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목사/육의 눈과 영의 눈 (열하 6:14-17)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육의 눈과 영의 눈’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안개는 항공, 항해 및 육상교통에 큰 장애가 됩니다. 안개 낀 공항에서는 활주로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행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합니다. 안개 낀 항구에서 앞이 안보여 선박의 충돌이 자주 일어납니다. 더욱이 고속도로에서 안개로 인해 수십 수백 대의 차량이 연쇄 충돌을 하기도 합니다. 인생행로에도 육의 눈으로만 사는 것은 안개 낀 항해나 비행이나 고속도로 주행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 이외에는 멀리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눈으로는 멀리 수십 리, 수백 리 밖을 내려다 볼 수 없습니다. 육의 눈으로 내일, 모레, 그 다음날 일어날 일도 우리가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의 눈을 보고 사는 사람은 종종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절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도단성을 둘러싼 아람의 군대
옛날에 이스라엘과 아람은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아람왕이 많은 군대를 준비해서 이스라엘 국경을 침공하면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군대를 준비해서 숨었다가 역습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패전하고 또 패전했습니다. 아람 왕이 가슴을 쳤습니다. “이 어찌된 일인고 어찌하여 우리가 계획한대로 군대를 보내면 그때마다 이스라엘의 왕이 군대를 미리 보내어서 길을 막고 있는가! 필경 우리 가운데 스파이가 있다.” 내각을 총동원해서 그는 크게 진노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스파이가 있어.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사람이 있다.” 그때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의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구하나이다.” 이스라엘은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육의 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눈을 하나님이 열어 주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만리 밖에 있는 사실도 보고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람 왕이 계획하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이스라엘 왕에게 경고해서 미리 군대를 동원해서 막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이 가로되 “너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는가 보라! 내가 잡으리라” 그런데 한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엘리사가 도단성에 그 수종드는 사람과 1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람왕이 최정예 군대를 총동원해서 도단성을 겹겹이 둘러싸서 아침이 되면 습격하여 엘리사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아침 일찍이 엘리사의 수종드는 사람이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고 보다가 그만 기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 전체가 아람군대에게 포위되어 있으며 아람군대의 깃발과 창검이 하늘에 사뭇쳤습니다. 그는 벌벌 떨고 기어서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큰일났습니다. 아람군대가 도단성을 겹겹이 둘러쌌습니다. 온 성주위에는 아람군대의 깃발과 창검만 번쩍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그 사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다.” 그리고 기도해서 말하기를 야웨여 원컨대 저에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하니 야웨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 보이게 하니 불말과 불경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은 군대를 총동원하여 도단성을 포위했지만 결국에는 엘리사를 잡지 못하고 도로 포로가 되어서 사마리아까지 다 끌려간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91편 11절에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우리 하나님께서 주를 경외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의 천군과 천사를 동원해서 지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눈을 가지고 보아서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사의 사환과 같습니다. 현실밖에는 안보이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는 하나님이 영의 눈을 열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구 소련의 우주 비행사 티토브는 우주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주에서 하나님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육의 눈을 가지고 우주에 나가서 살펴본들 육의 눈에 하나님이 보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라. 신령한 눈이 아니고는 안보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미국의 우주비행사 맥디브는 “나는 우주의 신비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영안으로 보고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우주 비행사인데 그는 예수 잘 믿고 거듭나서 영안이 열린 사람이라 영안이 열린 눈으로 우주에 나가서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우주를 보아도 육의 눈으로 보는 사람과 영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이는 도단성을 애워싼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의 사환에게는 보이지 않고 엘리사에게만 보였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를 둘러싼 원수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귀는 그 군대와 함께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으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만 가지고 떠보면 매일같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나서 영의 눈이 뜬 사람,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은 육신의 환경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환경과 우리 사이에 둘러 진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군대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우리를 둘러싼 원수들과 아군
