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우리는 `참 자유 자`입니다! (갈 1:1, 13-15)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8. 19. 08:50

우리는 '참 자유 자'입니다! (갈 1:1, 13-15)


  어느 부잣집 뜰에 난초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난초 사이에 두꺼비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주인이 나와서 난초에 물을 주면서 난초를 애지중지 하는 표현을 했습니다. '너는 왜 이렇게 아름다우냐?'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두꺼비는 너무 부러운 나머지 난초를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목이 말라도 누가 물 한 모금 주는 이가 없고 뱀은 날마다 나를 먹으려고 쫓아다니고 어디를 가나 천대만 받는 천덕꾸러기인데 너는 무슨 팔자가 좋아서 주인 이 그렇게 곱게 길러 주고 사랑해 주느냐? 너는 참 행복하겠다.'
  그 말을 들은 난초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나는 발이 없으니 목이 타도 주인이 물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소가 와서 나를 뜯어먹어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데 너는 발이 있잖니? 그래서 너는 자유스럽게 목이 마르면 가서 물도 마시고 도망가고 싶을 때는 도망도 갈 수 있지 않니?'
  그 말을 들은 두꺼비가 비로소 자기는 난초가 갖고 있지 아니한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할/ 그렇습니다. 자유는 참 소중합니다.
  ▶오래 전에 '스티븐 킹' 원작소설인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인 '앤디'는 유능하고 젊은 은행간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쇼생크'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차디찬 감옥 안에서 억울하게 평생 동안 갇혀 지내야만 하는 죄수가 된 것입니다.
  앤디는 감방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악당 패거리들을 특유의 강인함으로 굴복시키고, 자신의 특기를 살려 간수들의 신임까지 얻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여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을 바라보고 항상 희망이라는 단어를 품고 살았습니다.
  앤디는 함께 수감되어 있던 죄수를 통해서 작은 망치 하나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책 속에 은밀히 감추어 두고 매일 매일 쇼생크 감옥의 벽을 조금씩, 조금씩 쪼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가 평생 동안 쪼아도 그 견고하고 튼튼한 감옥의 벽을 다 허물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앤디는 희망을 잃지 않고 매일 조금씩, 조금씩 감옥의 벽을 긁어냈습니다.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은행간부였던 앤디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세무지식을 가지고 간수들의 세금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교도소 내에서 작은 특혜를 받아가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감옥 안에서 자신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증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앤디의 도움을 받아 은밀히 검은 돈을 만지던 교도소 소장이, 앤디가 무 협의로 풀려난다면 자신의 부정이 탄로날것이 두려워 증인을 살해합니다. 그렇게 되자 앤디는 쇼생크 감옥을 혼자 힘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천둥번개 치는 어느 날 탈출에 성공합니다. 자유를 찾은 것입니다. 19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극적으로 감옥을 빠져 나온 다음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기를 "나는 자유다."고 외칩니다. 저는 그 감격적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감옥에서 탈출한 앤디는 신문과 언론사에 쇼생크 감옥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자신의 무협의도 밝혀내어 누명을 벗고 자유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 브룩스라는 죄수가 있었는데 그도 종신형을 받은 사람으로 이 감옥에 무려 50년을 있었는데 이제 백발노인이 됐습니다. 정부에서 그걸 불쌍히 여겨서 50년 만에 그를 가석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가석방하게 된다는 걸 두려워합니다. 감옥밖에 생활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자유를 무서워합니다. 감옥에서 안 나가려고 살인극을 연출을 합니다마는 실패합니다. 결국은 감옥에서 석방됩니다. 그는 감옥생활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거기가 편했고, 밖에 나와서 스스로 산다는 것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결국 그는 '브룩스는 여기 있었다.' 라는 유서를 써 놓고 자살을 했습니다.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그는 감옥생활에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져 거기 길들여지고 나니까 오히려 자유가 부담이 되어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의 귀중함을 아는 사람이 그 자유를 지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도,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였습니다. 이때 '페트릭 헨리'는 1775년 '리치먼드' 연설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 주는 말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하려고 갔답니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에 보낸 자유의 선물입니다. 자유의 여신상의 왕관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숨이 찰 정도로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고 합니다.
