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눅 12:13-21)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7. 5. 15:40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눅 12:13-21)


  세상이 다변화되고 있습니다. 산업사회, 경쟁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살아 남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어떤 사람을 요구하느냐?'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끼, 꼴, 깡, 꿈' 이 네 가지 요건을 갖춘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끼'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 끼는 프로근성, 즉 전문성입니다. 이 프로 성이 없는 사람은 대우를 못 받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해내는 프로 성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꼴'이 좋아야 합니다. 꼴은 일하는 자세, 대인관계, 예의범절입니다. 이 자세가 흐트러지면 아무리 전문성이 있고, 아무리 고학력자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꼴 좋다.'라는 비아냥거리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살아가는 꼴이 좋아야 합니다. /아멘!/
  세 번째는 '깡'이 있어야 합니다. 위기를 돌파하는 의지력, 위기에 대처하는 인내력, 장애물을 돌파하는 깡이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가 '꿈'이 있어야 합니다. 한 달 후의 목표가 있고, 일년 후의 목표가 있고, 꿈이 있다는 말은 계속 발전해 간다는 말입니다. 이 꿈이 있는 사람이 생존한다는 것입니다. /할/
  그런데 이 네 가지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 '끼'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일에도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데도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하는데도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 프로근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프로근성만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성도들이 성도다움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니까 '꼴'이 좋아야 합니다. 불신자 보기에도 꼴이 좋아야 합니다. 불신자 앞에 우리 꼴이 망가지면 안 됩니다. /할/
  또한 '깡'이 있어야 합니다. 시련을 극복하고,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앞의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의 의지력이 꼭 필요합니다. 시험은 이기고 승리하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대화 속에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고, 꿈이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들을 때 상대방을 격려시키는 꿈이 묻어 나와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천국의 꿈을 놓치면 안됩니다. 천국의 소망이 우리를 이기게 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천국의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바른 물질 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청년에게 '탐심을 물리 치라'고 하신 후에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재물에 대한 교훈입니다. 사실 재물이나 재물의 축적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재산과 그 축적의 목적과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재물을 두고 그것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를 생각할 줄 알고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 자체를 너무 좋아하거나 재물을 너무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의미를 왜곡시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돈만 많으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없다.'고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삶은 그 본질이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돈만 있으면 그 관계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 말입니다. /할/
  여러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지 못한 채 소유하고 있는 재물은 그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돈은 잔뜩 벌어놓았는데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무슨 행복이 있고 평안히 있겠습니까?
  돈이 없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돈이 많아지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 도둑놈 같아 보이기 쉽습니다.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어떻게 해서든 뜯어먹으려는 수작들로만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늘 불안해지고 웅크리게 됩니다.
  '나는 돈만 있으면 부모형제도 친구도 친척도 다 필요 없어. 나 혼자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돈은 하나님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수단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전적 헌신에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은 종종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에게 등 돌리게 만드는 주범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의 가장 크고 가장 확실한 재산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아멘!/
 

  ①오늘 주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입니다.(13-15)
  본문의 배경을 보면 1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실 때 한 청년이 예수께 나와 '상속'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지혜로운 랍비에게 부탁해서 해결하는 그런 자세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재산 분배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해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지혜 있는 랍비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할/
  내용을 보면 13절에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입니다. 사실 유산문제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형제 사이도 갈라놓고, 어떤 경우 살인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장자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유대 나라는 장자가 갖는 특권이 대단한 나라입니다. 왜 야곱이 팥죽 한 그릇을 주면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까? 장자의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형제는 유산문제로 형제 사이에 의가 좋지 않거나, 나쁜 관계임을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유대 법에 의하면 유산은 형이 동생의 두 배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두 명일 경우 유산은 세 몫으로 나누어 그 ⅔를 형이 가지고 ⅓을 동생이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형이 동생의 배를 가지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형이 부모를 모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형이 부모를 모실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 동생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형이지만 두 몫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이 들면 동생은 형에게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으니 반반 나누자 했을 것이고, 그러면 형은 '무슨 소리냐, 법대로 나누자. 내가 부모를 모시건 안 모시건 형은 형이다. 그러므로 유산의 ⅔는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형제 사이에 유산이 시비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마다 자기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엄청 슬픈 일입니다. 효는 형제가 화목하며 사는 것입니다. 가장 큰 효가 바로 형제 우애입니다. 이 형제 우애는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시133:1절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의좋은 형제'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농사가 다 끝난 가을에 형이 생각을 해봅니다. '동생이 이제 결혼을 했는데 필요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논에 있는 볏단을 동생 몰래 지게로 져다가 동생 논의 볏단에 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동생도 또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제 결혼해서 두 식구밖에 없는데 형은 식구가 많으니 저것 가지고는 안 되겠다.' 그래서 밤에 몰래 가서 자기 논의 볏단을 지게로 져서 형의 논의 볏단에 쌓아놨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무리 가져다주어도 날마다 똑같은 것입니다.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어느 달밤에 '그래도 형을 더 갖다 주어야지.' '그래도 동생을 더 갖다 주어야지.' 그리고 지게에 볏단을 가득히 지고 서로 가다가 중간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둘이 너무 감격해서 붙들고 엉엉 울었다는 내용의 과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형제들이 다 죽었는가 안보입니다.
