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점도 없고 흠도 없이[적어도 내가 8년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군]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5. 10:14

070318점도 없고 흠도 없이 (벧후 3:14-18)

성경본문                                                                                           / 장영수 목사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해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않은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토마스 쿠퍼라고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의 주교이며 학자였습니다. 그가 8년 동안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산더미 같던 자료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게 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아내를 다그쳐 물었더니 아내가 그걸 난로에 집어넣어 다 태운 것이에요. 히스테릭한 아내이죠. “누가 이랬다고?” “내가 그랬어요. 당신이 너무 몰두하며 일해서 저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내가 다 태워버렸어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에요. 거듭 한숨을 쉬다가 토마스 쿠퍼가 말합니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그러나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8년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군.” 그러더니 조용히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년 후에 33,000단어가 실린 <로마어 영어 동의어대사전>을 편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신이 더 살아야 할 이유가 뭡니까? 오늘밤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아니요. 하나님. 나는 오늘 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의 일생의 끝이 처음 가졌던 생각과 같을 수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은 자라면서 배우면 배울수록 의문도 많이 생깁니다. 원하는 것을 구하려고 몸부림치다 보면 헤매기도 하지요. 여러분이 젊을 때 가졌던 그 아름다운 꿈, 그것과 오늘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특히 신앙에 있어서도 처음 교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가졌던 그 아름다운 소망,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꿈꾸었던 그 기대와 오늘의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처음 가졌던 순수한 바램을 오늘 그대로 이루어가고 있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이지요.

어떤 분은 그럴런지도 몰라요. ‘아이고, 그게 다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 같은 생각이지.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고 교회도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 한계 속에 있지요.’ 종종 그런 얘기를 들어요. 일면 그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요. 자기 나름대로의 경험이 있겠지요. 그러나 거기에 머물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거에요. 성장이 멈춘 거에요. 성경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면 그러한 거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을 넘어서는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성경은 증언하고 있어요. 오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에게는 죽음을 넘어선 산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오히려 그 모든 두려운 것으로부터 자유하고 자유하기에 이제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의 모습니다.

 

여러분은 몇 년 남았습니까? 한국 남녀의 평균 수명이 있잖아요. 몸을 입고 사는 이것은 한 번 주어지는 기회에요. 또 하나, 나와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많다면 그 가치가 좀 줄어들런지도 몰라요. 그러나 형제가 비슷하고 부자지간에 어쩌면 그렇게 똑같으냐 그렇게도 말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역사 속에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예요. 하나님은 나를 만나기를 원하세요. 너무나 소중한 존재예요. 능력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하나님이 지으신 가장 고귀한 작품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꼭 만나야 하는 거에요.

우리에게는 종말이 있어요. 어떤 분이 그래요. 과연 세상에는 종말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더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이 있어요. 제가 잠자리에 들어갈 때 가끔 생각납니다. 벌써 10년은 된 것 같아요. 제가 연애할 때 알게 된 집사람의 친구가 있었는데 신앙도 좋고 친절하고 건강한 사람이었어요. 10년 전에 남편과 자는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그 때 딸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는데… ‘, 그렇게도 가는구나.’ 그 다음부터 저는 잘 때 가끔 그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잔다고 눈을 감지만 내일 아침엔 어떻게 되는가?’  

그런데 말이지요, 이렇게 개인의 종말이 이렇게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지만 왠지 나의 종말은 실감나지 않아요. 객관적 사실로 우리에게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내게 주관적 체험으로 다가오지 않아요. 아직 건강해서 그럴까요? 아직 젊어서 그럴까요?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있어요. 종말이 있냐고 지식의 문제로는 궁금해 하지만 우리의 온 인격을 가지고 그 종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 한계를 이해하고 세상의 종말을 얘기해야 하는 거지요.

성경은 말합니다. 종말은 반드시 있다. 우선 역사적 경험이 있어요. 예수님이 처음 이 땅에 오실 때도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예언되어왔어요.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오실 때 쯤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 기대를 잃어버렸어요. 사람들이 생각한 시간에는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제나 저제나 오시나 기다렸다가 다 포기할 때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어요. 그래서 도적같이 오리라.

또 하나, 우리의 시간 계산법과 하나님의 시간 계산법은 좀 다릅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니까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신 주님이시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지구촌이 된 이 세상에 전지구적 재앙의 위기를 말합니다. 전쟁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이 지구의 모든 기상조건이나 이런 것들이 뒤집어짐으로 말미암아 리듬이 깨져서 오게 되는 세상의 파멸을 말하고 있습니다. , 이 종말에 대해서 성경은 반드시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할 게 있어요. 그 날이 언제인지 억지로 풀지 말라는 것이지요.

