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第三埠頭 (신춘문예 당선작)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2. 2. 10:51

"지는 사람만 죽는기라"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혼자말처럼 내뱉았다.

늦가을의 일곱시 반이면, 노랗게 식어가는 태양이 지고 어둠이 한뼘쯤 솟아 오른 때다.

부두로 통하는 철로 위였다.

"죽긴 왜, 부두작업 이삼일 안 나간다기로 죽는단 말이요?"

철은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자기가 좀 끼어 들었기로 밀려난 녀석이 곧 죽어 간다는게 말이 되느냐 말이다.

"그럼 김씨는 왜 싸웃능기요?"

그는 여념없이 몰려 걷는 그들을 따라 가려다 걷어 채어 넘어질 뻔한 몸을 겨우 가누었다. 코안이 아릿아릿하면서 매끈한 수제비가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다가는 내려가는 감촉이 눈물이 날만큼 쓰리다.

"먹기 위해서지, 먹기 위해서"

"못 묵으면 죽는기지 뭐"

"보소, 김씨도 보름이나 않고 났으이 일해야 살것 아닝기요?"

판수가 한 마디 역성을 들었다.

"일해야 산다는 것은 거짓말인기라. 두 달 동안 노임도 못받고 우째 살아왔노"

"그래, 오늘 밤부터 임자는 부두 작업 그만 둘랑기요?"

"와 이라노, 그런 때문에 불쌍한기 노무자 아니가배"

염색한 작업복들이 걷는 저편에는, 부두에 매달린 전등이 기를 쓰고 반짝이며 어둠을 쪼갠다. 그 바로 옆을 텐트를 쳐서 만든 술 가게들이 숨차게 들어 앉아버렸다.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검은 그림자들이 한 무더기씩 드러난다.

"오늘 밤에는 몇 반이나 들어 갈 낀가?"

"콩배 하나라카는데 몇 반이나 들어가겠나?"

철은 핏대를 올려 싸우고 난 뒤,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허전함에 사로잡혀갔다. 지쳐빠진 녀석이 아무 쓸모없는 계집의 나체를 아귀다툼을 하여 빼앗아 눕혀놓은 공허감과 비슷한 것이었다.

"잘 찾아 보레이"

판수가 다가와 소리를 죽였다.

"걸리기만 하면 그기 어디고, 한 상자만 해도 구만환이데이"

"한 개에 얼마씩인데?"

"흰기 삼백환, 국방색이 이백환 아이가. 두 상자면 십팔만환"

흥분한 판수의 눈이 어둠 속에서 고기비늘처럼 새파랗게 빛났다.

"배 안에 있다는 건 확실하나?"

철은 괜히 날뛰는 판수에 싫증이 났다. 번연히 별 도움이 안될 것을 알면서 아슬아슬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하는 '얌생이'는 생각한다는 것만 해도 지긋지긋한 부담이었다.

"털보 글마(그녀석) 유명한 얌생이 아이가. 영어를 몰라서 그런기지, 글마가 있다는데는 꼭 있데이"

한 줄기 불빛이 그들의 얼굴을 활짝 비치며 산돼지의 어금니 같은 플랫포옴을 앞으로 불쑥 쳐 내민 지게차가 작업을 기다리는 노무자를 몰아세우듯 달려들더니 커어브를 돌아 부두 안으로 사라졌다.

철은 가래침을 돋우어 뱉아버렸다. 털보와 공모하기는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털보는 생각만 해도 불길했다.

"구십 육 반! 구십 육 반!"

부르는 소리에 그들은 부두 정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은 증명을 내던지다시피 반장에게 주어 버렸다. 수위인 APP에게 증명을 맡기고 작업표를 받아 오는 것은 반장이 할 일이었다.

싫다. 헤어나고 싶다고 마음 속으로는 몇 번이나 외치면서 육체는 언제나 맨먼저 끌려 들어가 있곤 하는 부두 안은 언제나처럼 건조해 있었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화물 앞에는 총을 맨 경비병들이, 물건을 도난 당해 두들겨 맞거나 영창에 갇힐 수두룩한 가능성만을 앞에 쌓아 놓고 멍청히 서 있었다. 철모에 눌린 목이, 누가 비틀어 놓은 것처럼 창고쪽을 향하고 동작을 그쳐버린다.

거기서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여느때처럼 한들한들 빗자루를 길게 끌며 걸어 나온다. 가랑이는 짧으면서 그 궁둥이 폭이란, 어른 하나를 송두리째 삼키고도 남을만한 펑펑한 회색 바지들을 꿰입었다. 그 바지로 걷는 맵씨란 피둥피둥 살찐 채 병들어 버린 암탉의 뒷 부분처럼 지저분하다. 그 몰골로 터진 밀가루를 쓸어 모으고 그중 얼마씩은 으레 그 바지가랑이 속으로 들어갔다가 흙섞인 수제비가 되어 목줄로 들어오는 걸 생각하면 살이 내릴 지경이다.