  여하튼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는 유산문제로 서로 마음이 상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유산문제를 잘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사실 이 유산문제, 그 유산이 땅이든, 집이든, 돈이든 간에 유산 문제 때문에 형제간에 갈등이 있고, 그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탐심(貪心) 때문입니다. /할/
  이 탐심이 발동하면 형제간도 갈라지고, 원수지간이 되기도 합니다. 부부사이도 없습니다. 이 탐심이 발동하면 예수님에게 부탁해서라도 내 탐심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문제를 부탁하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답변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정확한 대답이십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탐심이 발동하는 한 아무리 유산 분배를 잘한다 할지라도 양쪽이 다 만족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멘!/

  ⑴그렇다면 이 탐심(貪心)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마음'이 곧 탐심이 됩니다. 분수에 넘치도록 더 가지겠다는 마음이, 탐심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계를 모르는 소유욕' 이것이 곧 탐심입니다.
  이 탐심이 있는 한 합리적인 의논은 불가합니다. 의(義)도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이 탐심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한 지난 일도 괘씸하게 생각되어 용서가 안되고, 그러다 보니 현재도 마음이 편치 못하고, 무엇 보다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 예상하면서 미리 불편하고, 미리 행복하지 못합니다. 다 탐심 때문에 일어나는 불편한 심기입니다. /할/
  ▶미국의 대재벌 록펠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소유가 넉넉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내가 클리블랜드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한 주에 3불을 받아도 하도 귀하게 여겨져서 화장실로 달려가 몰래 세어보곤 했고 그 때는 그 주급 3불이 천하를 얻은 듯 가슴 뿌듯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그때보다 엄청나게 재산이 많아졌지만 행복은 오히려 그렇지 못하다. 만일 그 때 그 행복을 도로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의 재산을 다 내 놓겠다.'
  록펠러의 이 말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복이란 소유와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 중 돈이 없다고 '난 불행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가졌다고 교만할 것 없고, 못 가졌다고 비굴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할/

  ⑵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4절에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할/
  여기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지만, 여기서는 그 생명이 살아가는 동안의 생명의 연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탐심을 말씀하시면서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라는 주제와 탐심이라는 주제는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생명과 소유라는 두 개념은 서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마는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소유가 넉넉하면, 그의 생명도 풍성하다. 그의 생명이 건강하다. 뿐만 아니라 소유가 넉넉한 사람이 장수한다. 심지어 잘하면 영생까지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소유가 넉넉하면 그의 생명도 풍성하고, 가난하면 그 생명이 빈약한 것입니까? 소유가 넉넉하면 그의 생명이 건강하고, 가난하면 그 생명은 비실, 비실 합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소유가 넉넉하고 많으면 치료는 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보장은 없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가 넉넉하면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행복합니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는 것은 소유가 넉넉하다고 생명이 보장된다는 것이 아니고, 죽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며 소유가 넉넉하다고 구원과 생명과 영생이 보장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과 생명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직 은혜로, 은총으로, 믿음으로만 받기 때문입니다. /아멘!/


  ②탐심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마23:25절에서 예수님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 마음속에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고 책망하셨고, 골3:5절에서는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어느 날 사탄이 한 청년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열 개의 병을 보이면서 청년에게 제안을 합니다. '여기 아홉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있고 한 개의 병에만 극약이 들어있는데 열 개 중에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마시면 엄청난 돈을 네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면서 '아무리 돈이 좋지만 하나밖에 없는 생명과 바꿀 수는 없지' 하며 그의 솔깃한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 말합니다. '극약은 열 개 중에 하나야. 겨우 하나일 뿐이야. 잘 생각해 보라고' 계속되는 사탄의 유혹에 청년은 속으로 그 돈이 그에게 가져다줄 평안함과 쾌락을 가늠해 봅니다.
