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내 영혼아 찬양하라[베르테르효과,감정의법칙,눈덩어리의법칙]/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5. 10:34

070304 내 영혼아 찬양하라 (146:1~10)

성경본문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연예인들이 자살하면 모방자살이 증가합니다. 이런 것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얘기하죠. 독일의 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 소설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필립스라고 하는 사람이 베르테르 효과라고 하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베르테르 효과의 아주 대표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Gloomy Sunday(우울한 일요일)’이란 노래가 있어요. 지난 2000년에는 영화화됐습니다만, 1935년 헝가리의 레조 세레스라고 하는 사람이 작곡한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발표했더니 헝가리 사람들이 무려 200명이나 연쇄 자살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작곡자도 투신자살 했어요. 그 다음에 1936년 파리에서 콘서트가 있었는데 이 곡을 연주하는 중에 드럼을 치는 사람이 갑자기 권총을 꺼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관객들이 경악했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금관악기를 불던 한 사람이 칼을 준비했다가 자기의 가슴을 찌르고 피를 토하고 죽습니다. 난리가 난거죠. 막 사람들이 놀래서 빠져 나갔죠. 마지막 남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이것은 기록에 남아있는 사건이죠.

여러분, 거 사람 대단한 거 아니에요. 마치 금이 간 유리잔 같아요. 겨우 살짝 맞춰놓고 붙여놓은 것뿐이에요. 다시 한 번 떨어지면 완전 박살나는 거예요. 연약한 존재에요. 그 잔에 무엇을 담느냐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어떤 분이 저한테 ‘양희은의 사랑노래 모음곡’ CD를 하나 주길래 받았어요. 다른 가수들이 부른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를 양희은이 다시 부른 거죠. 한동안 이걸 들었는데 말이죠, 이게 사람으로 하여금 우울하게 만들어요. 언젠가 제가 지방에 좀 멀리 갈 때 마침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그 CD를 계속 듣고 가다가 ‘이건 안되겠다’ 했습니다. 잠깐 듣는 것은 좋은데 계속 내 마음을 이 노래에 이렇게 맡기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뽑아버렸습니다.

우리 마음은 가만히 놔두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요 어두운 쪽으로 굴러갑니다. 왜냐, 우리 안에는 죄된 본성이 살아있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살면서 정말로 건강하고 밝고 아름다운 것을 제대로 만나고 그 기쁨을 맛보지 못했거든요. 그러나 노래 한 곡에 눈물 흘리고 옛날의 상처를 끄집어내고 그것이 내 노래인양 그것이 내 이야기인양 빠져드는 것에는 너무 익숙하거든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했어요. 그것은 의지적 결단이 필요한 거예요. 내 마음을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시편입니다. 시편은 모두 150편의 많은 기도와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인간 내면의 아주 다양한 모습이 골고루 다 들어있어요. 거기에는 슬픔이 있고 탄식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그로 인한 분노가 있고 절망이 있습니다. 또 반면에 위로가 있고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용서가 있고 찬양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기도죠. 저는 우리 예배에 기도하시는 분들의 기도를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세심히 듣습니다. , 잘했나 못했나 그것 때문에 듣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거기에 얹어서 같이 기도하는 것이죠. 그걸 표현한다면 꼭 일곱 빛깔 무지개 같아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래 맞아’ 공감하는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에 참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시편 146편부터 150편까지 이 마지막 5편은 시편 전체를 마무리 짓는 결론부분이에요. 찬양이에요. 146편부터 150편까지는 그저 오로지 찬양이에요. 눈물로 있었고 슬픔도 있었고 고통도 있었습니다마는 거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기쁨이 있었단 말이죠. 그러니 이건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인생의 마지막 클라이막스 마무리는 이제는 찬양이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죠.

혹 여러분 부부싸움을 하시지 않아요? 좀 종말론적으로 싸우세요. 무슨 말이냐? 10년 후에 한 번 오늘을 돌이켜 보세요. 아마 기억도 못할 거예요. 무슨 일로 그렇게 했는지 모를 거예요. 물론 남자들은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 구조이니까 더하겠습니다만 여자분들 일지라도 그 자그마한 자존심 문제를 가지고 다툰다는 거죠. 그러니 우리가 결국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터인데 그 때 하나님께 찬양을 하는 그 종말을 바라보고 그 자리에서 오늘을 볼 때 이제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용서해줄 수 있지 않아요. 좀 받아줄 수 있지 않아요.