철은 맞은 편 창고의 벽에 기대고, 몇 번이나 봐 버린 그림처럼 이런 모양을 보고 있었다. 창고 옆으로 하얀 수건을 쓴 청소부가 또 빗자루를 끌고 걸어 나왔다. 정말 몇 차례고 본 여인 같았다. 그런데 빙긋 웃었다. 흥—.

철은 외면해 버렸다.

우락부락한 얼굴이 야릇하게 비뚤어진 채 웃음을 띠고 줄곧 무엇인가를 강매하고 있는 얼굴과 부딪쳤다.

털보였다. 어느새 판수가 그를 끌고 와 있었다. 철은 털보를 보자 조건반사처럼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증오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털보의 두툼한 손이 종이쪽을 그의 손에 잡혀주었다.

"이것인데 찾아가보면 있을 끼요"

철은 그걸 그냥 호주머니에 꾸겨 넣어버렸다.

"몇 번 햇취랍디까?"

"사 번 햇취라카는데 내 다른데도 찾아볼끼요"

그러면서 털보는 판수를 돌아 봤다.

"니는 말이다. 창고에 남아야 한데이"

"일마는 나를 얼라(어린애)로 아나"

판수가 꽥 소리를 지르자 털보는 코웃음을 치며 절뚝거리는 발을 끌고 자기반 쪽으로 사라졌다. 철은 달리는 미군 트럭에 뛰어 올라 물건을 훔치다가 총에 맞았다는 털보의 넓적다리를 쏘아보며 그놈의 호르라기가 배 안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귀찮았다. 그것은 마침 피곤에 지쳐, 송장처럼 잠들었다가 도르르 끼끼 하는 기다리 중기의 소리,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를 꿈결에 듣게 되면서, ⌜일라 진지드이소⌟하는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때의 기분 같았다. 작업의 의욕도 죽을 용단도 귀찮기만한 순간 말이다. 그러나 철은 언제나 판수가 헐어빠진 작업복을 어깨에 걸치고 문지방에 기대서서,

"자, 나가봅세"

하면 뛰어나와 버리곤 했던 것이다.

"아까 그 판수네 말이다. 털보캉 요래 지낸다는 것, 니아나?"

판수가 두 손뼉을 맞대보였다.

"군인하구 산다면서?"

"아래(전에) 군인캉 산다카제. 그 군인 전속 갔다 아이가, 그 뒤로 찾아와가 칼쌈 났데이"

철은 자기에게도 몇 번이나 추파를 던지던 과수네를 연상했다. 그러한 짓이 필요했을 게다. 그러나 그러한 미소 밖에 띨 줄 모르는 그 여인은 부두만큼 무미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반장이 와서 그들은 창고를 돌아섰다. 그리고 판수가 재빠르게 바꾸어친 노무자와 배 위에 올라가, 노무자라면 모두가 도둑놈으로 밖에는 비치지 않을 코쟁이의 노란 고양이 눈알 앞에 작업표를 내 비치면서 될대로 되어라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반장이 사 번 햇취의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으스므레한 햇취 안은 콩자루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반쯤이나 하화된 콩더미너머로 철 띠로 동여 맨 커다란 상자들이 뾰조롬히 내다보였다. 그는 호주머니 안의 종이쪽을 꺼내보았다. ⌜Whistle 300 EA⌟라고 서투른 영어가 쓰여 있었다. 그는 히죽이 웃으며 찢어 내버렸다.

양쪽 기중기가 가뜬히 콩자루를 실을 빈 다이(臺 )를 다섯 겹씩 내려 놓았다.

"열 두 포씩만 실으시오"

군인 첵커 한 사람이 콩자루에 기댄 채 일어서지도 않고 말했다. 미국군 측 첵커와 한국군 측 첵커가 탤리에 하화된 콩자루의 수효를 기입해서 싸인만 교환하면 소위 군원 물자의 인계 인수가 끝나는 것이다.

"빨리 일하시오"

감독병이 꽥 소리를 지르자 모두들 구렁이처럼 어슬렁어슬렁 콩자루를 들쳐메서는 다이 위에 실었다.

철이도 한편 구석에서 뾰조롬히 내다보이는 상자더미를 다시 한 번 훔쳐보고 콩자루를 들쳐메었다.

"철이 나왔나?"

탤리판을 붙든, 웃음에 포만한 얼굴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 년 전 같이 근무했던 민간인 첵커였다.

"재수없이 콩 작업이야"

그는 헤프게 웃으며 콩자루를 다이 위에 내 동댕이쳤다. 이놈의 콩 작업은 언제나 어깨를 한치나 내려얹게 한곤 했었다.