  '그래 딱 한 번만 하는 거다. 이번 한 번으로 난 평생 고생 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지.'
  청년은 떨리는 손으로 진땀을 흘리며 열 개의 병중에 하나를 골라 조심스럽게 마십니다. 이내 청년은 환호성을 지르며 말합니다. '야, 내가 살았구나. 자칫하면 죽을 뻔했어. 자 어서 네가 약속한 돈을 내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라'
  사탄은 청년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는 '다음 번에 언제라도 남은 아홉 병중에 하나를 마시겠다면 돈을 곱으로 주겠다.'는 말과 함께 웃으며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엄청난 공돈이 생긴 청년은 흥청망청 방탕의 세월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자 그가 전에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한 사탄에게로 제 발로 찾아가서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여 아홉 개의 병중에 하나를 골라 마시고 사단이 유쾌히 웃으며 아낌없이 내어주는 돈을 받아 쥐고는 또 똑같은 방탕의 삶을 반복합니다.
  그 다음에 또 그 다음에도 이 사람은 스스로 사탄을 찾아가서 위험부담의 확률이 점점 높아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을 골라 마시고 돈을 받아오고 또 방탕의 삶을 계속 살아갑니다.
  어느덧 건장하고 꿈이 많고 할 일이 많던 청년은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술과 향락의 세월로 얼굴과 손이 다 떨립니다. 사탄을 찾아간 그 사람 앞에 놓인 병이 이제는 단 두 개 밖에 없습니다.
  노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두 병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두려운 마음으로 마십니다. '아! 내가 이겼어. 나는 끝까지 살아남고야 말았다. 내놔라, 돈! 이것으로 끝이다.' 이때 사단은 빙긋이 웃으며 나머지 한 병을 들어 마셨습니다. '자 이래도 네가 이겼느냐? 극약이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나 너는 돈이라는 나의 극약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지. 너는 천하보다 귀한 인생을 돈이라는 종이에 팔고 말았어. 나는 너의 청춘을 망가뜨렸지. 너는 세상에 더 가치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오직 돈만 알고 돈으로 인하여 너의 일생을 망가뜨린 나의 노예란 말이다.'
  이처럼 사탄에게 내 맡겨진 인생은 그 소유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결국 인생을 망치고 사탄과 더불어 영원히 멸망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원 없이 부귀영화를 누려본 지혜자 솔로몬이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조언합니다.
  잠15:16절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인간의 생사뿐만 아니라 화와 복(禍福)이 모두 하나님을 믿고 사는 그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가진 것이 많은 적든 예수 믿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로 여러분의 삶이 항상 기쁘고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③우리는 '바른 물질 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재물의 원어는 '마몬'인데 이는 '돈을 관장하는 신(神)'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돈을 단순히 교환의 매체나 부의 축적 수단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돈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통제하는 신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만큼 돈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중요하므로 성경적 재정 관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돈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돈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입니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돈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돈은 쓰는데서 가치가 나옵니다. 특별히 잘 써야 좋은 가치가 창출됩니다.
  과연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어떻게 돈을 써야 될까요? 어떻게 쓰는 게 잘 쓰는 걸까요? 성경을 보면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돈은 쓰고 누리는 것(누림)과,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드림)과, 그리고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나눔)' 등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방법을 잘 구사하면 우리는 돈으로 인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할/
  ⑴'누림'입니다. 즉 누리라는 것입니다. 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 사용하면서 즐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림을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5:19절에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신12:7절에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수고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가족들이 즐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돈을 쓰고 즐기는 게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대체로 궁핍한 생활을 하셨지만, 때때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잔치 집에도 가신 적도 있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누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돈을 주시고, 그것으로 인생을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분복입니다. 그런고로 돈을 두고도 궁상떠는 것은 결코 잘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주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누리되 지혜롭게 누려야 합니다. 분수에 넘게 사치하거나, 너무 세상의 유행을 따라가며 세속화되면 곤란합니다. 특히 주위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것은 금해야 합니다. 돈이 많다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흥청망청 돈을 쓰다 보면 이웃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100만원 월급쟁이 앞에서 수백만 원짜리 가방을 샀다고 흔들며 자랑하는 것은 자기 돈을 쓴 것이지만, 좋게 말하면 푼수요 나쁘게 말하면 죄악입니다.
