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바른 선택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수 24:14-25)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6. 26. 16:23

바른 선택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수 24:14-25)


  남북 전쟁을 앞두고 고민하며 기도하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게 한 참모가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각하,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확신이 없으십니까?' 그러자 링컨이 조용히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주장만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내가 지금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오직 하나님 편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았던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별 설교입니다. /할/ ◀제목 소개!▶

 

  출애굽의 두 영웅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홍해를 건너 출애굽의 대장정에 일어선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땅으로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간 대단한 지도자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7년의 전쟁을 통해 가나안 땅 대부분을 정복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떠돌이 생활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 모든 일을 마무리한 여호수아는 각 지파 지도자들을 세겜에 모아놓고 고별설교를 했습니다. 수 23장부터 24장까지의 말씀을 요약해보면,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세요.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섬길 대상을 명확히 하십시오.'라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성경 여호수아 전체를 마무리하는 끝 부분입니다. 29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었다.'고 했고, 31절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나올 때 애굽으로 팔려가 노예로 살다가 마침내 총리까지 되었던 이스라엘의 조상 요셉의 뼈를 가지고 나왔는데 32절에 보면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지냈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여호수아의 끝 장면입니다. /할/


  ①본문의 배경을 먼저 생각해 보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온지 벌써 스물 다섯 해가 지났습니다. 지금 가나안의 모든 땅이 이스라엘의 지배아래 놓여 있습니다. 모세로부터 정권을 인계 받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수많은 전투에서 크게 이겨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정착시킨 후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주었으며 나라를 안정시킨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런 여호수아도 어느새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어 그의 인생을 결산해야 할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습니다.
  수23:1-2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 많아 늙었도다.'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했습니다. 세월이 25년이 흘러갔습니다. 이제 여호수아의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곧 그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여호수아의 일종의 유언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언은 글자 그대로 남기고 가는 말입니다. 마지막 남기고 간 유언은 진실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유언은 진실합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이 메시지는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해 오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함께 가나안 정벌에 참여했던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간절한 사람의 마음을 담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날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는 여호수아의 충실한 동역 자요 격려 자요 후원자였던 갈렙이 있었을 것이며, 대제사장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전쟁터에서 피와 눈물과 땀을 함께 흘렸던 동지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들이 여호수아의 마지막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23-24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있어요, 잘 가세요'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 찾습니다. /할/
  수23:3절을 보세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또 23:5절을 보세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으사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3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분'임을 강조했고, 5절에서는 '그 땅을 주시는 하나님'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지금도 싸워 주시는 분입니다. 또 우리들에게 좋은 땅을 예배해 놓고 계시는 분입니다. /믿/아멘!/
  여호수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향하여 강조합니다. 23:11절에서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강조했고, 오늘 본문 14절에서 '우상을 버리고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고 했고, 15절에서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마지막 가면서도 외쳐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과 25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마지막 고별 설교 한곳이 '세겜'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25절에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할/


  ②세겜은 여호수아가 마지막 고별설교를 한 장소입니다.
  장소가 중요합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 있어서 아주 의미심장한 역할을 담당했던 지역 세 곳이 나옵니다. '길갈과 실로와 세겜'입니다.
  우리가 이 지역의 영적인 의미를 바로 알아야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장소가 어떤 장소인가를 더 깊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아멘!/


  ⑴'길갈'은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열두 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운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요단을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모맥을 거두는 시기로 우기 때라 요당 강물이 넘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여호수아는 언약 궤를 맨 제사장을 앞세우고 요단강에 들어서니 강이 갈라져 길이 생겨 잘 무사히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나 죽음의 강처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강으로 인식된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단강을 건넜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통과한 것이나 다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죽음의 강 요단을 건너서 주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는 장소입니다.
  오늘 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고치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 영원한 표어가 '가르치며 전파하며 고치는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성령의 바람으로 인격을 고칩니다. 습관도, 환경도, 질병도 성령이 밀어주시면 끝장이 납니다. /믿/
  길갈의 또 다른 의미는 '거듭남'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필코 길갈을 통과해야 합니다. 여러분! 길갈을 통과하셨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 길갈을 통과해야 합니다. /아멘!/


