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예수님의 손은 기적의 손입니다! (마 8:1-4, 14-1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8. 4. 11:15

예수님의 손은 기적의 손입니다! (마 8:1-4, 14-17)


  오래 전에 어느 전도사가 시골교회로 부임하여 기도회를 하려고 성도들을 소집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할머니 한 분뿐임을 알았습니다. 너무나 실망하여 기도하는 것도 포기하려고 하는 데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우리 교인은 한 명이 아닙니다. 다섯 명입니다.'
  '할머니 지금 할머니 한 분밖에 교인이 없잖아요?' '전도사님. 아니에요. 우리 교인은 다섯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나 그리고 전도사님이지요. 기도하십시다.' 이 말에 전도사님이 큰 용기를 얻고 열심히 기도하여 큰 목회자가 되었답니다. 주위 종은 성도들이 키웁니다. /아멘!/

   오래 전에 미국을 중심으로 ‘터치 운동’의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심리학자와 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터치(touch) 즉 접촉(接觸)이 인간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즉 피부 접촉이 어린 아이의 두뇌발달에 큰 효과가 있고, 정서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린 시절 접촉이 부족하면 지능지수도 낮아지고, 성장한 후 사회 적응력도 떨어질 뿐 아니라, 우울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린 시절의 접촉 결핍이 암이나 난치병의 원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고아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갔는데, 나중에 연구한 결과 ‘접촉 결핍증’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접촉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들도 부부끼리, 친구끼리 접촉을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뿐 아니라 면역력이 증진되고, 더 나아가 난치병 치료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할/
  오늘 본문속에서도 우리 예수님의 터치 운동이 나옵니다. 본문 3절과 15절을 주목하세요!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할/ 그리고 15절에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3절에서는 문등병자가 치료받았고, 15절에서는 베드로의 장모님의 열병이 치료받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절과 15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그의 손을 만지시니' 치유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 ◀제목 소개!▶
 

  ①문등병자를 치료하시는 예수님!(1-4)
  ㉠이 사건은 산상설교를 마치고 오시는 길에 나타났습니다(1)
  '산에서 내려오시니' 산상설교의 긴 말씀을 마치시고 내려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디로 오셨습니까? 다시 일반 백성들 속에서의 사역을 위하여 갈릴리 호수 근처의 낮은 지방으로 내려오셨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내려올 때 잘 내려와야 존경받는 정치인이 됩니다. 저는 이번 수원선거에서 떨어진 새정치연합의 손학규씨의 정계 은퇴를 보면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올 때도 있습니다. 사업이 잘될 때도 있고 망할 때도 있습니다. 건강할 때가 있는가 하면 병들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올라갈 때 너무 자만하지 말아야하고 내려올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여기 '허다한 무리'란 5:1절에서 나오는 '무리'보다 더 많은 숫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그의 소문이 각지로 퍼져 나가서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그의 교훈을 듣고자 예수께로 몰려왔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말의 표현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할/


  ㉡문등병자는 버림받은 인생입니다(2).
  나병의 특징은 처음에 작은 반정이 생기고, 그것이 썩어져 가면 더러운 고름이 나고 얼마 안 가서 눈썹이 빠지며 성대는 약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답니다. 그리고 먼저 손과 발이 썩고 서서히 온 몸에 퍼져나간다고 합니다.
  나병의 발병기간은 9년으로 봅니다. 자신도 모르게 3년, 자신이 알아서 3년, 다른 사람이 알아서 3년, 9년이 되어야 문둥병임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 신체의 부분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병입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머리 머리가 떨어져 나가 마침내 죽고 마는 병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은 신체적인 고통도 무섭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문둥병환자로 진단이 나면 철저히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을 받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문둥병자는 미처 죽은 사람처럼 취급되었다.'고 했습니다.
  중세기에는 문둥병에 걸리면 사제가 법의를 입고 십자가를 듣고, 환자를 교회로 데리고 와서 그에게 장례예식은 베풀었답니다. 한마디로 죽은 사람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레13:45절에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우리나라도 문둥병자들은 소록도에 격리 수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도 문둥병 환자는 예루살렘과 모든 성벽에 있는 도시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회당에는 문둥병자를 위하여 높이 3M, 넓이 2M에 별실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무섭고 끔직한 병이 문둥병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 볼 때에 다 죄에 병든 몸입니다. 죄는 문둥병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둥병은 죄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죄에 병든 자는 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죽어 지옥에 갑니다. /할/


