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누가 네 이웃인가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4. 23. 16:56

4월의 묵상

“너는 이 세 사람(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눅10:36-

 

저는 성경에서 예수님과의 대화를 읽고 있으면 그 초점을 잃고 당혹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라고 하는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율법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앉아서 듣고 있다가(10:25) 일어서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직접 대답을 하지 않고 율법사에게 되묻습니다. 율법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서슴없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인지 신약시대의 저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율법사는 그렇게 믿고 있었고 당연히 자기가 늘 실천하고 있는 일을 묻고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그럼 자기 이웃이 누구냐고 되묻습니다. 도대체 자기가 사랑하고 있지 않은 이웃이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것 같은 태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시고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를 드십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도, 레위인도 다 그를 피하여 지나갔는데 어떤 사마리아인만 그를 돌보아 주었다는 예화입니다. 그럼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을 실천해야 할 율법사의 이웃은 누구란 말입니까? 당연히 강도 만난 자입니다.

 

강도 만난 자가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었다면 그들이 낸 십일조로 생활을 유지하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제를 지내며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죽은 자를 만지는 일은 자신을 더럽히는 일(레21:1)이라고 율법을 지키려 했다는 변명도 맞지 않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아직 죽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잘 아는 율법사에게도 강도 만난 자는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입니다. 비록 사마리아인이었다 할지라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다 너희들이 이웃은 강도 만난 자이다.”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생각의 대전환이었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의 답은 “강도만난 자이다.”일 뿐 아니라 “너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한 사람은 율법사가 아니라 사마리아 인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저는 어려운 사람의 이웃이 될 뿐 아이라 나를 어려운 사람이 이웃으로 생각하도록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아멘.

 

출처 : 낮은 문턱
글쓴이 : 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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