  반대로 돈이 없다고 기죽을 것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은 외적인 것에 울고 웃지만, 크리스천은 내적인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 모신 곳이 하늘나라임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바울이 말한 것처럼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게 진정한 지혜입니다. 부요해도 겸손하고, 가난해도 당당할 줄 아는 게 크리스천의 멋입니다. /할/
  ⑵드림입니다. 돈은 분명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100% 누리라고 주신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리되 신앙이 성숙해 지면서 '누림의 비율'은 점차 낮추어가고, '드림의 비율과 나눔의 비율'을 높여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드림과 나눔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가리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6:20절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누리는 것은 즐겁고 좋지만 사실은 그때뿐입니다. 쌓아두는 것보다 낫지만 결국은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반면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위험하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안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라질 돈을 가지고 영원한 하늘의 보화를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헌금을 많이 강조합니다. 왜 그러실 까요?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궁해서 그런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라, 돈을 통해 '마음'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마6: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씀대로 돈에 사람의 마음이 담깁니다. 그래서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헌금을 통해 그 사람의 신앙과 마음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신앙,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받기를 소원하십니다. /아멘!/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한국교회에 많은 도움을 주신 최태섭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한국유리 회장이면서 기아대책기구 회장으로 자선활동을 하셨고, 특히 많은 농어촌 교회와 목회자들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했던 크리스천 실업가이셨습니다.
  그분은 본래 이북 출신으로 6.25 때 월남하셨습니다. 굶어죽을 지경이 되도록 가난한 시절 하나님께 눈물로 돈을 벌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돈을 벌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물질의 축복을 주셨고, 그분도 서원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던 날 호주머니에서 쪽지가 나왔습니다. 거기에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셔서 부하게 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신8장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신8:17-18절에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최 장로님은 물질이 많아지면서 혹시라도 자기 힘으로 벌었다고 착각하고 교만해질까봐 신8:17-18절의 말씀으로 마음을 다잡으셨던 것입니다. /할/
  우리는 헌금을 통해서 늘 하나님이 모든 재물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겸손히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헌금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알고 드려야 좋습니다. 크게 '의무헌금과 자원헌금'이 있습니다.
  의무헌금에는 주일헌금과 십일조가 있습니다. 주일헌금은 나를 구원하시고 생명 주신 것을 기억하며 드리는 헌금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가져오라는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헌금을 갖고 오라는 말씀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 나올 때마다 주일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10분지 1을 드리는 헌금으로 모든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헌금입니다. 말하자면 재산 관리 헌금입니다.
  자원 헌금에는 감사헌금과 사역헌금이 있습니다. 감사헌금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자원해서 드리는 헌금입니다. 사역헌금은 하나님이 맡긴 사명(복음 전파와 사랑 실천)을 위해 드리는 헌금입니다. 우리가 직접 사명을 감당하기도 해야 되겠지만, 동시에 물질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 사역헌금 중 해외선교헌금을 드리면, 그 헌금이 모아져서 선교사에게 보내져서 생활비나 기타 사역을 위한 용도로 사용됩니다. 그러면 선교사와 더불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됩니다. /아멘!/
  ⑶나눔입니다. 구제헌금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눅12:33절에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이웃을 구제하는 것은 하늘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입니다. 또 히13: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행과 나눔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잠19: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할/
  ▶프랑스의 농민화가 '밀레'와 그의 친구인 화가 '루소'의 이야기입니다.
  밀레는 무명 시절 몹시 가난했습니다. 루소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격려합니다. 하루는 찾아와서 말하기를 '드디어 자네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났네! 이것 봐. 선금을 내게 맡겼다고...'
  그 덕분에 밀레는 생활이 안정되었고 그림에 전념하게 됩니다. 점차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고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루소의 집에 놀러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수년 전 팔았던 그 그림이 거실 벽에 걸려 있는 게 아닙니까?
  그는 친구의 아름다운 사랑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나눔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할/
  전 무디 신학교 학장 '조지 스위팅'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장차 마지막 날 '너는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드렸는가?' '얼마나 나눴는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다 사라집니다. 돈도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늘에 쌓은 보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시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④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16-21)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들판에 나가 보았더니 농사가 잘되어 대 풍작이 예상됩니다. '작년보다 이번 수확이 더 많게 생겼는데 전에 가지고 있던 창고는 도저히 그 많은 곡식을 다 저장할 수가 없겠구나! 옳지 전에 있던 창고를 헐어버리고 새로 더 크게 짓자. 그리고 모든 곡식과 내 소유 전부를 거기에 쌓아 두자'고 생각하고 그 부자는 곳간을 넓히는 개조작업을 착수합니다.