  ▶오늘 치유 받은 문등병자의 신앙은 무엇인가?
  ⑴신앙은 용기입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말은 굉장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절대로 일반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 앞에 그렇게 담대하게 나올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왜? 항상 예수님 옆에는 인산인해의 사람들이 북적거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 앞에 나와 왔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할/
  믿음의 첫걸음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끌려 왔던 습관적으로 왔던, 교회에 왔다는 사실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고, 구원받아 살 것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길입니다.
  이 저주받은 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담담히 나온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래서 찬 205장은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여 편히 쉬리라' /할/
  예수님 앞에 나올 때 누구나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방해되는 일도 많고, 장애물도 많기 마련입니다. 가족 중에 못나가게 핍박을 합니다. 남편이 부모가 형제가 아니면 친구가 조롱을 합니다. 그러나 나온 자는 복을 받습니다. 신앙은 내가 지키는 것입니다. /믿/
  ⑵그는 경배의 사람입니다. '절하고' 절했다는 단어는 마태복음에서 13번이나 나오는데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이 문둥병자는 가볍게 인사한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온 몸으로 겸손과 진실과 순수한 그 모든 것을 다 바쳐 예수님 앞에 조용히 머리를 숙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신앙인은 머리는 들어서는 안 됩니다. 머리를 든다는 말은 교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는 자존심을 꺾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많이 봉사하시는 성도들은 절대 겸손함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약4: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또한 잠22: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할/
  ⑶그는 고백의 사람입니다. 여기 '가로되'라는 말은 말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말속에는 인격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 앞에 자신의 심각한 문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병이 낫길 바라는 간절한 요구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처해있는 환경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말못할 고민도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못할 고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앞에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자기의 고민을 하나님께 진솔하게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고백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숨깁니다. 주님 앞에 나를 내어놓는 것 같은데 내어놓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섭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 문둥병 환자는 자신을 공개합니다. 우리도 예수 앞에 자신을 다 공개해야 합니다. /할/
  ⑷예수님이 그의 생명의 주인임을 고백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주여!' 진정한 신앙은 바른 신앙고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말씀은 마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한 그런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주여'가 아닙니다.
  이 문둥병자는 지금 종교적인 쇼를 한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목소리를 더 멋있게 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표정이 좀 더 멋지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 오열하듯이 피를 토하듯이 자기의 온 마음과 인격을 다 바쳐서 '주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진실한 신앙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⑸이 문둥병자는 자기의 뜻보다는 먼저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 '원하시면'이란 말은 간단한 말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 내 병을 고치고 싶습니다. 정말 고침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의 뜻이라면' 이런 뜻이 들어 있는 그런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사정이 있고,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 문제가 우선이고, 급한 것이지 남의 뜻을 생각해 보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문둥병자는 남을 생각할 만큼 여유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는 돈도 없고, 그 병을 고칠만한 조건이 없는 사람입니다. 집에서 버림받고 친구에게도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육체적으로는 매일매일 고통 속에서 손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떨어져 나가는 추악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남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주님이 원하신다면,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은 배워야 합니다. 내 뜻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뜻을 물어 봐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내 병을 고쳐주십시오' 얼마나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입니까? '주님이 원하시면' 이 말은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시면 나는 이 병으로 죽어도 좋습니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안 고쳐 주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나는 안 하겠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할/
  과연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주님이 원하지 않을 것을 안 할 용기가 있습니까? 포기할 용기가 있습니까? 또 주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까? 이 믿음이 귀한 믿음입니다. /아멘!/
  ⑹'원하시면'이라는 말속에는 확실한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무엇을 느낍니까?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병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능력이 그 기적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믿는데서 능력이 나타나고, 믿는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 예수님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그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3절에서 역사를 일으킵니다. /아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3)
  문둥병자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이 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안수하십니다. 그 끔찍하고 더러운 문둥병자에게 그 거룩하시고 깨끗하신 주님의 손을 대어 안수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무나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고 안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랍비들은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썩어 문드러진 그 몸에 손을 대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할/
  더러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대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하신 것이며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허준은 의원의 등급을 상의(上醫), 중의(中醫), 하의(下醫)로 나누어 말했습니다. 상의는 신분이나 재물을 보지 않고 병만 보는 의원을 가리키고, 중의는 병도 보고 재물도 보는 의원, 하의는 재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의원으로 나눕니다. 우리 예수님은 상의 중의 상의입니다. /믿/
  여기 '내가 원하노니'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할/