  이 분이 자유의 여신상에 올라가는 일이 어찌나 힘이 드셨든지 훗날 '자유를 구경하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힘이 들을까?'라고 고백을 했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자유는 지키는 것이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할/ ◀제목 소개!▶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이 된지 69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날, 제69회 광복절로 많은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36년 동안 일제의 압제로 인해 온갖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우리의 국토를 빼앗기고, 이름과 언어를 빼앗기고, 생명까지도 다 빼앗겼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석탄광산에서 60만 명, 금속광산에서 15만 명, 군수공장에서 40만 명, 토건과 관계해서 30만 명, 항만운수와 관계해서 5만 명 등 총 150만 명의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일제에 징병된 젊은이만도 6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총알받이가 되어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더구나 20만여 명의 귀한 딸들이 정신대에 끌려가서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반성하지 않고 아직까지 독도를 자기나라 소유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정신 차려야 합니다. 36년 간의 고통스러운 과거가 우리 역사에 다시는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끊임없이 힘과 국력을 길러 이 나라를 지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할/
  하나님께서는 해방 이후 우리 민족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전 세계 200여 개국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제순위를 10위권으로 올려 주셨습니다. 최대의 스포츠 제전이라는 올림픽과 월드컵 경기도 1988년도와 2002년도에 훌륭히 치러냈습니다.
  한국전쟁을 치른 후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자원 하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을 만큼 자유와 풍요와 번영과 발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가 해방의 기쁨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멘!/
 

  ①성경의 역사는 온통 자유와 해방의 역사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자유를 추구하는 이스라엘의 해방의 역사요, 430년의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모세를 통하여 해방시킨 이야기입니다. 또한 출21장을 보면 종으로 팔려온 사람이 6년 동안 주인을 위해 종살이를 했을 경우 7년째 되는 해에는 무조건 자유를 주어 나가게 합니다. 7년 되는 그 해를 안식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7년 만에 한 번씩 지키는 안식년을 7번을 되풀이한 그 다음해 그러니까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합니다.
  그 해는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종 되었던 자들도 고향으로 가족에게 돌아가게 했고, 희년이 되는 1년 동안은 땅도 쉬도록 해서 파종을 하지 않았고 그 해 스스로 열매를 맺은 것들도 거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인간은 자유로워야 사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멘!/
 

  ②오늘 주제가 자유입니다.
  자유는 남에게 얽매이거나 강제로 속박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유가 귀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얽매인 곳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의 질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행복의 영역은 그가 누리는 자유의 영역만큼 됩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부자이면 부자인 만큼 경제적인 자유를 많이 누리게 됩니다. 가난하면 실제 생활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사고 싶어도 억제해야 되고 선한 일을 하려해도 돈이 없어 못합니다.
  어쨌든 부자이면 그만큼 자유의 한계가 넓어집니다. 또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입니다. 모르면 답답하고 기가 죽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자유의 질이 문제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면 방종이 됩니다. 또는 육체적인 자유, 양심의 자유, 도덕의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경제적인 자유보다는 양심의 자유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버스 안에서 젊은이들이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일어서면 다리가 불편하고, 앉아 있으려니 마음이 불편하고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다리가 좀 불편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한 것을 택한 사람은 양심의 자유가 더 귀한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조금 가난하고 불편하게 살더라도 양심대로 사는 사람이 차원 높은 인간입니다. 결국 사람은 내가 가지는 자유의 질에 따라 사람의 값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믿/
  높은 의미에서의 신령한 자유란 양심의 자유요 신앙의 자유입니다. 일본압제 때 신사참배를 하면 자유로운 몸이 되고, 거부하면 감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정조를 굽히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면했습니다. 그럴 때 그의 몸은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그의 마음은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 교계의 큰 별이었던 한경직 목사님은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신사참배를 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당시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 괴로움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자유, 차원 높은 자유는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입니다. /믿/


  ③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자유의 대헌장'입니다.
