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노래할 이유 있네[형사취수제=하나님이만들어놓은사회안전망]/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5. 14:17

070204 노래할 이유 있네 ( 4:13~17)

성경본문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빛과 소금>이라고 하는 기독교 잡지가 있습니다. 지난 연말 크리스천 천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얼굴들’을 분야별로 선정하는데 경제부문에서는 ‘이건희’ 삼성회장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를 선택한 이유는 ‘국위를 선양하고 국제 경쟁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는 1987년 삼성회장에 취임합니다. 올해로 벌써 20주년이 되는 거죠. 그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제2창업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기업의 체질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언젠가 미국 L.A에 있는 백화점 매장을 둘러보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중앙에 잘 보이는 데는 일본의 SONY Panasonic제품들이 놓여있고 삼성제품을 찾아보니까 저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돌아와서 ‘이것은 하나의 회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룹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 라고 하는 위기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반년 동안이나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그는 1993년 사장단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다 모이게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경영’을 선포합니다. 그때 나온 유명한 말이 있죠. ‘처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라.’ 이제까지 외형을 중시하고 양으로 승부했지만 이제는 기능을 중시하고 질로 승부하겠다. 회사 문을 1년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고치고 시작하자. 그래서 그때 ‘74시스템’이 나왔죠. 아침 7시에 출근하고 4시에 퇴근해서 자기를 계발할 수 있도록 하라. 그것은 나중에 다시 환원되기는 했습니다마는 삼성 전 직원들로 하여금 지금 우리 앞에 긴급한 변화가 있구나 라고 하는 것을 몸으로 겪게 하기 위한 긴급조치였던 것이죠. 그리고 삼성전자에서 휴대폰이 출시되면서 여러 가지로 불량에 대한 말이 많이 나왔을 때 무려 5백억 어치의 휴대폰을 수거해가지고 전 직원이 보는 앞에서 깔아뭉개고 불태우고 이렇게 하면서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죠.

과연 그 개혁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IMF가 일어났을 때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기업들은 순식간에 다 무너졌지만 오히려 미리 준비했던 삼성은 IMF를 통하여 일류기업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섯 가지 핵심가치를 얘기합니다. 삼성이 추구하는 가치는 ‘일류, 탁월함, 변화, 통합, 공동번영’.

그 돈 많다는 삼성회장도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반년 동안이나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여러분 사업이 안 되는 것 그거 당연한 겁니다. 사업 때문에 몸부림치는 것, 거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오히려 그보다 더 뼈 깎는 아픔이 있고 결단이 있을 때에 비로소 이것이 제 궤도에 오를 것입니다. 어찌 기업만 그렇겠습니까. 목회도 마찬가지예요. 한 번은 하나님이 그런 기회를 주시고서야 그를 바로 잡고 쓰신단 말씀입니다. 크리스천인 우리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이 격심한 경쟁사회 속에서도 풍부하게 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해서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가끔 우리가 신앙 간증집을 대하게 되지 않습니까. 특별히 공산주의 치하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에 참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놓치지 말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극심한 핍박가운데 있는 교회와 신앙이 갖는 한계가 또 있는 것이죠. 하루하루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그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는 것이죠. 그 극심한 상황에 어떻게 적응해서 살아날 것인가 밖에는 없는 것이죠. 또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너무나 울타리가 작아서 내세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요. 자기중심적이 되요. 자칫 어디라도 살 길이 있다고 한다면 순식간에 그쪽으로 휩쓸리게 되요. 미신적인 신앙이 되기 쉽다는 말이에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연구를 읽어보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북극지방의 에스키모인은 몇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삶의 모양이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 너무나 극심한 기후상황 속에 적응하는데 온 힘을 다 쏟아버렸어요. 문화를 꽃피울만한 것이 없어요. 삶 자체가 문화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들에게만 제한된 문화이지 세계인과 교류하며 세계문화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그런 문화는 되지 못한다는 거죠. 오히려 문명이 제대로 꽃피고 있는 지역은 사시사철의 변화가 있고 적당한 도전이 있고 거기에 대해서 응전할 때에 그것이 힘을 발해서 삶을 새롭게 하는 문화가 된다고 하는 거죠.

신앙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런 삶의 터전을 주셨습니다. 마룻바닥에 무릎 꿇던 그 옛날로 돌아가야 순수한 신앙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좀 생각이 모자라는 거죠. 이제는 의자 위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의자 위에 올라앉아 있다면 사람은 겸손해질 수 없습니까. 꼭 무릎을 꺾어야 겸손한 것입니까. 그렇게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건 일차원적인 신앙이죠. 평면적인 신앙생활이죠. 아마도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는 더 풍성한 물질과 많은 것들을 주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말씀하셨는가 라고 하는 배경을 살펴보니까 모두 132회 중에서 122회는 시장에서 말씀하셨어요. 또 비유 52개 중에서 45개는 일에 관한 비유였어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셨고 나중에 그것이 교회의 모체가 되었지만 그들은 당시 제사장이 아니라 다 일하던 노동자들이었어요. 예수님 자신이 목수였어요. 우리의 일을 신앙으로 해석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원화되고 형식뿐인 신앙이 되겠지요.

