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구원을 보라[신앙의기초=부활신앙,책=고통은선물이다,벽돌쌓기]/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17:54

070603 구원을 보라

성경본문(개역개정)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4:10~14)

 

여러분도 십계라는 영화를 보신 줄로 압니다. 제 기억에 제가 중학생 때 그 영화를 보았는데 그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은 이미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대목이지만 역시 대단하더라고요. 너무 멋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때 시골 읍내 영화관에 갔으니까 그 영화관은 들어가기만 하면 나오는 시간은 따지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 장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그 긴 영화를 다시 한 번 꾹꾹 참았다가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에요 여러분, 만약에 실제로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이 지금 애굽 군대가 병거를 몰고 쫓아와서 뒤에 보이지 않습니까 앞에는 바다로 가로막혔고.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신 故 강원용 목사님, 우리 한국교회 100년 역사에 한경직 목사님에 버금가는 그런 목사님이신데 그 분의 6.25때 경험담이 있습니다. 6.25 1.4후퇴 이후에 다시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이 남쪽으로 밀렸어요. 평택까지 밀렸지요. 그러니까 이제 통일되나 보다 했던 피난민들이 혼비백산 해가지고 막 부산으로 내리 몰린 겁니다. 전쟁 통에 얼마나 소문이 흉흉합니까. ‘부산도 안전하지 못하다’ 이렇게 된 거에요.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거예요. 그 때 교역자들, 그러니까 목사님과 가족들을 제주도로 피난시키려고 미군부대에서 큰 수송선 하나를 할애해준 것이죠. 그 일을 강원용 목사님이 주관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부둣가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찾아왔는지, 양떼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고 그리고는 배에 올라타기 시작했는데 아수라장, 아비규환이 따로 없더래요. 막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보다 못해 헌병들이 곤봉을 가지고 막 때리는데도 맞을수록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이 배를 놓치면 아마 죽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때리지.’ 그리고 기를 쓰고 막 올라탔다는 것이죠. 강원용 목사님이 그만 그걸 보고 ‘난 죽으면 죽었지 이렇게 하지는 못하겠다.’ 하고 돌아섰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천당을 가겠다고 한평생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부르짖으면서 믿었다는 목사, 장로들이 배에 올라타는 그 모습을 보니 지옥이 따로 없구나. 그의 회고담입니다.

아마 홍해 앞에 막히고 애굽 군대에 쫓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상황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더 절박했을 거예요. 이거는 소문을 듣고도 이 난리를 치는데 저 멀리 군대가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니나 다를까 이스라엘 백성이 심히 두려워하여 먼저는 배운 대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어요. 부르짖었는데 별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눈에 보이는 모세를 향해서 “왜 우리를 이끌어 내가지고 여기서 죽게 하는가. 차라리 우리가 애굽 사람들의 노예로 살다가 죽었으면 더 나을 뻔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는 것이죠. 우리가 거기 서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은 어떠했겠어요.

폴 브랜드라고 하는 의료 선교사가 영국 분인데 인도에서 수십 년간 의료선교를 하고 또 미국에 가서 생활하신 분이에요. 그분의 <고통은 선물이다>라고 하는 책에 재미있는 대목이 있어요. 고통에 대해서 반응하는 게 나라마다 다르다는 거예요. 예컨대 인도 사람들은 아예 체념, 그저 그건 숙명이다 하고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2차 대전을 겪고 런던폭격을 겪었던 영국 사람들은 고통에 의지로 맞선다는 거예요. 질서정연하게 의연하게 맞선다는 거예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고통이 오기도 전에 너무나 두려워한다는 거예요. 너무나 무서워한다는 거예요. 교육이 중요하죠. 그러니까 영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독교신앙이 녹아들어서 그들의 삶의 윤리가 된 것을 우리가 배울 필요가 있죠.

여기 이스라엘 백성이 심히 두려워합니다. 원망하고 분노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때 모세가 말합니다. 아주 놀라운 말을 해요. “너희는 두려워 말라. 가만히 서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듣기만 해도 속이 막 후련합니다. 그러면 모세는 뭐 특별한 게 있다고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 6.25때는 국민에게 안심하라고 하고 정부가 다 살그머니 도망가고 그랬었는데 모세는 도대체 뭘 믿었기에, 자기 용기를 가지고? 어림도 없지요.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모든 사람들은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떠나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장담했지요. 거짓으로 그랬겠어요. 진심이었어요. 그러나 죽음의 위기가 닥칠 때 사람의 용기는 허상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요.

