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좁은 문이 축복(祝福)의 통로(通路)입니다! (마 7:12-1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7. 3. 17:28

좁은 문이 축복(祝福)의 통로(通路)입니다! (마 7:12-14)


  마 5-7장, 이 세 장은 그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 어렵지도 무겁지도 않지만 대단히 심오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7장에 있으므로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이요 결론부분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언제나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강해 부분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이다.'하는 정확한 설명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은 강해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부분을 반드시 첨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이렇게 행하라'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특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원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철학, 그리고 생활의식, 생활 방법 등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너무 귀하기에 '금으로 써서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넣어야할 말씀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고 빛나야 될 가장 값진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금같이 귀중한 말씀들이지만, 특히 산상수훈은 더욱 귀중한 말씀입니다. /할/
  그런데 실상은 산상수훈의 결론은 12절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일맥상통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점의 해결방법이 바로 이 한 구절의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웃은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 적극적으로 이웃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산상설교의 결론입니다. /아멘!/


  ①남을 대접하는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산상수훈의 결론이 '율법과 선지자'입니다(12).
  여기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는, 이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의 다른 모든 명령들도 지키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교훈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꾸준히 제기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란 모세의 오경을 말하는 것이며, '선지자'는 구약의 12선지 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의 요약이란 뜻입니다.
  마22장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제일 큰 계명입니까?' 예수님은 37-40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도'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마5:17절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여기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고, 그 '황금률'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요약한 것입니다. /아멘!/


  ㉡본문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⑴이 말씀 속에 중요한 뜻은 참된 신앙이란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랑과 섬김의 대상, 즉 대접하는 대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웃은 남편일수도, 아내일수도, 형제일수도, 친구일수도, 성도일수도 동네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웃의 모두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인 것입니다. 목사님들도, 권사님도, 평신도도, 우리는 계급으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섬김의 대상입니다.
  ⑵'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언뜻 보면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사랑 받기 위해서 이기적인 생각으로 다른 사람에게 먼저 대접하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대접이란 관심과 사랑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은 미움의 대상, 시기의 대상,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을 열고 조건 없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아멘!/
  ⑶이 말씀 속에는 우리는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라는 것을 보여준 우리 모두는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복음의 빚은 졌으면 그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할/
  ⑷먼저 나 자신이 바른 양심과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은 '양심이 바로 된 사람이 되라.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고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⑸자기의 배려를 넘어서 타인을 배려하라는 말입니다. 남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바로 대접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할/
  ⑹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이 사랑과 섬김의 생활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야 합니다. 자기가 싫고 귀찮은 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좋은 것은 상대방도 좋을 것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주장하면 모든 것은 풀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으로 가야합니다. /아멘!/
  ⑺섬김의 원칙은 친절입니다.  
  ▶미국 체인점인 체인스토어 가운데 몬타나 주의 '세븐 일레븐' 회사에서 서비스를 감독하는 감독관이 나와서 그 가게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눈바람이 흩날리는 이런 날은 손님이 별로 없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주 산마루에 접해 있는 세븐 일레븐 체인점에는 의외로 손님이 많았습니다. 그가 자세히 관찰을 해보니까 '로베르트'라는 명찰을 하고 판매대에 앉아서 돈을 받는 자매가 너무 친절하고 상냥하게 사람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감독관은 역시 서비스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몇 사람들이 왔다가 나간 후에 노인이 들어왔습니다. 행색이 매우 초라해 보이는 이 노인은 매장을 빙빙 돌더니 바나나 하나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노인은 사람들이 다 나가기를 기다려서 판매대에 와서는 바나나를 올려놓았습니다.
  직원이 노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여러 가지 개인 생활을 물어보고 바나나 하나를 잘 포장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밖에까지 나와서 '힘내서 사시라'고 격려하면서 옷도 만져주고 씩 웃으면서 '내일 또 오시라'고 인사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감독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유명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맞아, 저 노인은 바나나를 사러 온 것이 아니야. 저 노인은 사랑을 사러 온 것이지.'
  그래서 이 이야기가 '세븐 일레븐'의 매니저들을 교육시키는데 필수적인 교육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물건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물건을 파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상점 직원처럼 사랑의 실천자가 된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전도도 저절로 잘 될 것으로 믿습니다. /아멘!/
  ⑻남을 대접하면 하나님의 보상이 반듯이 따라 옵니다. 히13:2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오늘날 세계 제일의 부자는 미국의 '빌 게이츠'입니다. 그가 현재 가진 재산은 500억 달러입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조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그리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300억 달러를 내놓았습니다.