육신의 눈에 보이는 죄악의 군대를 보십시오. 우리가 보면 온 천지가 죄로 가득 찼습니다. 문밖에만 나가면 모든 보는 것 듣는 것 체험하는 것이 죄악의 파도인 것입니다. 이 죄 많은 세상에 어떻게 나 혼자 독야청청하고 의롭게 살겠느냐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의 눈을 떠서 보면 그 죄악된 세상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의 군대가 둘러 진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군대는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권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권세가 죄악 세상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둘러 진치고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광으로 채워 주시고 평안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또 육의 눈으로 보면 세상 끝 마귀, 탐욕, 추함의 군대들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어떻게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수가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이 가득차고 더럽고 추악한데 이러한 세계 속에서 나 혼자 거룩하게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을 육신의 눈으로 보면 낙심하지만 우리가 영안을 떠서 보면 우리와 이 세상 사이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은혜의 군대가 둘러 진치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군대란 바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그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고 우리에게 와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 거룩한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추함을 이기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으니 영의 눈을 열어서 은혜의 군대인 성령을 바라보고 이 세상의 정욕과 탐욕과 더러움의 마귀 군대만 바라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육의 눈에 보이는 것은 병이란 마귀군대가 있습니다. 오늘날 의학적으로도 고칠 수 없는 너무나 흉악한 병이 많지 않습니까? 암이 얼마나 많습니까? 옛날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많은 종류의 암이 사람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있습니다. 고혈압, 당뇨병, 성인병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런 병들만 바라보면 위축됩니다.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내가 과연 이 병을 이기고 살 수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을 떠서 보면 병의 군대와 우리 사이에 치료의 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군대들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믿기만 하면 마귀의 군대인 병의 군대를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겐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나 유약하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엘리사가 말한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한 사람이 저들보다 많습니다. 우리와 함께 한 하나님의 은혜가 마귀의 군대보다 많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는 병을 이기고 넉넉히 건강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와 함께 계신 이가 저들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의 눈을 떠서 보면 넉넉히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육의 눈에 보이는 저주의 군대를 보십시오. 헐벗고, 굶주리고, 직장을 잃고, 사업이 무너지고 살기가 힘들어져서 온천지에 저주와 가난의 군대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육의 눈으로 보면 당연히 그렇지요. 우리가 영의 눈을 통해서 보면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저주의 군대와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영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세계는 언어의 세계요, 축복의 세계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주가 우리에게서 물러가도록 하나님의 속량하신 축복의 은혜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부요케 하는 은혜의 군대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의 군대를 바라보고 우리가 마음에 신념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믿음으로 기도하면 모든 저주와 가난은 물러가고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이 우리를 둘러 진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죽습니다. 젊어서도 죽고 늙어서도 죽습니다. 결국 인간은 죽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고 죽음이 다가오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죽음과 우리 사이에도 영생과 천국과 영광의 은혜의 군대가 둘러 진치고 있습니다. 사망이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해도 우리를 끌고서 지옥으로 못가는 것은 사망과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군대 즉,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영광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죽음이 군대처럼 둘러 진쳐도 우리를 압살시키지 못하는 것은 죽음과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둘러 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과 영생과 천국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서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국에 저명한 부흥사였던 길선주 목사님은 임종시에 둘러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말씀하기를 “하늘에서 전보가 왔으니 이제 가봐야 되겠다.” 슬픔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임종시에 “여보게 하늘에서 전보가 왔네. 이제는 가야 되겠다.” 그리고 세상을 떴습니다. 장자크 루소는 그 주변에서 눈물을 흘리는 동료들을 보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이 어쩌면 저리도 곱고 맑습니까? 나는 이제 그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군대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를 둘러 진치고 있는 하늘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움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부흥사 디엘 무디는 자기를 둘러싸고 눈물을 흘리는 아내와 자식들을 보고서 죽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땅이 물러간다. 