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그 날과 그 시를 준비하며 살자! (마 25:1-1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2. 2. 07:09

그 날과 그 시를 준비하며 살자! (마 25:1-13)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이외에 많은 히트곡을 낸 가수 심수봉씨는 '그 날과 그 시를 철저하게 준비하며 사는 신앙인'입니다. 그녀는 콘서트를 마치고 앙코르를 받으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양을 부릅니다. 야유가 쏟아지는 반응이 나와도 개의치 않고 찬양하며 예수를 전합니다. 그녀는 부득불 해야 할 일이라고 느끼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가 스물 셋 나이에 '그때 그 사람'으로 1978년에 데뷔를 했을 때 인기가 급상승했습니다. 이듬해 10,26현장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 금지 조치를 당해 한창 일할 나이에 묶여버립니다. 벗어날 방법을 찾던 그녀는 사주와 점술에 빠졌습니다.
  그녀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도 항상 운이 나쁘더군요. 그때 믿는 친구를 만나 상담하게 됐지요. 그런데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그 친구는 '너 같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했어요.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요' /할/
  1985년 그녀는 교회에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3일 동안 눈물만 흘렸다고 고백합니다. '마치 잃어버렸던 부모님을 찾은 심정이었어요. 세상에서 겪은 외로움, 설움, 고통이 모두 얽힌 눈물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으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고백도 했습니다. '제가 가수이다 보니 십일조 액수가 클 때가 많잖아요. 자랑하고 싶은데 우리 교회는 이름을 밝히지 않더라고요. 순간 서운한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바로 회개했습니다. 제가 바로 철두철미하게 계산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의 모습이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간증합니다. '앙코르 때마다 찬송을 부르는 이유는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잃었던 생명을 찾아 광명을 얻었거든요. 조만간 C.C.M 앨범을 들고 인사하렵니다.'
  험난했던 지난 세월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며 전화위복을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그녀는 역삼동에 있는 자기 집을 개조하여 모리아(Moriah)라는 찬양과 기도 카페를 개업하여 북한선교를 위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가장 큰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할/ ◀제목 소개!▶

 

  우리는 엊그제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을 보냈습니다. 설 잘 세셨죠? 그 설 명절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왜?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최희준은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노래했습니다. 유행가이면서도 찬송가 같은 유행가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인생은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특별히 나그네 의식이 강했습니다. 주후 70년 로마에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은 이 곳 저 곳 떠돌아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1948년 독립할 때가지 이스라엘은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인생은 모두 나그네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이기에 나그네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

 

  ①나그네의 삶의 철학은 어떤 것인가?
  ㉠나그네의 궁극의 목적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그네입니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 본능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여우는 죽을 때 꼬리를 자기 굴로 향하게 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연어는 알에서 깨어 바다로 가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 살기에 고향을 늘 생각하며 사는 것이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수 천 만 명이 명절이면 고생을 무릅쓰고 이동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하늘 나라입니다. /믿/
  바울은 빌3:20절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고, 히11:16절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할/


  ㉡나그네는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있는 곳은 영원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도 내 것이 아니며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 이런 의식이 하늘나라 시민권자의 상식입니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고 하셨고, 갈6: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나그네는 항상 외롭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끼리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10:19절에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나그네로 살았었으니 너희 땅에 들어오는 나그네들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그네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추수할 때 꼭 귀퉁이 10분의 1 정도는 추수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나그네들이 거두어 먹게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민족입니다.
  욥31:32절에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욥은 나그네를 사랑하였습니다. 내가 나그네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그네를 사랑하게 됩니다. /할/


  ㉣나그네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벧전1:17절에서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권면합니다. 또 나그네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 벧전2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나그네는 항상 유혹이 많고, 시험도 많고, 싸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정욕에 빠지지 않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면서 넘어지지 않게 두려움으로 살아야 한다고 베드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멘!/

