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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고 복음주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8. 11:53

최고 복음주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교회와신앙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in Lloyd-Jones, 1899.12.20-1981.3.1)는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쇠퇴기에 빠진 시대는 언제나 말씀 전하는 것이 감퇴되어 있었다”라고 지적하고, “부흥의 여명을 알리는 것은 말씀전하는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목사와 설교> p.30에서).

작금의 한국교회는 성장을 멈춘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설교의 우위성이 흔들리면서, 설교 이외의 것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교회마다 각종 편의시설과 프로그램과 친선 활동에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는 말씀 외에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다는 인식을 갖도록 만들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될 때 교회는 바로 선 시대였다. 반면에 교회가 타락한 시대는 설교가 타락한 시대였다. 이에 대해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1908-1986)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진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기독교 진리는 우리의 마음에 전혀 닿고 있지 않으며, 마음을 변화시킬 힘도 없는 것이 아닌가?”(<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 p.12).

여기서 더 나아가, 설교자는 ‘설교하는 바를 자기의 삶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이 물음은 비단 설교뿐 아니라 설교자 자신까지도 불신하는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매우 어두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설교의 홍수 시대’를 맞고 있지만, 그 누구도 우리 시대가 과거보다 영적으로 건강하고, 이전보다 더 생동감 있는 신앙적인 부흥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이 범람하면 정작 마실 물이 더 없어지는 것처럼, 설교의 홍수 시대에 현대인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각한 기갈 현상으로 탈진 상태에 있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회중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기력한 강단의 문제다. 이것은 한국교회 강단을 책임지고 있는 설교자들을 향한 각성을 일깨워주는 외침이 아닐 수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제시하는 현대 강단의 문제에 대한 예리함과 그에 대한 권면을 통해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마틴 로이드 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부친 헨리 로이드 존스(Henry Lloyd-Jones)와 모친 막달렌(Magdalene) 사이에서 3남 가운데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9세기가 저물어가고 20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그는 성품이 온유했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반면, 진지하고 심각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유년시절 그가 다니던 학교의 포웰(S. M. Powell) 선생은 마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역사를 전공한 그는 어린 마틴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고, 찬송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했다. 특히, 포웰은 로이드 존스로 하여금 윌리암스(William Williams)의 찬송시에 깊은 신앙고백을 경험하도록 도와주었다.

16세세 때 그는 부모님의 격려로 의학공부를 결심했고, 성바돌로매 부속 의학교에 입학했다. 런던대학교 의과시험에는 탁월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웨일즈 신문에 이름이 실리기도 했다. 그 후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왕립의과대학 병원에 봉직하면서 토마스 호더(Thomas Hoder)경의 조교로 일하게 되었다. 호더는 진단의 명수였다. 로이드 존스는 그에게서 요점을 생각하는 것, 원리를 설명하는 것, 정확하게 사고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등 전문의적인 의료행위의 요점들을 배웠다.

그는 내과의사가 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해에 무언가 보탬이 되는 설교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휴톤(John A. Hutton)의 설교는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존 휴톤의 설교는 로이드 존스에게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깊은 감동을 주었는데, 그 능력은 곧 죄에 대한 인식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런던의 빈민가와 바돌로매 병원에서 환자를 만날 때마다 그들의 보이는 병을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원인인 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호더(T. Hoder)경의 카드에 적혀있는 논평이 의학적인 것도 아니고 지식적인 문제도 아닌 영적인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27살의 나이에 설교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의학을 포기하기까지 그는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가 선택한 의사 직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설교자로서의 삶은 하나님의 전적인 부르심이었다. 그는 이 부르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설교자로서 어떠한 권위를 가지든지 간에 그것은 내 편에서 결정한 어느 무엇의 결과도 아닙니다. 나를 붙잡으시고 나를 이끌어내시어 이 사역을 위하여 구별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영적 선택> p.156에서).