  ㉣예수님의 당부(4)  
  ⑴'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세상 사람들 같으면 광고, 선전을 많이 하라고 난리 법석을 할 텐데, 우리 주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인 광고는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할/
  ⑵'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그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의사를 겸직했습니다.
  ⑶'모세의 명한 대로' 모세를 율법의 대표자로 봅니다. 이 말씀은 '율법대로 살아라!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아멘!/
  ⑷'예물을 드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마6: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께 마음 깊은 감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눅17장은 10명의 문둥병자가 다 치료함을 받았는데 아홉은 뿔뿔이 자기의 길로 갔지만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주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해야 할 성도가 감사하지 않으면 주님이 찾으십니다.
  ⑸'증거 하라!'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할/ 요4장에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자마자 자기가 살던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전도는 성도의 사명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유언입니다. 그런데 전도는 하면 됩니다. /아멘!/

 

  ②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예수님!(14-17)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산상 부흥회를 마치시고 내려오셔서 행하셨던 능력 가운데 그 세 번째 치료의 능력을 보이신 사건입니다.
  첫 번째는 한 문둥병자를 고쳐주셨고, 두 번째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베드로의 집에 가보니 그의 장모가 와 있었는데 열병으로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막1장에서도 눅5장에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내용도 간단합니다만 고치신 방법도 간단합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주님이 손을 대니 그의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마9:20절을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어느 날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그곳으로 지나가시는데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그 여인은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2년 동안 고통을 주던 혈루증의 근원이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
  그런데 비율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이나 몸에 손을 댄 경우보다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손을 대신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는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으신 경우가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양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인간 실존의 현장을 찾아다니시면서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주시고, 속상할 사람은 위로해 주시고 우는 자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아멘!/
  ▶조선일보의 이규태씨의 칼럼에서 '한국 여인이 입는 치마는 그 용도가 다양하다.'고 썼습니다. 그 치마는 입으면 옷이 되고, 깔면 자리, 싸면 보자기, 덮으면 포대기, 가리면 포장, 훔치면 행주, 강물에 몸을 던질 때 뒤집어쓰는 얼굴 가리개, 슬퍼서 눈물 흘릴 때는 손수건이 됩니다.
  옛날의 어머니들은 한에 울고, 시집살이에 울 때마다 치마로 눈물을 닦아야 했고, 그래서 세 벌의 치마가 눈물에 젖어 삭아야 시집살이가 끝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삶의 현장 속에서 겪는 고통, 절망, 좌절, 슬픔, 고독 이 모든 것들이 세 벌 치마를 눈물로 삭이는 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해결이 됩니다. /믿/아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광명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그 순간 그는 벌떡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 못하는 벙어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입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 순간 그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귀에 '에바다' 즉 '열려라'하시니 그 순간 귀가 열려 소리를 들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나인성에 살고 있던 과부의 아들이 죽어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묘지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면서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시니 그 청년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손이 주님의 손입니다. /할/