모세가 이렇게 담대한 까닭이 있어요. 뭔가 보고 듣고 확신하는 게 있었기 때문이죠. 갑자기 ‘용기를 내자’ 이렇게 해가지고 될 일이 아니죠. 모세의 지난 80년 인생이 여기 녹아들어 있어요. 모세는 80년의 아주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에요. 왕궁의 생활도 체험했지만 황량한 광야의 생활을 40년이나 했어요. 그래서 나이 80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는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너를 쓰겠다 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안 됩니다 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을 대면해서 만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되겠어요. 보나마나 안 봐도 비디오라고 틀림없이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오 하나님, 나를 만나주시다니요. 내 생명 다해 주님만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할거예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만나도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모세를 보세요. 모세는 차라리 우리보다 똑똑해요. 한순간의 감동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아요. “하나님 나는 입술이 둔한 자입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내가 지난 80년 온갖 것 해볼 만한 것 다 해봤습니다.”라고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이에요.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모세는 인간유형 중에 가장 의심이 많은 스타일이에요. 우울질이에요. 뭐라고 얘기해도 좀처럼 듣지 않아요. 워낙 지식이 많고 자기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그리고 지난 인생에 뼈저린 실패가 있기 때문에 그 실패에 잡혀서 좀처럼 한발을 앞으로 내디딜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끝내 설복시키죠. 모세가 하나님 앞에 돌아설 때까지 하나님께서 이적도 보이시고 가르쳐주시고 끝내는 모세의 마음을 바꾸게 하셔요.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한 겁니다.

사실은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영과 몸이 새롭게 부활할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선물이죠. 그러나 그 부활을 체험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듣고 나의 선입견과 고집과 경험을 겸손하게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부활이 있어야 되요. 모세는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결단하고 나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약속하셨느냐. “내가 너를 보낸다. 마른 막대기 같은 너지만 내가 너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겠다. 그리고 너희들이 모두 다 나와서 이 시내 산에서 다시 나에게 예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돌아와서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그날 그것이 하나님의 증거라고 했으니 믿음으로 붙들 수밖에요. 또 애굽에서 이미 열 가지 재앙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체험했어요. 신앙은 말이죠, 하루아침에 거저 되는 게 아니에요. 벽돌 쌓듯이 하나하나 올라가는 거예요.

지금 저 두바이에 삼성에서 세계 최고층빌딩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최고층빌딩이라도 바닥부터 쌓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 신앙도 바닥부터 쌓아가게 되는 거예요. 오늘의 믿음을 기초로 다시 내일을 쌓는 거예요. 열 가지 재앙을 거치면서 모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약속하셨어요. 유월절의 놀라운 사건을 보여주시면서 “봤지. 내가 너희들을 기필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약속하셨어요. 홍해는 이제 출발일 뿐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죠. 그러니 사람이 자기경험으로 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있기에 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최고의 낙관주의자예요. 한번 깊이 생각해 보셨어요? 죽은 자를 살리시겠다 약속하셨어요. 죽음이라고 하는 말은 인생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게 죽음이에요. 그런데 그 죽음을 바꾸어서 생명으로 되돌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러니 하나님만한 낙관주의자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하늘과 땅같이 다른데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해요. 하늘로부터 출발해야 되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우리 신앙의 기초는 놀랍게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신앙, 이게 우리 신앙의 기초에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현실화되는 것이고 이루어지는 거예요. 내가 뭘 몸부림쳐가지고 얻어낼 수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거죠.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 이런 선물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유는 그거 하나에요.