로이드 존스는 교단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헬라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당시의 신학이 지나치게 고등 비평적이고 자유주의적이어서 자신의 복음적인 신앙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교단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동료 내과의사 베단 필립스(Bethan Phillips)와 결혼하여, 그의 고향인 남웨일즈 아베라본에서 설교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첫 목회시절(1927-1938)의 설교는 주로 전도설교(Evangelistic Sermon)였다. 죄 의식과 복음의 놀라움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설교했다. 첫 10년간의 목회 기간에는 한 설교를 일주일 내내 몸소 손으로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아베라본에서 로이드 존스의 사역은 당시에 충격을 주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전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수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던 1920년대 중반에 웨일즈 지역 목회자들 사이의 신학적 기류는 역사적 칼빈주의가 아닌 낙천적인 자유주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경 말씀을 정확무오한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설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가 부임한 즉시, 그가 시무한 웨일즈의 한 장로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회심을 통해서 몇몇 악명 높은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교회에 다니기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 가운데는 그의 아내도 포함된다. 그의 사역 초기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다.

그 후 1938년부터는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 1863-1945) 목사의 제의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의 30년간의 목회가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얼마 안 되어 폭탄이 예배당에 투하되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약 500명의 성도들로서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1951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약 2,500명이 출석하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캠벨 몰간의 역사적인 계승자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강해설교의 왕자’라는 그의 칭호를 계승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그의 독특한 설교 방식을 발전시켰다. 성경 한 책에 대한 연속 강해설교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은 베드로후서 강해설교다. 그는 이 설교를 시작해서 무려 21년 동안, 계속해서 연속 설교를 했다. 5년에 걸친 <에베소서 강해설교>, 12년에 걸친 <로마서 강해설교>,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 관한 강해설교 등으로 이 모든 설교들은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또한 그가 실제적이고도 영향력 있는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진리의 깃발사’와 ‘런던 복음주의 도서관’과 ‘런던 신학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한 기독학생회(IVF: Inter Varsity Fellowship)와 기독의사협희(CMF: Christian Medical Fellowship)의 성장은 설득력 있는 능력의 증거요 로이드 존스가 행산 사역의 열매였다.

1968년, 로이드 존스는 심각한 병을 앓게 되자 목회 사역에서 은퇴했다. 그 후에도 12년 이상을 계속해서 설교했지만, 주된 사역은 책을 쓰는 일이었다. 그는 은퇴 후 자신의 13권으로 된 주요 설교집 시리즈와<목사와 설교>를 출판했다. 1981년 3월 1일, 그는 설교자로서의 삶을 다하고 그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로이드 존스의 사상적 배경
마틴 로이드 존스는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설교자다. 그러나 그에게 설교자로서 가장 두드러지게 영향을 미친 몇몇 사건들과 인물들이 있다. 그를 형성시켜간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설교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바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사도 바울이야말로 뛰어난 천재이며 가장 학식 있는 바리새인, 가장 박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바울의 영성과 지성과 삶을 본받으려 애썼고, 그의 설교 가운데서도 바울의 가르침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교육 방식도 바울 사도를 모방했으며, 바울 서신의 가장 위대한 강해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둘째, 청교도의 영향이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71년 웨스트민스터 청교도 연구회에서 행한 ‘청교도주의와 그 기원’이라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웨일즈 칼빈파 감리교회에서 자라났고, 그들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925년 우연히 리처드 백스터의 최신판 전기를 읽은 후부터 청교도와 청교도 저작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사역 전체가 이것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이러한 관심을 더욱더 부추긴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발견한 일이었습니다.

그 분의 책을 읽으면 누구든지 그와 동일한 자료들을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청교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가 볼 때에 어느 설교자라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청교도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도 청교도주의처럼 참된 말씀 사역을 격려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그러한 면에서 뛰어난 모범이었기 때문입니다(<청교도 신앙 : 그 기원과 계승자들>, p.248-249).

로이드 존스는 특별히 벤자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워필드를 가리켜 지난 70년 동안 영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라고 평가했다. 로이드 존스는 워필드의 신학에 심취했다. 그것은 그의 신학이 성경에 기초했고 주해적으로 정확할 뿐 아니라 뜨거운 영성이 겸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휫필드의 설교를 자신의 설교 모델로 생각했으며 언제나 그에게 용기를 얻었다.

