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살든지 죽든지[도스토예프스키,톨스토이솔제니친소설의영향력]/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1. 10:29

060521 살든지 죽든지 (로마서14:1-8)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제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아나톨 프랑스 라고 하는 작가의 단편이 생각납니다. 정작 어린 시절에는 이게 무슨 내용인가 했습니다만 두고두고 그 의미가 새롭습니다. 한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그 광대는 천하게 여겨졌거든요. 그 마음에 소원이 있었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성당에 갔어요.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니까 그래 신부님과 수녀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성당에 들어가서 시간을 좀 가져도 되겠습니까? 저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도 간청을 하기에 허락을 했어요. 그러고 얼마 지나서 나오는데 얼굴에 땀이 줄줄 흐르고 있어요. ‘도대체 뭘 하다가 나오기에 땀을 흘리나.’ 며칠 후에 또 왔습니다. 또 간청합니다. 그래 또 들여보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니 광대가 들어가서 뭐하는 거지? 그리고 어느 날 문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봅니다. 뭐 이렇게 쿵쿵 뛰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조용히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습니다. 성당 안에는 성모 마리아 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앞에서 광대가 사람들 앞에서 펼쳐 보이던 그 묘기를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보이고 있는 거예요. 신부가 깜짝 놀라가지고 문을 꽝하고 열면서 뛰어 들어가서 말했습니다. 당장 나오라고. 뭐하고 있는 거냐고, 감히 천한 광대가. 그래서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냅니다. 그런데 그 때, 성모마리아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해서 계단을 내려오는 거예요. 그리고는 광대가 뻘뻘 흘린 그 땀을 자기 옷자락으로 닦아줍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원했던 그 광대의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그런 이야기 이지요.

여기 신앙의 내용과 그것을 어떻게 표현 하느냐 하는 형식의 문제가 있어요. 예배 형식이 있어요. 그러나 광대는 자기의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려 했고 하나님을 만났다 라고 하는 이야기이지요. ,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되겠습니까. 문화의 문제가 있어요. 내용도 중요하고 형식도 중요합니다. 복음도 중요하고 그 복음을 문화라고 하는 그 그릇에 담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궁극적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찾아서 그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만 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나요.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시간과 장소가 같다는 게 아니에요. 표현 방법은 다 다양하지만 핵심은 하나에요.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셨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럴 때만 삶의 변화가 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민은 왜 우리가 날마다 애쓰는데 우리의 신앙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 하는가. 사실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거 같아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 같아요.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고 문제가 있어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냅니다. 로마 교회 형편을 들어보니 뭔가 문제가 심각해요. 교회 안에 큰 갈등이 생겼어요. 특별히 교회의 구성원이 이방인들도 있고 또는 유대인들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문화가 다양해요. 문화가 다양하고 습관이 다양하고 표현이 다양하다보니 충돌이 생겼어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뭐냐 음식 문제였어요. 술과 고기 문제였어요.

저는 음식에 대해서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맛있다고 끌리는 것을 별로 겪어보지 못했어요. 그런 사람이 뭐 보신탕 먹겠습니까. 그건 생각지도 않지요. 그러다가 말입니다. 제가 참 오래 전인데요 어쩌다 제가 두 끼를 굶었어요. 너무 배고픈 거예요. 마침 그때 식사모임이 있어서 급히 갔어요. 그런데 공교롭게 모였다는 집에 가보니까 보신탕 집이더라고요. 이것마저 안 먹으면 저는 세끼를 굶을 참이에요.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요. 그래서 살기 위해서 먹었는데 맛있더라고요. ‘, 사람들이 이래서 이렇게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제가 지방에 큰 교회 부목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좋은 자리를 마련해서 저를 환영하고 축하하는 자리인데 특식이 나왔다는데 뭔가 하고 보니까 보신탕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 제가 아휴 그거 못 먹습니다.” 그랬으면 준비한 분이 얼마나 민망하고 함께 앉은 분들은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그래서 속으로 하나님이 다 때를 맞추어서 훈련을 시키시는구나.’ 같이 즐겁게 먹었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거 제 돈 주고 먹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았어요.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그래서 누구라도 그거 먹고 싶다 그러면 아, 그거 하지 말라고 얘기하진 않습니다. 알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음식이던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아먹으면 그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자유한 사람이므로 모든 음식은 감사함으로 받아먹을 때,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좀 생각이 다릅니다. 여러분 여기 들어와 보니 이 이슬람 사람들이 우리보다는 훨씬 그들 나름대로 종교에 좀 율법적이라고 보일 만큼 엄격하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것도 그렇고 음식도 가려먹고 돼지고기 절대 안 먹지 않습니까. , 그와 같이 유대인들도 그렇게 이제까지 훈련 받았어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복음으로 모든 음식은 다 받아먹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생각뿐이지 그들이 마음으로는 흔쾌히 수용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그게 문화의 문제지요. 사도 바울 자신은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이방인 도시에서 살았던 디아스포라였고, 양쪽의 문화를 익히 알고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말합니다. “모든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아먹는 자는 강한 자라. 이 음식 저 음식을 가리는 것은 연약한 자다.” 이렇게 일단 구분합니다.