제가 TV에서 고물상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감동을 받았어요. 30대 초반의 부부이야기에요. 경기도 안성에서 고물상, 말하자면 고물수집상이죠. 그런데 원래 이 남자는 컴퓨터학원을 운영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아가씨를 만나게 된 거예요.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서 그 장인어른을 찾아가서 딸을 주십시오 그랬더니 아니 글쎄 이 분이 내놓는 조건이 “네가 고물상을 한다면 딸을 주겠다.” 이 분도 그런 계통으로 일을 하시거든요. 자기가 보니까 고물상이 겉보기는 그래도 솔잖게 남는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걸 한다면 주겠다. 이 젊은이가 생각하기를 ‘사랑을 위해서 뭔들 뭣하랴.’ 그리고 고물상을 하기로 한 거예요. 그리고 장인 될 사람 밑에 들어가서 3년을 아주 호되게 훈련을 받은 거예요. 그러면서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얘기를 해요. “이 일은 아주 정직한 일입니다. 아주 그대로 땀 흘린 것만큼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받습니다.” 이 현금으로 받는 재미가 아주 좋다는 거예요. 그런데 고물상을 부부가 하니 어떻겠어요. 그 부부가 같이 일하는 모습을 보니 부럽더라고요. 여자가 애들도 있고 집안일도 바쁘지마는 자기도 고물상 하는 집에서 늘 자라왔으니까 이제 남편이 이 때쯤 바쁘겠다 하면 탁 나타나요. 구세주같이 나타나가지고 그 일을 거듭니다. 또 건강해요. 무거운 짐인데도 번쩍번쩍 들어가지고 손발을 맞춰서. 그러면서 부부가 나누는 대화가 말이죠, 얼마나 건강한지 몰라요. 남편이 고맙다고 그러면 또 아내가 말이죠 탁 받아가지고 맞장구를 칩니다. “그래도 내 사랑 내 남편인데 내가 어디 가겠어.” 제가 그랬어요 속으로. ‘목사보다 낫다.’ 아, 은혜 받았어요. 여러분, 이제 우리 하루를 살더라도 좀 건강하게 살아야 되겠어요.

인간에게 있는 원초적 두려움을 오늘 성경이 말해요. 왜 그럴까요? 사람은 언젠가는 죽을 존재거든요. 사람은 병 걸릴까 두려워합니다. 또 사람들에게 어떤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이런 모든 두려움은 결국 하나로 수렴되면 죽을 존재라고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된 거예요.