“나는 용기를 잃거나 지쳐 있을 때마다 예외 없이 18세기로 돌아갑니다. 조지 휫필드가 나의 용기를 일깨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18세기에 있었던 성령 운동과 그 커다란 부흥의 조류를 읽으십시오. 그 일은 설교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이 귀중합니다”(<목사와 설교>, p.130).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하고 나서 교만해지려고 할 때마다 휫필드를 대하면서 겸손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로이드 존스의 영적 스승이다. 만약 자신에게 권위가 주어진다면,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두 권의 전집을 모든 목사들의 필독서로 만들고 싶다고 공언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로이드 존스에게 끼친 영향은 거의 측량하기 어렵다. 로이드 존스의 목회는 에드워즈에 의해 통제되어 왔다고 고백할 정도다. 그는 에드워즈에게서 성령이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지성과 부흥의 요소를 발견했다. 에드워즈는 로이드 존스에게 부흥의 강력한 필요성을 깨우쳐주었고, 그 부흥이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결론을 얻게 했다.

그 밖에 로이드 존스는 존 번연(John Bunyan),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존 오웬(John Owen) 등 17세기의 청교도들을 사랑했고, 18세기 설교자들을 존경했다. 그와 같은 청교도주의는 일생 동안 그의 신학적 사고와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칼빈주의 메서디즘의 영향이다. 18세기 초 웨일즈의 상황은 영적인 면에서 매우 낮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서 죽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부도덕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 위대한 각성과 부흥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부흥에 있어서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1714년 1월에 태어난 하웰 해리스(Howell Harris)이다. 그는 18세기 웨일즈의 칼빈주의 메서디스트였다.

웨일즈의 메서디즘은 전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신학을 개혁하려는 운동이 아니라 체험적인 실천적 신앙생활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웨일즈의 메서디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설교가 있었고, 위대한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뜨거운 열정과 부흥이라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래서 웨일즈의 메서디즘은 ‘죽은 칼빈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칼빈주의’를 산출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할 정도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웨일즈의 메서디즘은 차갑고, 서글프고 음울하고 침체된 칼빈주의가 아니었다. 감정, 열정, 뜨거움, 찬양, 감사로 나아가는 진정한 칼빈주의라고 고백한다.

로이드 존스는 13세에 하웰 해리스의 목회에 관한 소책자를 읽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특히, 그가 자라난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의 역사에 대한 이 첫 책은 역사에 관해서 평생 지속적인 관심을 일깨웠다. 위대한 부흥 시기의 교회사와 위대한 성도들과 설교자들의 전기에 대한 관심을 평생토록 갖게 했다.



최고 복음주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Ⅱ  

교회와신앙

설교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설교관’이다. 설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핍될 때 설교 이외의 것에서 부흥을 꾀하려고, 힘과 시간과 예산을 소모하는 현상이 생긴다. 설교자는 모든 일에서 조화와 균형이 있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가 자신의 모든 삶을 설교자로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확고한 ‘설교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성경 권위와 설교의 우위성
로이드 존스의 설교의 힘은 무엇인가?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다. 철저하게 성경을 신뢰했고, 성경에 의존하여 설교했다. 그는 오늘날의 대중들이 더 이상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합당한 대답은, 오직 성경의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시대의 표적』, p.148-9). 그는 설교하는 매 순간마다, 성경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했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 메시지를 사도와 같은 담대함을 가지고 증거했다. 단순히 그것을 말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선포할 때 자신에게 임하는 성령을 힘입어 설교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그는 교회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바로 설교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가 어떤 정신으로 설교했는지를 역설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교회의 첫째 임무는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분명한 입장을 피력한다. 계속해서 교회의 일차적 임무가 말씀전하는 일임을 강조한다. 그의 사도행전 강해에서 분명한 어조로 밝히고 있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필요는 바로 이 메시지를 듣는 것이라고, 설교는 지금도 예전처럼 세상에 필요한 일이라고, 아니 더 절실히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 인간의 가장 큰 필요이자, 최고 필요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곳은 교회뿐입니다”(『승리하는 기독교>』, p.391).