  ㉠14절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로 시작이 됩니다.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의 해변가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몇 가지로 말을 합니다. ㈀베드로가 초청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일정한 거쳐가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집에 자주 가셨을 것이다. ㈂요즘 말하는 심방을 가셨을 것이라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혼자만 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제자들과 같이 동행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집에 누가 있었습니까? 그의 장모가 그 집에 와 있었습니다. 모시고 사는지 아니면 잠깐 다니려 오신 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베드로가 장모가 있었다는 것은 그가 결혼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을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주장하면서 모든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하고 독신 제를 주장하며 또 교황의 무오 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을 보면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입니다. 천주교의 주장을 무색케 하고 있습니다.
  고전9:5절에서도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여기 바울의 편지를 보더라도 베드로가 결혼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결혼을 부인하려고 천주교는 크나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할/


  ⑴베드로의 장모님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열병은 급성 적인 병의 일종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장질부사에 걸렸다.'는 그 말입니다. 장질부사에 걸렸으니 그 가정이 얼마나 큰 시험과 고통이 있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제자요 위대한 사도의 가정에도 이런 어려움이 닥쳐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목사의 가정에도 장로의 가정에도 권사나 집사 님들의 가정에도 이런 질병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귀한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시고'입니다. 누가 보셨습니까? 주님이 그녀의 열병을 보셨습니다.
  보는 것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집니다. 제자들도 그의 열병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열병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보셔야 합니다. 우리의 사정을 주님이 보셔야 합니다. 보시면 해결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아멘!/
  여기 '보시고'는 그 집에 들어서는 즉시 주님이 목격하셨음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즉 주위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하기 전에 그녀의 안타까운 사정을 목도하셨습니다.
  ⑵그 당시 베드로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눅5:11절을 보면 베드로는 만선된 배도 그물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해온 어부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그 가정이 자연히 어려움이 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 마디로 말해서 남편 노릇도, 아버지 노릇도 잘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장모에 대해서는 사위 노릇을 바로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때문에 가정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정을 아시고 보십니다.
  주의 일 때문에 가정 일이 소홀해 졌습니까? 주의 일 때문에 사업이 소홀해 졌습니까? 주님이 보시고 보상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믿/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15)
  누가 누구의 손을 만졌습니까? 주님이 베드로 장모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손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은 단순히 도구나 만들고 악기나 연주하고 그림이나 그리고 음식이나 나르는 그런 손이 아닙니다. /할/
  ⑴예수님의 손은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못 박힌 손, 피 묻은 손입니다. 의사들은 사람의 손에 '이목구비가 들어차 있는 얼굴의 축소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온갖 신경이 손에 집중되어 있어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손에 접촉되는 감촉으로 물건의 성격과 질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로마 병정들은 주님의 그 손바닥에 못을 박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목에 박았다고도 합니다. 그때 주님의 손에서는 피가 흘렸습니다. 주님의 양손은 그때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 손은 상처 난 손이며, 피 묻은 손이며, 못 박힌 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산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그 손에 쇠못을 박는다면 그 아픔과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사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아 찍히신 손과 발에서 흐른 피는 나의 죄와 허물 때문에 흘린 피였고, 그 손에 상처도 흔적도 내 죄와 허물 때문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할/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피묻은 손을 주님의 능력의 흔적으로 고백했습니다. 갈6: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 흔적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길을 보장받았습니다. /믿/
  그런데 당시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도 의심을 했습니다. 답답하신 예수님이 눅24:39절에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신앙에서 의심은 금물입니다. 의심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의 물결 같은 마음으로 이런 마음은 아무 역사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임을 믿습니까? 확실히 믿습니까? 의심하면 불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확실히 믿는 사람이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할/
  ㈁능력의 손! 고치시는 손! 치료의 손입니다. 소경의 눈에 손을 대시면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손을 대시면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막5:35절 이하를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니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의 손이 닿는 곳엔 기적과 고침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멘!/
  제가 자랄 때만해도 요즘처럼 약이 흔하진 않았습니다. 구토, 설사해도 익모초 즙을 짜서 코를 막고 마시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열이 나면 찬물수건으로 찜질 정도가 치료방법이었습니다.
  그때는 열이 오르고 골치가 아파서 끙끙거리고 앓고 있을 때, 우리들의 어머니가 물수건 찜질을 해 주시면서 '엄마 손은 약손이다. 금방 낳는다.'고 하십니다. 정말 그때는 어머니의 약손이 머리에 닿으면 아픔이 말끔히 가시곤 했습니다. /할/
  그렇다면 정말 어머니의 손이 신통력이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어머니의 손은 정성의 손이기 때문에 우리가 위안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손은 어머니의 손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신5:15절을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시37: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주님의 손은 능력의 손이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실 수 있습니다. /아멘!/
  ▶어떤 사람은 힘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위로 올라가는 힘입니다. 안으로 파고드는 힘입니다. 그리고 밖으로 뻗는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위로 올라가는 힘이며, 우리의 심령 속으로 파고드는 힘이며, 온 세계와 우주로 뻗어나가는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신 힘이며, 최강의 힘입니다. /믿/