 미국에 유학을 간 한 유학생이 아내가 그만 갑자기 출산을 하게 되어서 부랴부랴 병원에 가게 되었어요. 그리고는 병실에 들어가고 난 후 명세서를 받아보니까 거기에 ‘delivery’ 라는 대목이 있는데 굉장히 비싸서 깜짝 놀란 거에요. 그래서 담당 의사에게 따집니다. “아니, 아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 차를 이용하는 비용이 왜 이리 비싼가요? 나도 차가 있다구요. I have a car.” 여기서 ‘delivery’란 뜻은 분만이란 뜻이거든요. 차를 쓰는 비용이 아니라 애 낳는 비용. 그래서 그 다음부터 그 병원에서는 한국사람이 오면 물어본답니다. “Do you have a car?” 오해이지요.

 종말에 관해서는 그렇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 으뜸가는 어거스틴(Augustine)도 자기 시대가 종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그 당시 1000년 로마가 쇠퇴하고 멸망했거든요. 게르만 민족이 쳐 내려오고 로마가 멸망했거든요. 그것을 보고 지구종말이 가까이 왔고 멸망하는구나 생각했거든요. 사실 그 때만 그런 게 아니에요. 시대마다 그랬어요.

 제가 1970년대 군에 있을 때 성경과 설교집과 여러 가지 성경강해집을 열심히 읽었는데 여러 가지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어요. 70년대 후반이니까 2000년 해봐야 20여년밖에 안 남았는데 요한계시록 강의를 읽어보니 그 분은 지구의 종말을 2000년으로 잡아 놓고 계산을 하고 있더라구요. 그 때 유럽공동체가, 지금은 EU라고 하지만 그 땐 EC공동체, 일곱 나라였는데 세나라 더 들어와 열나라 되는 그 날 인류는 멸망한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AD2000년은 이미 지나갔어요. 그것은 카운트를 잘못한 거예요. 그런데 애시당초 그렇게 계산하는 게 잘못된 거예요. 그것은 억지로 계산하지 말라는 거예요.

종말에 대해서 어느 시대나 종말이 임박했다고 생각했어요. 초대 교회도, 베드로나 바울을 비롯한 많은 초대교회의 사람들도 주님이 곧 재림하실 거라고 믿었고 그러했기에 로마의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당해도 믿음을 지켜나갔어요. 임박한 종말이에요. 그러나 사실 그 종말은 2000년이나 지체되었거든요. 여기에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있어요. 임박한 종말로 알고 살았어요. 그러나 임박한 종말로 알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럴 때 깨어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 거예요. 그러면 이제 반대로 2000년씩이나 종말이 지체된 여기엔 또 무슨 뜻이 있겠어요?

 1860년대 이후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쪼개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깨어지고 상처입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무디를 일으켜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합니다. 그리고 미국에 새롭게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발달할 때 사람들에게 꿈을 부어주셨어요. 그리하여 전 세계로 눈을 열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내건 표어가 있었어요. 당시에 미국 대학생들이 불타가지고 ‘1900년이 될 때까지 온 지구상에 복음을 전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다.’ 그 때에 재림의 시간표는 1900년이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어요. 똑똑한 대학생들이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나갔어요. 그 중에 가장 혜택을 본 나라가 한국이에요. 우리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 일본으로 가려 했던 아팬셀러가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인도로 가기 위해 기도했던 언더우드가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복음을 전했어요. 배운 바 없고 가난하고 미신에 가득찬 한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우리가 헛수고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갈등을 가지고 언더우드가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어요. 지체된 종말, 그들은 1900년에 종말이 올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나 종말은 그 때에 오지 않았어요. 오히려 하나님은 한국 민족을 복음으로 구원하시길 원하셨어요. 그래서 오늘 베드로가 말해요. “ 주의 날이 더디 온다고 여기지 말아라. 거기에도 우리가 미쳐 헤아리지 못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또 놀라운 생명을 구하시는 계획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과연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 하고 논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이제 복음이 세계를 한 바퀴 건너서 태평양을 건너서 한국으로 해서 중국에 몰아치고 있어요. 그래서 중국의 많은 지하 교회들이 일어나서 기도하길 이제는 비단길을 거쳐 중앙아시아를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복음이 돌아가는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종말이 올 것이다. 그래서 요즘 일어나는 선교운동이 ‘Back to Jerusalem’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선교운동이지요. 거기가 다 회교권이잖아요. 그리고 그 회교권의 교두보가 인도네시아에요. 그래서 인도네시아가 중요해요.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에요.