교회가 말씀에 최우선 순위를 둘 때,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 육신보다 영혼에 관심을 두는 일, 유한한 시간보다 영원을 중시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목회생활 40년 동안,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그가 고수한 설교의 우위성은 항상 간직하고 사수한 설교철학이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한 부흥
로이드 존스에게 설교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준비되고 기록된 설교, 그와 커뮤니케이션하는 회중 그리고 설교자와 회중의 정신과 의지와 감정에 역사하는 성령이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 세계를 지배하는 핵심 축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설교로 요약될 수 있다. 성령론은 그의 설교학을 지배하는 방향키다.

로이드 존스가 성령 사역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대에 말씀 사역이 직면한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었다. 그는 그 시대에 무기력한 강단을 보았다. 부흥시대의 설교자들과 같은 진정한 설교자들은 사라지고, 강단꾼만이 설교단을 점령한 시대였다.

로이드 존스 설교에서 성령이 중요한 이유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의 사역에 중심점을 둔 설교를 강조한다. 이 말은, 설교자가 성령 세례의 주목적인 주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증언할 수 있는 능력으로 무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진리를 믿게 하는 것은 사람의 논증이나 논리, 유창함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씀을 듣는 청중의 말씀 속에서의 성령 사역이다. 내적 증거가 없이는, 어떤 사람도 참으로 성경의 권위를 믿고 거기에 복종하지 않는다. 성령만이 들은 것을 확증하신다. 로이드 존스는 이런 진리를 그 누구보다 터득하고 설교에 적용했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론적인 설교가 효력 있게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설교의 전 과정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계속적으로 추구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사전트(Tony Sargent)에 따르면,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성령론은 기름부음을 향한 열망과 직접적인 기름부음을 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의 기름부음이야말로 설교에서 담대함과 명확성과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동인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무엇을 말하는가? 로이드 존스는 ‘영감’(Aafflatus)을 ‘기름부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능력의 부갗(Accession of Power) 또는 ‘능력의 부어주심’(Effusion of Power)라고 묘사했다. 이 능력은, 설교자를 자신의 밖으로 이끌어 내어 그가 말할 때 능력들을 주는 효과를 낸다.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이란 ‘성령의 의한 세례’(The Baptism by the Holy Spirit)와는 다르다. 그는 ‘성령에 의한 세례’는 중생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분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반면, 성령세례는 주로 담대함과 큰 확신으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능력을 주시는 활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성령 충만과도 다른 개념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의 주목적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힘 있게 증언할 수 있도록 하늘의 능력으로 재무장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전트는 “로이드 존스가 성령의 기름부음의 필요성을 그렇게도 강조한 것은 바로 설교의 품질 보증서가 되어야 할 이 긴급성과 권위를 회복하려는 갈망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설교에 능력이 임하기를 열망했다. 특히, 노련한 설교자의 위치에 올랐을 때도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늘 새로운 기름부음을 필요로 했다.

성령의 새로운 기름부음은 어떻게 가능하며,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설교자를 향하여 그 얼굴에서 빛을 내실 때 가능하다고 한다. 존스의 말을 빌면, ‘설교자를 향한 하나님의 미소’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미소를 보내셨고 지금도 미소를 보내시는 설교자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령의 주권에 사로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성령의 전적인 주권에 맡기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첫째, 설교자는 근면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 즉, 말씀을 준비하는 도중에 성령을 의지하고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능력을 갖추는 일은, 철저하게 말씀을 연구하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분석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더해져야 함을 말한다.

둘째, 설교자는 성령의 능력을 보내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는 항상 성령을 구하고 찾으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성령을 기다리는 것이 설교자가 해야 할 일임을 역설했다.

셋째, 설교자는 성령의 자유로움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로이드 존스는, 원고를 준비하되 원고에 얽매이지 말고 성령에 의지하여 설교할 것을 역설한다. 원고를 의존하는 것은 성령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바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개방된 자유로움의 공간을 창조하는 설교자에게 임하게 되는 선물로 보았다. 이때 설교는 예견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기대를 뛰어넘는 흥미로운 ‘로맨스’(romance)가 된다고 말한다(『목사와 설교』, p.390). 성령의 기름부음을 갈망하는 설교자는 성령께서 자신을 쓰실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을 사용해 주시도록 간절히 소망하면서 설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넷째, 성령의 기름부음을 위해 설교자는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단지 설교 준비에서의 철저한 준비와 기도, 설교 행위에서의 성령의 자유로움을 인정하는 차원으로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이 로이드 존스의 지론이다. 설교자의 삶의 영역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로이드 존스는 설교에 있어 설교자의 소망인 부흥을 위해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식하고, 그 부흥이 임하기를 기대하고 갈망하며 간구해야함을 강조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위해 설교자는 ‘철저한 준비’와 ‘철저히 의존’하는 자세를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설교 철학이다.



