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암 덩어리(단편)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2. 2. 10:54

 

1.

새벽 5시인데 명철의 방에서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

“잠 좀 자게 놔두세요.”

“뭐라고? 너 새벽기도 안 나가겠다는 거야?”

“예, 안 나가요.”

“이 자식이”

아버지 고지식이 아들의 뺨을 때리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왔다. 순복은 허겁지겁 아들 방으로 뛰어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아들이 마구 악을 쓰고 있었다.

“나는 안 나갑니다. 종교는 자유 아닙니까? 왜 아버지는 내가 싫다는데 이렇게 강요하는 겁니까?”

“너 말 다 했어?”

아버지의 손이 또 올라가는 것을 순복이 필사적으로 막아서며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고2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공부에 시달리는 애를 이렇게 몰아세우면 어쩌자는 거예요. 나도 명철의 새벽기도는 반대에요.”

“엄마가 이렇게 물러 터져서 어떻게 장남을 신앙으로 기르겠다는 거요. 어릴 때 습관이 평생을 간다는 말을 못 들었어요? 예수님께서도 새벽 미명에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가셨어요.”

순복은 갑자기 뛰어와서인지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와서 가슴에 손을 대고 쭈그려 앉았다.

“왜 그래?

“괜찮아요. 가슴이 갑자기 아파서요.”

“그러게. 너무 아들을 감싸고 대들지 말아요.”

하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기도시간이 늦었는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집회시간에 늦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교회에 가는 동안 순복이 낮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처음 당신을 교회로 인도할 때 언제 그렇게 강요한 일이 있었어요? 주님의 인도를 바라서 오래 참고 기도하며 기다렸잖아요. 지금 당신은 많은 교인이 존경하는 안수집사며, 구역장이예요. 당신도 나처럼 아들을 기다려 줄 수 없어요?”

“잠언에도 매를 아끼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나는 하나님이 그에게 그를 방자한 대로 내버려두는 무서운 형벌을 내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요.”

 

고지식은 결혼하기 전에는 기독교를 극렬히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기독교인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었다. 무슨 선거 운동원처럼 어깨에 띠를 띠고, 행인을 붙들고 전도지를 뿌리며 들러붙는 것이 싫었고, 아파트의 편지함에 전단지를 함부로 넣고, 또 벨을 누르며 가정을 수시로 방문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그에게 처음으로 눈을 끄는 한 여학생 민순복이 기독교인이었다. 대화를 해도 응대를 하지 않은 그녀 때문에 속이 탔다. 그러다 그녀가 다니는 교회를 한 번 기웃거린 것이 화근이었다. 교회에서 어떻게 그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았는지 그에게 계속 전화를 해 오고, 또 ‘이슬비 전도’라는 엽서를 매주 보내와서 정말 기독교는 껌딱지 같다는 생각을 하고 치가 떨렸다.

뒤에 알았지만 교회에는 새로 출석한 교인에 대한 전략이 있었다. 한번 미끼를 물었다면 놓지 않은 진돗개 전략, 한번 찔러보고 안 익었으면 다시 삶아서 찔러 보는 고구마 전도 등 다양한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전략의 그물에 그가 걸려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당면한 문제는 놓치기 싫은 민순복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자기는 기독교가 저승사자 만나는 것만큼 싫고, 예수를 믿는 그 여학생은 죽어도 놓기가 싫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조언을 구했다. 그 친구의 조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든지 그 여학생을 공략해서 자기가 없으면 못 살겠다고 고백할 만큼 만드는 것이 첫째요, 다음은 자기의 자유로운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녀가 기독교를 배교하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무표정과 무관심 때문에 정식으로 사귀는 일부터 어려워서 불가능한 일같이 생각되었다. 다음 대안은 반기도교냐 그녀냐 양자택일인데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면, 위장 기독교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동안 기도교인으로 살다가 결혼 후 기독교와 결별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그러자 친구는

“위장 기독교인?”하고 코웃음을 쳤다.

“기독교인이 아닌 너를 믿어 주지도 않겠지만 만일 진짜 기독교인 행세를 해서 너를 믿어 결혼까지 했다 하자. 너는 그때부터 코다리 신세가 된다. 내가 장담하건대 너는 5년 안에 진짜 기독교인이 되고 말걸. 기독교는 그렇게 전염성이 강하다구. 잘 판단해서 처신해라.”

