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말씀이 육신이 되어[말씀成肉身 명품설교,진리와 은혜]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0. 14:11

0512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 1:14-18)

성경본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이 많은 대주교가 교회에서 기도합니다. 날마다 기도 합니다. “하나님...” 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날 “왜 그러냐” 라고 말씀하시자 그만 깜짝 놀라가지고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하나님’ 하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냥 불렀을 뿐이에요. 응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에요. 오랜 세월 살아온 하나의 습관이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으니 습관을 넘어서서 이제는 미신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많지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깨어서 만날 수 있을까요?

제가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약간의 갈등을 겪습니다. 우리 애국가 가사에 보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렇게 쓰여 있어요. 순간 볼 때마다 이걸 하느님이라고 그냥 부를까 아니면 하나님이라고 살짝 고쳐서 부를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을 얘기 합니다. 그래서 물론 그 분들과 우리들이 하느님 얘기함으로써 의사가 소통되는 바가 있겠지요. ‘하느님그러면 전통적인 하늘님이지요. 하늘에 계신 신이지요. 그러나 하나님하면 그건 기독교적인 고백이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거지요. 많은 신이 있지만 하나님이야말로 한 분이신 그 분이시다. 그런 고백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그 분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 앞에 계시되신 그 하나님을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냐? 이게 더 중요해요.

한국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많은 광고 간판을 보게 되는데 그 중에 'Jesus loves you'라고 쓴 간판을 보게 됩니다. 고려 은단 사장님이 서울 소망 교회 장로님인데 기업 광고를 그렇게 하셨어요. Jesus loves you' 이것은 God loves you'하고 같은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차이가 나는 거지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할 때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기에 문제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적 문화와 한국적 심성으로는 ‘God loves you'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자기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Jesus loves you'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와 그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고백해야 하는 것이지요.

, 그러니까 그 문화에 따라서 어떻게 복음을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들어 왔을 때 보니까 한국 사람들은 대문에서부터 저 뒷간까지 부엌과 온갖 곳곳에 귀신들이 다 있었어요. 그래서 선교사들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다 그만두고 그저 딱 하나 예수 귀신 믿읍시다. 예수 귀신이 제일 강한 신이요.” 이렇게 이야기 했답니다. 그렇게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심성에 접근했어요. 그러나 그들이 일단 예수를 받아들인 다음부터 어떻게 했느냐 말씀을 가르칩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감성도 중요하고 이성도 중요합니다. 오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이 말씀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그리스말로 '로고스'라고 말합니다. 로고스. 대학을 다녀보신 분들은 교양 철학을 통해서 아시겠습니다만, 그리스 철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마지막 실체가 바로 로고스였어요. 그 로고스. 원리라고 하는 것. 궁극적 원리, 온 만물이 그로부터 나온다고 여겨지는 그 마지막 존재를 '로고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글 성경으로 번역할 때, 초기에는 ‘태초에 도가 계시니라.’ 전통적으로 도라고 해석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개혁 성경이 다시 번역될 때는 그것을 보다 더 쉽게 풀어서 말씀이 계시니라. 이것은 철학적 이해예요. 정적 이해예요. 그 말씀은 그냥 존재할 뿐이지 우리 삶 속에 들어와서 개입하는 분이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또 하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있어요. 그것은  유대 사람들의 종교적인 이해예요. 신앙적인 이해예요. 히브리말로 ‘따바르’. 이 ‘따바르’라고 하는 말씀은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주신 말씀. 그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고, 때로는 심판하시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위로하시고, 약속을 주셨던 그 말씀. 헬라 사람들의 로고스와 히브리 사람들의 ‘따바르’라고 하는 그 말씀을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로 묶어서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고스’ 이신 말씀, ‘따바르라는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몸소 그 몸으로 감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학자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죠.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한 자일지라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방법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지요.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 사건이지요.