"와 이래 콩만 들어오노"

노무자 하나가 발악을 하며 내뱉았다.

"이기 다 도레미탕 될끼 아이가?"

또 하나가 능글맞게 응대다. 감독병은 영내의 콩나물국을 연상했음인지 쌉쓰름하게 웃었다. 망할자식—.

철은 특별한 기술자나 되는 것처럼 탤리판을 소중히 붙들고 웃던 첵커 녀석 때문에 밸이 꼴렸다. 그녀석에게서 탤리판을 홀랑 빼앗아 버리면 어쩔 텐가?

지게차가 들어오면서 부두 밖으로 밀려나버린 노무자들처럼, 또 학도병이 들어오면서부터 첵커라는 명칭을 빼앗겨버린 자기네처럼 텅빈 밥통만을 움켜쥐고 부두 밖으로 쫓겨나버리면 말이다. 낡아 떨어져 가는 줄로 그네를 뛰면서 웃어보면 무엇할 것인가? 쓸개 빠진 녀석. — 살아 있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철은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고향의 부모에게 자기가 살아 있다고 막 외치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콩자루는 열 두 포가 되기가 무섭게 기중기는 수월스레 하늘 높이 치켜 올려서는 부두 위에 내려 놓곤 했다. 이렇게 내려진 다이는 지게차가 으르렁거리며 달려와서 그 산돼지 어금니 같은 플랫호음으로 들어 올려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 놓을 것이 틀림 없었다.

철은 이제 친구 따위의 얼굴은 잊어버리고 햇취 구석에 처박힌 상자를 더듬어보고 싶은 생각 뿐이었지만 감독병과 첵커가 보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콩자루를 들어올려 다이 위에 부려 놓는 단조로운 작업은 이제 유일한 즐거움인 대화마저 빼앗아가버리고 철은 콩자루의 무게 밑에서 후즐근히 배어든 식은 땀만을 의식했다. 배에 내려놓은 마지막 빈 다이가 또 치켜 올라가버지자 그는 콩자루 위에 벌떡 나자빠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영원히 떠나지 않을 듯 집요하게 귀끝에 달라붙는 도르르 끼끼하는 기중기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기를썼다. 곧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척추가, 거칠은 콩자루의 감촉 위에서 노곤히 늘어나듯이 느껴지더니 땀밴 내의가 등골에서 찼다. 몸이 쇠약해졌다는 생각이 와락 서글픔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전에 육ㆍ이오, 입대, 부산으로 전속, 제대, 첵커, 부두 노무자..., 여관업을 경영하던 형은 철공소의 직공, 여학생이던 누이는 뜨내기 미용사, 모두 탈선한 기관차들처럼 어딘가에 쳐박혀 버렸다.

그러면서 자기처럼 무엇을 어떻게 서글퍼해야 할지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만 철은 콩자루 쌓인 그 햇취가 그냥 자기 집이라면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 품에 한 번만 더 안겨 봤으면 하고 생각했다. 제발 어떠한 것도 자기를 명령하지 않고, 콩자루 위라도 좋으니 아무도 자기를 간섭하지 않고 누워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 위의 어수선한 소리와 도르르 끼끼하는 기중기의 소리는 다시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다른 노무자들도 지쳤는지 콩자루 위에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냉장선은 안들어 오나? 와 이래 재수 없이 콩배만 들어오노"

누군가가 몇 번이나 한 말을 되풀이했다.

"일마는 뭐라카노, 콩배라도 먹을기 있대이. 아래 콩배에서 비루를 실컷 안마셨나?"

또 하나가 허기진듯 상자더미를 쳐다보며 말했다.

빈 다이가 덜컥 배 안에 내려앉았다.

"뭐, 먹을 게 없나?"

철은 벌떡 일어나 상자 쪽으로 걸어갔다.

"빨리 일하시오"

감독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르라기가 들어 있음직한 상자만을 열심히 뒤져 봤다. 없다. 훨씬 뒤편 어두운 쪽으로 발을 옮겼다. 터진 상자가 몇 개 눈에 띄었다.

종이 부스러기와 대패밥이 수두룩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그는 쓴 웃음을 웃었다. 가벼운 상자를 터뜨러 본다는 것은 옛날 짓이다. 그때는 간혹 라이타 돌이나 재봉틀 바늘이 이런 상자에서 튀어나와 목돈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즘 가볍고 수량 많은 것은 으례 종이 부스러기나 대패밥 사이에서 소중히 싸여 나오는 비행기 부속품 따위로 시장에 가지고 나가 봐야 아무 쓸모없는 것들인 것이다. 이따끔 요염한 계집애의 넓적다리처럼 뾰조롬히 내비치는 런닝이나, 팬츠 따위가 든 병참물자가 터져 나오지만 그것은 배에서 내리기전 몸 수색에서 빼앗기는 게 고작이다.