5년 뒤, 그가 직장을 갖고 아들을 낳고 기르고 있는 동안 그는 정말 자기가 그렇게 싫어하던 기독교의 골수분자가 되어 있었다. 교회 안에 들어와 보니 기독교가 거부감이 없고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만나는 친구들도 좋았고, 밖에 2,3일 몇 가족과 캠핑을 나가도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첫째, 모이면 술 마시며 세상 근심걱정을 다 끌어안고 불평하며, 욕하,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가? 그런 걱정들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근심 걱정은 하나님께 다 맡기고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어찌 보면 바보같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두려워 말라. 담대하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면, “아멘”하고 따라 다니는 사람들 같았다. 참 기독교인들은 집에서 길들인 짐승들 같아서 야생마 기질이 없고 모두 양순했다. 사실 고지식은 복잡하게 얽힌 세상보다는 그렇게 자기를 하나님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에 맡기며 사는 사람들을 원래부터 더 좋아하도록 태어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에 호감을 갖기 시작하니 새로운 세계에 호기심이 생기고 설교 말씀이 마음에 감격으로 와 닿는 것이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성경의 말씀이 이해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예수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의 피 값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이렇게 말해도 그는 “무슨 개소리야.”하고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귀가 있어도 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귀를 가지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안타까워졌다. 이사야를 하나님께서 선자자로 부르실 때 너무 말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분을 발하며 일러준 말이 생각났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고, 일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라고 이사야를 불러 말씀하셨을 때 “주여, 언제까지 이렇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되물었던 이사야의 심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은 자기도 그렇게 고집스럽게 말씀 듣기를 거부했던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말씀을 순종하기로 했다. 십일조를 바치고 ‘일천번제 헌금’도 바치기로 했다. 봉투 세 개를 만들어 하나는 아내, 아들, 그리고 자기 이름으로 하나님께 번제대신 일천 번 돈을 바치기로 한 것이다. 가족의 안위를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석했다. 수요예배, 금요 철야기도회, 또 교인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기도원에도 갔다. 주일학교 교사도 했으며 여름‧겨울 수련회도 꼬박 꼬박 참석했다. 이제는 교회에서 그를 모르는 교인이 별로 없었다. 이내 안수집사도 되고 한 구역의 구역장도 되어 구역예배 인도도 했다. 구역원들을 너무 잘 챙기고 봉사했기 때문에 전 교회에서 그가 속한 구역은 모범 구역이 되고 모두 그 구역을 부러워하게 되었다. 구역에 주변에 있는 불신자를 참여시켜 새 교인을 육성해서 그 구역은 날로 번창해 갔다. 구역에서 가르치는 교재는 따로 없었고 주일 목사의 설교를 요약해서 반추하여 다시 전하고, 그 말씀으로 토의하고 말씀 적용을 하는 것이었다. 교단에서 만든 구역공과 책이나 다른 유명 목사들이 펴낸 구역인도 안내서 같은 것이 나와 있었지만 이 교회의 목사는 자기의 목회 원칙을 교인들이 일사분란하게 따라주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목사는 수요예배가 끝나면 구역인도자들의 구역인도 교육을 하였다. 그러나 이 고지식 집사는 이 교육에도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여기에 더해서 별도로 교회 홈피에 들어가 다시 목사의 방송을 듣고 정리하여 전달교육을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있는 자들은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씀의 적용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자기는 말씀을 받고 어둠에서 빛을 찾았는데 이 빛은 어둠을 비치는 데 써야 한다. 즉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어야 한다. 자기가 여기서 빛을 비추지 못하고 빛을 숨기고 있으면 자기가 받은 영감까지 잃게 되고, 자기의 받은 것을 남에게 나누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더 큰 은사를 주게 된다.’ 따라서 자기는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깨달은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그는 구역장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말씀 전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교회 일에 몰입하다 보니 직장이나 친구들 그리고 가정사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먼저 아내 민순복은 남편을 교회에 인도한 것을 후회하였다. 시내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녀는 자기 일도 바쁜데다 남편이 무관심하게 버려 둔 아들의 과외 시중을 드느라 너무 힘들었다. 그뿐 아니라 남편은 자기만 교회에 열심일 뿐 아니라 각 교회 집회마다 자기를 데리고 다니려고 했다. 힘들어 쓰러지겠다고 하면, 주님의 일을 하다가 순교하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없다고 새벽이고 저녁이고 자기를 데리고 다니려 했다. 따지고 보면 자기가 전도한 남편인데 남편의 교회에 대한 희생 봉사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교회에만 매달리고 미쳐 있는 것 같아 싫어졌다. 처음으로 교회생활에 회의가 왔다. 정말 교회란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무엇인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열매 맺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신앙에 회의가 오고 자기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초 신자가 된 기분이 되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바울은 말했는데 그렇게 주를 위해 충성하며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가? 그렇다면 남편을 칭찬해 주어야 하고 싫어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남편이 밉고 싫었다.