100달러가 떨어져 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 같으면 낼름 줍겠어요.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라면 얼른 가서 줍겠어요. 그런데 주우려고 하다 보니까 흙이 좀 묻었어요.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에이 기분 나빠. 흙이 묻었네.’ 그러면서 돌아서겠어요. 아니요, 저 같으면 주워서 흙 털고 그냥 주머니에다 넣겠어요. 주우려고 했는데 이게 좀 구겨졌어요. 거기다가 기분 나쁘게 누가 구두로 밟고 갔어요.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어요. 기분 나쁘다고 돌아서겠어요. 아니요, 저 같으면 잘 털어가지고 쓰겠어요. 여러분, 100달러라는 그 가치는 좀 구겨졌다고 상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허물도 많아요. 지난날 부끄러운 일들도 많아요. 구겨졌어요. 사실은 찢기기까지 했어요. 그래도 그 가치는 변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담아두신 가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는 아무리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 자녀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복된 인생으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어떻게 생각하느냐. 늘 내가 나를 판단합니다. 그러기에 실패해요. 내가 나를 판단한다면야 뭐 믿음으로 똑바로 서지 않은 이상에는 결론은 부정적으로 나오게 돼있죠. 비관적이 되죠. 어떻게 자기가 자기에게 만족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보시는 그 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이라 하고 믿음이라 말하는 거예요. 이게 왜 필요하냐.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 흔히 사람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적극적인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거예요. 내가 몸부림쳐서 쌓아 올리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그 적극적 사고방식을 믿음으로 붙들 때 우리는 현실을 이겨나갈 수 있는 거죠. 또 하나, 이 사고방식을 가질 때 우리는 현실을 인내할 수 있어요. 그러나 보세요, 십자가의 그리스도,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많이 배워서가 아니에요. 미인이라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녀인 까닭에 십자가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셔요. 그러니 그 사랑에 부딪힐 때, 우리는 어떻게 되겠어요. 인생을 새롭게 보는 거죠. 긍정적으로 보는 거죠. 그럴 때 우리 마음에 불이 일어나요.

추운 겨울에 말이에요, 일일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보면 예외 없이 드럼통에다가 장작을 패가지고 불을 피우잖아요. 그럼 사람들이 모두 다 모여가지고 불을 쬡니다. , 너무 추우니까. 현실은 그렇게 추운 거예요. 그런데 불이 있으면 사람들은 다 모여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다 끌려오게 돼있어요. 그렇게 끌려 올 때 그 안에서 교제가 일어나고 소통이 일어나요.

제가 지난 수요일 날 Google Earth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지금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회사가 Google이에요. 미국의 대학졸업생들이 Google에 가길 원해요. 주가가치가 제일 높은 회사에요. 검색업체잖아요. 뭐든지 거기다 치면 다 나오잖아요. 어느 나라 말이든지 치면 다 나오게 하는 것이 그 회사의 목표에요. Google Earth에 들어가 평양도 가고요 파리도 가고요 지난 며칠 전에는 이과수폭포에도 갔다 왔어요. 다 갔다 왔어요. 다 둘러봤어요. 한국에서 저희가 살던 집도 다 가봤어요. 어쩜 그렇게 또렷하게 도로, 차 다 보이죠. 제가 얘길 했더니 우리교회 식구들이 눈치도 빨라요, 그 얘기 딱 듣고 집에 가서 당장 실행해요. 어제 제가 만났더니 자기들이 해봤던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청출어람 청어람’이라고 저보다 늦게 알은 사람이 저보다 눈치는 빨라가지고 벌써 제가 하나 또 배웠어요. 저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만 알았는데 가만히 얘기를 듣다 보니까 화면의 단추 하나가 보는 각도를 돌리는 거예요. 자기는 동서남북으로 돌아가면서 봤다는 거예요. 제가 얼른 다시 가서 봤습니다. 이과수폭포를 어제까지는 꼭대기에서만 내려다봤는데 그걸 동서남북 돌리면서 봤더니 그냥 폭포 앞에까지 간 거예요. 소통이에요, 교제에요. 이게 교회의 축복이에요.

우리가 다 연약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약속을 가지고 함께 모여 찬송하고 말씀 듣고 기도할 때 저 사람 받은 은혜가 오늘 내게 주신 은혜에요. 내가 받은 은혜가 또 여러분에게 나누어지는 은혜에요. 하나님께서 그래서 교회를 두신 거예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나와 함께 예배하는 것은 날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새롭게 체험하는 훈련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실 때 “매일 아침 나가서 만나를 거둬라.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를 거두되 하루 분량만큼만 거둬라. 많이 거두면 그 다음날 아침에 남겨둔 것은 다 썩고 냄새가 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욕심이 많아가지고 믿지 않았어요. 욕심껏 거뒀어요. 그러나 어떻게 됐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 먹고 남겨둔 것은 썩어서 냄새가 났어요. 다 버렸어요. 그런데 제6일째 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오늘은 이틀 치를 거둬라.” 왜, 하루치는 오늘 먹고 하루치는 내일이 안식일이니까 주일이니까 그날 먹도록 거둬라. 이틀 치를 거두어서 하루치를 남겼는데 그 다음날 썩지 않았어요. 그리고 “안식일에는 나가지 말고 일을 멈추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려라.” 그랬는데 그것을 못 믿고 안식일에 또 거두러 나갔는데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돈을 벌어야 살죠. 그러나 욕심을 부리진 마세요. 오늘 주신 것으로 만족하세요. 감사하세요.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사세요. 그리고 주일은 주님 앞에 나와서 깨끗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세요. , 지금 세상은 그저 땀 흘리며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예배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고 자유로움을 누릴 때에 비로소 창조적인 생각이 있고 지혜가 있어요. 그 지혜를 가지고 다시 새로운 하루를 새로운 한 주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거죠.