  그가 몇 년 전에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전 재산의 95%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내놓고 나머지 5%만 자손에게 주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아들이 11세 때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암송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한 구절을 묵상하고 평생 실천했습니다. 바로 눅6:38절의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대표적인 바다가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와 사해입니다. 헐몬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이는 갈릴리 바다는 이스라엘의 전 국토를 비옥하게 만들고 또 그 물을 계속해서 사해로 흘려보냅니다. 반면에 갈릴리 바다의 물이 모이는 사해는 물을 밖으로 전혀 내보내지 않습니다. 사방으로 물을 나눠주는 갈릴리 바다는 물고기가 풍성한 생명의 바다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물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해는 물고기 한 마리 살지 못하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는 나누는 곳에 생명이 있고 움켜쥐기만 하는 곳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것을 나누지 못하고 계속 받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믿음도 죽고 인격도 죽고 삶도 죽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으려고만 하지말고 하나님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접하고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내 이웃을 사랑하고 대접하는 것이 됩니다. /할/
  마25:34-40절에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할/
  잠19: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11:24-25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아멘!/


  ②좁은 문이 축복의 통로요, 영생의 길입니다(13-14).
  학자들은 13-14절의 말씀을 가리켜 산상수훈의 후기 또는 부록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우리는 어려서부터 '군자(君子)는 대로 행(大路 行)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군자는 넓은 길로 가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넓은 길로 가지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질의 부유에 있습니까? 직위의 높음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도 '좁은 문이 축복의 통로'라고 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과 모습을 보여주고 나서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마지막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니라, 너희는 산 위에 드러낸 동네니라, 너희는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라, 너희는 외식하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사람을 두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먼저 남을 대접하라'
  이런 모든 말씀을 실제생활에 적용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결같이 행하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고, 수고와 희생과 땀이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배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성벽을 쌓고 성안에 모여서 살았습니다. 성벽에는 많은 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운데 있는 문은 제일 컸습니다. 물론 그 길도 넓었습니다. 전쟁에서 아군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는 그 문은 개선문처럼 사용하였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나와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군들을 환영했습니다. 이것이 넓은 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성벽의 후미진 곳에는 바늘귀처럼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답니다. 다른 문이 다 닫히고 난 뒤에라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그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비상구처럼 사용되는 문입니다. 길도 당연히 좁고 협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적은 문입니다. /할/


  ㉠좁은 문은 협찹한 문입니다(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 '협착하다'는 말은 원어 '델리보'라는 말로, '괴롭히다, 깨뜨리다, 좌절시키다.'라는 뜻으로 자기와의 싸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가는 길을 골1:24절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속성 때문에 그 길로 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대체적으로 인간의 속성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할/
  ⑴좁은 길보다 넓은 길을 가려는 속성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생리입니다. 사람은 좀 더 편안하고 쉽고 화려하게 살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게을러지고 가난해지고 놀기를 좋아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그 속성 때문입니다.
  ⑵어려운 일보다는 쉬운 일을 하려는 속성도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3D직종이라 해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요즘 신세대들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 신세대들은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비스업이나 술집에 들어가서 쉽게 일하며 편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곳에서 일을 하게 되면 살아가기는 쉽고 편안하겠지만 평생 가도 장래성은 없습니다.
  사람이 쉬운 일을 좋아하면 장래성이 없습니다. 상급도 없습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 쉬운 경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렵기에 그만큼 상급이 크고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운 경기는 인기도 없고 상급도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기술을 누가 인정해 줍니까? 사람이 이렇게 쉽게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노자는 '대방무우(大方無隅),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큰 인물이나 큰그릇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수련하고 노력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발명왕 에디슨에게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리 쉽게 물건을 만들어 내느냐, 당신은 천재다.' 그 말을 들은 에디슨이 말합니다. '천재는 99%의 땀과 단 1%의 영감으로 구성됩니다.' 이 말은 세상에 쉽게 무엇이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⑶돌아가는 길보다 지름길로 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쉽게 얻으려고 합니다. 지름길은 편법입니다. 그 길을 가면 일시적으로는 쉽고 편리하지만 후에 가서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지름길이나 편법은 권장할 만한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아멘!/


  ㉡이 좁은 문은 어떤 문입니까? 여기 문과 길은 같은 표현입니다.
  ⑴주님이 열어 놓으신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그 문이 열려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류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범죄 이후에 인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문이 닫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2:25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길을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 요19:30절에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속죄성취를 선언할 때, 예루살렘에 있는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막혔던 지성소의 문이 열렸습니다(마27:51).