자기뿐 아니라 장남 명철은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싫어하였다. 남에게 존경을 받으면 뭘 하는가? 아버지는 바로 바리새인이라고 말하며, 자기는 집을 떠나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면 교회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새벽기도와 구원이 무슨 상관인가? 복 받으려고 헌금하고, 순종하고, 봉사하는가? 내 이름으로 일천번제 헌금을 하고 기도하면, 나는 돈 내고 시험 잘 보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 나 아닌 아버지가 낸 헌금으로 내가 대학입시를 잘 보며, 우리 가족이 무병장수하는가? 아버지는 직장에 교회만큼 충성하는가? 아예 교회 목사가 되지 왜 직장과 가정에 소홀 하는가?

이렇게 아들이 아버지와 교회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지금까지 잘 믿었다던 어머니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애야, 한 순간 괴롭다고 아버지와 교회에 대해 불평하지 마라. 믿음은 평생 동안 지켜야 할 일이고, 대학 입학시험은 시기가 있어 지금 네가 최선을 다해야 할 때다. 새벽기도가 어려우면 얼마동안 쉬어도 된다.”

“엄마, 그것이 엄마가 할 소리야? 그러다 싫어지면 정말 새벽기도 안 나가도 돼?”

“그런 뜻이 아니잖아. 대신 엄마가 두 배 열심히 기도할게.”

 

 

2.

민순복은 집 김장, 교회 김장 등 바쁜 날을 보내고 쉬고 싶었는데 금요예배 시간이 되었다. 이 날은 예배를 마친 뒤에 철야기도를 원하는 신도들은 기도원에 가는 날이었다. 교회에서 차량이 나가는데 그날은 남편인 고 집사가 별도로 승용차를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새해를 위해 서원기도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민 집사는 피곤하여 쉬고 싶었으나, 남편이 차를 가지고 가기 때문에 졸음운전이 걱정이 되어 따라 나서기로 했다. 기도원의 철야기도회는 밤 11시에 시작했다.

이날은 성령 체험도 많고, 천국이나 지옥도 몇 번씩 다녀왔다는 외부에서 온 부흥강사가 인도했다. 사회자가 그분은 천국 체험이 많은 분으로 처음 몇 분 동안은 방언으로 하늘 보좌와 영통하는 기도를 한 뒤 그곳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전해 주신 말씀을 대언할 것이라고 했다.

부흥강사의 유창한 방언이 끝나자 주님 말씀의 대언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내가 너희와 함께 거닐고 싶은 아름다운 하늘 정원이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내가 주님과 함께 걷고 있는 것을 너희는 보느냐? 또 하늘 보좌에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소리도 들리느냐? 들어라. 주님께서 너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짐이 얼마나 무거우냐? 얼마나 괴로우냐? 눈물이 침상을 띄우도록 얼마나 통곡했느냐? 무엇이나 내게 구하여라. 나는 곤고한 백성의 기도에 늘 귀를 기울이고 있다. 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너는 목이 말라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처럼 헤매지만, 네가 찾고 있는 물은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를 것이다. 너는 가난하게 태어났다고 나를 원망하겠지만, 네게 물질을 주어도 너는 더 달라고 외칠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너의 공허한 심령 때문이다. 그것은 네 자유로운 영혼을 붙들고 있는 죄 때문이다. 너는 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너는 죄에서 너를 구원하지 못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듯, 불 속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불을 끄고 나올 수 없듯 너는 네 죄에서 너를 구원할 수 없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나는 너희를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너를 구원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가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너희는 귀를 막고 외치며 나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나를 못 박으라고 했다. 너는 그때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느냐?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가 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해 나를 놓고자 했을 때도 너희들은 큰 소리로 외쳐 재촉하며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었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안고 나를 보냈는데 너희가 나를 그처럼 홀대했으니,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천상에서 너희를 심판할 때 이런 너희 죄를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그러나 나는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 어떻게든지 너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너희와 함께 태초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에덴동산을 회복하고 싶구나. 하나님은 너희가 당신을 배반했을 때 너희를 지상으로 쫓아낸 저주를 거두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아담을 지으시고,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신 뒤, 아담이 그 생물들을 부르는 대로 이름이 되는 것을 보시고 얼마니 그때 흐뭇해하고 기뻐하셨는지 아느냐? 하나님은 그 때의 아름다웠던 장면으로 너희를 불러드리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늦었구나. 너희는 이 세상에 현혹 되어 죄지은 것도 까맣게 잊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살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 아버지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모르느냐? 그분은 너희가 죄도 모르고 당신을 멀리 떠나 멸망할 길을 걷고 있는 너희 때문에 가슴이 찢기셨다. 이제라도 어서 돌아오너라.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너라. 하나님은 맨발로 뛰어나가 너를 안으리라.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리라.