누가복음 12장에 예수님이 부자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때에 사실 그 부자는 열심히 일해가지고 많은 수확을 거두어서 고민하게 됐어요. 이 많은 곡식을 다 어디다 저장할까. 그래서 창고를 하나 더 크게 지어야 되겠다. 이 얼마나 성공한 사람이에요. 얼마나 부지런한 사람이에요. 얼마나 열심히 노력한 사람입니까. 그리고 말하기를 이제 일이 이만큼 끝났으니 좀 쉬어야 되겠다. 아주 합리적인 기업인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성공한 바보다 이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물질을 쌓아 놓은 것에서 자기 삶의 안정을 찾으려 했어요. 결정적 실패의 원인에 거기에 있는 것이죠. 어떻게 하면 우리는 시장에서도 성공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성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폴 스티븐스’라고 하는 교수님이 그의 글에서 하나님께 부요한 자는 첫째, 하나님께 투자하는 사람이다.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그렇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 투자하는 것은 뭘 말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네 손을 널리 펴서 나누고 베푸는 삶. 꼭 돈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같이 하고 시간도 나누고 눈물도 같이 하고 그렇게 함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삶은 더 풍성해지는 것이죠. 두 번째는 네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라. 새로운 피조물로 날마다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 생각이 날마다 깊어지고 넓어지고 새로운 변화를 늘 느끼고 체험하는 것, 거기에 삶의 목적이 있는 거죠. 건강백세가 우리 삶의 목적이겠습니까. 아니요,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풍성함을 맛보고 고백하며 사는 삶, 그게 우리 삶의 목적이죠. 세 번째, 방법을 분명히 하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네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리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붙들어라. 그리고 네 번째,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은 뭐냐, 시작부터 끝까지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시기는 하지만 나하고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그 분은 나를 아시고 나는 그 분을 알고 살아가는 그런 사랑의 관계로 만들어져 가는 것, 그것이 신앙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 ‘룻’이라고 하는 여인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배경은 사사시대에요. 성경 구약에서 사사시대의 특징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요. 그래서 사사기를 다 읽어보면 21장 마지막 절에 결론같이 이렇게 말했어요.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우리말로 쉽게 풀면 그 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제 마음대로 살았다, 제 멋대로 살았다, 제 뜻대로 살았다. 그래서 사사시대에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런 시대에 살았어요.

우리가 삼손을 아시지 않아요. 삼손은 사사였습니다마는 참으로 자기의 삶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사사였을 만큼 당시 사회는 어지러웠어요. 그런 사회일수록 약자들은 더 고통을 당하죠. 여기 ‘나오미’라는 여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기근이 들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살기가 어려워서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이라는 옆 나라로 이주를 갔어요. 그곳에 살다가 남편이 죽었어요. 남편이 죽으니까 의지할 바 없어서 아들들을 부랴부랴 장가를 들였어요. 모압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았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두 아들 역시 죽었어요. 과부만 셋이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젊은 며느리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제 돌아가라. 나를 따라서 이스라엘에 가봐야 너희들의 길은 가시밭길뿐이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서 새롭게 사람을 만나서 그곳에서 살아라.” 한 며느리는 돌아갔습니다마는 룻이라고 하는 며느리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나는 끝까지 어머니와 함께 가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사람들이 나오미를 맞이합니다. 아니, 이게 나오미냐고,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느냐고, 사람을 몰라보리만큼 변했다고 말합니다. 나오미가 말합니다. “더 이상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아주시오.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으니 나를 이제 ‘마라’라고 불러주시오.” ‘마라’라는 말은 쓰다는 말이에요. ‘나오미’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기쁨이라는 뜻이에요.

요즘 먹고 살기가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요즘 인터넷 신조어가 많이 나왔는데, ‘이태백’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거예요. ‘사오정’ 사십오 세면 이미 정년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새로 추가된 단어가 있어요. ‘십장생’이래요. 십대도 장래를 생각해야 된다. 그런 단어 중에 또 ‘나오미’도 있더라고요. 나오미는 뭐냐 그랬더니 외모를 가꾸기에 적극적인 중년여성들을 일컬어서 나오미족이라 그런대요. Not old image(낫 올드 이미지)’ 이 말을 줄여가지고. 더 이상 늙기 싫다 이거죠. 여기 나오미의 원래 히브리어의 뜻은 ‘기쁨’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나 나오미는 스스로 말합니다.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마시오. 나를 마라라고 불러주시오.” 쓰단 말입니다. 괴롭단 말입니다. 고통스럽단 말이죠. 그런데 이제 여기를 보세요. 우리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전략이 있어요.