  ㉤나그네는 종말의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몇 가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벧전4:17-11).
 ⑴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벧전4: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여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먼저 '때를 의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그 다음, 이 말은 '주님의 일 할 기회가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두고도 이렇게 생각해야 되지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생애도 생각해야 할 것을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진실이 묻어있습니다. /할/
  ⑵나그네 신앙은 '정신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벧전4:7).
  정신이 중요합니다. 정신은 생명과 같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고는 아무리 책을 오래 붙들고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공부는 하는 것 같은데 성적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대개 정신을 차리지 않고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죽으면 공부도 죽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설교를 들어야 은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생명 있는 기도가 됩니다.
  십자가를 눈앞에 둔 예수님은 사랑하는 수제자 셋을 대리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그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곳에서 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기도의 능력을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이 붙잡혀간 그 현장에서 어린 계집종에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그 밤에 그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신하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실제적인 체험을 가진 베드로이기 때문에 그는 특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고 기도하면 능력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시험에도 넘어집니다. 실패자 배신자가 됩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면 권능을 얻습니다. 시험을 이깁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면 영적인 능력을 얻어 승리하게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소년입니다. 그는 바벨론의 궁전에서 배우고 자라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 쪽의 창문을 열고 그쪽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몸은 비록 바벨론 포로에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 있었습니다. 정신이 살아있는 기도였습니다.
  그가 바벨론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애국심과 신앙심과 민족애를 잃지 않았던 것은 정신이 살아 있는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가 있었기에 사자 굴에 던짐을 당하여도 사자 밥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되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 '정신 차리라'는 말은 '경건한 마음, 자신을 통제하는 마음, 여기 저기 정신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멘!/
  ▶고속도로에서 운전 중 졸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경우, '얼마동안 졸았는가?' 물으면 '깜빡 졸았다'는 말이 87프로랍니다. 깜빡 졸았다는 말은 깜빡 정신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깜빡이란 순간이 중요합니다. 깜빡하는 순간에 일이 터지고 사고가 벌어집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⑶나그네 신앙은 '근신하며' 살아야 합니다(벧전4:7).
  근신한다는 말은 '자기를 살핀다, 자기를 이긴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실 누구든지 자기를 살피면 자신의 부족한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의 부족을 발견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근신하며 자기를 살피는 사람은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또 자기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어디서 옵니까? 기도하는데서 옵니다. 기도는 하늘의 능력을 붙잡는 통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잠에 곯아떨어진 추억이 있습니다. 깊은 고뇌에 빠진 예수님이 두 번씩이나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스승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지요. 베드로는 스스로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⑷나그네 길에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벧전4: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종말론적인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은 뜨겁게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은 수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스승을 배신했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 후로 베드로는 새벽녘에 닭이 울기만 하면 옛날 생각이 나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베드로의 허물을 다 용서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리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눈물겨운 사랑을 체험한 베드로는 자신 있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는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주기 때문입니다. /아멘!/ 

  ⑸나그네로 사는 인생은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하며 살아야 합니다.
  벧전4:9절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황금률에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금년 한 해는 서로 먼저 대접하기를 애쓰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할/
  ⑹나그네 신앙은 '받은 은사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벧전4: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양 좋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은사에 따라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아서 봉사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 전부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자세로 봉사해야 할까요?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해야 합니다. '봉사'(service)라는 것이 어떤 이득을 기대한다면 봉사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기꺼운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⑺나그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벧전5:11절에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맞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 속에 있어야 그 봉사가 아름다운 봉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멘!/


  ㉥나그네 인생을 살았던 야곱의 고백을 참고삼아 살아야 합니다(창47:9).
  야곱이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으로 내려간 가족은 모두 70명이었습니다. 야곱이 바로 왕이 보낸 수레를 타고 드디어 애굽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토록 그리웠던 아들 요셉을 만나고 그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왕 앞에 서게 했습니다.
  이때 바로가 야곱에게 '노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묻자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지금 야곱은 바로 왕 앞에서 자기 인생에 대해서 회고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가 자신을 '나그네'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나그네 삶을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자기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 땅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나라 애굽 땅에서 바로 왕 앞에서 '나는 지금도 나그네로 살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했고, 히11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외국인과 나그네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게 아주 훌륭한 '나그네 신학의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나그네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을 나그네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선택하자마자 제일 먼저 주신 사명은 '고향집을 떠나라. 나그네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인생 길이 나그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또 하나의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여기서 '세월'이라는 말은 '흘러가는 시간'을 뜻합니다. 야곱이 자기가 살아온 일백 삼십 년의 시간들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의 순탄하지 않은 생애를 뜻입니다. /할/