  ㈂축복의 손입니다. 창1:22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눅24:50절에서도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마14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 주님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5천명을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마14:20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을 때도 그때도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제자들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주님의 손으로 넘어가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믿/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니' 다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차고 넘치는 축복이 왔습니다. 이 축복은 보나마나 그 어린아이 몫일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축복은 일어납니다. 주님 손에 얹어 놓으십시오, 주님이 축사하시면 지금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축복의 손길에 붙잡히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그 손은 심판의 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손은 피 묻은 사랑의 손이며, 고치는 손이며, 또한 축복의 손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징계하시는 심판의 손이기도 합니다. /할/
  신2:15절에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또 욥19:21절에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여기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여기서 말하는 치셨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던 모세의 경우에도 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주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고 손에는 철창을 들고 만국은 통치하시며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림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예수님은 심판 주로 오셔서 죄인을 벌하십니다. 이상으로 주님의 손은 위대한 손입니다.
  본문 15절은 열병으로 고생하던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님의 손에 닿는 순간 열병이 떠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주경학자 크리스소톰은 '그녀는 열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완전한 회복까지도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정치도 열병을 앓고 있고, 사회 구석구석이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약이 필요합니다. 15절에서 그 약은 '손을 만지시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만져주셔야 합니다. /아멘!/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한동일 교수는 손가락이 아파 1년 동안 피아노 연주를 못하고 있을 때,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깨닫고 찬송가를 연주할 때 그 손이 치료받았다고 그가 간증했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의 손은 우리가 가지고 있을 때 그 손은 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이 내게 닿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 우리 참 행복한 교회에 손을 대주시옵소서, 주님, 성도들의 가정에 사업장에 손을 대 주시옵소서, 주님 행복한 모든 영혼들에게 손을 대주시옵소서!' /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도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⑵왜 기도의 손을 들어야 합니까?
  ㈀우리 인생살이에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모세는 그때마다 기도했습니다. 홍해가 가로막을 때에도 기도했고, 마라의 쓴 물을 만나서 백성들이 원망할 때도 기도했고,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마를 때도 기도했고 아말렉이 공격해온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기도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할/
  우리들도 남이 아는 문제가 있고, 남이 모르는 문제가 다 있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천국에 있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많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우리도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기를 항복시키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약하고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을 항복시키고 기도하면 강해지고 한계를 뛰어넘어 큰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약한 사람이 강해지는 비결이 기도에 있습니다. 무능한 사람이 능력의 사람이 되는 비결도 기도에 있습니다. 내 한계를 넘어서 더 넓고 더 높은 세계를 보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결이 기도에 있습니다. /믿/
  ㈂기도하면 모든 악의 세력은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기도의 손을 들 때에 아말렉은 물러갔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걱정 근심 염려, 두려움은 물러갑니다. 기도하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시험과 문제는 물러갑니다. /할/ 기도하면 홍해도 갈라지고 여리고도 무너지고 쓴 물은 단물로 바꾸어집니다. /아멘!/
  히스기야는 죽을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 항복하고 기도에 매달렸더니 질병이 물러가고 15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항복하고 기도하면 원수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 줄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에게 오는 이 모든 적을 하나님이 물리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떠한 문제 앞에서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손을 들면 넉넉히 감당하고 적은 물러가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은혜 받고 능력 받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 되고 무지한 사람이 지혜로워지고 방황하던 사람이 새 비전을 갖게 되고 맡은 일을 잘못하던 사람이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됩니다.
  구두 수선공이었던 무디는 기도하여 능력 받아 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폭력배 두목이었던 김익두가 기도하여 능력 받아 대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무능하다. 가진 것 없다. 배운 것이 없다. 돈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타령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받고 싶은 만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분량만큼 그릇 만큼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기도하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늘 창고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저축이 많이 되어 있으면 때가 되면 찾아서 쓰게 됩니다.
  여러분 저축이 무엇입니까? 앞날을 위하여 오늘 쌓아두는 것입니다. 기도는 저축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저축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시28:2절에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아멘!/
  ▶이제 본문의 베드로의 장모를 보세요!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드니라'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그 여자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그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아멘!/
  여기 '수종드니라'는 말은 쉽게 표현하면 '봉사했다.'는 말입니다. 봉사는 구원 얻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요 행위입니다. /할/