아, 불쌍한 내 아들딸들아,

너희 갈 길이 너무 멀구나. 비록 너희가 지금 회개한다 할지라도 너희는 용서 받을 수가 없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너희가 죄의 대가를 치루지 않고는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를 대신해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독생자인 나를 이 지상에 내려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먼저 세례 요한을 보내어 너희로 먼저 죄를 깨닫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를 통해 산을 낮추고 골짜기를 돋우어 내가 갈 고난의 길을 평탄하게 하셨다. 그리고 종래는 나를 너희들의 속죄 제물로 바치실 생각이셨다.

너희는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너희를 구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만이 너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육신을 입었으나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간 것이다. 먼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였지만, 너희는 끝까지 나를 믿지 아니하였다.

믿음 없는 너희를 어찌해야 할꼬?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옷을 입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살던 귀신들린 사람을 내가 고친 것을 기억하느냐?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오면서 뭐라고 했느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를 괴롭게 하지 마소서. 제발 나를 무저갱(無底坑)으로 들어가라고는 하지 마소서.”라고 하지 않았느냐? 귀신들도 나를 알아보았는데 너희는 아주 둔하기 짝이 없는 목석이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이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너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네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죄 값을 치렀다. 네가 아무리 짐승의 피를 흘려 제물을 드려도 일시적이요, 너의 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네 대신 내가 죽어 피를 흘리고, 나를 단번에 제물로 바쳐서 네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 내가 죽은 것이다. 너는 이제 눈의 쾌락과 육체의 쾌락과 물질을 가지고 자랑하는 세속적인 헛된 생각을 버리고,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나와 한 몸이 되어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 나라. 너는 결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탄이 끊임없이 너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자질할 것이다. 너는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사실 너는 죽어야 한다. 어떻게 네가 살아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겠느냐? 유일한 방법은 죄 없는 내가 네 대신 죽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네 대신 죽을 수 있느냐고?

너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대속죄 일에 어떻게 해서 너희가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는지를 기억하느냐? 그해의 대제사장은 10월 15일 대속죄 일에 숫염소 두 마리를 회막(會幕) 문 앞에 두고 제비를 뽑아 ‘여호와를 위한 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염소’로 나누었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는 대제사장에 의해 성소를 거친 후, 휘장을 통과하여 지성소의 법궤 위에 있는 속죄소에 뿌려졌다. 이 피를 보고 여호와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피 뿌리는 의식을 마치고, 그가 입은 에봇의 가장자리에 단 금방을 소리를 내며 휘장 밖으로 나오면 지성소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회중들은 ‘할렐루야!’를 외치고 환호하며 하나님께서 일 년 동안 죄를 가려 주신 것을 감사하였다.

한편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먼저 제사장이 염소에게 안수하면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한다. 아사셀 염소는 백성들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지게 되는 것이다. 아사셀 염소는 미리 선택된 사람에 의해 끈에 매여 ‘고난의 행보'를 시작한다.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갈 때 연도의 군중들은 이 저주의 아사셀 염소에게 욕하고, 침을 뱉고, 혹 돌을 던지고, 달려가 털을 뽑기도 한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 동편 광야에 가기까지 피투성이가 된다. 그곳 광야에 버려지면 염소는 굶주리고 헤매다가 맹수에 찢겨 죽게 된다. 이렇게 너희 죄를 아사셀 염소가 지고 먼 곳으로 사라져 너희는 일 년 동안 지은 죄 짐을 벗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아사셀 염소가 되어 너의 짐을 대신 지겠다는 말이다. 나는 너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었다. 사탄은 한 순간 승리의 개가를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삼일 만에 나는 다시 살아나 40일간 너희와 함께 있다가 이 하늘나라로 올라왔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시고 하늘로 부르신 것이다.

