의 왕이 (앗시리아는 아까 말한 시리아의 전신(前身)입니다.) 유대 땅 사마리아를 점령하고서, 사마리아 통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사마리아에 살던 지식층, 부유층, 식자층을 다 잡아다가 블레셋, 바빌론 등의 이방 나라로 보내고, 그 자리에 바빌론, 블레셋 등 이방 여러 나라에서 하층 계급을 갖다 심어 놓았습니다. 인구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그것이 식민지 통치의 한 유형이었습니다. 사람이 오면 사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언어가 따라옵니다. 문화도 따라옵니다. 종교도 따라옵니다. 섬기는 신도 함께 따라옵니다. 한참 세월이 지나다보니까 섞여서 결혼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순수 유대혈통이 아니라 "잡종 인간들"이 사마리아에 살게 되었습니다.
한 2백년이 지난 다음에 바빌론의 왕이, 사마리아에서 뿌리 뽑혀 이방으로 옮겨졌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특혜조치를 내렸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옛날 사마리아, 자신들의 조상 땅은 완전히 이방지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신앙은 흐려졌고, 이방 신을 섬기는 일이 만연해졌습니다. 그리심 산에 겨우 성전 하나 세워놓고 하나님께 예배할 뿐, 나머지는 전부 이방화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마리아는 팔레스타인에서, 우리 나라의 DMZ 같은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마리아는 금단의 지역, 지역 차별과 희생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결코 동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저주받을 백성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가 중간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에서 갈릴리가 있는 북쪽으로 갈 때에는 요단강을 건너서 돌아갔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면 직선 코스인데, 반드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금강산 가는 데 육로가 있으면 그냥 갈텐데 배타고 돌아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 사마리아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 땅에는 땅을 깊이 파서 만든 우물밖에 없었습니다. 이 우물물을 통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먹기도 하고 씻기도 해야 합니다.
이 사마리아에 예수께서 발을 디뎠습니다. 금단의 땅에, 종교적 이단의 땅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적대적인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혁명적입니다. 더군다나 그 땅의 한 여성과 대화를 나눕니다. 당시에 사마리아 여성이 아니더라도, 유대 땅에서도 여성들은 심각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차별을 받았는가 하면, 랍비 기록에서 "여자와 긴 이야기를 하면 악덕만 쌓이고 음부에 떨어진다. 얘기하지 말아라." "여자에게 율법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율법서를 태워버리는 게 낫다."라고 할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여성차별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여성을, 그것도 금단의 땅, 차별의 땅, 사마리아의 한 여성, 거기에다가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부정한 여성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의 내용은 다시 물 얘기입니다.
"물 좀 주시오."
"적대적인 유대 땅에서 오신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물을 요구합니까?"
"내가 누군지 알았다면 오히려 당신이 내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오. 그대가 주는 물은 마시면 또다시 목이 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당신이 누구길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준다고 하십니까?"
예수를 선지라라고 생각한 그 여인은 영적인 우물에 관해 묻습니다.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심 산에 있는 우리 사마리아 성전에서 예배드리면 영적인 물을 마시게 됩니까? 아니면 당신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면 그 물을 마실 수 있습니까? "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영생의 물, 이 둘은 하나입니다. 예배란 뭐냐? 영원한 샘물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시고 나서도 영생의 물을 못 마셨다면 가짜 예배에 참석한 것입니다. 아니면 은혜를 못 받은 예배를 드린 겁니다. 생명의 물을 마시는 것,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 예배는, 그 생명의 물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묻습니다. "제가 어디 가서 예배할까요? 예루살렘 성전에 갈까요? 그리심 성전에 갈까요?" 예수의 말씀입니다. "여기도 저기도 가지 말아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예배할 장소요, 바로 거기가 영원한 샘물이 솟는 곳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면 된다. 지금 여기도 된다."
영원한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인종도, 지역도, 종교도 다 초월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역사하는 곳에서는 생명의 물이 철철 흘러나옵니다. 예수의 말씀을 오늘 용어로 바꾸자면, "예배는, 생명의 물은 하나님 앞에 있다. 그 물은 하나님 앞에서 마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말은 하나님 안에서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가집에 이런 제목이 많습니다. 요즘은 종교단체에도 이런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코람 데오"(coram Deo). 그런 말 들어 보셨죠? 그 말이 뭐냐하면, 라틴말로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코람―앞에서, 데오―하나님. 그래서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을 보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어느 곳이든 그곳에서 치유의 물로 목욕할 수 있습니다. 그곳의 물을 마시면 썩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경동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진정한 예배의 장소임을 확실히 믿고, 여러분은 썩지 않는 영생의 물을 마시기 바랍니다. 이곳에는 누구든지 와도 됩니다. 부패한 사람도 와서 영생의 물을 마시면 됩니다. 죄인도 와도 됩니다. 괴로운 사람도 와도 됩니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이 와도 됩니다. 누구든지 오면 코란 데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실 때 경동교회 흙을 한 보따리 담아 가십시오. 집에다가 그 흙을 놓고 그곳에 화초를 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신 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영생의 물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자기 몸을 찢어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물, 생명의 물, 생명의 흙,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교회에 오면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들이 작은 교회가 되어 누구든지 우리한테 오면 하나님의 물을 마시고 하나님의 흙을 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언론보도를 통해 다 아는 일입니다만, 이수현이라는 학생이 1년 전에 일본 동경의 한 전철역에서 술에 취해 철로에 떨어진 한 취객을 살리고 자기는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엊그제가 1주기였습니다. 일본의 매스컴이 난리가 나고, 일본 전국이 난리가 난 것 같습니다. 이 땅의 숱한 여성들을 정신대로 끌고 가서 욕보인 일이 그 얼마인데, 한번도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민족인데, 한 유학생의 죽음, 헌신적 죽음 앞에서 전율도 하고 감동도 하고, 사회가 온통 난리가 난 것 같습니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수현은 정치 외교의 벽을 넘어, 국적도 초월하여, 인종도 넘어, 죽음 앞에 있는 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졌습니다. 말 그대로 순수한 인간애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국민들 속에, 우리 국민들 속에, 이수현이가 작은 살아 있는 강물이 되어 마음을 치유하기를 바랍니다. 이수현이가 작은 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큰 강줄기가 되어 큰 흙덩이가 되어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타인을 위해 피 흘리고 몸 찢겼던 그 한 사람은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쓴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은 나무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부활한 다음에도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고 함께 마셨다."
하나님 나라를 갈구하는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오로지 하늘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그분의 땅을 밟아야 합니다. 그분의 물을 직접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욕까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서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모든 예언자와 사도들이 증언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습니다. 새 생명을 얻습니다. 이 예수는 사랑의 화신이 되어, 예수 믿는 우리의 향기로서 존재하십니다. 예수를 대신하여 보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도 예수처럼 생명의 강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 있는 요단강, 살아 있는 흙, 한번 되어 보십시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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