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하나님의 아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7. 4. 17:43

7월의 묵상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막11:2-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공생애가 끝나고 구원의 사명을 완수할 마지막 주간이 다가왔습니다. 구약에서 오랫동안 예언 되어 왔던 왕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면 새끼 나귀가 있을 것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당당하게 자기 소유를 가져오라고 말하듯이 명령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나귀를 타고 제자들의 환호성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개성 장군이 노예와 전차를 끌고 말을 타고 입성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구약의 예언(사62:11)을 성취하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류 구원을 성취하러 겸손하게 입성하신 것입니다. 고난을 예상하며 묵묵히 순종하는 주님을 ‘호산나’하고 찬송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나귀가 자기 것인가? 왜 남의 것을 가져가면서 그렇게 당당해.”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도 가끔 이렇게 당당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헌금을 내라, 해외선교로 어려운 일을 하러가니 후원금을 내라. 선교단체의 간사니 후원금을 약정해서 내라. 하나님의 일에 차가 필요하다. 컴퓨터나 핸드폰이 필요하다. 같이 생활할 집이 필요하다’

이러면 믿음이 적은 사람이나 불신자는 이상한 눈으로 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도 이런 분위기 속에 살았기 때문에 너무 당당하게 살았다는 후회를 많이 합니다. 저는 연소할 때 문단에 입문했습니다. 그래서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좋은 평을 받으면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평론가 김현 씨는 제가 발표한 <아시아제>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1971년에 그 제목으로 단편집을 내면서 발문을 부탁했더니 흔쾌히 승낙하고 써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아무 사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문학과 지성’을 창간하고 아주 바쁠 때의 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그분의 발문을 읽어보면서 문학수련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일도 없어 천애고아와 같은 나의 활동을 도와 주려고 애써준 그에게 나는 감사의 인사한 번 못했는데 그는 20년 전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타계했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다음은 그의 발문 말미입니다.

 

내가 아는 짧은 지식으로는 그는 술․담배를 공식적으로는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직장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축하하는 뜻에서 그가 단편집을 내면 그를 대취하게 하고 싶다. 그러면 그의 내부의 간극에 앙금이 지어 그것이 무너질지도 모르겠다.

 

기독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저를 풀어주고 싶다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대취해서 한번쯤 그에게 감사표시를 했더라면 지금처럼 미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술을 좋아해서 아팠을 때도 친구에게 “내 대신 마시라”고 술값을 준 분이었다는데…

 

기도:

하나님, 하늘나라가 제 본향이지만 지금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출처 : 낮은 문턱
글쓴이 : 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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