  이 사람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그는 선견지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미래지향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가을에 그는 풍성한 소출을 거둬들인 다음에 곳간마다 가득가득 쌓아두었습니다.
  그 모든 곡식을 다 쌓아두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자기 마음속으로 독백하기를 19절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장면에 개입하셨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이 이 부자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0절에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⑴여러분, 왜 이 부자가 어리석은 자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사람은 남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밤중에도 자신의 농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던 사람입니다. 남들이 휴일에 가족들과 함께 유원지로, 운동장으로 놀러 가는 시간에도 그는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았습니다.
  이 사람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 사람이 만일 현대에 살고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요, 출세한 사람이요, 자신의 꿈을 성취한 사람이요, 자기의 기업을 성공적이고,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부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마음 속에 숨어 있는 탐심입니다. 왜냐하면 유산 문제를 가지고 와서 잘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대답하신 말씀이 탐심이었고, 곧바로 예를 든 비유가 한 부자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 부자의 문제도 탐심이라는 점에 포인트를 맞추신 것입니다. /할/
  ▶어떤 부자가 보신을 잘하여 80세가 될 때까지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더 살고 싶은 마음에 하나님께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 나 돈이 많아요. 좀 더 살고 싶어요. 재산의 반을 떼어 드릴 테니 더 살게 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하나님은 반색을 하시며 '만일 네가 재산 전부를 주겠다면 2천년을 살게 해주었을 텐데, 재산 반을 떼어 주겠다고 하니 나도 반을 잘라 천년을 더 살게 해 주마'
  이 말을 들은 부자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모아 천년을 더 살게 되었다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심장 마비로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이해할 수 없다며 하나님께 따집니다. '하나님도 거짓말하십니까? 약속을 지키시야죠. 아버지께 천년을 약속해 놓고 하루만에 불러 가시다니 말이 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성경도 못 보았느냐? 성경에 보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 있느니라.' /믿거나 말거나/ 


  ⑵이 부자는 '오직 재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예수'이어야 합니다. /아멘!/
  ▶'록펠러'는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자신을 위하여 돈 버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다 30대에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설립하고, 40대에는 철도회사와 기업을 병합하여 미국 정유 능력의 90% 이상을 지배하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착취했습니다. 그러기에 성공해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록펠러 역시 남을 위해 희생하는 기쁨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50세가 넘어 심한 노이로제에 걸리게 됩니다. 전혀 식욕이 없게 되어 날마다 우유 한 잔, 크래커 몇 조각으로 연명하며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저주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던 목표가 잘못된 길이었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제야 가족과 친구와 이웃이 보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가 사랑해야 될 사람들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며 목숨을 걸었던 물질도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 이후 자선 사업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록펠러 재단을 만들고 십일조 전산실을 따로 두고, 대학을 세우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물질만을 위해 살았던 삶이 실로 어리석은 삶이었음을 철저히 깨닫고 주는 자로 살다가 갔습니다. /할/
  여러분, 세상에 돈만이 재산은 아닙니다. 요즈음은 돈보다 지식이 재산입니다. 신용도 재산이고 아이디어도 재산이고 명예도 재산이고 인격도 재산이고 봉사심과 봉사할 수 있는 건강도 재산이고 인심을 얻어놓은 것도 재산이고 존경받는 것도 재산입니다. 이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⑶이 부자는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부자는 '내 곡식, 내 곳간, 내 영혼' 등 '나'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그냥 '곡식'이라고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성경에는 '내 곡식'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많은 곡식이 다 자기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부자는 자기 소유에 대해서 강한 집착을 보였습니다.
  이 부자는 '나'가 아니라 '우리'를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 부자는 부정한 방법으로 소득을 올린 것은 아닙니다. 밭의 소출이 풍성해서 얻은 곡식이요 재산입니다. 성실한 농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당연히 자기 재산은 자신의 것으로서 응당 자신을 위하여 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가진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현대인의 삶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탐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할/
  ▶종교 개혁자 '칼빈'은 물질에 대한 두 가지의 모습을 말합니다.