폴 트루니에는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의학자이며 의사이죠. 그리고 신앙인이죠.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서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책들은 그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삶의 고백이에요. 그는 출생한지 석 달 만에 아버지를 잃고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어요. 그리고는 외삼촌 집에 들어가서 삽니다. 그는 기억합니다. ‘고아의 마음으로 살았다. 엄마의 품에서 살 때에는 천국 같은 따뜻한 가정이었지만 술주정뱅이였던 외삼촌 집에 내맡겨진 이후로는 아무도 그를 돌봐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에 뒤뜰에 있는 나무와 개와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라납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아주 뛰어난 실력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다가 자기 인생에 있었던 세 번의 만남을 얘기해요. ‘내 인생을 변화시킨 세 번의 만남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열여섯 살 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불어를 가르쳐주셨던 디브와 선생님과의 만남이었어요. 그를 한 개인으로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대화의 상대로 받아주고 그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그는 자기가 한 인간으로 대우받고 인정받고 관심을 받는 존재가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렇게 기록해요. 그 이후에 그는 뛰어난 의사가 됩니다. 그리고 칼빈의 신앙을 추종하는 아주 지성적인 신앙인이 돼요. 그러나 그가 고백하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당시 내 신앙은 생명력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서른네 살에 한 지성인들의 신앙그룹을 만나게 됩니다. 'Oxford Group Movement'라고 해서 지성인들이 모여서 서로 신앙을 나누는데 이 모임은 지적인 탐구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겪었던 성공과 실패, 그리고 기쁨과 슬픔, 아픔까지도 열어 놓는 모임이었죠. 그 중에 한 회원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갔어요.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날 밤 그 사람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될까 기대하며 옷을 반듯하게 입고 그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와 하루 저녁 나눈 대화는 놀랍게도 무슨 고상한 철학을 얘기하고 지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 그 분이 자기가 지나온 삶의 어려웠던 일, 실수했던 일, 실패했던 일, 아 이런 것을 턱 열어 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폴 트루니에는 깜짝 놀랍니다. 자기의 기대를 벗어난 뜻밖의 사건이었어요. 그래서 그가 그렇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자기도 생전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 놓았던 쓰라린 기억들, 아픔들, 슬픔들 이런 것을 하나씩 하나씩 내어 놓고 고아로 살았던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쏟게 되는 거예요. 마음을 열고 눈물을 펑펑 쏟을 수 있는 그런 대화를 체험한 거예요. 이것이 두 번째 만남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만남은 아내와의 만남이에요.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아내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이전에 아내는 말합니다. “당신은 내 선생님일 수 있고 내 상담자일 수는 있지만 내 남편은 아니에요.” 늘 그렇게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이 두 번째 만남을 체험한 다음부터 알았어요. 이제는 아내와도 마음을 열고 눈높이 대화를 시작하는 거예요. 이제는 자기의 부끄러움과 자기의 아픔과 고통도 숨기지 않고 다 열어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의술에 있어서도 눈뜨기 시작합니다. 의사가 의학정보를 알고 어떤 의술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내가 상대하고 있는 환자의 인격의 상황을 몰라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거죠. 인격의학이 시작돼요. 그래서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어떤 문제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깊은 대화를 통해서 하나하나 발견하게 돼요. 그러면서 그가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지 못하면 그게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와 육체적 병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고 하는 거죠. 병의 원인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성립되어 있지 않은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그가 나중에 인격의학을 새롭게 발견하고 정리해서 책을 쓰기 위해 원고를 다 만들어 가지고 고등학교 때 자기에게 첫 번째 만남을 주었던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에게 “이런 책을 내게 됐습니다.” 그 선생님이 “그것을 한 번 읽어보라.” 그래서 그 책을 읽습니다. 하루 종일 읽습니다. 해가 저물 무렵 갑자기 선생님이 말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세.” “아니 선생님, 언제 크리스천이 되셨습니까.” “바로 지금이라네.”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서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 선생님은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또 더불어 살던 아내가 먼저 임종을 맞습니다. 아내가 임종을 앞두고 말합니다. “여보, 만약 내가 한 달 전에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다면 아마 나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가게 될 것이고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던 당신의 부모님들도 볼 수 있었을 텐데요.” 그 말에 트루니에는 감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고맙소. 고아로 자라난 나를 만나서 나와 함께 살고 이제 당신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틀림없이 우리 부모님이 맨 앞에 나와서 두 팔을 벌려 반갑게 맞이할 거요. 불쌍한 내 자식을 이렇게 끌어안고 살아준 당신을 반갑게 맞으며 감사할거요.

여러분 한 평생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은 결국 어디에 있습니까. 부를 쌓고 높은 건물을 짓는데 있습니까. 아니요, 우리 안에 인격의 집을 짓는데 있습니다. 자유로운 인생으로, 성숙한 인생으로 시편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모든 고통과 연단의 그 끝에 오로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그런 인생으로 마무리하기를 주님이 원하시죠. 그래서 이 폴 트루니에가 쓴 책 <강자와 약자> 이것은 모든 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감정인 두려움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사람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에요.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감정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거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착각이에요. 강자에게는 아부하고 약자는 무시하는 거짓된 철학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똑같은 두려움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있다. 강한 반응이 있고 약한 반응이 있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그 두려움을 숨기려고 하고 오히려 남의 두려움을 들추어내서 자기 것을 감추려고 하는 적극적 반응이 있다. 그래서 자기 것을 과시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잔소리하고 결국에는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강한 반응이 있다. 그러나 또 하나는 자기의 두려움을 감추는데 실패해서 당황하면서 그 두려움을 노출한 그래서 열등감에 빠지고 결국에는 우울증을 앓게 되는 그러한 약한 반응이 있다. 강한 반응을 가진 자는 내면에 깊은 불안을 가지고 있고 약한 반응을 드러내는 자는 그 내면에 절망을 가지고 있다. 흔히 부부싸움을 할 때 남자는 강자인 것 같이 막 윽박지르고 여자들은 약자의 편에 서죠. 그게 아니에요. 강자와 약자가 아니에요. 다 똑같은 거예요. 어떻게 대응할까요. 두려움이 없는 듯이. 그것은 감정을 억압하는 거죠. 거짓이죠. 언젠가는 터져 나오는 거죠. 또 하나는 거기에 굴복하죠. 그렇다면 그 악순환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죠.

