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나의 멘토 한미성 선교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8. 9. 18:15

나의 멘토 한미성 선교사 |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17 |추천 0 |2015.08.03. 17:58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31 

8월의 말씀산책

 

나는 1955년에 내한, 1967년에 한국을 떠난 교육 선교사 한미성(Melicent Huneycutt) 교수를 나의 멘토로 생각하고 지금도 존경한다. 그분이 전주 기전여고 교장(1957-1962)으로 계실 때 나는 그곳 교사로 취직했으며 한남대학교 교수로 계실 때(1963-1964) 그곳 대학에 학생으로 편입하여 그분을 모시고 조교로 일했다. 그분은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충격적으로 깨닫고 살게 해 주신 분이다. 기전여고에 채용된 후 신입 교사 환영 파티가 있었는데 그 때 신입교사인 나에게 교사들은 노래를 시켰다. 술 파티를 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방법으로 흥을 돋우는 듯했다. 나는 미국인 교장 앞에서 수학교사지만 영어도 잘 한다는 치기로 영어 노래를 했다. 그것이 케세라 세라라는 당시 영화 주제가였다.

그런데 나는 다음 날 교장실에 불려가서 한 마디 들었다. 그 때 한 교장은 기독교인은 케세라 세라하고 살면 안 됩니다.”하고 미소를 띠며 말했는데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평생 잊지 않고 살고 있다. 기독교인은 케세라 세라하고 살면 안 된다는 기독교 윤리를 터득한 것이다. 그 뒤 나는 영어공부를 더 하고 싶어 일기장을 두 권을 사서 일주일씩 교대로 영문으로 일기를 써서 한 권을 드리고 교정해 준 것을 받는 동안 쓴 또 한 권의 일기장을 드리는 식으로 교정을 해 받았다. 그분은 제가 미국 유학을 희망한다는 것을 알고 초급대학 졸업으로는 유학이 힘들다고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편입시키고 첫 학기 등록금을 대주며 생활비가 필요할 거라고 나를 조교로 써 주신 분이다.

 

수학과 학생을 어떻게 영문과 조교로 쓸 수 있는가? 그러나 그분은 여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도 나를 대동해서 시골 교회에 나가 설교할 때 통역을 시켰고 한국 고무신을 팔아 선교비를 마련할 때도 내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대학에 와서는 서정주 시인을 만날 때에도 갑사까지 나를 대동했었다. 그분은 한국 선교사는 한국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선교사 촌에서 나와 한국인 마을에서 온돌방에 살면서 여대생 한 사람을 양녀로 그리고 나이 어린 남자애를 양자로 삼아 가정 도우미를 써가며 길렀다. 영문과 과장으로 있으면서 시내에서 좀 떨어진 장동에 있는 미국인 캠프의 사병들을 불러 저녁 때 쿠키대접을 하면서 학생들과 소그룹 회화를 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대학이 작았지만 시내에서 영어연극 공연을 하면 국립대학 공연보다 훨씬 더 큰 환영을 받았다. 이런 그분을 도우면서 나의 신앙은 성장했다.

 

나는 정말 케세라 세라하며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상과 짝하며 살지 않았는지 지금도 많이 반성한다. 사실 어렵고 힘들 때는 될 때로 되라고 그렇게 살기도 했다. 은퇴한 지금 나는 새삼스럽게 그 때 일을 생각하며 지금까지는 다 연습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정말 온 우주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고 나도 살아 있는 우주관을 갖고 사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새로운 결심을 한다. 그분은 지금도 나이가 90이 넘었는데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선교의 열정을 굽히지 않고 계신다.

 

선한 사람의 걸음을 여호와께서 정하시니 그분은 그 길을 기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