기껏 노무자가 바라는 것은 배 안에서 먹어 치울 수 있는 통조림이나 비루 따위다. 빠득이 먹고나면 신바람이 나서 부두에 똥을 한 무더기씩 누워놓고 나간다. 사용 변소 하나 없어 아침이면 이 환짜리 변소표를 사들고 초조하게 기다려야 차례가 닥치는 그런 공동 변소에서 누는 기분 따위와는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옛날들을 생각하며 되도록 초조해지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도시 호르라기의 상자가 나타나지 않는데는 맥이 풀렸다. 그는 겸연쩍은 얼굴로 상자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뭐 비루 말인기요?"

"비루가 있다케 봐라. 코쟁이가 안지켜 섰나"

"뭐 있등기요?⌟

"비행기 부속품"

콩자루를 들쳐메는데 철은 와락 울화가 치밀었다. 무엇 때문에 털보 따위의 말을 듣게 되었는지 견딜 수 없었다. 지저분한 자식. 바다와 육지의 경계 지점에서 훤히 트인 바다도, 호화찬란한 도시도, 평생 모르고 빌어먹을 얌생잇꾼! 그는 그따위 녀석의 말을 믿고 있던 자기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증오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턱대고 흥분하기만을 즐기는 판수에게도. 왜 그녀석은 보통 부두 작업자의 최후가 으례 그렇듯 병들어 죽거나 칼맞아 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어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요 며칠 전에도 사 부두에서는 술에 취해 바다 위에 지은 변소에 갔다가 빠져 죽은 시체를 그 다음 날에야 찾아낸 일이 있는 것이다. 모오타 보우트로 물건을 훔치러 부두에 저어 왔다가 총맞아 죽는 수도 흔히 있다. 이 지저분한 번지수에 사는 몰골치고 그렇게 안 죽는 사람은 없다. 털보 녀석도 미군 추럭에 뛰어들었을때 총맞아 죽어버렸어야 했을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쓸모없는 녀석들이다. 그저 눈이 벌개져서 부두에만 들어붙는다. 고작해야 가대기(등짐)나 얌생이에 생명을 내걸고 아귀다툼이다.

"몇 다이 올랐소?"

첵커가 지쳐빠진 소리를 쳤다.

"그 뒤로 말입니꺼? 서른 다섯 다이 올랐심더"

배 안에 다이가 없어지자 또 벌떡벌떡 나자빠졌다.

"김씨요, 김씨요, 이거 뭔기요?"

한 노무자가 머리맡에 벤 상자를 두들기며 말했다.

"챠라(집어 치워라), 삼백 개나 든기 아이가"

"공군 물자란 말이가?"

철은 소리나는 데로 가 보았다.

'Whistle 300 EA'란 영어를 읽을 수 있었다. 철은 반갑다기보다 어처구니없었다. 똑같은 상자가 두 개 거기 굴러 떨어져 노무자들이 베고 있었던 것이다.

"뭔기요?"

철의 아연한 모습을 그들이 지켜보았다. 그는 곧 인지를 입으로 가져가며 후닥닥 주위를 살폈다.

"뭐요, 뭐, 빨리 일하시오"

감독병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빈 다이는 내려와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털보였다. 절룩거리며 콩자루 앞으로 걸어 와 웅숭그린 털보는 가슴팍에서 통조림 하나를 꺼내 놓았다.

"뭔기요?"

노무자, 첵커, 감독병 할것없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누군가가 재빠르게 깡트는 것을 내놓았다. 샛뇨란 파인애플이었다.

"야!"

일제히 함성이 올랐다.

"이 배에서 나온 것인기요?"

털보가 훌쩍 물을 들이마시고는 내밀었다. 대여섯의 거친 손이 한테 몰려 들었다. 몇 개의 새까만 손들은 벌써 통안에 쳐박혀 있었다.

"놓이소, 놓이소"

깡통이 저편으로 날렸다.

와—와—또 떨어진 작업복들의 물결이 저편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파인애플 조각을 서너개의 손이 단번에 한옹큼씩 끌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부어놓고 먹읍세"

깡통을 부을만한 넓은 그릇이 없었다. 그러자 어처구니없이 보고 섰는 철을 떠밀고 깡통은 한편 구석 위에 놓인 상자로 치달았다. 철은 깜짝 놀라 상자를 햇취 맨 뒤로 팽개쳐버렸다. 파인애플은 지체하지 않고 콩자루위에 쏟아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산산히 흩어져 없어져 버렸다. 첵커도 어처구니없는 모양이었다.

"이 배에서 나온 거요?"

"가 보이소, 삼번 햇취, 제일 아랫단입니데이"

"그기 와 이제야 나왔노"

목줄까지도 소식이 없는 파인애플은 군침만을 돌게 한 모양이었다.