  기록자 사도 바울은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그가 고전9:1절에서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참 자유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를 보면 이 자유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싸운 흔적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자유를 잃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에게서 자유를 박탈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한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유를 알고, 그것을 소중히 느끼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성숙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나는 자유자다.'라고 말한 자유는 육신의 속박에서 자유 함을 얻는 그런 자유가 아닙니다.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자유, '율법에서부터 자유, 심지어는 죽음의 문제까지를 초월하는 그런 자유'를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 했습니다. 그는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유대교의 특징은 계율이 많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생활 지침서인 탈무드를 보면 모두 613가지의 계율이 6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라'는 계율이 248가지고 '하지 말라'는 계율이 모두 365가지나 됩니다. 이 수많은 계율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자유를 속박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을 못 하도록 묶어 놓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 이 모든 계율로부터 해방을 받습니다. 모두 집어던지고 '나는 자유자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를테면 613가지의 율법의 옷을 모두 던지고 예수의 옷 한 벌만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아멘!/


  ▶기원 400년경에 '키니크학파' 일명 개처럼 자유롭게 살아간다고 해서 '견유학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내걸은 자유 얻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⑴'될 수 있는 대로 욕망을 적게 가지라!' 사람이 실패를 하는 데 그 원인들을 보면 모두 지나친 욕망 때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⑵'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 사람은 자족하지 않는 한 욕망을 채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을 타면 종을 부리고 싶어집니다. 100명을 거느리면 1,000명을 거느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또 1억을 가지면 10억을 갖고 싶은 욕망으로 발전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먹어도, 먹어도 갈증에 시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⑶'체면을 버리라!' 사람이 정말 자유 하려면 체면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외친 '자유'는 '견유학파'가 외친 그런 자유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고, 심지어 죽음의 문제로부터도 자유한 그런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자유했던 사람입니까? 우리도 참 자유자가 된 것을 확실히 믿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④그 자유를 누가 주었습니까? 주님이 주셨습니다(1).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시작해서 13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마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자유와 사랑이 결코 별개의 것들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세계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가지의 자유를 말했습니다.
  ⑴기아에서의 자유입니다. 유엔 식량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지구촌 곳곳에서 먹지 못해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1분에 28명이랍니다.
  ⑵질병에서의 자유로 건강하게 살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⑶전쟁과 자연재해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⑷정치적 억압에서의 자유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자유보다 더 중요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정치적인, 사회적인 자유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자유하지 못한다면 결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
  그러나 인간은 불행하게도 영적인 자유를 빼앗긴 채 태어납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쫓겨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아담의 후손들은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의리도 버리고 건강도 포기합니다. 권력의 노예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화투만 보면 빠져드는 도박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강에 나쁜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담배와 술과 마약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원망의 노예, 미움의 노예, 불평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무엇인가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당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로 하여금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종의 멍에에 매여 살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⑴자유를 주시는 예수를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요8:36절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할/
  아들이 누구입니까?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분입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발로 짓밟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소유하신 만 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 고후3:17절에서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아멘!/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여름휴가철을 맞아 국내외 피서지를 찾아 다녀온 사람도 있고, 좀 늦게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 그들이 찾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삶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은 경제성장을 통해서도 자유를 얻으려하고, 풍요로움을 통해서도 자유를 얻으려고 합니다.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탈출해 내려오는 것도 자유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더 큰 자유가 있는 곳을 찾아 끊임없이 자유의 행군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참 자유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저기 찾아다닌다고 얻게 되지 않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옮겨질 때 참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저주와 멸망에서 건짐을 받을 때, 참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주님께서 유월절 희생양이 되셔서 우리를 멸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옮기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오늘 이 시간에서도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자유,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가 영원토록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할/
  그런데 우리 민족이 해방 이후에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았지만, 지금은 자살율과 이혼율 세계 1위에 알코올중독자 300만 명이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참 자유는 경제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지식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문화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가 주어질 때 모든 저주와 멸망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할/
  ▶'앤드류'는 성경을 공산 세계로 밀수하는 일을 했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가 젊은 시절 네덜란드 군인으로 인도네시아에 주둔 할 때 원숭이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원숭이에게 '기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가족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본이는 목 근처에 손을 대기만 하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칩니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기본이가 새끼였을 때 목을 묶었다가 풀어주지 않고 그냥 둔 철사가 목에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이의 몸이 커지면서 철사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목을 조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앤드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원숭이의 목에 걸려있는 철사를 간신히 제거했습니다. 기본이는 피를 흘리며 고생을 했지만 고통이 없어진 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기뻐했습니다.