  ㉦중요하기에 또한 번 강조합니다. '나그네는 본향을 향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야곱이 죽을 때 이런 유언을 합니다. '나를 이 땅에 묻지 말고 가나안 땅에 묻어 다오 내가 거기서 끝까지 살았어야 하는데 속이고 속고 하는 이런 일 때문에 내가 잘못한 것 때문에 이렇게 쫓겨다니면서 살았다. 그러니 내 이 두개골만이라도 그 본향에 가지고 가라'
  그의 아들 요셉은 또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거니와 너희가 이 땅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갈 때는 내 해골을 메고 갈지라'
  그래서 모세가 출애굽할 때 요셉의 무덤을 파서 그 해골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습니까? 본향의 의미가 찬송가 221장에 나와 있습니다.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중한 짐을 벗어버렸네. 죄 중에 다시 방황할 일 없으니 저 생명 시냇가에 길이 살겠네'
  이게 우리가 가고 있는 삶의 목표입니다. 강원도 양양에 가면 남대천 하류에 있는 국립 수산 진흥원이 있습니다. 매년 10-11월에 연어를 수정시킵니다. 부화된 연어 새끼들은 3개월 자란 뒤에 2월말, 3월초에 바다에 방류합니다. 그들은 몸집이 커져서 큰 것은 70cm나 성장해서 북태평양 일대를 약 5년 동안 살다가 어부에게 잡히거나 아니면 다른 물고기에 잡혀먹지 않으면 9월과 12월 사이에 남대천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들은 지도도 보지 않고 나침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넓은 태평양에서 어떻게 강원도 양양을 찾아올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마지막에는 다 본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 같이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본향을 향한 믿음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딤후4:7-8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여러분, 왜 설 명절 끝에 '나그네' 설교를 합니까? 정초에는 새로운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벌써 2014년도 1월이 가고 2월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짧아지는 인생 시간의 안타까움이 아니라 본향의 승리로 다가가는 희망의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주님은 종말론적 설교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를 비유' 설교하심으로 미리 준비하여 영원의 세계에서 승리의 본향에 입성할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할/

 

  ②나그네 신앙은 '그 날과 그 시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마25:1-13)
  사람들은 내일 닥칠 일을 계획하고 미리 준비합니다. 비가 올 것 같으면 우산을 준비하고, 학생은 열심히 공부함으로서 대학입시와 취직시험을 준비하며, 사업가는 각종 사고 예방과 사업 확충을 위해 계획하고 준비합니다. 이렇듯 만사에 준비가 필요합니다. 군인에게는 전쟁준비, 신부에게는 혼인 준비가 있어야 하듯, 인생에게는 세상을 떠날 준비가 더욱 필요합니다. /믿/
  본 장은 '종말의 비유 장'입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시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마24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 물음에 주님께서 당신의 재림의 징조를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고 나서 말세의 결론적인 말씀으로 마24:44절에서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반드시 신랑은 오신다는 결론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열 처녀 비유의 배경입니다. /할/

 

