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마하트마 간디`의 약속과 일화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11. 11. 10:49

 

인도의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다.

간디 앞에 무릎을 끓은 어머니는 아들을 도와주기를 간청했다.

 

“선생님 제 아들을 도와주세요. 아들이 설탕을 너무 좋아해요.

건강에 나쁘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안 들어요. 그런데 아들이 간디 선생님을 존경해서 선생님께서 설탕을 끊으라고 하면 끊겠다고 합니다.

 

간디는 소년의 눈을 바라보며 그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도와드릴 테니 보름 뒤에 아드님을 데려오십시오.”

“저희는 선생님을 뵈러 아주 먼 길을 왔습니다. 그냥 돌려보내지 마세요. 제 아들에게 설탕을 먹지 말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간디는 다시 한 번 소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보름 뒤에 다시 아드님을 데려오십시오.”

 

보름 뒤, 그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다. 간디는 소년에게 말했다.

“얘야, 설탕을 많이 먹으면 건강을 해치니 먹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그 어머니는 고마운 뜻을 전하면서 간디에게 물었다.

“선생님, 궁금한게 있습니다. 보름 전에 제가 아들을 데리고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왜 보름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하셨습니까?

 

간디가 대답했다.

“실은 저도 설탕을 좋아합니다. 보름 전에는 저도 설탕을 먹고 있었거든요. 아이에게 설탕을 먹지 말라고 하기 전에 제가 먼저 설탕을 끊어야 했습니다.”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아이에게만 강요할 수 없었기에 자신이 먼저 좋아하는 것을 끊고 남에게 권유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다.

 

 

신발 한짝 (간디의 일화)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인도의 소년 "간디"가 올라탔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짝이 벗겨져
플렛홈 바닥에 떨어졌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간다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짝을 벗어 그 옆으로 던졌다.

플렛홈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짝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승객들은
간디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를 묻는 한 승객의 질문에
간디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저 신발 한짝을 주웠다고 상상을 해보십시요.
그에게 그 신발 한짝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내가 신을 수 없다면 다른 누군가라도
한 짝이 아닌 한 켤레를 주워서
제대로 신도록 던진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싶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고
기차가 멀리 가기 전에 즉시 행동으로 옮긴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성인 "마하트마 간디"는 어려서부터
사고방식이 다른가봅니다.

 

 

영국에서 유학한 후 변호사가 된 간디는 인도에서 변호사로서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는 대영제국에 속한 다른 지역인 남아프리카로 직업적인 성공을 찾아 떠났다.

젊고 미숙한 변호사였던 그는 사람들에게 유능함을 인정받아 세속적 성공을 거둔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원했다. 나탈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난 다음 그는 트란스발주의

프리토리아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게 되었다. 여기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기차는 나탈의 마리츠버그 역에 정차했다. 한 백인이 간디가 타고 있는 객실로 들어 왔다.

그리고 승무원에게 유색인종과는 한 객실에 타고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승무원은 간디에게 3등차칸으로 가라고 말했다. 간디는 항의했다. 간디는 기차 밖으로 쫒겨났다.

그리고 추운 대합실에서 밤새 떨어야했다. 프리토리아까지 가는 남은 여정동안 간디

1등 칸으로 여행하겠다고 계속 요구했지만 그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점점 화가 났다. 그리고 인도인이 3등 시민으로 대접 받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 밤을 지새게 되었다. 프리토리아에 도착한 그는 인도인들을 모았다.

그리고 인도인에 대한 부당한 처지에 대처하기 위해 그들을 규합했다.

이 날의 회합이 바로 변호사 간디가 정치적 지도자로 전환하는 첫 순간이었다.

간디는 후에 자신이 걷게 된 정치운동의 사명이 바로 마리츠버그의 기차역에서 시작되었다고 술회했다.