  앤드류는 그의 책 '하나님의 밀수 꾼'에서 '기본이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아픔에서 풀어준 일은 그와 나를 묶는 사랑의 끈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질 만큼 가지고도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죄악의 줄이 우리 목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항상 묶여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옭아매고 있는 마귀의 사슬 때문입니다. /믿/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 목에 걸려 있는 죄악의 줄을 제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기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요8:36절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복음입니다. /할/ 다른 길은 없습니다. 많은 돈도, 이성적인 사랑도, 높은 자리와 엄청난 권력도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영접할 때, 주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해방 자 이십니다. 여러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부디 모든 저주와 질병, 두려움과 마귀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⑵참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폴 마이어'가 쓴 '코끼리 훈련 법'이란 책의 내용입니다.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인 후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무거운 물건을 코로 들어 옮기기도 하고, 조그마한 기둥 위에 올라가 앞 발 들고 서서 조련사가 지시하는 대로 묘기를 부립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어릴 때부터의 훈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어린 코끼리를 말뚝에 단단한 밧줄로 묶어 놓습니다. 코끼리는 그 말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단단한 밧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코끼리의 머리 속에 '나는 말뚝에 매인 줄로 꼼짝 못한다. 아무리 몸부림 쳐보아야 소용이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조련사는 계속해서 말뚝을 작게 하고 밧줄을 가늘게 합니다. 나중에는 성냥개비 만한 말뚝에 실오라기 같은 줄로 바꾸어 놓아도 코끼리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코끼리는 자신의 코로 1톤 이상의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을 쉽게 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얌전하게 조련사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어리석은 코끼리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자유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것에 묶여서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요8:31-32절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자유케 합니다.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아멘!/
  마4장을 보니 예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사용하셨던 중요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말씀의 무기입니다. 사탄이 시험을 하면 예수께서는 '기록 된 바'라고 하시며 말씀으로 대적하셨습니다.
  기도는 나를 이기는 힘이 있는 반면에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 거할 때, 말씀으로 무장할 때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시1:2절에서 다윗 왕은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할 때에 우리의 길이 평탄하게 되고 우리의 삶이 자유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⑶'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13).
  자유를 기회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기회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 기회는 내면 세계에서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영적인 소욕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선과 의를 지향하는 거룩한 본능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자유의 기회를 삼아 그 뜻을 발전시켜 나가는 삶입니다.
  또 하나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육체의 욕구에 이끌리어 유혹에 빠지고 방탕하게 되고 게으르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자유는 기회이지만 이렇듯 극과 극의 두 기회로 나누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란 자기가 누리는 자유만큼의 가치를 강요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유를 어떻게 향유하느냐.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자신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자유는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쟁취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새는 걸핏하면 투쟁이다 뭐다 합니다마는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투쟁을 통해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투쟁은 자유케하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더러는 투쟁으로써 정치적 자유는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투쟁하여 자유를 얻는 그 순간에 이미 도덕적 타락에 빠집니다. 폭력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인간성이 파괴되고 맙니다. 그리하여 끝내 자유하지 못하고 비참해지는 경우를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수없이 목격해왔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자유는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해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한을 푼다'라고 말합니다 마는 한을 어떻게 풀자는 것입니까? 그것 또한 자유할 수 있는 길이 되지 못합니다.
  ▶또 자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입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가지고 싶은 대로 가지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동물적인 자유'입니다. /할/
  또 하나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는 자유'입니다. 인간적인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지키기가 힘이 듭니다. 늦잠 자는 것은 동물적인 자유이며 일찍 일어나는 것은 인간적인 자유입니다. 공부하기 싫어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은 동물적인 자유이고 내일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유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자유를 두 가지 차원에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유는 제한적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유를 다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한을 받습니다. 옛 로마인들이 향락을 일삼을 때에는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나서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토한 다음에 다시 먹곤 하였다고 합니다. 마음껏 먹고 싶지만 위장이 한정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먹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고 싶은 곳을 다 갈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수도 없습니다. 자유는 제한적인 것이요, 또 제한을 받아야만 합니다.
  물고기가 자유롭다고 하여 물 밖으로 나가서 살 수 있습니까? 물 밖으로 나가면 죽습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가정이라는 제한된 울타리가 있습니다. 가정 밖으로 뛰쳐나가면 그것도 죽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이 제한, 이 자유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방종(放縱)입니다. /할/
  결국 우리에게는 정치적 한계, 경제적 한계, 교육적 한계, 지식적 한계가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또 도덕적 한계가 있습니다.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여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내 감정을 다 드러냄으로써 상대방의 기분을 어지럽혀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남의 감정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적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오직 제한된 자유를 향유할 수 있습니다. 본래 자유에는 그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멘 입니까?/
  두 번째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이는 스스로 버리는 자유입니다.