  ㉠열 처녀들이 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1).
  '그때에' 어느 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즉 종말론적 심판의 때를 의미합니다. 여기 '그때에'란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을 나타내기보다는 대략적인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한 말입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만 약 90회나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천국은 마치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했는데, 여기서 신랑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신랑이 왔다는 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데,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성도들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먼저 열 처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유대 결혼 풍속을 보면 신부가 자기 친구들을 초대해 신부의 들러리를 서게 합니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본문의 열 처녀에 대한 숫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처녀의 수가 열 명이라는 상징은 10은 완전수로 예수님 당시 유대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요 여러 종교집회에 필요로 한 정족수입니다. 그 당시 유대의 풍속에서는 장례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가 반드시 10명으로 채워졌다고 탈무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의 열 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며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을 가리킵니다. /아멘!/
  본문의 신랑은 예수님이요, 우리는 그의 신부가 될 자입니다. 등불은 빛으로써 성도의 착하고 의로운 행실을 가리킵니다. 마5:16절에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빛은 믿는 자의 행실을 말합니다. 성도가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하나님이 욕을 먹고 행실이 바르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바울은 엡5:8-9절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주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할/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입니다(2).
  이 열 처녀는 바로 교회의 성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믿음을 잘 지키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어리석은 성도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5:5로 양분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숫자에 대한 의미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 가운데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음을 가르쳐 주는 대목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여기 '슬기롭다'의 원어는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뭐니뭐니해도 준비하는 신앙이 귀하고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는 성도가 귀합니다. /할/
  또 '미련하다'의 원어 적인 의미는 '우둔한, 얼빠진 자'라는 의미로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준비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는 그런 성도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 안에 들어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3-4)
  기름을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여기 열 처녀들은 모두 등을 들고 나왔습니다. 여기서 등은 사람 앞에 구체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위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나오고 봉사를 하고 기도를 하는 그런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면에서 누가 보아도 '저 사람 교회 가나보다, 행복한 교회 집사구먼!'하면서 알 수 있는 행위 그것이 바로 등입니다. /할/
  등은 누구나 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름입니다. 기름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마다 다 준비된 것이 아니라 오직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이 기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름은 무엇입니까? 등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 기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기름은 등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할/
  ⑴슬기로운 자는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깊은 교제를 하는 자, 성령 충만함을 받은 자,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별 되었다는 뜻이요, 세상의 죄와 악으로부터 분리된 자며 인간 역사의 변화의 주도권을 쥔 자입니다. /믿/ 또 자기를 이기는 자이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또 기름을 준비한 사람은 이 시대가 잃어버린 진리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입니다. /아멘!/
  ⑵기름을 준비 못한 미련한 자를 보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며, 그 다음 ㈂신앙의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 자신 1:1의 신앙이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성령 충만해야지,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믿음 충만하다고 들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할/
  ⑶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진리입니다. 잔칫집의 문이 닫혔습니다. 한번 닫힌 문은 다시 열 수가 없습니다. 범사에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내 인생의 기회의 문이 닫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6: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아멘!/
  ⑷주님과의 만남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열심히 신앙으로 성장한 어린 소녀가 자기 엄마에게 '엄마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러는데 이 세상의 삶은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래요' '아이고, 기특도 하지!' 그때 어린 소녀가 엄마에게 다시 말하기를 '엄마는 작년에도 제주도에 가고 올해는 설악산에 가면서 열심히 준비하는데 왜 엄마는 천국 갈 준비는 안 해?'
  이 말에 엄마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도전을 받았습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준비합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준비된 자의 이야기입니다. /할/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5)
  '신랑이 더디 오므로'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그러면 그렇지 정말 예수가 다시 오실까' 하며 재림신앙이 식어져 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때 주님이 더디 오는 것 같지만 주님은 당신의 때에 분명히 오십니다. /믿/아멘!/
  본문의 표현은 '심판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온다고 할 때가 늦어짐을 보고 제자들이 고대하는 바처럼 신속히 오시지 않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졸며 잘 새' 열 처녀 모두 졸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롬13: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그리고 본문 13절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을 만한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순간마다 깜박 깜박 조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실 때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는 졸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지 않고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결심을 했다가도 풀어지고 열심히 하려고 하다가도 졸고 잘하려고 하다가도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우리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다만 문제는 일시적으로 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졸며'는 일시적으로 조는 것을 말하고, '잔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자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누가 일시적으로 졸았으며 누가 계속적으로 잤겠습니까?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일시적으로 졸았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계속적으로 신앙의 잠을 잤습니다. /할/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6)
  '밤중에 신랑이 왔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오신 것을 예고' 한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한밤중은 혼란의 밤으로 비유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고 윤리가 무너지고 도덕이 짓밟히는 혼란의 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살인, 강도, 강간, 사기, 그리고 기후 변화가 다 종말론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암흑기에 살고 있습니다. 이때 주님이 '도적같이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준비하십시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멘!/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7)
  여기 '다 일어나 등을 준비했다'는 말은, 외형적으로 볼 때 일어나 주를 맞이하려는 것은 미련한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모두 똑같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 공동체는 죽음과 잠에서 깨어 일어나 모두 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역시 주님 심판의 현장 때까지는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함께 구분 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마13장의 '알곡과 가라지가 똑같이 자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할/
  여기서 우리가 정검해 봐야 할 부분은 '내가 지금 깨어 있는가? 냐가 정말 알곡인가?'를 정감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멘!/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합니다(8).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문학적으로 등불의 마른 심지가 공급되는 기름이 전혀 없으므로 밤은 연기를 뿜어내며 꺼져 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어리석은 처녀의 내면 영적 상태의 고갈을 의미합니다. '잠들어 버린 신앙, 병들어 버린 신앙, 은혜를 망각해 버린 신앙, 강퍅하고 마비된 양심, 죄가 죄인지를 모르고 범하는 화인 맞은 양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등불이 꺼져있다'는 말은 '내가 준비한 것이 다 드러나 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색이 드러난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예수님을 잘 믿는 줄 알았는데 결정적 순간에 예수님이 오시니까 그 믿음이 엉터리인 것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할/
  '기름을 좀 나눠달라' 여기서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이 종말의 때에 겪는 당황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심판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 놓은 은혜와 신앙의 기름을 타인에게 꾸어달라고 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입니다. 실로 심판 주 앞에서 심판의 평가는 자기 공로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빌려다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오직 자기가 쌓아 올린 신앙의 업적과 헌신과 충성대로 평가를 받습니다. /아멘!/ 그때에 충성한 자에게는 잘했다는 칭찬이 있을 것이고, 불충한 자에게는 바깥 어두운 때 떨어져 슬피 울며 이를 감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칭찬 받을 수 있는 한 가지 선한 일이라도 꼭 해야 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단 한번만이라도 기쁘게 해 드리는 어떤 계기를 꼭 가져야 합니다. /아멘!/

