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나의 멘토 한미성 선교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4. 16. 09:49

4월의 묵상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후5:17-

 

저는 1955년에 내한, 1967년에 한국을 떠난 교육 선교사 한미성(Melicent Huneycutt) 교수를 저의 멘토로 생각하고 지금도 존경합니다. 그분이 전주 기전여고 교장(1957-1962)으로 계실 때 저는 그곳 교사로 취직했으며 한남대학교 교수로 계실 때(1963-1964) 그곳 대학에 학생으로 편입하여 그분을 모시고 조교로 일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충격적으로 깨닫고 살게 해 주신 분입니다. 기전여고에 채용된 후 신입 교사 환영 파티가 있었는데 그 때 저에게 노래를 시켰습니다. 술 파티를 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야 당연히 흥을 돋울 수 있었겠지요. 저는 미국인 교장 앞에서 수학교사지만 영어도 잘 한다는 치기로 영어 노래를 했습니다. 그것이 ‘케세라 세라’라는 당시 영화 주제가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음 날 교장실에 불려갔습니다. 그 때 한미성 교장은 “기독교인은 ‘케세라 세라’하고 살면 안 됩니다.”하고 미소를 띠며 말했는데 저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평생 잊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 뒤 저는 영어공부를 더 하고 싶어 일기장을 두 권을 사서 일주일씩 교대로 영문으로 일기를 써서 그 분에게 드리고 교정을 해 받았습니다. 그분은 제가 미국 유학을 희망한다는 것을 알고 초급대학 졸업으로는 유학이 힘들다고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편입시키고 첫 학기 등록금을 대주며 생활비가 필요할 거라고 저를 조교로 써 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한국 선교사는 한국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선교사 촌에서 나와 한국인 마을에서 온돌방에 살면서 여대생 한 사람을 양녀로 그리고 나이 어린 남자를 양자로 삼아 가정 도우미를 써가며 길렀습니다. 또 대학생 선교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UBF: University Bible Fellowship)을 짜서 시내에 회관을 구해 학생들이 그곳에서 성경공부도 하고 친목하고 지내도록 했습니다. 영문과 과장으로 있으면서 시내에서 좀 떨어진 장동에 있는 미국인 캠프의 사병들을 불러 저녁 때 쿠키대접을 하면서 학생들과 소그룹 회화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학이 작았지만 시내에서 영어연극 공연을 하면 국립대학 공연보다 훨씬 더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런 그분을 도우면서 저의 신앙은 성장했습니다.

 

저는 정말 ‘케세라 세라’하고 세상과 짝하며 살지 않았는지 지금도 많이 반성합니다. 사실 어렵고 힘들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은퇴한 지금 저는 “지금까지는 다 연습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정말 보람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라고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몸이 낡아져서 힘이 없습니다. 고난 주간을 당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제게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기도:

하나님, 이제 물욕도, 권력도, 명예욕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새 힘을 구하오니 주신 능력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 주십시오. 아멘.

 

2004년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만난 한미성 부부

출처 : 낮은 문턱
글쓴이 : 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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