  ⑵'실로'입니다.
  수18:1절을 보면, 실로라는 장소는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그들은 그곳에서 장막을 세웠습니다. 장막은 성막의 또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희막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장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장소를 성별하여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셨습니다.
  실로는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반듯이 실로를 찾아 나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실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곳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 실로입니다. /아멘!/


  ⑶'세겜'입니다.
  세겜은 그리심산과 에벨산 사이의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입니다. 세겜이 어떤 곳인가 하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세겜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 출신입니까? 아브라함은 본래 우상을 섬기던 갈데아 우르 출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거기서 불러 내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제단을 쌓았던 곳이 바로 세겜입니다.
  창12:6-7절에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그렇습니다! 세겜은 하나님 예배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참된 모습은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배자를 찾으시고, 예배자를 만나주십니다.
  요4: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할/
  또한 세겜은 어떤 곳인가? 야곱이 세겜에 거주하다가 불행한 일을 겪게 된 곳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추장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곳입니다. 그 일 때문에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행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세겜에 머물 수 없게 된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족들과 함께 벧엘로 갔습니다. 그 때 그 곳 세겜에서 벧엘로 출발할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의 처첩들이 이방 우상을 가지고 왔는데 야곱이 그 모든 우상을 땅 속에 묻고 다짐하기를 '하나님 제가 온 생명을 다 바쳐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한 곳이 바로 바로 그 현장이 세겜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와 결단의 역사가 있었던 현장이 바로 세겜이라는 말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세겜 땅에 들어가서 맨 처음 한 일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모든 것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무너진 제단을 우리가 다시 쌓아야 합니다. 제단을 다시 쌓자는 것은 단순히 예배를 회복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처음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 전 세겜에서 행한 일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이방 신상들을 모두 다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우상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방해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세겜에 묻어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묻어 버려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멘!/


  ③여호수아가 외친 고별설교의 포인트는 '바른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15).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할/
  마치 갈멜 산상에서 단호한 어조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18:21)고 했던 엘리야처럼 결단을 촉구하는 여호수아의 '메세지'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냐 우상이냐를,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선택하여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선택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믿/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순간의 선택을 바로 잘 함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선택을 순간적으로 잘못함으로 말미암아서 일생을 불행한 가운데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택의 윤리학'에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 세 가지 선택을 잘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직업의 선택을 잘 해야 된다고 합니다. 둘째로는 배우자의 선택을 잘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의 선택을 바로 잘 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 종교의 선택을 잘 하지 못하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할/


  ㉠바른 선택과 결단이 인생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하는 선두에 섰던 백전노장의 여호수아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 가기 직전, 고별 설교를 하는 대목입니다.
  누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과거와 현재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숱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면서 이스라엘을 이끌어온 여호수아는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감지했습니다. 다가온 축복 속에서 마냥 기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어떤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누구를 섬길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방종교의 문화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호와만을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믿/