  ㉢말씀으로 귀신을 쫓으신 예수님!(16)
  소문을 듣고 어떤 무리들이 많이 왔습니까? 귀신들린 자, 병든 자들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막1:34절에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다 고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능력입니다. 이 말씀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했던 그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그 말씀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아멘!/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17)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8장의 사건을 보면서 '문둥병자와 백부장의 하인' 그리고 열병이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구약 이사야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구나!' 라고 구약을 해석했습니다.
  ▶마태가 해석한 것에 따르면 예수님은 두 가지 모습이었습니다.
  ⑴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연약한 것은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사5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은 담당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믿/아멘!/
  사람이 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약한 존재들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대단한 능력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양식을 먹고 지냈고 심한 가뭄 3년 동안에도 사렙다 과부 집에서 기적의 밀가루통과 기름병을 통해 먹고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렙다 과부의 독자가 죽었을 때 살렸던 사람이요,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고 비가 내리게 했던 능력의 사자요,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이던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연약함이 어디서 나타났습니까?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아합왕의 부인 이세벨이 죽인다고 위협할 때,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서 하나님께 내 목숨을 거두어가 달라고 애원하던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많고 지식이 많다고 강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 자신을 돌아다보면 약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고독하고 외로워질지도 모릅니다. 젊어서는 이해가 안 갑니다. 나이가 좀 먹어야 인간이 약하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할/ 그렇다면 우리 연약한 인생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로의 약점과 아픔을 품어주어야 합니다. /아멘!/
  ▶어느 날 남편이 부인에게 말하기를 '여보, 당신에게 여러 번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소.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 될 것 같소' 그럽니다. 부인은 '남편이 다른 여자가 있는가?'라는 생각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기를 '사실, 우리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소. 나는 첩의 자식이요.'라는 말을 하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 남편은 그 말을 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부인이 들어보니 너무나 하찮은 이야기입니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이제 겨우 이야기해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아요?'라고 웃더니, 이번에는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모처럼 당신이 비밀을 말하니, 나도 그 동안 못했던 비밀을 말할게요.'
  남편도 긴장합니다. '사실, 우리 아버지가 전쟁통에 죽은 것은 빨갱이 노릇을 하다가 국방 군에 붙잡혀서 총살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고향에도 못 갑니다. 그 동안 당신이 이 사실을 알까봐 너무나 마음을 졸였어요. 그러나 이제 다 털어놓으니 날아갈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부인이 웁니다.
  남편도 '육이오 사변 때 그런 일을 당한 가정이 얼마나 많소?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숨겨왔오?'라고 껄껄 웃습니다. 그 때부터 그 부부는 서로의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음으로 더 깊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은 일이 자신에게는 엄청난 인생의 올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의 상처들을 십자가 사랑으로 끌어안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
  이제 우리가 연약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셨으므로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무섭지 않습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든든합니다. /믿/ 그래서 찬송작가는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라고 찬양했습니다. /아멘!/
  ⑵주님은 우리의 질병을 지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노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제한이 없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우리의 영혼만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병을 고쳐주신 별입니다.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생활의 질병도 치료해 주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인생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메시야이십니다. /할/  (2014년 8월 3일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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