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과연 누구의 것이냐[현실참여의성경적이유,교황청운전자십계명]/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17:30

070722 과연 누구의 것이냐 (22:15~22)

성경본문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 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나라의 정치상황 참 어지럽습니다. 이것을 사자성어로 두 개만 골라서 이야기해본다면 무엇이 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하나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짙은 안개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요. 이것은 현실이고, 또 두 번째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마음에 드는 후보가 아니라 누가 더 나중에 일을 그르치지 않겠는가 하는 소극적 관점으로 사람을 골라야 하는 참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그간의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는 뭔가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한을 풀어내는 기회였다 그렇게 평가를 합니다. ‘지역의 문제’라든지 ‘민주화의 문제’라든지, 어느 칼럼리스트는 이제 우리의 대통령 선거는 다행히 이제 그런 어떤 맺힌 한들은 하나하나 다 풀린 것 같다. 이제는 우리 온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그런 리더가 돼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 하는 것이죠.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이러한 정치현실에 어떤 입장, 어떤 자세를 갖춰야 할 것이냐 이게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대상황은 이렇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그 나라는 로마의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었어요. 로마의 왕인 가이사 시저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로마의 지배가 오래되면서 자연히 로마지배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그들과 협력하고 또 그러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등장하죠. 헤롯왕과 헤롯왕을 추종하는 당파들이 있습니다. 헤롯당. 그러나 또 반대로 여기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내심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심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열심당’이라고 해가지고 로마정부에 투쟁하는 테러를 자행하는 그런 무리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예수님은 헤롯당도 비판했지만 바리새인들도 비판했어요. 열심당도 비판했어요. 그러다보니까 오늘 바리새인들이 자기들과는 하늘을 같이 질 수 없다 라고 했던 반대편에 있는 헤롯당과 임시 손을 잡고-적과의 동침이죠-예수를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그 빌미를 찾으려고 서로 다른 두 당파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아주 묘한 물음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께 아첨하는 말을 한참 늘어놓다가 결정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그릇된 것입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에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라 그런다면 지배당하고 있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마음과는 반대 입장에 서는 것이죠. 또 바치지 말아라 그런다면 이것은 헤롯당에게 고소당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죠. 어떡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 셋돈을 가져와라. 세금 낼 때 내는 그 돈을 가져와라. 그랬더니 드라크마를 가져왔습니다. 은으로 만든 돈이죠. 은전을 가져왔어요. 그 드라크마를 하나 받아놓고 그 화폐에 돋을새김으로 그려져 있는 형상이 있죠. 쓰여져 있는 글씨가 있죠. 이게 누구냐. 로마황제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거기에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가이사입니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자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전통적으로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해서 ‘정교분리’,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켜서 그 근거로 이 대목을 많이 사용했어요. 그러나 사실 이것은 오류이죠.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죠. 특별히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이죠. 나라를 위해서 기도 합니다만 그들의 행동범위는 기도에 머물고 맙니다. 교회의 일차적인 목적은 영혼구원이다, 그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뭅니다. 일면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는 그러한 근거로 이 말씀을 썼죠.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 거죠. 거기에 성경적인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 사회, 교회, 모든 것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에. 우선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두 번째는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셨듯이 그것은 한 개인뿐만이 아니라 개인이 구성하는 교회와 사회, 모든 것을 다 대상으로 하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건은 그저 한낱 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그들 삶의 모든 것을 다 새롭게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는 거죠. 죄로부터의 죄 사함 뿐만이 아니라, 자유함 뿐만이 아니라, 그리고 사회의 온전한 회복을 위한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도 이 많은 계명 중에 단 한 가지 으뜸가는 계명을 고른다면 그것은 ‘네 힘과 뜻과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몸을 아끼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이 계명이죠.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설 때에 하나님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심판하시는 판단하시는 하나의 근거가 하나님을 사랑했으며 네 이웃을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심판의 기준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현실에 참여해야 되는 거죠.

그러나 그렇다면 또 반대로 현실에 참여하되 어떻게 참여할 것이냐. 흔히 예전에는 ‘정교일치’를 주장했어요. 정치와 종교의 통합이에요. 즉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된다든지 아니면 근본주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가 되도록 한다든지 그것을 국교로 정해야 된다든지 하는 그런 노력들이 있었죠. 그런 것을 ‘신정주의’라고 말하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것을 법제화하고 이론화 해야 된다 라는 주장이죠.