  ㉡선택과 결단에서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⑴선택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비싼 물건 하나를 살 때도 꼼꼼하게 살펴보고 고릅니다. 그래서 선택을 할 때는 집중력과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다른 여러 신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선택에 앞서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왜 이렇게 촉구하고 있을까요? 그들 중에 이미 이방 신들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결단의 촉구에 대한 백성들의 일차적인 반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16절에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굳은 결단으로 화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수24장에서 한 장을 넘기면 사사기가 나오는데,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은 아주 빠르게 영적 어두움의 시대로 진입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 앞에서 했던 그들의 결단의 흔적은 너무 빨리 지워져 버렸습니다. 영적 혼란기의 사사 시대가 오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각오는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 순수한 마음만으로 결단한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확신의 근거는 감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믿고자 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43: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할/
  ⑵선택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의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사실 선택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선택은 언제나 포기를 가져옵니다. 여호와를 선택한다는 것은 수많은 신들에 대한 유혹을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이방 신들을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한 사람과 결혼을 염두에 두고 사귀기 시작한다면 그동안의 다른 이성적 관계는 끊어야 합니다. 양다리는 갈등을 심화시키고 모든 관계를 깨는 요인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출발은 과거와 깨끗한 결별을 해야 시작됩니다. /아멘!/
  갈멜산의 영웅 엘리야도 백성들에게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고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적당주의는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피곤한 삶은 애매한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눈치를 보게 됩니다. 신앙이면 신앙, 세상이면 세상이어야 합니다. 느슨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색깔이 회색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온도는 미지근한 것입니다. 신앙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정확한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선택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변질하게 됩니다. /할/
  ⑶선택은 때(기회)와 시기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 택하라'입니다. 선택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으니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떤 특별한 순간이 왔을 때 특별한 선택을 한다면 전혀 다른 인생이 되고, 인생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특별한 기회를 주실 때를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택은 우물쭈물해서는 안 됩니다. 선택은 빠른 결단이 요구됩니다. 미루어서는 안 되고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마틴 루터'는 사탄의 최상의 전술 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차차 하지. 다음에 하지. 나중에 하지'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용기와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항상 우물쭈물하게 되고 우물쭈물하고 선택을 올바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은 항상 후회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수만 번의 기회 중에 아주 중요한 몇 번의 기회를 잘 선택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큰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룰은 고후6: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이 바로 선택의 때요, 결단의 때입니다. 기회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지나가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타이밍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아멘!/
  ⑷일단 선택했다면 확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작심삼일은 절대 안됩니다. /할/
 

  ④여호수아의 결단을 보세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
  ㉠신앙생활은 섬김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들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창조 때부터 의미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일할 때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섬김으로 삶의 의미를 얻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그 맛에 사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몫이기도 합니다.
  이 섬김의 삶은 성경의 핵심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강조하신 강조 점의 중심도 이 섬김의 삶입니다. 10계명 가운데서 6가지 계명이 '이웃을 섬기라'는 내용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이 섬김의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높아지려고 하지말고 낮아지라고 하셨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웃에게 물 한 모금 마시게 하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법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법 중에 가장 많은 법은 섬김의 법입니다. /할/
  하나님 백성에게는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는 삶이고, 또 하나는 구원받은 후의 섬김의 삶입니다. 일반적인 섬김의 삶에도 향기가 있고 감동이 들어있고 따뜻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자원봉사' 얼마나 신선하고 향기롭습니까? 그런데 주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섬김의 삶에는 더 큰 영향이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
  진정한 행복은 나눌 때, 줄 때, 섬길 때 주어집니다. 그것이 역설의 행복입니다.
  위로도 섬김입니다. 사람은 위로 받을 때 행복을 얻습니다. 그리고 위로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위로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칭찬도 섬김의 삶입니다. 내 칭찬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도 젊은이도 어른도 모두 칭찬을 좋아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젊다, 예뻐졌다.'라는 칭찬의 말 한마디면 모든 여성들은 깜빡 죽습니다. 그 칭찬의 말한 마디는 보약보다 효과가 더 좋습니다. /할/
  예수님께서 가장 힘써 강조하신 것이 이 섬김의 삶입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병자들을 일일이 손으로 만져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당부였습니다. /아멘!/