  내게 주어진 권리, 내게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자유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충성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스스로 자유를 포기합니다.
  ▶신혼여행 차 비행기를 탄 신혼부부들이 있었습니다. 한 커플은 엄청난 애정표현으로 어디다가 시선을 두어야할지 퍽 거북했습니다. 모두들 행복해 보여서 절로 미소가 나왔습니다. 쌍쌍이 끼리끼리 서로가 좋아서 못 견딜 지경입니다.
  그런가 했더니 놀랍게도 벌써 다투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식을 올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러나 싶어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왜 곁눈질이냐?' '왜 다른 여자를 쳐다보느냐?'하고 티격태격 입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여 부부가 되었으면 그 순간부터 다른 여자 다른 남자는 보아서도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다른 남자를 꿈꾸고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꿈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아무리 금실이 좋은 부부라 해도 무사하기 힘듭니다.  
  사랑의 속박은 결코 부자유가 아닙니다. 스스로 자유를 반납해버렸기에 그렇습니다. 스스로 매이기를 바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속박 안에서 자유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할/
  충성도 그렇습니다. 요즘 군 병영문제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사실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려고 군에 입대합니다. 입대하는 날부터 군기(軍紀)에 매입니다. 내 나라를 위하여 내 자유를 반납하고 펄펄뛰는 청년기의 귀중한 2년 몇 개월을 고스란히 바칩니다. 이것은 충성입니다.
  그런 속박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양심을 위하여,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우리의 자유를 스스로 속박합니다. 이것이 높은 차원의 자유입니다. /아멘!/
  ▶어떤 청년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주례자 앞에서 신부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신랑이 신부입장 결혼 행진곡이 한창 울려 나오는데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내 식장이 소란해졌고 주례 목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축하객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30분이 족히 지나서야 신랑이 헐떡거리며 돌아왔는데 얼굴과 예복이 온통 물에 젖었고 게다가 검댕이 칠로 뒤범벅이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주례를 계속해 주시지요?' 그 청년은 죄송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주례목사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신랑은 어디를 갔다왔습니까?' '목사님, 저는 소방수입니다. 신부의 결혼행진곡이 막 울려 퍼지려는 순간 화재 사이렌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서 불을 끄고 지금 달려오는 길입니다.'
  신랑의 이 말에 남은 축하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정말로 책임감이 강한 충실한 소방수라며 칭찬해 마지않았습니다. /할/


  ⑷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13).
  증오할 때에는 이미 자유인이 아닙니다. 사랑할 때에만 자유인이 됩니다. 사랑할 자를 사랑하지 않고는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자유'입니다. 이것은 섬기는 자유입니다. 섬기는 것이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섬김이 기쁨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편은 아내의 종입니다. 직장에서 화나고 분이 차 올라와 사표를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마누라입니다. 그러면 사표를 다시 구겨놓고 상사의 명령 앞에 조용히 머리를 숙입니다. 종처럼 그렇습니다. 과거 같으면 그래도 월급봉투라도 한 달에 한번 가져다주면서 '내가 벌어온 것 받아'하며 목에 힘 줄 수 있는데, 요즘은 온라인으로 들어가서 완전히 명세가 다 드러납니다.
  세상에 그런 종이 어디 있습니까? 가정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기에 그래도 힘들지 않습니다. 어떤 남편은 설거지를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퐁퐁' 쓰는 재미가 퐁퐁 하답니다. 사랑하면 가능합니다. /아멘!/
  ▶테레사 수녀는 1m50의 키가 작은 사람입니다. 그녀는 1950년에 동전 몇 푼을 가지고 인도의 켈커타에 도착했습니다. 그분이 죽어 가는 사람들의 눈을 감기면서 사랑을 베푸는 동안에 수녀가 4,000명이 생기고, 고아원이 517개가 세워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이 생기고 AIDS환자를 위한 호스피스가 생겼습니다.
  이것을 보고 미국 상하 양원이 그분을 모셔다가 연설을 듣고 미국의 최대 시민 명예 상을 수여했습니다. 그분은 노벨상도 수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죽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인도 정부가 주관을 해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전 세계가 그 분을 추앙하고 애도했습니다.
