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과학은 신앙의 적인가|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10. 6. 10:04

과학은 신앙의 적인가|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17 |추천 0 |2015.10.05. 06:24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40 

10월의 말씀 산책


   예수를 믿게 된 나는 한남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집합론을 배우게 되었는데 나는 여기서 수학이 셈을 하는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고 철학과 통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집합이란 분명하고 뚜렷이 구분되는 총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대상, 이른바 원소들의 모임을 말한다.”라고 어렵지만 퍽 순진한(naive)’ 정의를 하고 있다. 더 설명하기를 집합은 원소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그 원소가 집합에 들어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어야 하고 집합 속에 있는 두 원소를 꺼냈을 때 그 두 원소가 같은지 틀린지를 알 수 있도록 정의 되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수학 자체는 평소 내가 생각해온 수학이 아니었다.


   수학자 칸도어(Georg Cantor, 1845-1918)는 집합론을 만든 사람인데 자기가 정의(定義), 정리(定理)를 만들고 증명하곤 했다. 그러면서 집합에는 그 원소의 개수가 무한한 무한 집합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무한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터부시되고 손을 대지 못했는데 그는 무한도 어느 무한이 더 큰지 조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 집합에 속해 있는 원소의 개수를 그 집합의 기수(基數)라고 하는데 자연수 N=1, 2, 3, 4, …⎬의 기수를 최소의 초한수라 하고 직선상의 점집합의 기수를 연속체의 기수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최소의 초한수보다 분명히 크고 연속체의 기수보다 분명히 작은 기수를 가진 집합은 없다는 증명을 하려다 실패하고 드디어는 말년에 우울증에 걸려 1918년에 세상을 떴다. 그는 당대에 두려워하던 무한집합 사이의 기수를 비교하는 일을 과감히 도전하여 짝수, 정수, 유리수들은 다 자연수와 기수가 같다는 것을 중명했고 또 연속체의 기수는 자연수의 기소보다 크다는 것을 증명했다. 무한해서 셀 수 없는 집합의 크기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에 칸토어는 다음과 비슷한 예를 든다. 10밖에 셀 수 없는 원시인이 11마리의 오리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그저 많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50마리의 양과 52마리의 오리를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양 한 마리와 오리 한 마리를 쌍으로 우리에서 밖으로 내보내면 남은 쪽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크기를 비교할 때는 세는 것보다 비교하는 것이 앞선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그는 모든 무한집합의 크기를 비교했다. 후에 칸토어는 모든 집합에는 반듯이 그 기수보다 큰 기수를 가진 집합이 있다는 것도 증명했다.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집합은 얼마나 커질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 집합인가? 집합의 집합도 집합인가? 그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의 집합도 집합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모아놓은 것도 집합인가? 그 집합보다 더 큰 집합이 반드시 있다는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모아놓은 집합보다 더 큰 집합은 무엇인가?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수학자는 M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라고 하면 그런 집합 M은 모순이라는 역설을 내면서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나는 세빌리아 모든 사람들 중에서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면도해 준다.” 라고 주장한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빈정댔다. 스스로 면도를 하면 자기주장에 어긋나니 그럴 수 없으며 면도를 안 하면 자기주장에 의해 면도를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는 면도를 할 수도 안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집합론을 너무 순진한 정의의 토대위에 세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후에 이 집합논의 모순을 없애기 위해 공리론적 집합론이 이 순진한 집합론을 대체 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뉴턴의 고전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로 대체 되었다. 과학은 이렇게 계속 그 가정(假定)을 수정해 가면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원시인이 모른다고 생각한 신비한 세상은 계속 과학으로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그럼 신은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는 대로 구석에 몰려 그 설 자리를 잃고 물러나는 것일까? 인간은 자기가 아는 것만 알고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아직도 베일에 숨겨진 하나님의 신비를 알아내기란 요원하다. 뉴턴은 자기는 아직도 발견되지 아니한 큰 대양이 자기 앞에 누워 있는데 자기는 매끄러운 조약돌이나 보통 것보다는 더 예쁜 조개껍질을 찾으며 기분 풀이를 하고 있는 어린애와 같다고 말했다. 과학은 신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태곳적부터 신이 숨겨 놓은 것을 찾아 진리에 접근해 가는 학문이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믿는 자에게는 허락 되었으나 안 믿는 자에게는 아니 되었다.


게오르크 칸토어(1845-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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