  ㉡섬김에는 몇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⑴섬김에는 높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듯 중심으로 섬기는 것이요, 하나님을 섬기듯 사람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⑵섬김에는 길이가 있습니다. 언제나 섬기는 자세가 같아야 합니다. 집사 때 섬기는 자세로 있다가 권사 되어 섬김을 받으려하면 큰일입니다. 가난한 때는 잘 섬기는 생활을 하다가 부자 되었다고 섬김을 받으려 하면 안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이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 프란시스'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섬겼습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지나가던 중 보기에도 참혹한 문둥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마음에 움직임을 받아 말에서 내려 그 문둥이를 껴안았습니다. 그런데 그 품에 앉긴 얼굴을 보니 그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성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할/
  ⑶섬김은 이론이 아닙니다. 섬김은 형식이 아닙니다. 섬김은 삶 그 자체입니다.
  14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여기 '성실'은 '온전함', '순수함'을 의미하며, '진정'은 '견고함', '확실함'을 의미하는 말로 이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잡다한 생각이 없이 오직 하나님만 향하는 순수한 마음과, 어떠한 유혹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마음가짐으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아멘!/
  ⑷섬긴다는 말속에는 종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종은 주인만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의 신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야말로 성도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⑸주님은 섬기는 자를 귀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요12: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할/
  이 세상의 지위를 누릴 때는 당당하나 그 지위를 잃고 빼앗기면 비참해집니다. 그것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의 지위는 누가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막10:43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는 이웃도, 교회도 잘 섬깁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겠노라고 결단하고 결단합니다. /할/