때로는 이러한 극단적인 종교의 흐름도 있지만 정반대로 좌익으로 가면 신을 부정하면서도 인간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 혁명을 해야 된다 이런 주장도 있죠.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런 입장까지도 수용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죠. 여러분 그러나 혁명이란 무엇입니까. 루이 16세 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왕비였던 마리 앙뜨와네뜨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시녀에게 물었어요. “요즘 바깥세상이 시끄러운데 혁명, 혁명 하는데 도대체 혁명이 뭐야?” 그랬더니 그 시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예, 마마. 혁명이란 간단합니다. 제가 왕비가 되고 마마께서 제 시녀가 되는 것이 혁명입니다.” 정답이죠. 혁명을 이룬다 하지만 그 사회 속에 여러 모양으로 차별이 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정치적 입장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성경을 읽어보니까 헤롯에 대해서 ‘여우’라고 불렀어요. 비판적이었어요. 그러나 이 혁명이나 또 정교일치에 신정주의, 이런 것도 비판하셨어요. 왜 그러냐. 정치란 근본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죠. 선거할 때 보면 다 내가 바로 대통령 되기에 가장 적임자다 라고 정말 얼굴도 붉히지 않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긍정적으로 자기만 얘기하면 그것도 그저 못이기는 척하고 들어주겠는데 상대방 후보에 대해서 비난하고 깎아내리지 않습니까.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죄 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자리가 정치하는 사람들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그만 명예욕에 끌려가지고 정치판에 들어갔다가 얼굴에 먹칠을 하고 나오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므로 어떤 정치제도라도 절대적으로 옳은 정치는 없는 것이죠. 하나의 상대적 비교일 뿐이죠. 불완전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삼자 그리고 그 분을 쫓아다니고 몰려다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는 것을 거부하셨어요. 많은 관중들의 그 환호에 귀 기울이지 않으셨어요. 이적을 베푸시고는 얼른 그들을 떠나서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셨다. 왜 기도하셨겠어요. 대통령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주위에서 부추기는 사람들 때문에 자기판단이 결국에는 흐려지는 거예요. 훈수 두는 사람, 3자들의 눈으로 보면 안 될게 빤한데도 그게 아닌 거예요. 예수님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적을 보고 환호하는 소리에 마음이 흔들리실까봐 조용히 홀로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옆에서 더 날뛰고 흥분하는 제자들과 자기를 분리시키셨어요. 그분은 오히려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던 방법을 택하셨어요. 고난 받는 종으로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가셨어요. 그리고 부활하셔서 오늘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주가 되셨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셔요.

가이사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 가이사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또 하나 제시한 나라가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셨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을 보면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같은 갈릴리에서 한평생 고기잡이하는 어부들도 있었습니다만, 제법 글도 배웠던 마태 같은 세리들도 있었어요. 세리는 헤롯당 같은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 제자 중에는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죽이는 ‘셀로딘’, 열심당원도 있었어요. 또 중간에서 고민하는 빌립 같은 지식인들도 있었어요. 계층과 이념과 모든 성향을 다 불문하고 누구든지 예수님은 다 제자로 안으셨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3년의 공생애를 통하여 그리고 십자가사건을 통하여, 부활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어요. 보여주셨어요. 우리는 딜레마가 있는 거예요. 가이사의 나라에 분명히 살고 있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 앞에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과제가 있는 거죠.