설교자의 자세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증거하는 일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의 자세 또한 매우 중요하다. 설교에는 설교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마치, 액자가 그림을 돋보이게 하듯이 설교자는 설교를 보완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보완할 수 있을까? 로이드 존스는 그의 설교사역을 통해 삶으로 말해주고 있다.

첫째, 설교자의 확실한 소명이다. 그는 설교자의 소명에 대해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즉 그들의 타락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 주어야겠다는 소원을 포함하게 된다. 이것이 소명의 진수”라고 말한다. 만일, 설교자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를 알고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설교할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설교자의 준비다. 설교자의 가장 좋은 훈련방법은, 자신이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특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와 경건은 설교자의 생활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설교자는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설교 속에서 로이드 존스는 자주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할 때 “우리의 복 되신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그의 설교 중에는 이러한 생각을 보여 주는 실례가 있다. 그는 기도자의 태도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하는 존중의 태도를 언급한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수록, 설교자는 기도 속에서 ‘친애하는 하나님’(Dear God) 같은 표현을 점점 덜 사용할 것이다. 도리어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깨달을수록, 더욱 조심스러워야 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불 붙는 가시떨기 속에 나타나시고, 모세가 그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다가갔을 때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잘 기억할 것이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바로 이것이다. 그분의 장엄으로 인한 경외와 경건한 두려움이다”(『로마서 강해 시리즈: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p.220).

토니 사전트는 그의 경건한 모습에 대해 “로이드 존스의 얼굴을 보면, 주님에게 도취된 사람 같았다”고 묘사한다.

셋째, 자신에게 설교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의 성향과 삶의 질이 사역을 보완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는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을 소망으로 삼는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님이 사신 것처럼 살라는, 점점 그분처럼 되라는 초대이다. 그것은 그분처럼 되는 것이며, 우리가 이 복음서들에게서 읽는 그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할수록, 그 동기는 더욱 커질 것이다. … 그분을 주목하고 따르라. 주님은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 그분의 복된 얼굴을 보고, 영원히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산상설교(하)』- “좁은문”, p.119).
로이드 존스의 설교들을 보면 그 방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거대한 스케일로 철저한 논증을 통해 성경 내용을 청중의 이성에 호소하고 있다.



예리하면서도 정확한 균형을 이룬 성경 해석
로이드 존스의 설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성경 해석이다. 그의 설교는 많은 부분에서 사도 바울의 설교를 표방한다. 바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바울의 인격뿐 아니라 설교 스타일을 그대로 닮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성경 해석에 대한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첫째, 그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 로이드 존스가 말한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기본 원리는 설교마다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는 성경 해석에서 항상 지켜야 할 규칙, 즉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병행 진술을 찾아야 합니다”(The Sons of God, p.296). 그의 설교는 규칙적으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고 예증한다.

둘째, 본문 해석은 전체로부터 구체적인 데로 나아간다. 로이드 존스 설교는,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내용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그는 성경 전체를 총괄적으로 살펴본 후 주해를 통한 문맥의 핵심적인 내용을 말한다. 전체적인 성경 조망에서 발견한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세부적인 부분으로 논증해 나간다.

셋째, 성경을 성령의 조명을 통해 해석한다. 본문이 말하는 바를 듣고, 무슨 의미인지 본문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 핵심을 청중에게 전한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우리에게 시도하는 바가 크다. 성경 본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성경 한두 구절 읽어놓고 설교자의 사상을 전하기 십상이다. 또는 성경 내용을 말한다 하더라도,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내용만을 말할 수 있다.