요즘 미국에서 제일 인기가 있고 관심을 모으는 목사님이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에요. 그분이 쓴 책이 <긍정의 힘>이잖아요. 영어제목이 <Your Best Life Now>, ‘당신의 가장 멋있는 인생은 지금부터.’ 지금 생각을 바꾸라, 그러면서 자기 집안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아버지가 굉장히 가난했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요. 가난을 못 벗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열일곱에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했어요. 그리고 날마다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마음에 꿈이 일어났어요. ‘그래. 나도 하나님을 믿고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버려야지. 그리고 나와 내 자식들은 더 이상 가난에 매이지 않게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온전한 복을 받아가지고 누려야 되겠다.’ 이러다가 하나님께서 또 소명을 주셔서 목사가 됐어요. 이 분이 설교를 했는데 글쎄 첫 설교를 하려니 얼마나 긴장이 됩니까. 삼손에 관한 것을 열심히 설교했는데 설교 끝날 때쯤 되니까 이제까지 삼손을 그만 착각해가지고 타잔이라고 내내 불렀다는 게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하긴 삼손하고 타잔이 비슷하잖아요, 생김새가. 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말해요. 그런 어설픈 설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말할 수 없는 복을 주셨다.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말합니다. 아버지가 한평생 그런 복을 받고 살았지만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을 더 넓게 펴고 하나님께 더 큰 복을 기대하겠다. ,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축복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이런 예를 들더라고요. 몇 년 전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미국의 유명한 골프선수를 초청했어요. 좀 나와 함께 휴일을 보내자고. 전용비행기를 보내서 선수를 태워왔어요. 그리고 며칠 함께 골프 라운딩을 했어요. 그리고 일정을 마치고 그가 돌아가게 됐어요. 사례도 두둑이 줬는데 비행기에 올라가기 전에 왕이 묻습니다. “혹시 내가 좀 뭐 하나를 선물하고 싶은데 어떤 선물이 좋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며칠간 제가 받은 환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랬는데 왕이 “내가 당신하고 며칠간 이렇게 골프치면서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는데 이 여행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 뭔가 좀 기억에 남을만한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이렇게까지 왕이 얘기하니 거절하면 이게 실례가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 말합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골프하는 사람이니까 골프채가 좋겠죠.” 그러고는 비행기에 올라 돌아왔습니다. 또 왕이 골프채를 준다니 내내 머릿속에 골프채가 떠나지 않는 거예요. 어떤 골프채를 주려나, 순금으로 만든 골프채를 주려나 하면서 기다립니다. 이제나 저제나 무슨 선물이 오려나 기다리는데 안 오는 거예요. 몇 달이 지났어요. 이제는 다 잊을 만해요. ‘왕이 괜히 실없는 소리를 했나.’ 그런데 편지가 왔어요. 무슨 큰 소포가 올 줄 알았더니 왠 편지가. 뜯었어요.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와 함께 베풀어준 그 시간에 나는 너무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 작은 정성을 보냅니다. 기쁘게 받아주십시오.’ 그리고는 미국에 있는 골프장을 하나 사서 기증서를 보낸 거예요. 골프장을 선물했어요. 평범한 사람과 왕은 생각의 수준이 다른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도 꼭 골프장 하나를 받아야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겠어요. 생각을 바꾸세요. 보는 눈을 바꾸는 순간 평범했던 아내가 왕비에요. 남편이 왕이에요. 생각을 바꾸는 순간 내게 주어진 이 모든 만물은 바로 나를 위해서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에요.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현실에 매어있는지,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고 계획한다고 하는 것이 그저 어떻게 하면 손에 쥔 것을 놓치지 않을까, 그 생각의 뿌리는 두려움이요 냉혹한 현실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었음을 깨달으며 회개하오니, 십자가에 그 아들을 내어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시고 하늘 문을 여시고 지혜를 주시는 주님. 참으로 이런 지혜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보는 눈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활짝 열며 오늘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