천국이 열리고 내게 다가온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내가 너희들보다 먼저 가겠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이란 것이 절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아름다운 여행이었습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의 아내인 캐더린 부스는 임종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는다기 보다는 오히려 더 나은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 눈에 보이는구나! 이제 와보니 죽음이야말로 아름답고도 귀한 것이구나!“ 그렇게 말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의 눈으로 부활과 영생과 천국이 바라보이기 때문에 영의 눈을 뜬 사람에게는 사망의 군대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영안을 가지고 보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와 함께 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밖에 있는 원수들보다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면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음
이 땅에 살면서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사방으로 우리 목을 조여 오는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리는 쌓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방으로 들어오는 군대보다도 우리를 지키고 있는 군대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이라고 말했는데 여러분과 내가 거룩한 나라이면 천국의 지상국경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니까 최일선에 서있는 나라입니다. 세상에 사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최전방 국경지대인 것입니다. 우리 휴전선 국경지대에는 우리나라 모든 군대가 그곳에 집결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천군, 천사들은 천국의 지상국경인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총동원해서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했으며 누가복음 17장 21절에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했으므로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임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이 여러분에게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시고 통치권이 임하여 있는 여러분을 버리실 이유가 있습니까? 천국의 지상국경인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서 겹겹이 둘러싸고 하나님의 군대가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가 말한 것처럼 우리와 함께 계신이가 저 세상에 있는 사람들보다 많다.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가 우겨싸도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34편 7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보면서 하는 말이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불안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말합니다. 사실 육신의 눈으로만 보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110만의 대군을 배치하고 언제나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천문이 넘는 장사포를 우리에게 겨누어서 우리를 불바다를 만들려고 하고 있고 미사일과 원자탄을 개발하고 그것을 쓸 수도 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떠서 보면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가운데 교회가 5만여 곳이 있고 주의 종이 10만명이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1,200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지상국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을 뜨고 보면 북한의 110만 군대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면 하늘나라에는 천천이요, 만만인 천사들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의 눈을 뜬 사람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6.25사변으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않고 IMF라는 경제위기로 나라가 망할 뻔해도 우리가 우겨싸여 압살당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대한민국 속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공산화가 되었거나 국가는 부도가 나서 수출과 수입이 중단되고 기름을 수입하지 못하므로 발전소가 중지되어 자동차는 달리지 못하며 공장들은 모두 스톱하고 큰 국가적 위기에 적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살인과 강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나서 한국은 지옥과 같이 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외국에 가면 외국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참! 한국은 희한하다. 꼭 망할 것 같은데도 안 망하고 넘어질 것 같은데도 안 넘어지니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가?”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라도 오늘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 밖에 있는 원수들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육의 눈으로 보면 절망하지만 영안을 떠서 보면 우리가 결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답답한 일이 많습니다. 자식 길러보는 사람은 자식 때문에 얼마나 답답한 일이 많습니까? 사업하고 온 사람은 사업 때문에 얼마나 답답하며 직장이 있는 사람은 요즘 언제 직장에서 퇴출 당할까봐 답답하기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육의 눈으로 보면 우리같이 약하고 불안한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안을 열고 살펴보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가벼운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흘린 보혈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무슨 값으로 계산 할 수 있겠습니까? 천하보다 귀한 예수님의 보혈의 값으로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에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이 피값을 주고 여러분을 샀습니다. 보통 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거기에다가 성령으로 인치셔서 주님이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쳤습니다. 