  어떻게 그분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참 자유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당신은 그러한 일을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분은 '나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연필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셨답니다. 예수님 때문에 희생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 할 때에 테레사 수녀야말로 참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아멘!/
  ▶오래 전에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열린 무디 선생의 성경수양회에 영국의 귀족들이 방문하여 참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영국에서는 손님이 오면 종이 밤새도록 손님의 구두를 닦아 놓는 풍습이 있었는데, 무디 선생의 제자들 사이에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결론은 '여기는 미국이니까 손님들의 구두를 닦지 말자'입니다. 그런데 한 제자가 이 이야기를 무디에게 전하면서 그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무디는 빙그레 웃으며, '글쎄, 주님께 물어볼까?' 하더랍니다. 이튿날 아침, 영국의 귀족들이 일어났을 때 그들의 구두는 모두 깨끗하게 닦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무디 선생이 밤새도록 닦아 놓았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봉사한 것입니다. /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의 저서 '기독교인의 자유'에서 '기독교인은 모든 것 위에 서 있는 자유로운 군주로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고 종으로서 누구에게도 예속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유자인 동시에 종입니다. 죄와 율법과 사망에 대해서는 자유자지만 사랑과 의와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종입니다. 선을 위하여 내 육신의 자유를 버리며, 사랑을 위하여 내 미움을 버리며, 의를 위하여 내 생명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참 자유자입니다. /할/
  사도 바울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고, 15절에서는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망하는 것은 쉽습니다. 서로 물고 찢고 먹으면 피차에 망합니다. 그러므로 피차에 망할 일을 하지말고, 부디 서로 종노릇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아멘!/


  ⑸자유는 주어진 책임과 함께 하는 자유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악당이 거리에서 자신의 원수를 만나자 총을 뽑아 그를 쏘았습니다. 권총에서 아직 연기가 나고 있는 동안 어떤 차가 그 앞에 섰습니다. 가냘픈 여인이 차에 서 내려서 총을 맞은 사람의 상처를 지혈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권총을 든 악당이 그녀에게 비키지 않으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그녀는 '미안합니다. 이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나는 간호사입니다. 나는 병에 들었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도와줄 의무와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 일을 할 뿐입니다.' 이것이 자유인입니다. 내게 주어진 책임, 내게 주어진 사랑,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유하기 때문에 남을 섬기고 충성을 다하고 내 책임을 다 할 때에 인류가 새로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백성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⑹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야 신앙인의 참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지 않고 행하는 신앙생활은 힘들고 짜증나고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것은 자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행하는 신앙의 길이 기쁨과 감격과 힘을 줍니다. 그것이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이 맛보는 자유입니다. /할/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와 능력으로 가능해집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모릅니다.
  은혜 아래 있지 않은 사람에게 예배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졸릴 뿐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예배가 얼마나 감격스럽고 은혜가 넘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긴 설교도 꿀맛 같고 짧게만 느껴집니다. 아무리 짧은 설교도 은혜가 충만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지 않은 사람은 설교가 길면 길다고 불평, 짧으면 짧다고 투덜거립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헌금하는 일, 특히 십일조 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일지 잘 압니다. 그래서 헌금 강조를 안 하는 것입니다. 헌금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헌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도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헌금할 줄 모릅니다.
  마이동풍이고 우의독경입니다. 집에 돈을 쌓아 놓고도 헌금은 안 합니다. 은혜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할지 모릅니다. 내가 고생해서 번 돈인데 왜 내가 교회에 바쳐야 되느냐, 교회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냐 하며 헌금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헌금 강조해봐야 반발심만 커집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은혜를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사람들, 정말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안 사람들은 헌금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내지 말라 해도 내고 낼 명분 찾기에 분주합니다.
  '지금 나의 나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있는 대로 다 바쳐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그저 기쁘고 감사가 더 넘칠 뿐입니다.
  교회에서 헌금 잘 하시는 분들 보면 재산이 많아서 하는 것 아닙니다. 은혜 받은 것이 많아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헌금도 자유롭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돈에 대한 애착, 모은 돈이 줄어든다는 생각에서 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봉사란 정말 귀찮고 불평스럽고 피곤하며 재미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봉사가 얼마나 신나고 즐겁고 보람 있는 일로 여겨지는지 모릅니다. 더 해야 할 봉사가 없나 하고 스스로 찾아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하라 그래서 하는 것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얻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누려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고, 은혜 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믿/
  우리 참 행복한 성도들이 모두 이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4년 8월17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