전 세계인들 특별히 미국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인물이 있죠. ‘오프라 윈프리(Ophra  Winri)'. 그녀는 제대로 된 혼인관계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사생아에요. 또 자기 자신도 가난 속에 살았고 자라면서 많은 이웃들에게 성폭행 당했고 열네 살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죽었어요. 그 인생의 상처로 말하면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견딜 수 없어서 마약을 한 적도 있어요. 또 그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어서 먹다가 막 몸무게가 100kg에 육박한 적도 있대요. 그런 사람이었건만 그는 오늘 날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나누는 사람이 됐어요. 자기 삶을 활짝 열어요. 그래서 누가 그러죠. “당신은 사생아에다가, 미혼모에다가, 마약을 했고, 뚱뚱했고......” 그렇게 말할 때 “So what?(그래서 어쨌다는 거예요) 그가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책을 읽어보면 "참으로 이건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나를 붙들어주셨기에 나는 나를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한 분명한 계획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습니다.” 이게 출발이에요. 그렇다면 정말로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상처를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우뚝 세워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거예요. 한사람 한사람에게 그 삶을 향한 하나님의 맞춤전략이 있는 거예요.

요즘 ‘Private Banking’이잖아요. 돈 있는 사람들의 자산을 관리한다. Private Banking, 하나님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맞춤으로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오늘 그 예를 들었어요. 영적인 어두움과 가난이 있고 기근이 있고 어려운 그 세상에 덜렁 남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과부의 삶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를 오늘 보여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전략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에게 만남의 축복을 주셔요. 지금 룻이 이렇게 말했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겠습니다.” 룻의 입장으로 보면 청상과부에요. 그는 남의 나라에 가서 살아야 되요. 특별히 유대인들은 모압사람들을 무시했어요. 하나님의 구원하고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라고 무시했어요. 그런 곳에 가서 살아야 되요. 이국땅에서, 가난과 싸우며 살아야 되요. 그래서 보리 추수, 밀 추수할 때가 되었으니 가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 추수하는 논바닥에 가서 이삭을 줍는 겁니다. 부지런히 이삭을 주어야 그저 그 식구들 입에 풀칠하고 사는 거죠. 나갔어요. 성경을 보니까 그의 걸음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갔더라. 사람에게는 우연이었지만 하나님에게는 숨겨진 계획이 있었어요.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또 성경을 보니 마침 그 때 보아스가 일꾼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와서 보게 되다가 이 룻을 보게 되는 거죠. ‘우연히, 마침’, 사람은 그렇게 표현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안에 계획이 있는 거죠.

두 사람이 만났어요. 그런데 보아스가 이미 소식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젊은 모압여인이 시어머니를 따라 이곳 땅에 와서 시어머니를 섬긴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어요. 그런데 바로 이 아가씨가 그 아가씨인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그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저가 이삭을 주우니까 야박하게 다 추수하지 말고 좀 더 많이 땅에 흘려 놔라. 또 물도 마실 수 있게 하고 점심도 자기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야 되는데 그러지 말고 일꾼들하고 같이 먹게 하라. 호의를 베푸는 거예요. 여러분 뭐든지 이 첫 만남과 첫 인상이 중요해요. 웃음이 없는 사람은 장사할 생각 마세요. 식당에서 음식도 중요하지만 주인이 친절하게 웃어야 밥맛이 나지 무뚝뚝하면 누가 그 집에 밥을 먹으러 가겠어요, 체하지. 활짝 웃어야 되요. 오늘 안으로는 피눈물을 흘릴지라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믿음으로 탁 덮고 활짝 웃어야 되는 거예요. 고독하게 돌아서서 눈물짓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 줄 알아야 세상을 사는 거죠. 여기 보세요. 모압 여인,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이런 호의를 받을 때에 그는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사람이 이래야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죠.

, 이제 집에 돌아왔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보아스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제야 시어머니가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보아스를 만났단 말이냐.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우리의 먼 친척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전략 두 번째, 하나님은 제도를 준비해놓으셔요. 가난한 자를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제도가 있어요. 하나는 ‘형사취수제’에요. 옛날 부족사회에서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더불어 잡니다. 그리고 아이를 얻으면 그 아이는 형의 아이로 돌려놓습니다. 그래서 형의 내려오는 유산을 그 과부와 아이 몫으로 넘겨주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뭐에요. 남의 집에 시집 온 여자를 지켜주기 위한 ‘과부 보호법’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이름으로는 집안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한다고 했습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에요. 또 하나 있어요. 기업 무르는 법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먹고 살게 없어서 자기 집의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그 토지가 낯 모르는 사람에게 팔려가지 않도록 하라. 할 수만 있다면 그 친척이 그것을 되물려 사라.” 무르는 법이 있었어요. 기업을 무르는 법이 있었어요.