  예수님은 이 성소의 휘장을 자신의 육체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사죄를 성립시킴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이라고 하였습니다(히10:20). 그래서 주님은 그의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계3:8)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아멘!/
  ⑵좁은 문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이 좁은 문을 다르게 표현하기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란 무엇을 의미함인가? 그것은 구원의 문을 의미합니다. 그 구원의 문의 정체가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 말입니다. /할/
  요10:7절에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9절에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
  여기 '구원'은 '영생'을 가리킵니다. 행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열린 좁은 문은 구원의 문이요, 천국의 문입니다. 그 문이 바로 하늘로 직행하는 길입니다. 요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할/
  ⑶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씀은 '좁은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를 믿으라'는 의미로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1: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에서 '영접'과 '믿음'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뱀에게 물린 자들이 모세가 만든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1:9)고 한 사실을, 예수님을 '믿으라'는 개념과 동일시하셨습니다(요3:14-15). 또한 요5:24-25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는데, 이런 경우 '믿는다.'는 말과 '듣는다.'는 말은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요6장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을 '먹고 마시는'것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15장에는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으면 과실을 맺는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면 과실을 맺는 것이라고 다시 풀이하셨습니다. '믿음'을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예수를 믿으라'는 뜻입니다. 즉 행동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 주 안'이라고 하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가야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⑷그런데 이 길을 가려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갈등의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엄밀히 말하자면 평안의 생활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싸우기도 하면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언제나 자기와의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욕망과도 싸워야하고 육신과도 싸워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언제나 자꾸만 정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질서를 깨보려는 욕망이 들어 있고, 타락해 보고 싶은 속성도 들어 있고, 거역해 보고 싶은 마음도 어떤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이 인간 본성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같은 욕망과 싸워서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 본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좁은 길을 가는 생활입니다. 그러자니까 그 길을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넓은 길은 사람들이 가기가 아주 쉽습니다. 거기에는 재미도 있고, 굳이 갈등을 느끼며 싸울 필요도 없는 그런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경고합니다. 그 길은 넓어서 가기가 재미있고, 쉽지만 그 길은 결국 멸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권고하기를 '너희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문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래서 이 길을 가려면 갈등을 각오해야 합니다. /믿/
  ㈁그 다음에 문제는 '고독과의 싸움'입니다. 사람이 잘 살아가다가도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이 들 때, 고독이 느껴집니다. 신앙의 길은 혼자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은 언제나 외롭고 고독한 길입니다. 본문에서도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여기 적다는 의미는 '십자가 고난의 참된 진리를 체득하는 자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은 좁은 길이요, 그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오, 신앙의 원칙대로 살아보려고 힘써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한지 모릅니다. 따돌림을 당하고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당하고 때로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감수할 각오가 없으면 이 길을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지드는 '좁은 문'이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책 속에 여주인공은 이렇게 독백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게 보이신 그 길은 너무나 좁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라는 독백이 나온답니다. 그래요, 신앙의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입니다. 홀로 가기 때문에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우리 주님이 동행해 주십니다. /믿/할/
  노아는 120년 동안 혼자 방주를 지었습니다. 외로운 길이요, 고독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줄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하며 넓은 길로 가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님은 죽음을 각오하고 좁은 길을 택한 사람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오점을 남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3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27회 장로교 총회는 날치기로 신사참배 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과 그가 섬기는 산정현교회 만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주 목사님을 감옥에 가두고 갖은 고문을 가하여 항복을 받아 내려고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산정현 교회의 출입구를 못 밖아 폐쇄시켜버렸고, 주목사는 감옥에서 외롭고 고독한 싸움을 했습니다.
  한번은 주 목사님을 여러 날 굶겨 놓고는 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방에는 밥상이 있었습니다. 밥상 앞에 주 목사님은 무릎을 꿇게 하고 뒤로 손을 묶어 놓고는 밥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앞에 쳤던 광목을 제치는데 거기에 신사의 모형이 있었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머리를 숙이면 신사에 절하는 꼴이 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주 목사님은 기진맥진하였지만 결코 그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경찰서 마당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에 갇힌 성도들을 불러모아 놓고는 주 목사님도 끌어냈습니다. 그 앞에는 무수한 못이 솟아있는 널빤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일본 형사가 성도들에게 '너희가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주목사가 못 위에 걷지 않아도 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위를 걷게 할 것이다.'
  그러자 주 목사님이 '성도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지 마시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십시오, 오직 주님의 계명을 굳게 지키십시오,' 하고서 자진해서 못 판 위로 오르셨습니다.