  ㉢왜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합니까?
  ⑴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 되시며 인류 역사의 대주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삼상2:8절에서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며 찬양했습니다.
  ⑵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 하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보호하십니다. /할/아멘!/
  ⑶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나의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삼상2:6-7절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할/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잘 섬겨야 합니다. 사장님을 잘 섬기면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장도 되고 상무도 됩니다. 대통령을 잘 섬기면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요직에 두루두루 앉아 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을 잘 섬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수지 맞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엘로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까?
  ⑴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겨야 합니다(14).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 심히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두렵고 떨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엄에 대하여 두려움과 무서움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내가 바로 서지 못함을 두려워하고 떨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그분에 대한 존경심으로 경건과 봉사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멘!/
  ⑵우상을 버리고 섬겨야 합니다(14, 16, 23)
  옛날에는 부족들 간에 전쟁이 많았습니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전쟁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피하고 싶은 경우에는 상대와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 평화협정을 맺을 때에는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방의 종교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협정을 맺을 때 서로의 신상을 교환하면서 '너희가 섬기는 신을 우리가 섬기고, 우리가 섬기는 신을 너희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를 서로 수용하지 않으면 평화협정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이라 하는 것들은 사람이 만든 가짜 신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그 날로 하나님이 주신 어마어마한 약속이 폐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주겠는데, 하나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그곳 주민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거나 그들과 어울려서 살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깨뜨리라'고 하셨습니다. 출34:13절에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14절에 이어서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얼마나 분명하십니까? 왜 이렇게 과격한 명령을 내리시는 줄 아십니까? 우상숭배가 무엇일까요?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등지고 이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시106:36절에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우상은 꼭 어떤 형상에만 섬기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이 되고, 명예와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⑶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9).
  하나님은 스스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질투라는 단어는 그리 긍정적으로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 로마서에도 보면 사람의 악행 중 하나가 시기와 질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의 이 질투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로는 '칸나'인데 이는 '질투하는, 시샘하는'을 의미하며, 부부간에 자기 짝이 아닌 다른 이에게 한눈을 팔 때 나타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부정한 짓을 저지를 때 그에 대한 불붙는 분노를 나타내듯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른 우상이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제대로 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분노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의 온전한 사랑을 바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질투라는 것은, 성서적인 원리로는 '하나님께 속한 소중한 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멘!/
  그래서 신학자 '제임스 파커'는 하나님의 질투라는 이 말, 이 표현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연인 관계로 드러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연인이라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질투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투를 느끼시는 것은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속에는 우리에게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요구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뜨거운 열심히 있습니다.
  오늘도 질투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만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오늘도 나는 열심으로 너를 위해 일하고 있다.' /할/믿/아멘!/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가 받는 복은 무엇인가? 엄청 많지만 세 구절만 소개합니다. 
  ⑴신11:13-15절에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⑵시128:1-6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아멘!/
  ⑶시144:12-15절에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로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할/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아멘!/ 이 얼마나 뜨거운 신앙의 열정입니까? 우리도 불같은 뜨거운 신앙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⑴뜨거운 신앙이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65세 최고령의 현역 비서가 '성공하는 CEO 뒤엔 명품 비서가 있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단순히 비서가 아니라 최고 경영자의 최고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자취가 담겨있는 그런 책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가 65세가 된 지금까지 탁월한 비서로서의 직책을 멋지게 감당하고 있는지 소소한 삶의 태도에서 거대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달려온 궤적을 보여준 내용입니다.
  그녀는 명문 여대 약대 출신이며, 그의 남편 또한 한국 최고의 명문대 철학과 교수였습니다. 부러울 것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아니 부러울 것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대우받아야 할 정도의 신분의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가장 말단처럼 여겨지는 비서 직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커피 타는 일부터 상관의 구두 닦는 등의 하찮은 일들을 천직처럼 여기며 달려올 수 있었을까? 
  그의 고백 속에 가장 돋보이는 미덕은 '하찮은 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비서는 라틴어원에 '비밀을 맡은 자'라는 뜻이랍니다. 바울은 우리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비밀을 맡은 주님의 비서입니다.
  명품 비서 이야기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여러분, 우리 모두 작고 하찮은 일에도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명품 비서가 됩시다. 고전4:1-2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아멘!/
  ⑵뜨거운 신앙이란, '열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제일보기 추한 것이 빈둥거리며 노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할 일이 없어 노는 젊은이들이 많아 안타깝기는 합니다.
  요즘 엄청 더웠습니다. 올 여름엔 땀을 엄청 많이 흘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땀을 흘린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땀이 나도록 무슨 일을 한다면 정말 잘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할 때, 이마에 땀이 나야 그때부터 운동 효과가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신앙을 살 때, 이마에 땀이 흘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뜨거운 신앙입니다. /아멘!/
  땀이 나도록 달려와서 교회당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참 좋습니다. 찬송할 때에도 목에서 땀이 나도록 큰 소리로 불러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땀이 나도록 기도하면 주님이 보시고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할/
  롬12: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⑶뜨거운 신앙이란, 주님께 '미치는 것'입니다.
  미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되는 것이 미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말하는 미친다는 말은 한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 한가지 일에 목숨을 걸 정도로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나쁜 곳에, 잘못된 곳에 미치니 문제입니다. 여자에 미치고, 놀음에 미치고, 돈에 미치고, 춤에 미치고, 요즘은 컴퓨터 깨임에 미치고, 가족도 돌보지 않고, 그곳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학생들이 공부에 미친다면 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사업하시는 분이 사업에 미치도록 몰두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미쳐야 합니다. 바울이 주님께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행26:24절에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고후5:13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할/
  ⑷뜨거운 신앙이란,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실력 있는 오르간 연주자이며 신학 교수였던 슈바이처(1875-1965)는 여행 중에 우연히 벌거벗은 흑인 상을 보고서 남은 생애를 밀림의 불쌍한 원주민들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5년 뒤 의사가 된 그가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자 주변 사람들은 그가 사랑 때문에 그 동안 계획해왔던 아프리카 행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마침내 슈바이처는 사랑하는 헬레네와 자신의 결심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녀와의 만남을 피하고 방황했습니다.
  슈바이처가 자신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헬레네가 어느 날 그를 찾아왔습니다. 슈바이처는 헬레네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난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하지만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돕는 의사의 꿈을 버릴 수 없소. 당신의 남은 생애를 밀림 속에서 나와 함께 할 수 있겠소? 만일 당신이 이러한 나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요.'
  헬레네는 슈바이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핼쑥해진 모습은 그동안 그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헬레네는 사랑하는 슈바이처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긋이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습니다.
  '그 동안 왜 혼자서만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셨나요. 저도 정식으로 간호 교육을 받은 사람이에요. 간호사인 저 없이 당신 혼자 그 일을 모두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헬레네는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위한 간호사이자 슈바이처의 아내로서 평생 동안 살았습니다.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남편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할/
  여러분, 왜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미지껀 합니까? 우리의 신앙이 왜 냉랭합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뜨겁게 합니다. 사랑이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벧전1:22절에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아멘!/
  저는 오늘 여호수아의 신앙의 결단인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는 이 말씀을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멘!/ (2014년 6월 22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