여러분, 우리 도서실에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이 있어요. ‘마빈 헤리슨이라고 하는 문화인류학자가 쓴 책인데, 재미있게도 ‘왜 중동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안 먹는가?’ 하는 것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한 대목이 있어요. 레위기 11 7절에는 돼지는 굽이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못하므로 그건 먹지 말아라. 그건 부정한 짐승이다.’ 그렇게 종교적인 계율로 정해놨습니다마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삶의 구조 속에 왜 그걸 먹지 못하도록 했는가 하는 것을 분석하고 있어요. 경제적으로 이야기하면 돼지를 사육하고 기르는 투자비용에 비해서 돌아오는 수익이 상대적으로 너무 적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척박한 그들의 삶 속에서 돼지고기는 기가 막히게 맛있지만 그것을 일반화시키기에는 너무나 많은 투자비용이 들어가는 거지요. 경제적으로 적합하지 못하다는 거지요. 그런 삶의 구조 속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계율로 하나의 공동체를 운영해 나가기 위한 지혜로 그렇게 정했던 거지요.

, 이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음식을 가려먹는 자들은 연약한 자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음식을 가려먹음으로 말미암아 가질 수 있는 문제는 뭐냐 하면 신앙의 자유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는 거지요. 이것저것 가리는 것이 많게 될 때 그렇게 되지요. 역시 입맛 있는 사람이 좋은 거예요. 어디 가든지 어느 나라 음식이든지 먹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지요. 그 사람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강한 자이지요. 자유로운 사람이지요. 음식에 있어서 자유로운 거지요.

또 하나, 두 번째는 자칫 이러한 것을 지키고 이러한 것을 함으로 이런 행위를 강조하므로 신앙이 자칫 여러 가지 규율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 될 수 있다라는 거지요. 그러나 신앙의 핵심은 내가 어떤 규율을 지키는 그것 이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어마어마한 그 은총에 접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그 사랑에 부딪히는 거지요. 잘못하면 먹는다고 하는 여러 가지 계율이 하나님의 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체험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쉽다라는 거지요.

이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첫째는 서로 비판하지 말아라. 먹을 수 있는 자는 먹지 못하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아라. 왜 그러냐? 먹는 자나 먹지 못하는 자나 모두 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신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다 다릅니다. 입맛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다 달라요. 서로를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가 일하다 보면 다 달라요. 우리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김치를 해내도 다 다른 거예요. 고춧가루 많이 쓰시는 분 있고 적게 쓰시는 분 있어요. 다 달라요. 많다 적다 그저 한 마디 얘기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두 마디는 하지 마세요. 오늘은 저 분이 음식을 했으니까 저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세요. 그리고 나중에 내가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맛있게 하세요. 그거로 족한 것입니다. 서로 비판하지 말라.