의심 많은 아들딸들아,

그래도 너는 내가 죽은 것이지 어떻게 네가 죽은 것이냐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늘나라의 비밀이다. 불신자에게는 감추고 너희에게만 계시한 비밀이다. 나는 이미 피 흘리고 십자가에 죽어서 너의 죄 값을 치렀다. 이제 네가 할 일은 네가 십자가에 네 정욕을 못 박고 나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나와 함께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이 하늘나라의 비밀이다. 마음 문을 열고 너희는 와서 내 안에 거하라. 내가 네 안에 거하면, 그 속에서 네 새로운 인생을 내가 살 것이다. 이제 소망을 육신에 두지 말고 하늘에 두어라. 이곳은 너무 황홀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너희는 나를 본받고 내 이름으로 거듭난 자가 되어라. 승리하는 자가 되어라. 너희의 삶 가운데, 나와의 대화 가운데, 나를 나타내는 빛이 되어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 것이다. 이것이 믿는 자들에게 계시하신 하늘나라의 비밀이다. 이제 너는 나와 한 몸이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어 한 몸이 되어 천국 문으로 들어가자. 과거의 죄가 주홍 같았을지라도 내가 세상의 재판장이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의 중보자가 될 것이다. 두려워 말라. 담대 하라. 하나님은 네 행위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내 의로운 행위로 재판하실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희는 나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는 지금도 이 구원을, 물질을 바쳐서 사거나, 자기가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행해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도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교인처럼 제사와 예물을 드리고 속죄제를 드리고 있다. 나는 이를 기뻐하지 않는다. 세계에 충만한 것이 내 것인데 왜 내가 제물을 탐하겠느냐?

희가 다니고 있는 교회 건물은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는 성전이 아니라, 나를 경배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예배당이다. 두 세 사람이라도 나를 예배하는 그 자리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은 하늘 보좌이며 너희가 땅에서 성전이라고 믿고 다니는 곳은 하늘 보좌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 그 예배당을 크게 지으려고 왜 서로 경쟁하느냐? 왜 파이프 오르간 등으로 호화로운 시설을 하고 불신자들이 자기 집처럼 편하게 드나들며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고 허풍을 떠느냐?

는 교회가 세상과 구별이 안 되는 것을 싫어한다. 성별 되지 않은 예배당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지상에 있을 때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고,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꾸중한 것을 생각하지 않느냐? 내 집은 가르치는 곳이요 기도하는 곳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가르치고 기도하는데 큰 집이 웬 말이냐? 느 허술한 곳이라도 두 세 사람이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내가 그곳에 임할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는 돈 많은 교회를 싫어한다. 일 년 살림을 하고 쓰고 남은 돈은 다 선교와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데 남기지 말고 써 버려라. 돈을 아껴 남겨두면 안 된다. 돈이 쌓이면 교회는 부패한다. 돈은 마귀가 너희를 유혹하는 도구이다. 돈이 남으면 서로 싸우거나 더 큰 교회를 지을 탐욕을 부추긴다. 그래서 분에 넘치는 교회를 지으면서 은행에서 융자를 받을 때는 교인들의 재산을 담보로 하고 큰 교회에 모여들 예상교인을 담보로 한다. 그러다 부도가 나면 교회를 급경매에 붙여 팔고 너희들은 거지가 된다.

삯꾼 목자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양을 치라고 맡겨 놓고 승천했는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 양들을 그릇 인도하고 있구나. 양들이 울어도 듣지 않고, 가슴을 쳐도 막무가내구나. 여호와의 권위에 의지하여 방자하게 지내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을 보느냐? 언약궤를 내세워 싸움에 이기려던 그들의 최후를 보느냐? 하나님의 진노가 엘리 가정에 임하여 엘리 제사장은 목이 부러져 죽은 것을 모르느냐? 회개하지 않으면 내 몸인 교회는 갈기갈기 찢기어 나갈 것이다.

어찌할꼬.