그리고 예수를 만난 제자들, 사도들에 의해서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과 승천 사건 이후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를 고백하게 됩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우린 이제 더 줄여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온 대로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메시야다. 예수가 내 인생의 모든 물음에 해답이 되시는 분이다. 그리고 오늘 내 삶 속에 모든 문제와 모든 물음에 응답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이 신앙고백을 헬라어로 ‘케리그마’ 라고 합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증거된 예수. 그리고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거 하는 거 아니에요. 교회는 구제도 열심히 하고 서로 모여 교제도하고 열심히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생명력은 성경공부 많이 하는데 있는 거 아니에요. 가난한 사람 열심히 돕는데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끼리 열심히 서로 교제하는 거 아니에요. 가장 근본적으로는 이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에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곳입니다.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곳이지요.

그래서 칼 바르트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번 오신다. 첫째는 인간이 되어 성육신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다시 재림하여 그 몸을 보이실 것이다. 그럼 두 번째는 뭐냐? 그 분은 성령으로 교회를 이루면서 이 땅에 오신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이다. 그래서 교회는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돼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 교회 식구들은 어떤 모델, 어떤 모습이기를 원하느냐, 이미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정도 주시고 일터도 주셨어요. 다 분량에 맞게 공부도 시키고,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셨어요. 그래 여러분의 일터를 열어 주셨어요. 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내 인생의 해답이 되시고, 오늘 이 문제에 응답해 주시고,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분명한 고백을 가슴에 분명히 안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일터에 가서 마음대로 일하세요. 열심히 일하십시오. 어거스틴이 한 말대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라. 그리고는 네 마음대로 하라.

오직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요. 예수 그리스도 그 고백이 분명히 살아 있다면,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여러분을 기질대로 은사대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해야 힘이 있는 겁니다. 팔방미인이 굶어 죽는다고 하잖아요. 우직하고 단순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좋아 하세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 분명한 사람, 사람이기에 비행기 날듯이 뭔가 은혜가 넘치고 신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사람이기에 비행기 내려앉듯이 우울할 때도 있고 침체될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는 거예요. 오히려 그 때, 감사해야 되요. 그게 사람의 참모습이에요. 그래야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끄시고 주도하시는 은혜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때가 있는 거예요. 그걸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로고스’란 말씀과 ‘따바르’ 라 하는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그 말씀을 받아서 제자들이 증거하고 나가 복음을 전할 때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다. 그러니까 교회는 말씀을 놓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그 말씀은 기록됩니다. 그 말씀이 성경이에요. 성경은 객관적으로 기록된 계시예요. 그러나 사실은 성경이 쓰여 지기는 했습니다마는 교회에 대해서 성경은 지극히 적었어요. 글을 아는 자들만 읽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에는 성경은 있었으나 그것은 사실 뚜껑이 덮여 있었던 거예요. 성경 없이 그냥 믿는 거지요.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는 의식과 여러 가지 그림과 조각을 통해서 예수를 믿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철학적으로 해석해 놓은 많은 전통과 예식을 가지고 그냥 그렇게 하나님을 믿었던 거예요. 이성주의에 맞았던 거예요. 그러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쭉 이어져 올 때, 그 곁가지에는 소위 이단으로 분류되었던 수많은 신앙 분파가 일어났어요. 그들의 특징은 뭐냐. 그렇게 지식적으로만 아는 그런 하나님 그런 예수는 우린 거부하겠다. 뭔가 뜨거운 체험으로 몸이 흔들리고 뭔가 마음에 불이 떨어지는 그런 은혜를 받아야 한다. 주관주의지요. 그러나, 여러분 이 두 가지가 다 균형을 이루어야 해요.