  그 순간 성도들을 울음을 터뜨리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한발, 한발 내딛는 주 목사님의 발에서는 피가 흐르고 발자국 마디에는 핏자국이 얼룩졌습니다. 주 목사님은 순교를 각오하고 좁은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주기철 목사님의 일대기입니다. 이 영화 장면에서 주기철 목사님이 못 판 위에 걸어가는 것을 촬영할 때, 주연 배우와 감독들, 엑스트라도 그 장소에 모였던 모든 성도들이 실제로 울음을 터뜨리며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주기철 목사님은 혼자 외롭게 그 고독을 참아냈습니다. 그분은 죽었지만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만큼 부흥된 것은 그분의 순교의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본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인생의 행로에는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넓은 문으로 걸어가는 길이 있고, 하나는 좁은 문으로 걸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느냐? 아니면 멸망의 길에 빠지느냐가 결정됩니다. /아멘!/
  ⑸좁은 문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신앙의 문이요, 구원의 문이요, 축복의 문이요, 기적의 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문입니다.
  목사가 가는 길도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원망도 많은 길입니다. 그러나 사명이기에 그 길을 갑니다. 하나님이 그 길가라고 하니 묵묵히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10:9절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문은 좁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문을 통과한 사람만이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한 자만이 능력을 받고 축복을 받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할/
  ⑹또 좁은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문을 통과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인생행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믿음으로 사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을 가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또한 온전한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푯대가 되어 쫓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할/
  ⑺좁은 길은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왜 고생을 사서하며 불편하고 어려운 일을 스스로 택하였습니까?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좁은 길을 선택한 사람은 분명히 거기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에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아멘!/
  생명이 있는 곳에는 약동이 있고 성장이 있고, 창조의 능력이 있고, 썩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죽은 고기는 물과 함께 떠내려갑니다. 죽은 신앙은 세속화되어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산물고기는 어떠한 역류라도 힘차게 가르고 나갑니다.
  산 신앙을 세파의 큰 물줄기를 가르고 전진하는 자입니다. 생명은 귀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엇이 유익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보십니다. 주님은 요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가는 길이 바로 좁은 길입니다. /아멘!/
  ⑻그 길은 주님을 영접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미국 텍사스에서 큰 목장을 경영하는 돈 많은 한 부자가 세계여행 중에, 그렇게 보고 싶던 버킹검 궁전 앞까지 왔습니다. 그는 문지기에게 천불 짜리 지폐를 주면서, '이 정도면 이 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문지기는 '아닙니다. 이 왕궁은 돈을 주고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사람은 단 일 불도, 들이지 않고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문, 구원의 문, 좁은 문, 생명의 문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 그 피의 속죄 은총을 받은 믿음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공적이 없어도 하나님의 영접을 받아 들어가는 '은혜의 문, 영생의 문'입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 문과 길은 어떻게 들어가야 합니까?
  ⑴이 길은 오직 믿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생명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진 자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음을 아는 자만이 그 길을 갑니다.
  여러분, 누가 좁고 협착한 길을 좋아합니까? 그 길은 고난과 박해와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길입니다. 제가 화양동에서 교회건축을 하고 동네사람들과 무려 4-5년을 싸웠습니다. 그 당시 왜 우리가 동네 사람들에게 그런 멸시와 무시를 당하고도 참고 갑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고 분합니까?
  그런데도 그 길을 간 것은 그 길이 좁은 길이요, 그 길을 가야 생명이 있음을 분명히 믿기에 우리는 그 길을 간 것입니다. /할/
  롬8: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마5: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아멘!/
  ⑵좁은 길은 의인이 가는 길입니다. 시1편을 보면 두 사람의 길에 대해서 나옵니다. 한 사람은 의인의 길에 있고, 또 한 사람은 악인의 길에 있습니다.
  먼저 의인의 길은 시1:1-3절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것이 의인의 길,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은 끝까지 좁은 길이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된 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인의 길을 보세요! 시1:4-5절에서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 두 가지 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시1:6절에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은 좁은 길을 가는 자요, 여기 악인은 넓은 길로 가는 자입니다. /할/
  본문 13절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큰문은 무엇이든지 다 가지고 통과할 수 있는 문입니다. 큰문을 가기도 쉽고 재미도 있고, 편하기도 합니다. 욕심, 탐욕, 정욕을 다 가지고 갈 수 있는 문입니다.