너희들은 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내가 얼마나 세상의 수치를 더 받아야 되겠느냐? 내가 언제 큰 건물을 원했느냐? 하늘보좌에 자리가 비좁아서 내가 그곳에 내려가겠느냐? 내 이름을 팔아서 너희 배만 불리고 탐욕으로 눈이 붉어졌구나. 양의 우리 안에 많은 양들을 끌어들여 그들로 더욱 죄짓게 하고 있구나. 누가 이 길 잃은 양들의 손을 잡아줄꼬?

삯꾼 목자에게 속고 있는 가련한 양들아,

아멘, 아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내게로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을 닫고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며, 인내로 말씀의 열매를 맺고 결실하는 자가 되어라. 내가 너를 죄에서 자유케 하려고 율법의 속박에서 구해 주었는데 너희는 다시 율법으로 자신을 옭아매고, 누군가의 노예가 되려 하는구나? 목자가 너희에게 권위를 내세우고, 대접을 받고자 하거나 순종을 강요하면, 그는 내 제자가 아니고 삯꾼 목자다. 나는 세상을 섬기려 했지 세상에서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내 가련한 양들아,

가정과 교회, 직장과 교회 때문에 갈등으로 시달려 죽도록 고생하지 마라. 도 입지 않고 무덤 사이에 살던 귀신들린 자를 내가 구해주었을 때 그가 나와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집으로 보냈다.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누리고, 은혜에 걸맞게 감사하며 살고, 받은바 은혜를 이웃에게 증거하며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갇혀 있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거라.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사대로 세상을 섬겨야 한다. 너를 우리 안에 가두고 노예로 부리려는 삯꾼 목자를 조심해라. 나는 주일에도 병자를 고쳤다. 율법은 사망을 가져오고 나는 참 생명을 가져온다.

갈등이 있을 때는 나를 외쳐 부르며 기도해라. 나는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까지 보이리라. 생명을 살리는 일은 내가 바라는 일이고, 궁극적으로 생명을 죽이는 일은 마귀가 원하는 일이다. 즐거운 일이 있느냐? 찬양해라. 고난당한 일이 있느냐? 나를 찾으라. 왜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느냐? 너는 말로는 나와 동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행동은 따로 한다. 갈릴리 호수에서 광풍을 만났을 때 나와 함께 배에 탄 사람은 어떻게 하였느냐? 광풍과 싸워 배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잠자던 나를 깨워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맨 먼저 나를 찾는 믿음을 가져라. 나는 졸지도 않고 늘 네 곁에 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물로 바치라 했을 때도 다시 아들을 살리실 것을 믿고 순종했던 그런 믿음을 너에게도 달라고 기도해라.

내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들이 복 받는 일이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네 몸에서 난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까지 복 받기를 원한다. 왜 나를 믿고 교회를 찾아와 구원을 얻은 너희가 불만스럽고 불행한 삶을 살려고 하느냐? 교회생활이 불행하냐? 교회생활이 불만스러우냐? 내가 살고 있는 집인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다.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안식을 누리는 곳이다. 내가 너의 눈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더냐? 그곳은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지 않더냐?

이곳은 너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다. 나와 함께 하는 곳은 어디나 천국이다. 네가 나와 함께 하는 세상에서 천국을 체험하지 못하면 천국은 죽어서도 없다. 주의 백성이 주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 천국인데 네가 천국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는 주의 백성이 아니거나 주의 다스림을 받고 있지 않거나 한 것이다.

교회가 너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주고 일을 맡겨 불행하냐? 성령 충만을 받아 모든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만한 능력을 달라고 내게 구하여라. 내가 도와주리라. 불평하며 노예처럼 일하는 사람은 내 집에는 없어야 한다. 은사를 사모해라. 내게 남을 섬길 수 있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라. 그렇게 해도 능력도 은사도 받지 못하고 불행하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라. 불평하며 노예처럼 사는 것보다 쉬며 기도하는 것이 낫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집하며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우기지 마라. 그것은 네 ‘의(義)’를 세우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러면 모든 것은 자연히 이루어진다. 너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마라. 악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교만하기까지 하면 그를 불쌍히 여겨라. 그들은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이다. 영의 눈과 영의 귀가 열리지 않아 기를 쓰고 말씀을 안 듣는 자들이다. 어떤 징계도 효과가 없어 내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두어 그들의 임의대로 행하게 저주한 것이다. 심판의 날에 그들의 종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징계할 때 너는 이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꾸중할 때 낙심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징계하는 것은 네가 사생아가 아니고 내 아들이기 때문이다.