 

"나는 인도인 정착자들의 힘든 상황을 글로 읽고 귀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함으로 세세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남아프리카는 자존심이 있는 인도인들이 살 곳이 못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런 사태를 개선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는것에 점점 더 사로 잡혀갔다"

 

마리츠버그에서의 일화는 우연의 선물이었다. 누구도 그런 일이 일어날 지 알지 못했지만 그 일은 결국

간디의 인생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이 일 이후 그는 다시는 세속적 성공에 연연한 젊고 미숙한 변호사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마리츠버그 열차역의 사건은 그를 도약시켰다.

 

 

  

간디의 위대함은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를 하나로 결집시킨 데서 가장 잘 드러나지만 그의 가정 속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간디의 손자인 아룬 간디간디의 아들, 즉 아룬 간디의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화간디의 위대한 자녀 교육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저 역시 그렇게 자녀들을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아룬 간디가 17살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회의에 참석하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룬 간디에게 에게 집에서 15킬로 떨어진 사무실까지 차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고 아룬 간디는 차를 운전하며 아버지를 사무실에 모셔드렸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한 아버지가 아룬 간디에게 말했습니다. “차가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서 귀에 거슬리는 구나. 수리를 해야겠다. 차를 정비소에 맡긴 다음 5시까지는 다시 사무실로 오너라. 5시까지 꼭 돌아와야 한다.”

아룬 간디는 시내를 지나 외곽에 있는 정비소에 갔습니다. 정비사에게 차에 대한 설명을 한 후 차를 맡기고 간단히 점심을 먹고 돌아왔습니다. 차는 금방 고쳐졌는데 겨우 12시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고 5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남은 아룬 간디는 시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극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극장을 표 한 장에 영화 두편을 보여주는 곳이었는데 한편만 보고 나오려던 간디는 영화에 빠져 두편을 다 보게 되었고 시간은 6시 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랴부랴 차를 몰아 아버지 사무실로 가니 아버지는 사무실 밖에서 혼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룬 간디를 보자 안도감에 큰 숨을 내 쉬셨습니다. 혼을 내지도 않은 채 무슨 사고라도 났나 해서 걱정했다고 하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아룬 간디는 순간 거짓말을 했습니다. 고장 원인을 찾지 못해 한참 걸렸는데 겨우 찾아 수리를 끝내서 이제야 아버지에게 올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아버지는 차를 타라는 아들의 말에 꼼짝도 안 하고 서 있다가 아들에게 자신을 걸어서 가겠다고 했습니다. 15km나 되는 거리를 언제 걸어가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나는 지난 17년 동안 너를 올바르게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내가 네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구나. 어떻게 해야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걸어가련다. 네가 거짓말 할 정도로 내가 나쁜 아버지였다면 용서해 다오”.

아버지는 걷고 아들은 차를 천천히 운전하면서 울먹이면서 따라갔습니다. 둘은 천천히 걷고 운전하며 집에 도착하였는데 다섯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집에 도착한 아룬 간디의 아버지는 말없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아룬 간디는 평생을 간직할만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 후로는 어떤 사람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섯 시간 집을 향해 걸었던 아버지의 모습과 행동이 화를 내고 혼을 내는 것보다 더 깊은 영향을 아룬 간디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인도의 독립을 성취시킨 간디는 정치적 독립 못지않게 경제적 독립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섬유 생산의 자급자족을 강조했다. 당시 인도는 대부분 영국에서 들여오는

면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간디는 이러한 경제적 종속이 계속되는 한 진정한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어느 날 간디가 면섬유의 자급자족을 강조하는 강연을 하고 있었는데,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답답한 소리 그만 집어치우고, 차라리 스스로 목이나 매시오!”

그러자 간디는 화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선 목을 매는 데 필요한 끈을 생산한 다음에나 할 일이지요.”

 

 

 

 

잘 알려지지않은 간디의 모습

마하트마의 유래

우리가 마하트마 간디라 칭하는 그 분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이다
.
마하트마는 주지하듯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
그를 성자(聖者)의 반열로 추앙하는 후대 사람들이 붙였음직한 이름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를 처음 마하트마로 칭한 것은 그 자신이다.
나중에는 마하트마도 부족해서인지 "진정한 마하트마"라고 자칭했다
.

