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시끄럽다 (수필)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2. 2. 10:55

 

요즘은 대화나 언어 소통이 안 되는 불통시대다. 얘들 집에 가면 손자들이 나와 머리를 꾸벅하는데 너희들, 학교 잘 다니니?”하고 물어 보아도 핸드폰이나 아이패드를 손에 들고 쳐다보지도 않고 만지작거린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난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할 말이 있다한들 듣지 않겠다니 어떻게 하겠는가?

 

의사도 환자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불평한다. 환자가 두 달 가까이 기침이 심하다고 하여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폐에 별 이상이 없었다. 그래도 기침이 간헐적으로 일어나며 그러고 나면 목소리가 허스키 해 진다고 또 호소를 했다고 한다. 청진기로 심장박동을 잘 듣고 환자에게 모든 것이 정상적이니 2,3일 처방한 약을 들며 기다려 보라고 했더니 그 말은 듣는 것 같지 않고 나이가 많아지면 남자도 남성호르몬이 결핍되어 면역력이 약해진다고 하니 호르몬 수치를 좀 재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꼭 원하시면 채혈을 해 놓고 가시면 3일 내에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또 엉뚱하게 채혈 같은 귀찮은 일 하지 않고 그냥 비아그라를 사 먹으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의사는 이 불통 환자가 답답하다는 것이다. 환자가 진단을 받으러 와서 의사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가 약까지 지정해서 처방 받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목사는 어떤가? 교인들이 전혀 말을 안 듣는다고 투덜댄다. 일주일에 한번만 새벽기도에 나오라고 해도 자기 말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들은 척했던 교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했다. “‘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예수님도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기는 받은 것입니까? 구원 받은 사람이 왜 전도를 하지 않습니까?”라고 해도 자기 목소리는 땅에 떨어져 함흥차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설교할 때마다 속이 터져 목소리가 높아진다고 한다. 앞자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는 하는 것인지 속이 타는데 끝날 때는 생기가 돋아서 예배당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신기하다고 교인들과의 불통을 호소한다.

 

목사 사모도 소통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목사가 아내를 데리고 부모를 찾아뵈러 가면 아내는 제 세상 만난 것처럼 기뻐서 시어머니에게 말을 안 들어주는 목사에 대해 하소연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시어머니는 네가 참 힘들겠다.”고 며느리를 위로 하고 때로는 목사에게도 세심하게 아내에게도 신경을 써 주라고 주의도 준다고 한다. 교인들과는 말도 조심해야 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하니 목사 사모는 사회적으로 격리 되어 살아야 하는 힘든 자라다. 그런데 남편마저 불통이면 그 답답함을 어디다 호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말 잘 들어주는 시어머니께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시어머니는 한마디 한다고 한다. “시끄럽다!” 그러면 상황이 끝난다. 이제 시어머니와도 대화가 끝난 것이다.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야당 의원들은 대통령도 불통이라고 한다. 무슨 말을 듣기는 듣는 것인지 아무 말도 않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 후 결과는 럭비공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는 것이다. 대통령도 자기 고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해 달라고 떼를 쓰거나 싫은 말 하는 사람들의 말만 들으라고 하면 듣고 있겠는가? 해외 국빈들 영접도 해야 하고 또 해외로 나가 그 나라 말로 연설도 하려면 귀를 막고 있어도 바쁠 것이다. 결국 그분을 불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촛불 집회를 하겠다고 나선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지금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외치는 사람만 많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선거유세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 박수부대를 동원해서 데리고 다녀야 할 형편이다. 아무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있느냐고 기가 막혀 호소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끝까지 경청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숨을 쉬기도 어려웠는데 내말 들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들을 수 있는 상담자가 아쉽다. 들어주는 것이 상처의 참다운 치유다.

 

나는 최근 어떤 젊은 대학 교수를 만났다. 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며 대학이 지금 파선 직전에 있다고 했다. 대학 입학정원이 고등학교 졸업생 수를 능가할 것이라는 예상은 10여 년 전부터 해 왔다. 그러나 정부는 해마다 대학 인가를 늘려서 지금의 불균형을 가져 왔다. 이제는 대학 입학 정원을 줄이려하는데 듣지를 않는다. 그래서 정부는 대학구조개혁추진안을 발표하고 입학정원 감축, 학과 통폐합을 강행하고 그래도 말을 안 듣는 대학은 대학평가지표라는 정량적인 숫자를 만들어 하위대학을 강제로 퇴출시킬 생각이다. 이것은 대학 교수들의 생명줄을 끊어 놓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총장은 무엇을 하는가? 그는 전혀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것 같지 않다. 행정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싶은 말이 목에 차올랐다는 것이다. 왜 총장과 대화를 해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오랜 시도 끝에 겨우 한 번 만나기는 했는데 자기가 3분 이야기하자 총장을 듣는 것을 중단하고 15분을 자기 이야기만 한 뒤 약속이 있다고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반응할까, 무슨 대답을 해줄까 하고 생각하며 듣는다는 것은 진정 들어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말 안 들어주는 직장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자식들을 다 출가 시켜버리고 노부부 두 사람이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의 대화가 막히면 온 가정이 불통가정이 된다. 그러나 나는 비교적 아내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아내는 나를 아이들 다루듯이 한다. 내가 외출하면 옷을 다 입고 나면 반드시 거울 앞에 서서 보세요. 가시는 길은 알고 있겠지요? 정말 운전할 때 길을 자주 바꾸지 마세요. 도착하면 손을 씻으세요. 그리고 전화하세요. 남의 말만 듣고 자기 말은 하지 마세요.이렇게 문을 나서기 전까지 계속 주의를 주면 나도 모르게 시끄럽다.”하고 극약 처방을 내린다. 말 들어주기를 끝낸 것이다. 운전하고 가면서 나는 우리 가정도 불통가정이 되는 것이 아닐까하고 후회한다. 이 사회가 이렇게 변하면 안 되는데 하고 걱정한다.

출처 : 낮은 문턱
글쓴이 : 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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