  사람들은 크고 쉽고 평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또한 눈에 보기 좋고 감각적이며 화려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넓고 큰문은 멸망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못 박고 있습니다. /믿/
  ⑶자기 포기가 있어야 가는 길입니다. 언제나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대는 남편도 아니고 이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사단에게 싸워 이긴 사람도 자기라는 우상 앞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금식하고 철야하고 회개하고 성경공부하고 말씀을 받고 눈물을 흘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자기 앞에서 실패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가장 큰 적은 사단도 아닌 남편도 아니고 자기 자신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아셨기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도 포기할 수 있어야 그 길을 갑니다. 여러분, 우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명예를, 인기를, 세상을 하나님보다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할/
  ▶기독교 인물 가운데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앗시시에서 어느 부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그는 사교계 명사로 탕아의 우두머리를 뒷골목에서 방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방탕을 하면서 살아가던 그가 어느 날 환상 속에서 천사들의 합창소리를 듣습니다. '은혜 받은 자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때 그가 천사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는 크게 깨닫고 멀어져간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한 마디에 변화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다가 나중에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방탕생활도 환락의 생활도, 세상에 대한 미련도, 부모의 재산도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외치기를 '이제 나는 좁은 길을 가련다.' /할/ 
  그때부터 그는 병든 자 소외된 자를 찾아가 위로해 줍니다. 문둥병자에게 찾아가서는 입을 맞추기도 하고 고름을 빨아주기도 합니다. 또 거지들과 함께 구걸도 합니다. 그런 그를 가리켜 후대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는 것 같다고 했고, 그때부터 그를 성자로, 성 프란체스코라 불렀습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기도를 남겼습니다. '주님! 나를 천사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둠이 있는 곳에 밝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⑷죄의 짐을 다 벗어버리고 들어가는 문입니다. 히12: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죄의 짐을 벗는 길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천국은 회개 없이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복음의 일 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오늘날 한국 강단이 회개가 빠진 믿음을 강조하고 회개 없는 신앙을 양산하다가 이 사회가 이렇게 되었다고 통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회개 없는 신앙은 변화가 없습니다. 회개 없이는 주님을 만날 수 없고, 회개 없이는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회개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했습니다. 이런 곳을 갔습니다. 이렇게 남을 속였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진실된 마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⑸그 문은 겸손한 자가 들어가는 문입니다. 좁은 문을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하신 유대 베들레헴 말구유간 자리에 지금 성탄 기념교회가 세워져있습니다.
  그런데 그 큰 교회에 출입구 문은 작은 문하나 밖에 없답니다. 왜? 작은 문하나 밖에 없을까요? 거기에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고, 아기 예수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머리를 숙일 수 있고, 자기 허리를 굽힐 수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길은 바로 이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께 은혜 받은 통로입니다. 약4:6절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리고 벧전5:6절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또한 시10:17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할/ 우리 모두 겸손한 신앙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⑹그 문은 혼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학교의 문, 사회의 문은 때로는 단체적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환경, 학벌, 배경, 이런 것들이 그 문에 들어가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은 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내가 바로 설 수 있을 때 그 문은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구원의 문은 아버지의 믿음 가지고 아내의 믿음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의 믿음으로 들어가는 1:1의 문입니다. /할/
  ⑺그 문은 핍박과 환란이 동반되는 문입니다.
  ⑻그 문은 자기 헌신이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일을 지키는 것, 새벽재단을 쌓는 것, 봉사하는 것, 다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길입니다.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생명이 있는 자에게 미래는 보장이 된 것입니다. /아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의 알사스 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29살의 나이에 철학 박사, 신학 박사, 음악학 박사, 의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의사가 없다는 말을 듣고 의학을 시작해서 그의 나이 36살에 의학 박사가 되었답니다.
  37살 때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닭장을 개조하여 진료 실을 만들어서 거기서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생 동안 아프리카 인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 슈바이처는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 상금으로 아프리카에 큰 병원을 짓고 그들을 섬겼습니다. /할/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좁은 문이 있습니다. '데이'라는 사람이 쓴 '세 황금 문'이란 글에 보면, 인간이 언어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충고의 말이 나옵니다.
  '말하기 전에 세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 그 문은 다 좁은 문들'이라고 전재를 하면서, 첫째 문은 '그것이 참말이냐?' 그리고 둘째 문은 '그것이 필요한 말이냐?' 네 마음속에서 참된 대답을 하라는 것이고, 셋째 문은 '그것이 친절한 말이냐?'를 물었습니다.
  그 세 문을 지나왔거든 그 말의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염려말고 '크게 외쳐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열매가 맺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 길로 가라고 하십니까? 그 문이 생명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은 우리에게 좁은 문을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들어가 믿음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위대한 생명의 역사가 동반됩니다. 막9: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멘!/ (2014년 6월 29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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