"야, 그기 와 여긴 없노"

창백한 얼굴들이 볼그레하게 홍조를 띤다. 멋없이 시들어져 버린 흥분속에서 삶의 보람들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콩자루가 거뜬히 어깨 위로 올라갔다가는 다이 위로 나동그라졌다.

"지금도 많아요?"

감독병이 털보에게 물었다.

"한 상자를 맨 밑에 내려 논긴데 곧 없어질게요"

감독병이 햇취 위를 쳐다보았다. 콩을 실은 다이는 공중에서 멋들어진 곡예를 하면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람들 갱장하제?"

노무자 하나가 물었다. 털보는 대답 대신 담배를 꺼내어 하나를 철에게 권하였다. 까딱거리는 엄지가 눈에 띄었다. 털보는 담배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서는 철이가 일러준 상자 옆에 쭈그리고 앉아 답배에 불을 붙였다. 배 안에서는 담배를 못피우게 되어 있다. 코쟁이나 감독병에게 걸리면 크게 경을 치고 마는 것이었다. 이런 배 안에서 담배를 피울 때는 누구나 그렇게 하듯 철이도 천연스럽게 털보 곁으로 가 쭈그리고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틀림 없는기요?"

털보가 상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틀림 없소."

털보는 자기 앞 콩자루를 두 포만큼 들어 뒤로 내던지자 그 위에 쭈그리고 앉아 또 하나의 콩자루를 끌어당겨 서슴지 않고 호주머니에서 손칼을 내자 콩자루의 실을 잘랐다. 양손으로 실을 뽑으니 콩자루는 시원히 터져 콩이 쏟아져 나왔다.

"상자 가아(가져) 오소."

털보는 명령하듯이 말했다. 노무자들이 흘깃흘깃 이족을 쳐다보는 것이 털보의 옆구리 사이로 보였다. 철은 바른 손에 칼을 든 채 떡 버티고 앉아 있는 털보 앞에서 떠 맡겨져버린 부담 같은 것을 느꼈다.

"빨리 가아 오소."

털보는 성급하게 쏘아 부쳤다. 철은 끌리듯 허리를 길게 뻗어 상자를 붙들고 재빠르게 옮겼다.

그러나 정육면체의 상자는 콩자루 안으로 들어가질 않았다.

털보는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칼로 상자를 도려팠다. 헌병들이 차고 있던 흰 호르라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을 삼분지 이나 비운 콩자루 안으로 쏟아 넣었다.

"또 하나 가아 오소"

떼어다 붙인 것 같은 털보의 볼때기 근육이 씰룩거렸다. 철은 얼마나 담배를 빨아댔는지 기침이 터져나왔다. 그는 가슴을 움켜 쥐고 꼬부라졌다. 가슴윗편이 쓰리면서 통점이 목줄을 타고 길게 내려갔다.

"뭐하는 기요?"

여전히 칼을 든 채 재촉하는 털보의 눈에는 살기마저 등등했다. 철은 정신없이 상자를 옮겼다. 상자가 터진다. 호르라기가 쏟아져 들어간다. 철은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풀어헤쳐진 끈을 네 겹으로 해서 콩자루를 묶었다. 이렇게 강박적으로 물건을 훔쳐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것은 쫓기는 악몽의 연속만 같았다. 누군가가 어깨를 쳐 그는 소스라쳐 고개를 들었다.

감독병이었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철은 이것이 악몽이라면 빨리 깨어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뭐요? 끌러봐요"

눈매는 사뭇 날카로왔다.

"그럴끼 뭐 있능기요, 다 아는기 아닌기요?"

털보가 매달렸다.

"끌러봐요"

철은 끈을 풀었다. 첵커와 노무자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야 거기 참한기 있데이"

"이기, 비쌀기다"

군침들이 도는 모양이었다.

"일마들, 구경인 줄 아나? 빨리 안갈래?"

털보가 새빨간 눈을 치떴다.

"작업표 내쇼"

감독병은 철의 작업표를 받아들자, 털보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하나만 있으면 될끼 아닌기요?"

"빨리 내라니까"

"이기 누가 한긴데 내보고 조르는기요?"

감독병은 한참이나 털보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돌아서며 노무자들에게 악을 썼다.

"빨리들 일하시오"

철은 일어서 버렸다.

능글맞게 웃으며 보고 있는 민간인 첵커 앞에서 여지없이 도둑놈이 되어버린 자기 자신이 한없이 비굴하기만 했다. 이 일은 이 일대로 놔둬버릴 밖에 없었다. 그는 시간이 끝나기까지 콩자루를 메는 의무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아무도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털보가 감독병과 어떤 수작을 하건 아랑곳할 바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악몽에서 깨어난 시원함까지 느꼈다. 그 시원함이 불규칙한 심장의 고동을 가라앉히면서 기중기의 소리, 어수선한 발자국소리가 일과마냥 되돌아 왔다. 어지럽히는 갖가지 환상들! 아, 이러고 싶지 않다. 그는 무엇엔지 모를 혐오를 느꼈다.