 

 

젊은 시절의 간디는 더더욱 평화와 거리가 멀었다.
그는 보아전쟁, 줄루전쟁, 1차 세계대전 등 총 세 차례에 걸쳐 
"
조국" 영국을 위해 참전신청을 제출했다.
다행히(?) 늑막염으로 실제 참전은 불발.

히틀러가 체코를 침공했을 때, 그리고 유태인을 학살했을 때
간디는 일관되게 체코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싸우지 말고 자살할 것"을 권고했다.

 

히틀러의 만행이 점차 심해지자 견디다 못한(?) 간디는 히틀러에게 편지를 썼다.
친구가 편지의 효과를 묻자 "히틀러는 착한 사람이니 곧 중지할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히틀러도 착한 사람이라면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인가?  
간디 식의 평화주의가 학살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은 항의편지를 쓰는 것이다.
간디는 가끔 스스로 흥분될 때에는 평화주의를 살짝 포기한듯한 발언도 했다. "인도의 자유를 위해서 백만명이 희생된다해도 상관없다"는 주장이 그 예. 

 

 

순결주의

간디는 순결주의자로도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는 마치 간디가 평생을 독신으로 산 것처럼 알려져있다
.
간디는 결혼했고 말년에 들어 순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조를 실험하고 싶어했다.
그 방편으로 젊은 처자들을 벌겨벗겨 같이 동침하는 시도를 자주 했다. 자신이 그 여성을 범하는지 안하는지 실험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자신이 어떻게 지난 밤의 성적 유혹을 극복했는지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처자들을 범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자신을 마하트마로 평가하면서
모든 남성들이 자신과 같이 순결하기를 바랬다. 그는 굳이 결혼을 한다면 일생 3~4회만 부부관계를 맺을 것을 권했고 (도올 선생도 이와 유사한 말을 했다, 철학자들의 임무가 부부관계의 이상적 횟수를 규정하는 것인지 궁금하다.그 이상의 관계를 맺는 자들은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실험에 참여한 여성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섭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 여성들이 간디를 절대적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한 인격적 모멸감을 느꼈을 것은 자명하다
. 간디 선생은 인정하기 어렵겠
만 여성에게도 인격이라는게 있다.

 

 

이중적 가족관
그는 모든 생명체를 존중할 것을 주문하지만 정작 가족에게는 매몰찼다
.
(사실 대부분의 성자들은 가족을 버리는 공통점을 갖는다
.)
그는 부인을 ""에 비유하며 (인도적 관습으로는 이 자체가 모욕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로 부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다고 하며
부인을 멀리했다고 한다. 간디는 고등교육을 받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부인은 물론 모든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부인이 폐렴에 걸리자 현대의학을 거부한다는 명분으로 부인에게 페니실린 주사조차
놓지 못하게 하여 
결국 부인은 사망했다.
그러나 부인의 사망 직후 자신이 말라리아에 걸리자 자신은 서둘러 주사를 맞았다
.
나중에 맹장염에 걸렸을 때는 수술도 받았다
.
부인의 죽음을 통해 현대의학을 수용하게 된 걸까

 

종교적 화해에 대한 이중성

간디는 모든 종교에는 나름의 진리와 구원이 있으니 모두 인정하고 "갈등없이" 평화롭게 살자고 주문한다. 실제로 그는 힌두교적 배경을 타고 났으나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의 통합을 주제로 한 노래도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아들이 이슬람 교도 여성과 결혼하려고 하자 극렬히 반대했다.
반대 사유는 그 여성이 이슬람 교도라는 것과 순결을 부정하고 결혼을 탐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아들은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했고, 간디는 그 아들과 절연한 후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간디식 평화주의의 오묘함