두 번째는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왜 남의 종을 비판하느냐. 알고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종이에요. 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러므로 비판할 일이 있으면 좋은 방법이 있어요. 기도 하는 것. 비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일을 마음에 놓고 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유대인의 안식일을 굉장히 갑갑하고 답답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요. 안식일의 그 규례가 얼마나 복잡한지 이스라엘의 어느 호텔은 말이지요. 아예 안식일이 되면 자동으로 모든 층이 자동으로 서고 자동으로 열리게 돼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버튼을 누르는 것도 일이니까. 가만히 있으면 문이 열리고 타면은 층마다 열려서 자기 층으로 내려 갈 수 있도록. , 이거 좀 우스워 보이지 않습니까?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하는 것이 자칫 잘못하면 이렇게 생활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래 어느 분이 한 랍비에게 물었답니다. “그 안식일을 지키는 게 골치 아프고 복잡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랍비가 말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주일 내내 복잡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일하고 그렇게 바삐 돌아가다가 안식일만 되면 저는 전화도 안받고 신문도 안보고 모든 일로부터 나는 자유 합니다. 오직 나와 하나님과 그리고 내 가족과만 시간을 나눕니다. 이 날 내가 온전히 쉼으로 말미암아 난 다시 새로운 한 주간을 생기 있게 일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을 나를 억압하는 굴레로 이해하는 사람하고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나에게 안식과 자유로움을 주신다고 느끼는 사람하고 이만큼 다른 거지요. 똑같은 일을 놓고도 어떻게 보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해요. “서로 비판하지 말라.” 그러나 이렇게 소극적으로 비판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제 한 걸음 더 뛰어 나갑니다. 우리의 신앙은 음식 문제를 놓고 언쟁을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눈을 들어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보라는 거지요.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의 것이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

솔제니친이라고 하는 러시아의 소설가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예전에 <수용소 군도>라는 책을 통해서 소련의 참혹한 실상을 서방 세계에 폭로한 사람이지요. 그는 그로 말미암아 붙들려가서 시베리아에서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여론이 소련을 압박해서 그는 드디어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1983년에 템플턴상을 받게 됩니다. 인류를 위해서 수고한 공로를 인정받는 상을 받으면서 수상 연설에서 말합니다.

공산주의 러시아 혁명으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러시아 사람 6천 만 명이 죽었습니다. 엄청난 일이지요. 공산주의 60년 동안에 소련에서 6천 만 명이 죽었다는 겁니다. 이건 정말 참혹한 재앙이지요. 모든 교회는 다 문을 닫아야 했어요. 많은 성직자들이 죽어야 했어요. 많은 신도들이 죽어야 했어요. 처참한 박해와 고통 속에 빠져 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도대체 왜 우리 민족이 이러한 비극과 불행을 겪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책을 읽고 궁리하며 스스로 책을 써내 기도했습니다만 내가 발견한 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동네 어른들이 서로 수군거리면서 나누던 그 말 한마디를 기억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여러분, 민족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엄청난 수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솔제니친이 이런 눈물과 고통 속에서 좌절과 절망 속에서 신앙을 되찾게 된 결정적인 회심의 기회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그 속에 있는 인간의 악함과 그리고 놀랍게도 그 속에 은총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 뜨게 되었기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게 됩니다. 1970년대 소련이 말할 수 없는 그 여러 가지 억압 속에 있을 때, 소련 사회의 지식인 사회에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에 놀란 사람들이 물어 봤대요. “아니, 어떻게 공산주의로 철저히 세뇌되어 있고 감시 체제와 억압 속에 갇혀 있는 그 세계 속에 어떻게 신앙의 불길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랬더니 한 사람이 말합니다. “모든 교회는 문을 닫고 성경은 다 불 태워 졌지만 그러나 정말로 인간의 고통과 거기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판매금지 못한 결정적 실책으로 인해서 그 소설책을 통해서 인간의 죄악을 발견하고 처절한 고통 속에 있는 자기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적으로 보면 사회적으로 부적응자였어요. 그는 술에 빠진 사람이요. 도박하는 사람 이예요. 많은 여인을 취했던 사람 이예요. 또 간질로 인해서 평생을 고생했던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이 젊은 시절에 그 억압적인 짜아르의 전제정치에 분노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정치 집단에 들어갔다가 체포됩니다. 짜아르 황제는 이 겁 없는 젊은이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명령을 내립니다. 사형시키라고 그런데 모의 사형이에요. 젊은이들을 놀래주기 위해서 가짜 사형식을 한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감옥에 갇혀 있던 그들을 끌어냅니다. 광장으로 끌어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광장 기둥에다 묶고 소총군대들이 총에 탄알을 장전합니다. 그리고 겨냥하여 이제 막 방아쇠를 당길 찰나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 각본대로 짜아르가 보낸 전령이 말을 타고 순식간에 들이닥치면서 짜아르의 명령이다. 멈춰라. 사형을 중지하라.” 그리고 그들 모두 시베리아로 무기징역을 보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순간에 자기의 죽음을 직면합니다. 죽음을 직면하는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어려서부터 배웠던 그 신앙. ‘주님 나를 받아 주십시오.’ 그 한마디 밖에는 내뱉을 것이 없었어요.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 외에 의지할 아무런 존재가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그가 감옥으로 되돌아와서 시베리아로 가기 전에 쓴 글을 보면, 그는 완전히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에요.