"김씨, 고된 모양인데 좀 누우시소"

얼마만에 반장이 동정하듯 말했다.

"얼굴이 되기 못됐네. 저녁이나 묵었능기요."

그는 굳어진 눈까풀을 치껴뜨고 말한 편을 노려보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그는 조급히 달려가 콩자루 위에 쓰러져버렸다.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러자 정신은 말똥말똥하게 되살아났다. 지쳐빠진 것은 육체뿐이었다. 죽는 것은 아닌가보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생각해 본 일일 있을까? 사는 것만큼 죽는 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는 자기가 현재 엉뚱한 자리에 놓여져버린 것 같다는 것만을 의식했다.

숨을 쉬는 것만이 사는 것은 아닐 게다. 아름다운 모든 것을 망각의 무덤 속에 묻어버리는 사막도 심호흡을 하면서 달려볼 만한 공간은 있다.

그런데 자기는 왜 이 햇취 안에서 담담해야 하는가? 부두 작업이 하고 싶었을까? 이렇게 쓰러져버리고 싶었을까?

남들이 부두에 나가면 자기도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훔치면 자기도 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쓰러지지 않고 일하면 자기도 쓰러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엉뚱하다고 생각하는 현재의 위치만큼 그는 이 모든 것을 싫어하고 저주해 왔다는 것 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왜 이녀석들은 헐어빠진 염색한 작업복에 몸을 감고 움직이고만 있는 것일까?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 감독병이 작업표를 불쑥 내밀었다.

"갈 때 같이 나갑시다. 약속한 장소는 알고 있소?"

철은 작업표를 받아들고 어리둥절한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주위를 살펴 봤다. 털보는 구석에 헛김을 뱉으면서 세워져 있어야 할 호르라기의 콩자루와 함께 보이지 않았다. 호르라기가 다이에 실린다. 햇취 안에서 신호한다. 판수가 그걸 붙들 게다. 판수는 그걸 부두 밖까지 가지고 나가야한다. 호르라기를 판다. 돈을 나눈다. 감독병과 첵커도 한 몫 낀다. 자기는 인질로 붙들려있다. 노무자들에겐 막걸리를 나누며 성공의 축배를 올리면 된다. 너무나 단순했다.

철은 지쳐빠진 자기의 육체만이 어처구니없이 느껴졌다.

열 두 시 휴식시간이 되어 그들은 같이 배에서 내렸다. 기중기의 소리가 그쳐버린 거무스름한 선체는 반짝이는 전등을 빼고는 일시에 숨을 거둔 시체처럼 고요를 지켰다. 빈 다이를 정리하기 위해 으르렁거리는 지게차만 사라지면 이제 부두도 한 시간 동안 죽어 나자빠질 것이었다.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 콩더미위에서는 두세명의 청소반네들이 딩굴고, 밑에서는 쫓기듯이 다급하게 호주머니에 콩을 쑤셔넣는 노무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부두에서 빠져나오자 철은 어둠 속에 묻혀 버린 간척지 위의 마을을 봤다. 움집 옆에 또 움집을 달아내고 그 옆에 또 움집이 늘어붙은 선인장 같은 가대깃군의 마을은 죽음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우선 숨을 크게 쉬고 싶었다.

"시간 없소. 빨리 갑시다"

감독병의 거무스름한 모습이 진저리나는 빚장이처럼 거기 서 있었다. 그는 털보와 미리 약속한 장소로 그를 끌고 갔다. 덩그렇게 앉았던 판수가 반갑게 일어섰다.

"니 욕봤제?"

그러면서 감독병을 보자 비굴한 웃음을 띠며 꾸벅 허리를 굽혔다.

"털보한테 다 들었심더. 그기 다 그런기 아닌기요."

"그 사람 안왔소?"

감독병은 선 채로 말했다.

"곧 올끼요. 앉으이소"

판수는 술을 청했다.

"자, 한 잔씩 합세. 뭐라케도 술이 제일인기라. 마느라가 있나, 집이 있나, 우리도 집있고 돈있으면 이는 안살끼요"

판수는 술을 주욱 들이키고 새까만 손으로 깍두기를 주워삼켰다. 그러나 철은 한 치도 떼지 않고 다가앉은 감독병 옆에서 숨막히는 압박감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멍청히 판수를 쳐다보면서 자기는 왜 판수처럼 되어버릴 수 없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봤다. 이제 털보도 돈도 다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돈을 벌어야 산다고 그는 노래 부르듯 한다. 가대기나 얌생이에 그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이다. 그러나 훔치고 나면 그뿐이다.