 

  ㉧슬기 있는 자들이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했습니다(9).
  기름을 꾸어 달라고 하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자의 대답은 아주 단호합니다.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어떻게 보면 '야! 사랑이 없다느니 인색하다느니' 이런 도덕적인 견지에서는 비평의 여지가 있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떤 문제입니까? '내가 죽느냐 사느냐 구원이냐 심판이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신앙적인 문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그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은혜 받는 문제는 절대로 양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은 성도들끼리 나눌 수 있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믿/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각자 받은 거룩한 은총입니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성령과 은혜와 신앙에 의해 결정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구원을 받았다고 아들이 아버지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인이 권사가 되었다고 치맛자락 붙들고 천국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우리에게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신자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 하나는 진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만족하는 신자들입니다.
  진실한 신자는 신앙의 형식과 내용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반면에 부실한 신자는 신앙의 형식은 갖추고 있는데 그 내용이 없습니다. 결국 믿음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 개인의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할/ 우리 각 사람은 자기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 각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아멘!/
  가룟 유다는 삼 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는 엄연히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죄인의 구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로마 제국을 쫓아내고 유대 나라를 세울 정치적인 메시아로 보았는데 십자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니까 자기의 야망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자 돌변하여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30냥에 팔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냉정합니다.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하십니다. 기름은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마13:44-46절을 보세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여기서 밭은 크게는 세상이요, 적게는 교회요,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요, 사람은 성도로써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한 성도가 그 진리에 감격하고 기뻐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 주님을 자기 최고의 보화로 모시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아마 그 사람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과감하게 다 팔아 밭을 샀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 밭에 감추어진 보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연락이나 쾌락, 부질없는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보다 더 훨씬 좋은 천국을 나의 소유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보화를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것으로 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천국도 자기의 소유로 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감추어진 보화와 같은 천국을 열심히 구하십시다. 그리고 이 세상의 부질없는 모든 것을 과감하게 내어버리십시다. 그리하여 생수의 기쁨이 넘치는 천국백성들이 되시기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10)
  '저희가 사러 갈 동안에' 때가 지났습니다.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봉사할 기회가 있고 때가 있습니다. 언제나 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도 효도할 수 있는 때가 있고, 기회가 있습니다. 부모가 영원히 항상 자식들 옆에 있지 못합니다. 때가 되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실 때 효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본문의 이 미련한 처녀들은 그 밤에 신랑이 올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문이 모두 닫혀 살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려고 나왔습니다. 그때 신랑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누가 주님과 함께 들어왔습니까?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그렇습니다. 준비된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비된 자란 인내를 가지고 신랑이 더디 올 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입니다. /할/
  '닫힌지라' 이 단어는 이미 문이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구원은 기회를 잃어버리면 끝장입니다. /믿/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1-12)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절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7:21-22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비유의 '크라이 막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허겁지겁 신자, 헐레벌떡 신자'를 보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항상 한 박자 늦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그런 대로 넘어갑니다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안 통합니다. 여러분, 가장 불상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가 가장 불쌍한 존재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디로 갑니까? 지옥 음부에 떨어져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처참한 신세가 됩니다. /믿/아멘!/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
  깨어 있으려면 자신의 믿음을 늘 확인해야 가능합니다. 바울은 고후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롬13:11절에서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할/
  여기 '깨어 있으라'는 말은 '예비하고 있으라'와 동일한 말입니다.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이 24장에서 4번이나 나옵니다.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깨어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종말의 신앙은 여기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준비하고 깨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 돌아가는 증조들을 보면 정말 우리 주님이 오실 재림의 때가 임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깨어있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4년 2월 2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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