이제 무기 징역조차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예요. 시베리아로 가서 10년을 고생합니다. 그런데 오직 감옥에서 허용되었던 책은 유일하게 성경이었습니다. 어느 한 여인이 넣어준 그 성경 한 권을 가지고 10년을 삽니다. 마디마디 구절구절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드디어 그는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그의 글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그 분만이 온전하시고 아름다우시고 그 분만이 나의 모두가 되신다. 만약에 누가 나에게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 진리를 증거 한다 할지라도 나는 차라리 그 진리보다 그리스도를 택하겠다.

여러분, 그가 신앙을 되찾으니까 그 다음부턴 모든 순간이 다 은혜로 다가와요. 그가 죄수가 되어가지고 감옥에 끌려갈 때, 어느 자그마한 소녀가 쪼르륵 달려 와 동전을 하나 줍니다. 그러면서 “불쌍한 아저씨 이거 가지세요.” 그는 한 평생 그 동전을 간직합니다. 그것마저도 나에게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의 손길로 이해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일들을 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총으로 이해합니다. 언제 풀려날 길 없는 그 감옥 속에서 아침에 덧문을 열 때, 어디선가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여보시오, 힘내시오. 이 바깥도 그 곳 못지않게 힘들어요. 그러니 힘내요.” 그 말 한마디에 소망을 갖습니다.

여러분, 그는 말합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 그 많은 죄수들과 더불어 살면서 인간 내면의 숨겨져 있는 악마성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마음에 숨겨져 있는 또 하나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그 사랑으로만 회복될 수 있는 인간존재에 대해서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나와서 소설을 씁니다. 깨어져가는 인간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어가는 사람들을 쓰게 됩니다. 60년 공산주의 지배와 6천만 명이 죽는 그런 참혹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성경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자기 삶을 새롭게 해석한 그 사람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 만나야 할 많은 사람들을 일깨워 놓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거지요. 한마디로 절대 은혜예요.

여러분, 어떻게 살기를 원합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체험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다시 한 번 이런 핍박이 와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다시 전쟁이 와야 되겠습니까. 또 다시 고통이 와야 하겠습니까.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는 재난을 당하는 거예요.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이렇게 보내셨어요.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어요.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교 현장에 부르신 거예요.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지난번 월드컵 때만해도 1승이 목표였어요. 1. 그런데 벌써 4년 만에 1승은 아무도 이야기 안 해요. Again 2002' 4강 이상 더 큰일을 저지를 수 있다. 간이 부었어요. 자기 실력을 몰라요. 그러나 이러한 자신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도스토예프스키 같이 한평생 고통 속에 있는 한 사람을 변화시키셔서 6천만 명이 죽어가는 그 지옥 같은 세상 속에 복음을 전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를 여기에 보내셔서 새로운 환경 속에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다면 남은 일은 딱 한 가지예요. 이미자 노래를 듣고 싶으세요? 주파수를 잘 맞추세요. 거기에 다 들어 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 그 복음에 우리의 인생의 주파수를 맞추세요. 우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야 할는지 내 자녀는 어떻게 될는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응답이 다 들어 있는 것이지요.

 

기도

하나님, 절망 속에 있던 한 사람을 만나주시고 변화시키시므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셨듯이 연약하고 오늘 연약하고 허물이 많지만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시옵소서. 이제는 이곳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