넋빠진 백치처럼 술이나 마시고 계집질이다.

"그사람, 어디 갔소?"

감독병은 초조한 모양이었다.

"인자 막 나갔소, 곧 올기요"

판수는 또 술을 들이켰다.

"자, 드시소. 이렇게 한 잔씩 들고 홀하우스(사창굴)에 가는기라. 팔자가더러버 ×도 삼십 년이 다 돼도 마누라 맛도 모르고 안사나?"

"털보 그애 새버린 게 아니야?"

철도, 털보 그 녀석이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지 모른다고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글마 절뚝발이가 어디 가겠노? 평생 부두에서 벗어날끼가, 지가"

"그건 안가지구 나왔나?"

"청소반네가 가아 올끼다. 앉아 술이나 마셔라"

철은 일어서버렸다. 판수는 술만을 들이키고 있다. 털보는 돈을 호주머니에 넣기 위해 정신이 없을 게다. 자기는…… 털보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이 거머리 같은 감독병을 우선 처치해버려야 한다.

"어딜 가나?"

"내 털보를 붙들고 올게"

천막 밖으로 걸어 나오자 옷소매에 매달리다시피 감독병이 따라나섰다. 그는 우뚝 멈추어 서버렸다. 죄수처럼 끌려 또 털보를 찾아 나서기는 싫다고 생각했다. 돈도 싫다. 판수가 술을 마시건 털보가 잔꾀를 부리건 자기는 그러한 것에서 자유롭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뒤를 돌아봤다. 감독병은 어디로건 빨리 자기를 끌고 가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빨리 털보를 만나야겠다. 돈을 분배받아 이 감독병을 몰아내야 되겠다.

그러나 어디서 털보를 만날 것인가? 철은 털보를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 같은 불안감까지 느꼈다.

부두 정문에서는 청소반네들이 판자 조각을 한옴큼씩 묶어 쥐고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맨 처음이 과수네였다. 마구 아양을 떨며 판자 묶음을 들고 도망쳐 나왔다. 몸 수색을 하게 되어 있는 여자 APP는 웃고만 서 있었다. 뒤에 따라 나오던 두 여인들은 덩달아 달려나왔다.

"안돼요, 안돼"

남자 APP가 부두 밖까지 달려나와 과수네의 나무 묶음만을 붙들고 실랑이질을 했다.

과수네가 눈을 흘기고 나무 묶음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철로 위로 걷는 두 여인을 쫓았다. 철이도 천천히 그 여인들의 뒤를 밟았다. 그 평평한 바지가랑이 속에 나무 묶음을 미끼로 무사히 빠져 나온 호르라기들이 앙큼스럽게 들어박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여인들은 판수가 들어 앉았을 술집은 돌아보지도 않고 한없이 철로를 타고 올라가고만 있었다.

얼마 쯤 걷자 감독병은 초조했음인지 철의 팔을 끌었다.

"시간이 없겠는데…… 당신 증명 내시오. 돈과 바꿔드리죠"

철은 냉큼 증명을 내주었다. 홀가분한 소매사이로 싸늘한 밤바람이 스며들었다. 으스스 떨리는 허전한 바람이었다. 그는 한없이 뻗어버린 어두운 철로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어둠만 지나면 폭발할 아귀다툼의 뇌관들을 저마다 간직하고 잠들어버린 철도 연변의 마을 집들은, 밤을 새는 역 구내의 짐짝들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털보 따위 생각은 말자—.

그러자 으스스 몸이 떨렸다. 여인네들은 철로를 벗어나 마을 안으로 꼬리를 감추었다. 그는 갑자기 양손에 힘을 주며 여인들의 뒤를 쫓았다. 털보는 혼자서 돈을 쥐려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내일이던 오늘밤, '자 나가봅세'하면 증명 없는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 적어도 부두의 배설물이 그득 찼을 짐짝들 사이에서 주인 없는 개처럼 눌려버리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약방 뒤를 돌아 여인들은 가위 이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앞에서 멈추어 섰다.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문고리를 젖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빨리듯이 들어간다.

"됐나?"

굵직하면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히 털보의 목소리였다. 철은 바싹 다가서 세 번째 여인의 뒤를 이어 문안으로 들어섰다.

"이기 누구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인의 소리를 듣고 그는 덤덤히 서 있었다. 촛불을 들고 선 털보가 아니꼬운듯 훑어보고는 말없이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절뚝거리는 털보의 뒤를 펑펑한 바지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자 그는 도망해버리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자기도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배에 참여해야 한다. 이 층은 두 간 방으로 되어 있었다. 털보가 벽에 낚시처럼 걸려 있는 철사 끝에 초를 꽂자 여인들이 들어섰다. 그도 들어서려 했다. 그러자 과수네가 미닫이 문을 붙들고 막아섰다.