그는 인도의 악명높은 카스트 제도에 대해 "서로 조화롭게 살아라"라는 매우 모호하고 수구적인 가르침으로 일관한다. 예컨데 하루 종일 죽도록 노동하고도 품삯을 받지 못해 어린 아들을 굶겨죽이게 된
노예 신분자가 간디에게 하소연을 할 때도 그는 "조화롭게 살아라"를 반복한다.
목숨을 걸고 도적질이라도 해서 아들을 살려야겠다고 하면 "차라리 죽어라"라고 한다.
이것이 그의 비폭력의 이면이다.
기존의 질서 아래에서 큰 고통이 없는 자들에게는 매우 평화롭게 들리겠지만 착취 당하는 낮은 자들에게 간디는 그저 웃음을 띤 방관자였을 뿐이다. 간디는 귀족 출신이었으며, 대영제국의 변호사임에 자부심을 느꼈으며 천민과 접촉해서는 안된다는 사상(불가촉천민 사상)의 소유자였다.
 
간디는 1917년 구자랏의 아흐메다바드에서 신생 노동조합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곳은 1870년대부터 면방직과 제조업이 융성했던 곳으로 영국의 맨체스터에 버금갈 정도였다
1차 세계대전으로 섬유산업이 절정에 오르면서 아흐메다바드의 경기도 폭등했다.
그럼에도 아흐메다바드의 노동자들은 오히려 임금 삭감이라는 철퇴를 맞았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들고 일어났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제조업자들은 간디에게 접근했다.
간디는 제조업자들에게 노동자의 의무와 권리를 명시한 노동조합(Majoor Mahajan Sangh)
결성을 지원토록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의 진정한 권리를 위한 갈등과 투쟁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예컨데 파업과 같은 쟁의행위는 금지한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 이슬람이거나 힌두 극빈자층에 속하는 직조공과 염색공들의 권리는 
중세 수준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MMS
는 종교적·신분적 차별성을 바탕에 깐 동업조합이었지 노동조합이 아니었다
(
한겨레 21 2002년06월19 )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간디가 죽은 후에도, 인도가 독립한 후에도 해결되지 않아
만성적 빈곤, 빈부격차, 노동탄압으로 이어진다.

 

 

 

젊은 시절의 간디는 더더욱 평화와 거리가 멀었다.
그는 보아전쟁, 줄루전쟁, 1차 세계대전 등 총 세 차례에 걸쳐 
"
조국" 영국을 위해 참전신청을 제출했다.
다행히(?) 늑막염으로 실제 참전은 불발.

히틀러가 체코를 침공했을 때, 그리고 유태인을 학살했을 때
간디는 일관되게 체코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싸우지 말고 자살할 것"을 권고했다.

 

히틀러의 만행이 점차 심해지자 견디다 못한(?) 간디는 히틀러에게 편지를 썼다.
친구가 편지의 효과를 묻자 "히틀러는 착한 사람이니 곧 중지할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히틀러도 착한 사람이라면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인가?  
간디 식의 평화주의가 학살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은 항의편지를 쓰는 것이다.
간디는 가끔 스스로 흥분될 때에는 평화주의를 살짝 포기한듯한 발언도 했다. "인도의 자유를 위해서 백만명이 희생된다해도 상관없다"는 주장이 그 예. 

 

 

입장을 바꾸어서

간디의 전 생애를 관장한 사상은 평화나 사랑이라기 보다는 "말썽없는" 삶이었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그 무엇과도 마찰없이 지내고 싶어했다.
만일 간디가
일제시대의 조선인이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우지 말아라
-
내선일체에 협조해라
-
조선의 독립을 꿈꾸되 어떠한 폭력도 행사하지 말아라

-
조선의 독립이란 일본지배 하에서 자치권을 얻는 것을 의미하며,
  
그 정도면 족하다
조선인은 결혼하지 말 것이며, 아이도 낳지 말아라.
- 아이를 낳더라고 학교는 보내지 말아라.
- 조선의 노동자는 고용주에 성실히 협조해라. 노동쟁의나 파업따위는 생각도 말아라.
-
일본인이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면 차라리 자살해라.

누가 이런 주장을 반기겠는가?
두 말 할 나위없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다.

이래도 간디가 존경스러운가?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 간디를 존경하는 사람이다.

출처 - http://paper.cyworld.com/1000228272/721760


출처 : 업장소멸
글쓴이 : 수목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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