며칠 전에 로마 교황청에서 운전자를 위한 십계명을 발표했어요. 1년에 120만 명씩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운전자들에게 제발 이렇게 운전하라 했어요. 몇 가지를 보니까, 음주운전 하지마라. 그리고 과속하지 마라. 그리고 자기 차가 좋은 차라고 뽐내면서 과시하지 마라. 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돌아봐주라. 또 가해자와 피해자는 그 후에 좋은 기회를 가지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져라. 그리고 운전하기 전에는 반드시 기도하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그렇게 운전하며 살아라. 제가 언젠가 카이로의 이집트를 들렸어요. 아이고, 얼마나 복잡한지 몰라요. 그래서 그랬나요, 어느 책자를 보니까 카이로에 처음 온 여행객을 위한 운전 십계명이 있더라구요. 거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첫째, 남 생각 절대마라. 두 번째, 철저하고 단호하라. 세 번째, 너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분명히 알려라. 네 번째, 크락션 사용을 주저하지 마라. 다섯 번째, 빨간불에 서지마라. 여섯 번째, 파란불에 가지마라. 일곱 번째, 일방통행 믿지 마라. 여덟 번째, 경찰수신호 믿지 마라. 아홉 번째, 길 건너는 사람 예고 없다. 열 번째, 첫째도 방어운전, 둘째도 방어운전. 저는 가봤기 때문에 이거 맞더라구요. 뭐 사람하고 차가 막 엉켜가지고 다니니까 우물쭈물하다가는 사고 납니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이에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오늘 우리의 출발점은 다시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런데 여기 가운데 접속사가 있어요. 헬라어로 ‘카이’라는 접속사에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카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 카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영어로 and 라는 의미도 되지만 but 이라고 하는 의미도 돼요. 그것을 만약에 그냥 and로 읽을 때 ‘그리고’ 라고 읽으면 초점이 주로 앞에 놓이게 돼요. 정교분리.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러나’로 해석해야 된다. 가이사의 질서가 있어요. 그 질서 안에서 그 셋돈을 사용하는 사람들. 또는 때로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거부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선택하라’ 이렇게 말씀하셔요.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들에게는, 셋돈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므로 그 돈을 쓰는 사람들은 가이사의 질서 속에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 질서에 들어가서 살아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우리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산상수훈’이잖아요. 그러나 이 산상수훈은 말하자면 종말론적 윤리에요. 오늘 현실에서 그 산상수훈을 순진하게 그대로 내어민다, 그건 문제가 심각한 거죠.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다음에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순진하게 시행착오를 겪을까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어떤 두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지난 주일에 교회 앞에서 돈지갑을 주웠는데 빽빽하게 빳빳한 화폐가 그득 있던데.” 친구가 묻습니다. “그래서 그거 신고했나?” “아니 아직 못했어. 이게 도대체 기도의 응답인지, 악마의 유혹인지 결론을 못 내렸단 말이야.” 우리가 그런 상황이 많죠. 그러나 이것은 도둑놈 심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을 때에 완성되는 그런 세계에요. 사실 산상수훈의 그 윤리는 우리가 죽을 때에 이루어질 윤리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내 마음에 임하셔서 일하시는 이 자리도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요. 예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시간이에요.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주님 앞에 지혜를 얻어 순종하는 시간시간마다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어떡할까요.

시대를 이끌어가는 라이프스타일이 있어요. 1980년대에는 ‘여피’라고 그랬어요. 1960년대에 '히피'들이 등장했잖아요. 전쟁에 빠져있는 기성질서를 거부하고 자유를 구가한 히피들. 그래서 1980년대는 여피라고 그랬어요. 여피라는 것은 ‘Young, Urban, Professionals’ 그러니까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 전문직 고소득층들. 이런 사람들이 80년대 하나의 시대 모델들이었어요. 1990년대 가니까 ‘보보스’라고 그랬어요. 보보스라고 하는 것은 하나는 ‘Bourgeois, 또 하나는 ‘Bohemian,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아주 실리적이면서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겠다 라고 하는 디지털 시대 엘리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어요. 최근에는 ‘욘족’이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YAWN(Young And Wealthy but Normal), 젊고 부자지만 검소하고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그래서 대표적인 모델을 누구를 꼽느냐면 바로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잖아요. 세계 제일의 갑부잖아요. 이제 자기는 은퇴한대요. 그리고 이제까지 번 돈을 다 자선재단에다 넣고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나라의 어려운 사람들을 어떡하면 도울까 하는 것을 깊이 연구해서 한평생 그 일을 하겠다. 바로 지난 제헌절에도 영국의 억만장자인 ‘톰 헌터’경이-이제 마흔 일곱 밖에 안 된 사람이에요-19천억 자기 재산을 다 자선재단에다 내어 놓겠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기부하기 위해 오늘까지 돈 벌었다.’ 새로운 시대 흐름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요. 이것이 또한 여론을 일으키고 그 여론이 또한 정치적인 방향도 또한 움직여 나가는 거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복음이요 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그렇다면 오늘 내게 주신 일터에서 내게 주신 일과 주신 은사대로 기쁘게 살고 감사함으로 살고 열심히 살고 지혜를 얻어 살아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서 누릴 뿐만 아니라 건강한 모습으로 살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서 더불어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겠다 라고 꿈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에요. 그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에요.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나라의 어지러운 정치 모습을 보며 저들을 비판하고 현실을 탄식하는 우리들이지만은 정작 우리들 또한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에 매몰되어 살았습니다. 하나님, 국민으로서 우리의 의무를 다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건강과 일터와 가정과 또 자녀를 양육하는 일과, 또 이웃들을 섬기는 이 모든 일들에 생각을 열고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