결국은 들어설 방문을 막아 선 여인의 팔목은 귀찮기만 했다. 그는 손목을 잡고 밀었다.

"와 이카노. 이 사람이 미쳤나? 와 이래 손목을 잡는기요?"

앙칼진 목소리에 그는 손목을 힘있게 치며 방안으로 몸을 들이 밀었다. 문짝이 소리를 내고 여인들의 머리 위로 무너졌다. 털보의 안색에 순간 변화가 스쳤다. 그러나 발악을 하며 달려드는 과수네의 어깨를 두둘겨 그들은 옆방으로 사라졌다.

기울어진 초는 보기 흉하게 녹아있었다. 그 깜박거리는 촛불 가까이에 털보의 것인 듯한 염색한 검은 잠바가 퇴색한 채로 한편이 무거운 듯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이윽고 털보가 나타났다. 엉거추춤 서 있던 아낙네들이 옆방으로 사라졌다.

"옛다, 가아 가라"

털보가 만 환 뭉치를 내밀었다.

"그게 뭔데"

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돈 아이가"

그는 털보의 손을 홱 뿌리쳤다. 돈 뭉퉁이가 헐어빠진 다다미 위로 굴러 떨어졌다. 더 이상 이용당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새끼, 작단 말가?"

털보가 치렁치렁한 핏줄을 드러내고 다가왔다.

"비켜, 비켜서란 말야"

철은 발악을 하듯 소리치며 양손으로 털보의 얼굴을 가로 막았다. 보는 것만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부두 전체가 그 작은 방안에 몰려들어버린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철은 한 걸음도 이 방안에서 물러 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걸어 와버린 것이다. 이제 어디로 또 갈 곳이 있단 말인가?

철의 온 살덩이는 오한에 떨고 있었다.

"뭐 이런기 있노. 니 죽고 싶나?"

털보는 살기 띤 눈을 치뜨고 마구 철의 턱을 흔들어대며 미닫이까지 그를 육박했다. 동심원을 그리며 울컥울컥 번져가던 분노는 마침내 그를 삼켜버렸다. 그는 마지막 한걸음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발을 들어 힘껏 털보의 아랫배를 차 던졌다. 비실비실 물러나던 그는 쿵 하고 벽에 엉덩이를 찧었다.

털보는 일어나기가 무섭게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정신 없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걸려있는 잠바 호주머니에서 새파란 칼을 뽑아들었다.

"이새끼, 한번 죽어볼래?"

철은 정신이 번쩍 들어 털보를 노려 보았다. 도르르 끼끼하는 기중기의 소리,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 저녁 먹으라고 깨우던 아주머니의 소리, 이 모든 것이 순간 머릿속에서 복잡한 전자의 궤도를 그리며 사라졌다.

싸워야 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구역질 날만큼 싫은 영원한 부담 같은 것이기도 했다.

둘은 불꽃을 튀기며 노려 보았다.

털보가 한 걸음 다가서자 철은 와락 뛰어들었다. 유리창이 떨어져 나갈 듯이 흔들린 뒤 둘이는 한 덩어리가 되어 나동그라졌다.

철은 이내 털보의 육중한 체중을 갈빗대 위에 느꼈다. 시퍼런 칼이 번쩍 치켜 올라갔다. 철은 눈을 감고 기다렸다. 차라리 이 새파란 칼날이 줄 감촉은 오히려 홀가분한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기다리는 감촉은 오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눈을 떴다.

털보는 칼끝을 이마 위에 대고 이지러진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새끼, 맛 좀 볼래?"

씨근덕거리며 털보는 칼끝으로 이마를 후비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뒤꼬며 털보를 차던지고 벌떡 일어섰다.

털보와 칼이 나동그라졌다.

그는 힘있게 칼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황급히 달려드는 검은 그림자에 몸을 던졌다. 살덩이가 찔린 칼자루는 무겁게 흔들렸다. 철은 칼을 붙든 그대로 다다미 위에 쓰러졌다.

다정한 사람모양 털보의 몸 위에 찰싹 달라붙은 철은 두 손으로 칼자루를 안은 채, 이러고 싶지 않다 이로고 싶지 않다고 울고 있었다.

(一九五九年한국일보신춘문예당선작)

 

 

심사소감:

작년에는 가작 한 편도 뽑을 도리가 없었는데 당선작을 내게 된 것이 기쁘다. <第三埠頭>를 당선작으로 결정함에 있어서 朴花城 여사나 黃順元 씨나 필자나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第三埠頭>가 당선작으로 뚜렷한 [새것]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만한 문장력과 저력이 있다면 충분히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데 합의를 보았다.

우리는 완전무결한 작품도 좋지만 대성할 수 있는 작가를 찾아내는 것도 우리의 임무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李無影>

 

 

 

출처 : 낮은 문턱
글쓴이 : 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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