  '거울 앞에서는 사람'과 '창문 앞에서는 사람'입니다. 거울 앞에 서면 자기 밖에 안 보입니다. 물질을 가지고 자신만을 치장하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씁니다. 하지만 창문 앞에 서면 창문 너머로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위해 물질을 쓰게 됩니다.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밖에 보지 못했던 거울 앞에 선 사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남은바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물질만을 위한 삶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영혼과 바른 대화를 하며 살다가 하나님 부르실 때에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⑷이 부자는 이렇게 자기가 소출이 많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햇빛과 비를 내려 주셔서 소출이 풍성하게 된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소출을 곳간에 쌓아 두는 것만을 알았지 받은 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사람은 재산이 자신의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는 재산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일시 위탁받아 관리하는 청지기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그의 재산은 자신의 것이니까 마음대로 써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그의 재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일시 위탁받아 우리는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그 재산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을 위해서 써야 하고 둘째는 이웃을 위하여 써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할/
  ▶어느 바닷가에 갈매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갈매기는 부둣가에 버려진 썩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채 입에 물고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수많은 갈매기들이 달려들었습니다. 갈매기는 '썩은 물고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그러다 움켜쥔 '썩은 물고기'를 바다로 떨어뜨렸습니다.
  이 때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이 그것을 쫓아 바다 쪽으로 일제히 날아갔습니다. 그 때 갈매기는 푸른 창공이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움켜쥔 '썩은 물고기'를 포기하는 순간, 넓은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할/
  움켜쥔 몇 푼의 재물 때문에 창공을 보지 못하고 걱정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재물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꽉 움켜 줘서 결국 하나님을 보지 못하여 청지기의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고 삽시다. 주고 사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눅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아멘!/


  ⑸이 사람이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까?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의 원 뜻은 '생각이 없는 자'입니다. 물론 부자는 많이 생각했습니다. 골똘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그는 마땅히 생각해야 할 세 가지를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부자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부자는 자기의 죽음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부자는 다른 사람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하나님을 생각했더라면,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부자가 자기의 죽음을 생각했더라면, 여러 해 쓸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자가 다른 사람을 생각했더라면, 감사한 마음으로 남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할/
  우리교회는 다음 주에 맥추감사절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무엇이 이 부자에게 어리석었습니까? 세 가지입니다.   
  ㈀이 부자는 '자기 관'이 어리석었습니다.
  이 사람은 오직 '나, 내가'입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만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는 현대인의 병은 '내가 병'이라고 했습니다. 바클레이는 '나라는 단어는 침략적 단어'라고 했습니다.
  ㈁이 부자는 '물질 관'이 어리석었습니다.
  본문에서 네 가지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쉬자, 먹자, 마시자, 즐거워하자' 이 모두는 일차원적이고 쾌락적인 감정의 표현입니다. 로마 격언에 '돈은 바다 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를 벌었는가를 묻지 않고 어떻게 얼마를 썼는가를 점검하십니다. 이웃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써야 합니다. /할/
  ㈂이 부자는 '영혼 관'이 어리석었습니다.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도로 찾으리니'란 말은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과 영혼의 일시적인 청지기일 뿐입니다. 제대하는 군인이 모든 것 다 반납하듯이 끝나는 날 모두를 반납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한 부자는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실 때 속수무책인 존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밤'이라는 말이 그의 모든 계획을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자는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여러 해'라는 이 표현은 장기간을 말할 때 쓰이는 용어가 됩니다.
  이제 이 사람은 모든 것이 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제부터는 미래 행복만 누리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보편적 진리 하나를 그에게 제시했습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가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미래 불안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언제 죽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자기 해답을 확실히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도 '오늘 밤'은 찾아옵니다.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 밤'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믿/아멘!/
  그러므로 우리 모두 21절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되지 말고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여기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주 좋은 관계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멘!/
  ▶어느 여인이 남편의 죽음 앞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남편은 화장실 수를 늘리다가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내 남편이 죽은 마당에 넓은 집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화장실 많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러면서 통곡했습니다.
  그 부부는 너무도 가난해서 단칸방의 월세로부터 신혼살림을 차렸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 매서운 찬바람을 맞으며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집안 거실에 화장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목표로 밤낮 쉴새 없이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줄이고, 쉬는 날도 없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져 거실에 화장실이 있는 집을 장만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이번에는 화장실이 방안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또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방마다 화장실이 있는 꽤 넓은 아파트를 장만한 것입니다. 이제는 편안하게 오순도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로 그 날 밤 그 남편이 과로로 유명을 달리하고야 만 것입니다.
  여러분, 넓은 집, 각 방마다 화장실이 있는 아파트보다 더 귀한 천국이 우리에게 있음을 믿으시고, 사랑하는 온 가족들과 함께 주안에서 날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로운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4년 7월 6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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