그러면 어떤 것이 건강한 신앙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신앙을 지키라.’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신앙을 지키라.

어느 40대 후반의 회사원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식사를 하려고 했더니 아내가 멸치볶음을 반찬으로 해놓았어요. 그것을 보는 순간 30년 전의 일이 추억으로 떠올랐어요. 그는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집은 가난했어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려다가 실패했어요. 또 그것이 마음에 짐이 되어서 그만 병을 얻었어요.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고생고생하며 그 가정을 이끌어가고 있는 거에요. 자기는 어려서부터 멸치볶음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멸치볶음도 제대로 못 먹게 되었어요 날마다 김치만 먹고 도시락반찬으로 김치를 싸가는 것이 일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생 시절 아침반찬에 멸치볶음이 나왔어요. 왠 일인가 하고 신나서 그것을 먹었는데 도시락 반찬에도 그것을 싸주시는 거에요. 학교를 가면서 병석에 있는 아버지께 인사를 했더니 그 날은 왠 일인지 아버지가 부기도 빠진 것 같고 좀 얼굴이 좋아 보이셨어요. 환한 얼굴로 그래, 잘 갔다 와라.” 그 날은 점심시간만 기다렸어요. 4교시에 지리 시간이었는데 그 전에 지리시험을 본 것이 만점이라는 거예요. 그 학교에서 자기만 만점을 받은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신났겠어요. 이제 점심시간이 되려면 10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 날은 모든 것이 다 잘 되어가는 거에요. 근데 담임선생님이 자기를 부르는 거에요. “잠깐 이리로 나와봐라. 너 빨리 집에 가보아라.” 갑자기 마음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혹시 하고는 막 집으로 돌아갔더니 집에 가까이 왔을 때 벌써 곡하는 소리가 들려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장례를 치르고 학교에 돌아가봤더니 그날 얼마나 황급했든지 책상서랍에 책도 그대로 있고 공책도 있었어요. 밥을 꺼내어보니 멸치볶음에 곰팡이가 앉았어요. 그래서 그 후론 멸치볶음을 볼 때마다 자기들을 위하여 고생하다가 병을 얻고 고통가운데에 있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게 되었어요.

여러분, 흔히들 장난으로 마태볶음, 마가볶음하잖아요. 멸치볶음을 대할 때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 것처럼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주의 고난을 깊이 묵상해야겠습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너희가 구원을 얻었느니라. 하나님의 자유를 얻었고 모든 얽매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었고 해방을 얻었고 이제는 죽어도 다시 사는 천국의 산 소망을 가지고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주 예수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나라.” 종말이 언제냐고 날짜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그 날이 언제가 되었든지 하나님의 손 안에 맡기고 너는 오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라.

 월남 이상재 선생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고통을 당할 때 그는 고난을 꿋꿋하게 견디면서 민족을 이끌었던 민족 지도자이지요. 그가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정부 전복 음모죄로 감옥에 들어갑니다. 한성감옥에 갇혀서 독방에 갇히게 됩니다. 독방에 갇혀있으니 너무 심심해요. 너무 괴로워요. 어두운 감옥을 뒤지다 보니 종이조각이 있어요. 그래서 펼쳐보았더니 그게 성경의 한 구절이었어요. 놀랍게도 그것은 마태복음 5 38-48절 말씀이었어요.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내밀어라. 그리고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해라.’ 그런 구절이었어요. 그가 그걸 보더니 , 좋기는 좋지만 안될 소리이지.’ 그리고는 내던졌어요. 그러나 또 심심해서 구겨버렸던 그 구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탁상공론이야.’ 그리고 또 내던집니다. 그렇지만 또 읽어보고 읽어봅니다. 열 번을 읽었습니다. 그 때 그 말씀이 자기 마음 속에 들어옵니다. 드디어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 옵니다. 그는 그 감옥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에는 무슨 왕도가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말씀을 읽고 또 읽을 때 그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고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도 하기 전에 우리가 마음을 닫아버려서는 안되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까지 다시 읽고 묵상해야겠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앞두고 그것을 묵상하기 위해 주일을 뺀 40일 동안 주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는 사순절이에요. 사실 예수 믿는 것, 한 순간 뭐가 보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준 이성을 가지고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게 다가오고 내 생각을 고치고 내 삶을 고칠 때까지 하나님께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일꾼같이 봉사하라.” 이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세상의 종말도 있고 우리의 종말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때를 아시고 주장하심을 믿습니다. 정결한 마음으로 오늘을 귀한 선물로 받아 값있게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날 주저함 없이 감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