 

부흥 강사는 얼마 동안 잠잠하더니 “주여!, 주여!”를 연발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방언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가 끝나자 찬송을 하였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3.

불이 꺼지자 모두 울며 통성으로 기도하였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 마루를 치며 기도하는 사람, ‘주여!’를 외치는 사람… 각양각색이었다.

20분 쯤 지나자 많은 사람이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 집사는 마루에 엎디어 계속 기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새해의 서원기도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정말 자기가 바른 신앙생활을 했는지 회개하는 기도가 터져 나왔다.

주여! 주님은 누구시오며, 나는 누구입니까? 나와 주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나와 교회는, 나와 아내는, 나와 자녀들은, 나와 친구들은, 나와 직장은? 이렇게 생각이 미치니 남은 배려하지 않고 나만을 위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방자하게 살아온 것 같았다. 자기에게는 버리지 못한 옛 버릇이 너무 많이 남아 이 나쁜 고정관념이 나와 여러 관계들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의 관계에서 자기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더 많이 수고하고, 헌신하고, 봉사해서 하나님 가까이에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니, 이웃의 모든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었다.

엎드려 얼마나 기도했을까, 두세 시간이 지난 것이었을까? 주위가 한산하다는 생각이 들어 일어나 뒤에 있는 아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마루에 엎드러져 기도하는 자세였다. 옆에 가 어깨를 흔들었다. 반응이 없었다. 놀래서 밀치니 옆으로 넘어지는 것이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놀래서 사람을 불러 아내를 차에 싣고 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그런데 너무 늦었었다. 교회에 헌신하다 죽으면 순교하는 것이라고 무리하게 강요해서 끌고 다닌 자신이 한스러웠다. 평소에 가끔 가슴을 쥐어짜고 아프다는 아내를 무관심하게 보고 넘겨서 심근경색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직장에 월차를 내고 아내 장례를 치룬 뒤 방 안에 우둑하니 누워 있는데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 같았다. 잠을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배는 더부룩하고, 식욕도 없으며 몸을 움직이기도 싫었다. 그런 중에 아내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훑어보게 되었다.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해 철야기도, 금식기도, 일천번제 헌금을 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나의 믿음은 이렇게 초라한가? 남편이 이렇게 미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그를 교회로 인도한 것이 후회된다.

…큰아들 명철은 정말 교회를 떠날 것 같다. 새벽기도를 강요하는 남편을 말리는 내가 싫다.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를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이라.’는 율례처럼 남편은 꼭 새벽기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나 새벽기도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나의 말은 잘못이 아닐까?

…남편은 자기 봉급은 생활비로 내놓지 않는다. 물론 그가 좋은 일에 쓰는 줄은 안다. 교회 헌금, 선교사 지원, 구역예배, 주일학교 학생 및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 등 다 좋다. 그런데 일천번제 헌금에 나와 자기 그리고 큰 아들 명철의 이름으로 따로 헌금봉투에 넣어 새벽기도마다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각자 따로따로 복을 받자고 물질을 바치는 것인가? 얼마씩 드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10,000원씩? 그렇게 내고 있으면 자기 봉급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자기는 우리 가정의 제사장이고,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중보(中保)하는 자이며 우리는 습관대로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면 되는 군중일까? 우리 구원은 그가 다 책임진다는 뜻일까?

…무엇보다도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애들은? 직장은? 친구들은?

…한번 느긋하게 애들과 함께 교외에 나가 산과 들을 보고 싶다.

 

고지식 집사는 읽고 있는 동안 오른쪽 배가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힘들면 힘이 든다고 말하지 왜 순종할 줄만 알았는가?’ 그는 이제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가 함께 살면서 그녀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가슴 아플 뿐이었다.

“정말 죽어야 할 놈은 나인데 왜 당신이 죽어야 했는가?”

그런데 문제는 고지식이었다. 장모가 와서 돌보는 데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 있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강제로 병원으로 데려 갔다. 그런데 거기서 들은 놀라운 소식은 그가 간암 말기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사랑을 받았던 여러 교우들이 모여 기도하며 그의 살 길을 논의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사필귀정이라며 자기는 죽어야 마땅하다고 자기의 죽음을 받아 드렸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 지 삼 개월 만에 그 암 덩어리를 안고 세상을 떠났다.  

 

출처 : 낮은 문턱
글쓴이 : 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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