설교자의 임무는, 성경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청중에게 그것이 분명해지려면, 그것은 설교자에게 먼저 선명하게 다가와야 한다. 설교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그 진리 가운데로 들어갈 때 그를 비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박하고 광범위한 스케일
로이드 존스 설교의 또 다른 특징은, 연속 강해설교를 시행했다는 점이다. 그는 성경 중 한 책을 선택해서 매우 자세하고 계속적으로 설교한 칼빈(Jean Calvin, 1509-1564)과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를 따른다. 하지만 특별한 절기가 주는 유익을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는 잠시 연속설교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정근두 목사는 “이런 면에서 그는 청교도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고, ‘성령의 자유로우심’을 유지하며 자신을 개방시키고 성령의 역사에 민감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평가한다(『로이드 존스의 설교론』, p.176).

로이드 존스의 연속 설교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특정 본문을 철저하게 파헤쳐 가면서 본문에 충실하게 설교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본문 중심의 강해 설교의 대표적인 것이 ‘산상수훈 강해’다. 물론, ‘로마서 강해 시리즈’도 이 부류에 속한다.

둘째는 자신이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하는 것을 하나의 주제로 엮어 연속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 설교의 대표적인 예갰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다. 그는 이 설교를 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에베소서로 연속 설교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인도함을 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내 자신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옷을 차려입고 있는데 갑자기 무엇이 짓누르듯이 하나님의 성령이 ‘영적 침체’에 대해 연속된 설교를 하라고 명하는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정말 글자 그대로, 내가 옷을 입고 있는 동안 내 심중에 설교순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메모 용지에다 여러 개의 본문과 그런 식으로 떠오른 순서를 적었습니다. 그 동안 ‘영적 침체’에 대해 설교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러한 일도 한 번도 없었습니다. … 나는 언제나 그렇게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크게 집중시킵니다. 그것은 다른 것과는 달리 매우 놀랍고 영광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리고 나는 감히 그런 식으로 내게 오는 아주 뚜렷한 주입이라고 느끼는 것을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연속설교가 성령님 자신에 의해 지시된 것으로 확신합니다”(『목사와 설교』, p.247-248).

그는 방대한 분량의 연속 설교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뤄졌다고 말한다. 산상수훈 연속 설교 역시 성령의 타이르심과 명하심과 인도하심을 감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로이드 존스가 그토록 방대한 분량의 연속설교를 쏟아 낼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일까?
첫째, 꾸준한 성경 읽기와 묵상이다. 그는 성경을 애독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설교의 골격을 만들어 갔다. 또한,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있으면 즉시 종이에 적었다. 로이드 존스의 장녀 엘리자베스 캐서우드(Elizabeth Catherwood)에 따르면, 로이드 존스는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 성경 읽기표를 따라, 54년 동안 성경을 일어나갔다고 한다. 게다가 설교를 위한 성경 읽기를 통해 신약을 110회 정도 통독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날, 이 땅에서 성경을 읽은 마지막장은 고린도전서 15장이었다.

둘째, 독서 생활이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의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책을 읽지 않았다. 생각을 자극시켜서 스스로 사고하게 하는 데 독서의 의미를 두었다.

셋째, 교회사, 특히 청교도 역사에 대한 의존이다. 교회사는 성경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밝히고, 과거에 잘못된 성경 해석이나 오류를 피하게 한다. 그는 청교도 역사와 18세기 부흥 역사에서 많은 것을 의존했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 교회사는 하나님의 사역과 함께 살아서 움직이는 역사였다. 교회사에 일어난 수많은 사례들을 통하여 성경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의 설교는 더욱더 풍성해질 수 있었다.



성경과 현시대의 탁월한 적용
로이드 존스 설교는 확실한 두 가지 축이 있다. 하나는 메시지가 진리임을 확신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청중이 곤경에 처해 있음을 동일하게 확신했다. 로이드 존스는 본문을 분석하여 청중이 처한 상태를 진단하고 그것을 적용해나갔다. 그는 “진리를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지 않고 단지 설명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 설교는 실패”라고 말한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폭행이며, 성경과 모순된다고 보았다.

정근두 목사는 로이드 존스 설교에 드러난 적용을 몇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연역적 적용이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의 설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명령법(Imperative) 앞에 직설법(Indicative)을 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교리를 먼저 논증하고 교리의 적용이 뒤따라온다. 서술이 분명한 다음에 명령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의 특징적인 적용 방법은 연역적 적용이다.