그냥 값만 지불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을 치시고 보증해서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러분은 확실하게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어 하나님 손안에 있으니 하나님이 안 돌보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안 돌보시면 하나님이 손해 보시게 됩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하나님이 손해 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님의 소유물이요, 성령으로 인을 쳐서 소유권 등기 이전에 끝난 하나님이 돌보시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답답함이 둘러싸도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므로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손에 우리가 잡혀 있으니 우리에게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룹니다. 어둠이 다가오면 하나님 빛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죽음이 다가오면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추함이 다가오면 아름다움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고통이 다가오면 오히려 축복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현재 답답해도 육신의 눈으로 보면 답답해도 영의 눈을 뜨고 보면 답답한 것이 없습니다. 영의 눈을 떠보고 있으면 끝에 합동하여 다 선이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 장난감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랄 때는 장난감이 별로 없었고 가끔 가다가 보면 오뚜기 장난감이 있습니다. 그 오뚜기 장난감은 희한합니다. 손으로 던져 버려도 오뚝 일어나고 발로 차버려도 오뚝 일어나고 밀어버려도 오뚝 일어납니다. 오뚝이를 넘어뜨릴 장사가 없습니다. 아무리 넘어 뜨려도 발딱 일어나고 발딱 일어나고... 우리가 어릴 때는 희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오뚜기가 어떻게 해서 자꾸 일어나느냐? 나중에 보니까 오뚜기 속에 그 밑에 납덩어리를 넣어 놓았기 때문에 무게 중심이 밑에 있으므로 아무리 넘어뜨려도 자꾸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뚜기를 넘어뜨릴 장사가 없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아무리 마귀가 넘어뜨려도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우리 대한민국이 아무리 넘어져도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것은 우리 속에 납덩어리보다 더 무거운 중심인 하나님이 속에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넘어질 수가 없습니다. 발로차 보십시오. 넘어지는가! 밀쳐도 넘어지지 않고 던져버리도 넘어지지 않고 오뚜기 인생처럼 늘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중심에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답답함이 군대처럼 둘러싸서 우리를 밀어도 우리 속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승리하고 또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핍박의 원수들이 둘러 진쳐도 우리 몸은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여러분 자체가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요, 하나님이 성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안에 계시므로 아무리 바깥에서 핍박을 해도 버린바 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더 굳세게 우리를 품에 품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야 우리가 버림을 당하는데 발길로 차면 찰수록 손으로 때리면 때릴수록 욕하면 욕할수록 더욱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 안아주시기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하나님 은혜 속에 넘치도록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로 34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니 아무리 핍박한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히브리서 13장 5절로 6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여러분!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과연 너와 같이 하고 과연 너를 보내지 않겠다. 과연 이란 말은 진짜라는 말입니다. “truly" “truly" 진짜로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진짜로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데 이 하나님이 세상 무엇보다도 크지 않습니까? 핍박의 군대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핍박의 군대보다 더 위대하고 크시기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로마시대 명설교가였던 크리소스톰은 복음을 증거 하다가 체포되어 황제 앞에 서게 되었는데 로마황제가 그를 위협하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만약 예수를 계속 믿고 전도하면 너를 먼 나라로 추방해 버리겠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황제께서 나를 먼 나라로 추방할지라도 하나님은 늘 내 속에 계심으로 나는 결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추방하셔도 나는 겁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좋다! 그러면 너의 모든 재산을 몰수 하겠다.” 그때 크리소스톰은 “나는 나의 모든 재산을 이미 하늘에 쌓아 놓았기 때문에 황제께서 아무리 빼앗으려고 해도 못 빼앗습니다. 내 재산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황제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는 노기가 등등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네 이놈! 네가 나를 놀리느냐? 너를 당장 죽여 버리겠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씽긋이 웃으면서 담담한 얼굴로 “폐하! 나는 이미 40년 전에 죽었는데요. 내가 40년 전에 예수를 믿을 때 세상에 대하여 죽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내 목숨을 끊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내 목숨은 이미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국 황제는 “그러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신하들이 “바깥으로 내쫓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이상 주님과 함께 천국을 상속으로 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핍박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 사람이 너희를 온갖 거짓말로 욕하고 핍박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뛰고 춤추라.