지금 나오미가 너무너무 가난합니다. 나오미가 생각합니다. 보아스에게 우리의 형편을 이야기하자. 이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사회 안전망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 않거든요. 재산에 손해가 나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법으로 어떻게 만들어놨느냐 하면 형이 자식도 없이 죽었을 때 형수를 위하여 시동생이 하나님이 정한 법에 따라서 그렇게 해야 되는데 시동생이 그걸 거부할 때에는 형수에게 권리가 있어요. 동네 장로들을 불러가지고 재판에 고소를 해요. 시동생을 불러요. 그리고는 시동생에게 재판장이 물어요. “네가 이 형수와 자지 않을 것이냐, 형의 집안을 세우지 않을 것이냐.” “나는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냐면 형수가 가서 그 얼굴 낯짝에다가 침을 뱉어요. “나를 데리고 자지도 않는 이런 나쁜 놈.” 침을 뱉어요. 그리고 그 사람의 신발을 벗겨가지고 뺨을 때리게 되어있어요. 참 이상한 문화죠. 그러나 그 중심을 이해해야 되요. 그렇게 하면서 가난한 자를 보호하며 살게 하신 거죠. 그래서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신 벗기운 자의 집’ 이런 불명예가 영영히 붙어 다니게 한 것이죠. 자 그러나 이것은 말이죠, 왜 이렇게 엄한 법을 만들어 놨느냐 하면 그만큼 사람들이 안 했다는 얘기에요. 했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안 하면 이렇게 망신 줄 테니까 이렇게 하라고 법으로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껌 뱉지 마라. 이게 무슨 얘기에요. 하도 껌을 뱉으니까. 안 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전략 세 번째, 사람을 준비시킨 거예요. 보아스는 돈 있는 사람이고 신앙의 사람이고 놀랍게도 가나안 정복 전쟁 때 기생 ‘라합’이 낳은 아이에요. 그러니까 보아스는 일찍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에요. 자기 어머니로부터 어떻게 이 집안이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백성 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사람이에요. 이제 모압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나오미가 말이죠, 룻을 깨끗하게 목욕을 시키고 잘 준비시켜 가지고 추수하는 날 타작마당으로 가게 합니다. 원래 도둑들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주인이 타작마당에서 잠을 자게 되어있었는데 보아스가 잠자는 그 발꿈치 이불을 살짝 들추고 거기에 가서 누웠어요. 한밤중 타작마당의 러브스토리죠. 보아스가 자다 말고 새벽에 발에 뭐가 걸리기에 몸을 뒤척이다가 보니까 깜짝 놀랐어요. 웬 처녀가 누워있는 거예요. 누구냐고. “저는 룻입니다. 당신은 우리 집안을 책임지실 분입니다. 나를 받아주시고 우리집안을 책임져주십시오.” 이게 유혹이 아니고 러브스토리예요. 하나님이 사람을 살려 가시는 방법이에요. 제가 이것을 읽으면서 참 하나님도 로맨틱한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구나. 신앙생활이라는 게 막 뻑뻑하고 딱딱하고 이런 게 아니에요. 우리 인간의 서로 좋아하는 감정과 이런 것들이 다 엮어져 가지고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들어가서 한 가족을 일으키고 생명을 구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결정적 만남을 준비하시는 거예요. 만남의 축복이 늘 있습니다마는 때를 따라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결정적 만남을 주시는 거예요. 사실은 성경을 꼼꼼이 읽어보면 보아스는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에요. 룻은 아주 젊은 과부에요. 아버지와 딸같이 나이 차이가 커요. 그러나 그들은 결혼하게 되요. 그리고 아이를 얻게 되요. 그리고 그 아이가 다윗 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것이죠.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의 기업을 무르신 분이다. 내가 사단에게 빼앗겼던 생명과 소중한 모든 것들을 다 되찾아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략을 깨닫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해 놓은 사람이 있고 축복된 만남이 있고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이제 마음을 활짝 열고 순종하며 살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나를 위한 계획이 있으니 이제 그 계획을 하루하루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러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돈 많은 사람도 내일 무얼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 극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우리의 일용할 양식도 공급해 주시고 또한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사랑, 또 만남의 축복, 그리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복된 인생이 되도록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음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마음을 열고 주님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