둘째는 보편적 적용이다. 로이드 존스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자유롭게 발견한다. 그의 보편적인 적용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가변적인, 인생 문제의 표면적 차원에 기초하지 않고 불변하는 인간의 심층 상황에 기초하고 있다.

셋째는 정황적 적용이다. 성경적인 가르침은 상황에 직접 적용할 수 있다. 메시지는 어떤 문화적인 상황 속에서도 당면한 문제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재적용의 필요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재적용의 필요는 원독자의 정황이 현대 청중의 정황과 다를 때 일어난다. 로이드 존스는,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지만 적용은 정황이 다를 때에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마지막으로 실제적 적용이다. 로이드 존스는 주어진 교리에 포함된 성경적 원리를 고찰한 다음에 그 원리를 실제적으로 적용한다. ‘실제적’이라는 말은 정치적 또는 사회?경제적인 상황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 본문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떻게’(how) 측면을 항상 강조하다. 기독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할 말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일과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자동적으로 올바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생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 한국교회에 주는 로이드 존스의 교훈
우리 시대에도 ‘설교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마틴 로이드 존스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이전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로부터 선한 영향을 받았다. 그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탁월하고 능력 있는 설교자로 거듭나게 한 설교자들이 있었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에게서 강단의 자유스러움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받았고,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로부터는 경건과 지성과 논리를 일깨움 받았다. 이제, 그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감동과 도전의 사람이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우리 시대의 설교자들에게 성경의 권위와 설교의 중요성과 우위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의 설교는 당대에 유행하던 설교와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로이드 존스 당시의 설교는, 지나친 감정주의와 예언적 메시지를 통해 감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혼돈을 유발하는 웨일즈풍 설교였다. 그 당시 설교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수많은 예화를 인용하면서 효과를 얻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이런 설교 형태와 대조적으로 주요 주제를 조심스럽게 분석해 나가는 매우 논증적인 것이었다. 그 시대에 가장 잘 알려진 대부분의 설교들과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다르게 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부흥과 설교자에게 임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설교자에게 권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씀에 대한 권위’다. 설교의 우위성은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동시에 기도를 통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 때문이다. 설교자는 이론적으로 말씀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말씀의 우위성을 온몸으로 체험해야 한다. 말씀의 우위성이 지켜지는 또 다른 측면은, 말씀이 기도와 성령으로 에워싸일 때 가능하다.

로이드 존스의 메시지는, 참된 부흥을 위하여 설교자에게 임하실 하나님의 능력과 기름 부으심을 위하여 기도할 분명한 이유를 찾게 한다. 설교자는 본문을 연구하는 시간 이상의 기도로 성령님과 동행해야 하며, 설교 시간에도 성령의 자유로우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음을 한 평생 갈망하면서 엄숙함과 진지함으로 말씀 사역에 임했다. 로이드 존스를 통해, 설교자의 삶은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각성케 한다.

셋째,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철저한 적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가 교리 일변도로 흐르는 설교가 되어서는 안 되며, 더불어 적용 일변도로 흘러서도 안 되는 균형을 강조했다. 적용은 반드시 교리가 설명된 후에 나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직설법이 항상 명령법에 앞섰다. 설교자는 거룩한 본문을 분석하며 인간이 처한 상태를 진단해야 한다. 그 다음에 전자를 후자에 적용시켜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효과적인 적용을 위해 청중이 곤경에 처해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청중에 대한 변화의 핵심 요소를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그의 설교는 사람의 본성과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곧 적용으로 연결된다.

로이드 존스는 청중의 표면적인 정황보다 심층적인 영적 정황을 강조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죄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그의 평생을 통해 복음을 외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청중들이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느껴진 필요’보다,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 단절로 인해서 생겨진 죄의 문제인 ‘궁극적인 필요’에 대하여 말씀을 적용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적용을 향해서 달려가는 설교’다. 설교를 통한 적용은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며, 변화된 청중의 삶은 또한 부흥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이는 한국 교회의 부흥을 향해 달려가는 설교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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