아주 오래 전인데요. 경상도 김천 근처에 가면 용문산이 있어요. 6.25전쟁 이후에 얼마나 사회가 가난하고 혼란하고 어지러웠습니까. 아무런 소망이 없었어요. 그야말로 하늘나라만 기다리는 그런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문산 기도원이 일어났잖아요. 그런 세월이 다 지난 몇 년 전에 제가 그 곳을 올라가 봤어요. 참 느껴지는 게 많았어요.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 말세다 하고 다 올라와서 집을 짓고 살았어요. 그게 지금 다 폐허가 되었지만, 초·중·고등학교 큰 건물이 있었어요. 옛날에는 집단을 이루고 그 곳에서 주님 오실 날만을 기다리면서 거기서 날마다 예배하며 살았던 거지요. 사람은 그 시대상황을 온전히 다 벗어나지 못해요. 그 누가 똑똑해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새롭게 깨닫고 믿겠습니까. 아마도 우리가 그 시대에 태어나고 거기에 누군가와 연결돼 있었다면, 우리도 거기 올라가서 초막집 아래 모여 가지고 날마다 박수치며 부흥회하면서 울부짖고 기도하면서 주님 빨리 내려오시라고 기도했을 거예요. 한국 사회가 얼마나 급속하게 변하는지 신앙의 모습도 급작스레 변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다 옛날에 부흥회 쫓아다니며 박수치고 기도하고 그게 다 우리에게 영양분이 되었지요.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신앙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비로소 성경이 열리기 시작 했습니다. 라틴어로만 고집하던 성경을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해서 독일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전했어요. 그러자 사람들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고 부흥이 일어났어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그 순간 진정한 신앙은 시작되는 거지요. 그래서 설교를 하게 되는 거지요. 설교란 뭡니까? 기록되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거지요.

그저 자기 아내를 처음 만난 여자처럼 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가슴이 뛸까요? 얼마나 설렐까요? 성경을 오늘 내게 주신 말씀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다면, 그건 말할 것도 없지요. 살아있는 신앙이 되는 거지요. 이 연애라는 게 얼마나 희한합니까? 뭐 별것도 아닌 두 사람이 만나 번쩍하며 눈이 맞는 순간에 저 사람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그 몇 마디 말하는데도 온 마음이 실리고 인생이 실리고 또 거기에 감동이 있고, 글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이 편지를 쓰겠다고 난리를 치고 시를 모르는 사람들이 입을 열어 시를 이야기하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은혜라는 거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만나야 합니다. 루터는 말합니다. 기록된 성경은 알고 보면, 사실은 죽은 글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만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거기에 살아있는 놀라운 생명이 꽃피게 된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질 때부터 성도는 성도되고 교회는 교회되는 것이지요. 일을 좀 잘한다고 막 설치면서 열심히 하면 제가 칭찬은 합니다만, 속으로 걱정합니다. ‘아이고 저러면 안 되는데.’ 기도는 안하고 일만 열심히 하면 걱정스러워요. 저러면 산통 다 깨고 자기도 엎어지고 다른 사람 상처주고, 교회를 어지럽게 합니다.

오늘 말합니다. 말씀이신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 , 의에 균형을 맞추어야 하지요. 진리-객관적 계시에요. 은혜-내게 주시는 주관적 계시. 거기에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할 수 있어요. 뭔가 뜨겁게 박수치고 이렇게 하면 대개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요.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서울 소망교회에 가보면 30분전부터 예배당이 꽉 차기 시작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지만 조용합니다. 말하는 사람 없어요. 그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에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이에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분주한 세상 일상 속에서 T.V를 켜면 시끄러운 노래가 나오고 일주일에 단 한 시간도 조용히 내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는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한 시간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10 20분 먼저 나와서 조용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균형 있는 신앙은 객관적인 계시 진리와 주관적 계시인 은혜를 겸손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아내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모든 진리를 우리가 다 알겠습니까. 내가 알고자 노력했습니다만 다 모르고 죽습니다. 이제 모르는 부분은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이 있어야 되요. 그게 바로 믿음이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잘 나기만을 바랍니까. 아니요,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거짓됨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고 내게 약속해 주신 주님의 소망을 꼭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요, 절망도 교만이에요. 언제는 자기 힘으로 살았습니까? 절망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적당히 하세요. 그것도 교만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더불어 사는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그저 주님이 주신 사랑이 있기에 그 사랑으로 위로의 말 한마디를 던지는 거예요. 눈빛 하나, 손길 하나, 다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요.

오늘 아기 예수로 오신 성육신하신 그 주님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이 시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번 주에 성탄을 맞습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주님을 올바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도 진리와 은혜를 사모할 뿐만 아니라, 겸손하게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주님 앞에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를 살고 올 한 해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주님의 성탄을 맞습니다. 아기 예수로 오신 그 놀라운 사건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 내게 주시는 은혜, 그리고 그것을 올바로 받을 수 있는 겸손의 그릇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