오늘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두려움을 가지고 내게로 나아오라.” 여러분, 성경은 ‘두려움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성경에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이 365회가 나온대요. 거 참 잘됐죠. 1 365일인데 날마다 하루에 한 번씩 듣는 셈이죠. ‘두려워 말라’ 라는 말은 두려움이 있지만 그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하나님이 가지고 있기에 두려워 말라. 어떤 사람이 걱정을 했대요. 늙어서 치매에 걸릴까봐. 하도 걱정을 하니까 의사가 말이죠 퉁명스럽게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부부가 늙어서 치매에 걸릴 수도 있는데 이왕 걸릴 거 먼저 걸리는 게 장땡이죠.” 그랬대요. 먼저 걸리면 아예 잊어버릴 것 아니에요. 뒤에 남는 사람이 손해지.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 연약함을 고백하라. 여기 중요한 법칙이 있어요. 감정의 법칙, 눈 덩어리의 법칙이에요. 눈을 뭉쳐가지고 굴리면 순식간에 커지듯이, 실 패를 두려워하면 그 두려움 때문에 몸이 긴장되어 가지고 결국 실패합니다. 그럼 실패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두려움이 더 커져버려요. 점점 커져버려요. 그러니 그 두려움을 어서 하나님께 내어 맡겨야 돼요. 이 눈 덩어리 법칙은 신앙에도 적용이 돼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그 신뢰에 대한 응답이 있어요. 그게 있기에 이번에는 다시 더 큰 신뢰를 보내게 되고 더 큰 응답을 받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434장 찬송에 보면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이게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에 사고로 그만 실명을 해서 아흔여섯 살 한평생을 어둠 속에 살아야 했던 크로스비라고 하는 한 여인의 신앙고백이에요. 그런데 이 찬송이 지어지게 된 내용을 보니까 50대 중반에 크로스비가 어느 날 단 5달러가 없는 거예요. 이 얼마나 기가 막힌 거예요. 50대 중반에 5달러의 돈이 없다니 말이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이 돈이 꼭 필요합니다. 이 돈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대요. 그런데 기도를 마쳤을 때 초인종 벨이 울리고 어느 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면서 앞을 보지 못하는 크로스비 손에 뭔가를 쥐어줬는데 보니 그게 5달러였죠. 크로스비가 그것을 가지고 감격해서 하나님께 지은 찬송이 바로 434장이에요. 그토록 한국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애창하며 위로를 얻는 찬송이에요. 저는 더 놀라요. ‘아니 글쎄 내 나이에 그래 5달러가 없어 이런 꼴을 당해야 돼, 이런 망신을 당해야 돼’ 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마음을 두고 살았던 그는 오히려 이 자그마한 5달러를 통해서 자기 한 평생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로 재해석합니다. 그리고 찬송해요.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결론을 말합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그 날로 모든 도모를 다 내려놓고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진정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리고 그를 향해 나아가서 찬양하라. ‘할렐루야’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라’ 라고 하는 명령이죠.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이제는 내가 그것을 알았기에 내가 내 마음을 향하여 스스로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래서 아침 첫 곡이 제일 중요해요. 다 준비해 놓으세요. 제가 군 생활 할 때 한번 이런 훈련을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면 얼마나 괴롭고 힘듭니까. 그래서 어느 날 설교집을 읽고 은혜를 받았어요. 아 이렇게 고쳐야 되겠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첫마디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군 생활 참 행복하게 했습니다. 생각을 바꿀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세상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니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움츠러들기 쉬운 우리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찬양하며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