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린다는 것은 죽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이면 망한다는 것은 없어지거나 지옥 가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죽여도 없어지거나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오히려 우리에게는 천국에 가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천국의 후사이므로 언제나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받기 위해서 하늘나라에 갈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로 18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후사가 된다. 생각해 보십시오. 영광의 하나님! 우주와 만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를 다 지으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상속으로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겁납니까? 우리는 육의 몸을 벗어 버리면 영의 몸으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상속자로써 아버지 앞에 설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7절에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 부자의 후사가 되는 것도 굉장한데 하늘나라의 후사가 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축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는 아프리카 선교사 부부의 간증을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젊을 때 부부가 아프리카 선교를 떠나서 아프리카에 가서 은퇴할 노인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말라리아와 싸우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싸우고 도둑들과 싸우면서 목숨을 바쳐 아프리카에 복음을 심고 일을 했습니다. 이제 나이 늙어서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오는 기선을 타고 불란서 항구에 들렸다가 뉴욕에 도착했는데 바깥에 보니까 군악대가 나와서 나팔을 불고 팡파레를 울리고 온 거리가 아름다운 꽃동산처럼 장치를 하고 색종이가 날리고 야단입니다. “와~ 우리가 아프리카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왔으니 저들이 우리를 환영하는구나! 어떻게 우리가 오는 것을 알았을까?” 그리고 두 사람이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다 낡아빠진 가방을 들고 급기야 배에서 내려 보니 아무도 자기들을 처다 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누구를 보고 그렇게 하는가 보니까 뒤에서 내려오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목에는 꽃다발이 걸려있고 그 젊은이를 향해서 사람들이 환영을 하고 고함을 치고 야단입니다. 누군가 알아보니까 미국에서 단발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해서 파리에 도착한 린드버그 비행사였습니다. 젊은 비행사가 무사히 대서양을 단독 비행해서 파리까지 왔다고 그가 함께 타고 온 기선에서 내리지 마자 온 미국이 떠들썩하고 나팔 불고 북치고 꽃다발을 주고 꽃을 날리고 야단났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너무나 마음에 충격을 느꼈습니다.
낡은 가방을 들고 뉴욕의 한 낡은 호텔에 들어와서 가방을 던져 놓고 침대에 둘이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젊어서 이 나라를 떠나서 평생을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와도 환영하러 나온 아무 사람도 없고 아무도 우리보고 수고했다는 사람이 없는데 저 젊은 린드버그는 비행기타고 대서양 건너서 파리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저렇게 환영을 하는데 너무나 우리는 원통하고 억울하고 슬프고 외롭고 섭섭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야 이 사람들아~ 린드버그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너희들은 아직 고향에 안 돌아오지 않았느냐? 아프리카나 미국이나 아직 객지 아니냐?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있지 않느냐? 장차 너희가 고향에 돌아올 때쯤 되면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의 천사 군악대들이 와서 팡파레를 울리고 꽃다발도 걸어주고 박수도 치고 할렐루야도 하고 굉장할 터이니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그때까지 기다려라! 너는 아직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맞습니다. 우리는 아직 고향땅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가 죽기 전에 오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장막 집을 벗게 되면 우리는 다 우리를 환영하는 아름다운 천국에 들어가고 주의 천사들이 모여서 박수를 치고 할렐루야를 부르며 여러분을 환영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로 39절 우리 같이 읽어 봅시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엘리사의 수종드는 종이 밖에 나가보고 도단성 주위에 첩첩히 둘러싼 아람군대와 깃발과 창검을 보고 간담이 서늘하고 오금이 주려서 기어서 들어왔을 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그 수종드는 종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를 보고 있었고 하늘나라의 군대가 불말과 불병거로 적군과 엘리사 사이를 진치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만 합니다. 육신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시민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민인 것입니다. 영의 눈을 뜨고 보면 이 세상 나라에 하늘나라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원수들이 둘러 진칠뿐 아니라 그 가운데 우리와 원수들 사이에 하늘나라의 은혜의 군대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으며 하나님이 친히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과 더불어 여러분 안에 와 계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세상에 있는 어떤 원수들 보다도 우리는 강하고 우리와 같이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많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 알고 이것을 믿고 이것을 바라보고 이것을 가지고 담대하게 입으로 시인하며 기도하고 영광을 향해서 믿음으로 전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육신의 눈만 뜨고 보면 우리는 외롭고 고달프고 무섭고 절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의 눈을 뜨고 보면 우리와 같이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사람보다 많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주의 천사들이 함께 계시고
그 말로다 할 수 없는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듣지 못하는 것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깨닫지 못하는 것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갖지 못한 신령한 은혜를 가슴에 안고서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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