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지혜로운 신앙(비유, 율법주의,치매증상)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1. 14:31

2009 9 20 주일예배

지혜로운 신앙

( 11:16-19)

  1.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동무를 불러
  2.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 불어도 너희가 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 요한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 들렸다 하더니
  4. 인자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아주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20대 두 딸과 함께 양잿물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그는“우리는 이걸 먹어도 죽지 않는다. 성경 마가복음 16 18절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지 않느냐.”했다는 거예요. 성경을 잘못 이해한 까닭에 빚어진 비극이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이란 책이 있어요. 1965년 전후해서 이곳 인도네시아 띠모르 지방에서 성령께서 초대교회 때와 같이 역사하셨어요. 그쪽이 기독교 지역이지만 명목상의 기독교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불이 붙었어요.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이 40년 전엔 얼마나 가난했겠어요. 그런데도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어느 마을의 악한 사람들이 그 먼 길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독이 든 음료를 내놓았어요. 감사하게 그걸 받아 마셨어요. 시간이 지나도 고꾸라져 죽을 줄 알았는데 멀쩡한 거예요. 그 일로 인해서 그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회심하고 돌아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불붙는 마음으로 나아간 사람들이 이렇게 악한 자들 때문에 위험에 빠질 때에 하나님이 저들을 지켜준다 라고 하는 뜻이지 번연히 독이 있는 줄 알면서 마시면 죽게 돼있는 거예요. 이런 신앙을 `문자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무조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신학 부재의 신앙이죠. 아주 극단적인 예가 되겠죠.

   또 신학적인 이해의 도움 없이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어요. 그 중 하나가 흔히 `알레고리Allegory' 라는 것 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비유가 나오잖아요.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장례식에서 애곡을 해야 할 때도 함께 슬퍼하지 않는, 마음이 무뎌지고 강퍅해진 사람들의 이야기' 이게 뭐예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말씀을 들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들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세태를 비유하는 거예요. 알레고리는 비유이지만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이솝우화와 같이 이야기 속에 뜻이 담겨 있죠.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 후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인생에 비유해서 말합니다. 애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살던 우리의 모습을 가리키고 가나안은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게 되는 천국을 상징하고 오늘은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의 광야생활과 같다. 여러 가지 환란과 풍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로 우리를 도우신다. 이런 게 다 알레고리예요. 알레고리 그 자체가 틀렸다는 게 아니에요. 너무 지나치면 안 되는 거예요. 특별히 구약성경을 읽을 때 뭐든지 나무만 나오면 십자가에다가 비유한다든지 붉은 색만 나오면 예수님의 보혈이다라고 연결시키는 것은 위험한 거죠. 먼저 구체적인 사실과 역사적인 상황을 잘 이해한 다음에 그것이 무슨 뜻을 가졌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되는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교회에서 극장에 가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저는 사실 극장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영 마음에 걸렸었어요. 주일은 나가서 밥 사먹고 극장 가고 그러는 거 아니라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한 권고였지요. 제가 어렸을 때도 이러했으니 그 옛날엔 더 엄격하지 않았겠어요? 어떤 선교사님이 그랬다는 거예요.“극장에 가지 말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그게 어디에 기록되어 있나요?”그랬더니“사도행전 19 31절에 기록돼 있다.”그러나 문맥을 보면 어떤 내용이냐 하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했더니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돌아오면서 우상들을 버리고 불태워 버리니까 우상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손해가 막심해 졌어요. 이 사람들이 데모를 한 거예요.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던 몇몇 사람을 붙잡아서 어디에 모였느냐 하면 에베소에 유명한 연극장이 있단 말이에요. 거기에 모인 거예요. 거기서 자기들끼리 데모를 하고 난리가 난 거예요.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이 그곳에 가려고 하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말립니다. `극장에 가지 마시오.' 전혀 상황이 다르죠.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필요한 구절만 따서 쓰는 것, 아주 위험한 성경해석이에요. 조심해야 되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성경에서 무얼 찾아야 될 것이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위시해서 신구약 모든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요한복음 5 39절의 이야기와 같아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나를 증거하는 것이니라.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할 때 항상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돼요. 특별히 복음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증거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주인공이에요.

   복음서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이에요.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 분은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신 하나님의 종이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고백이에요. `그 분은 구약이 이제까지 예언했던,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시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증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분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으로 행하신 분이다.' 이게 누가복음의 증거예요. 드디어 요한복음에서는 `그 분은 사람의 몸으로 오셨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고 하나님이셨다.' 이게 성경의 고백이라구요. 생각해 보세요. 누군들 처음부터 예수님을 이렇게 알았겠어요? 그건 아니죠.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정확하게 AD 29-30이에요. 그런데 신약성경 중에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생각하는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전서는 AD 50년이에요. 그런데 데살로니가 전서에 보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분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하고 있어요. 불과 20년 만에 십자가에 죽은 나사렛 청년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어요.

   과연 제자들이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걸 알아야 되잖아요. 복음서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이시다.

메시야이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분이시다.

 

그 말씀 중에는 특별히 예수님이 실제로 했다고 여겨지는 그런 말씀 또는 예수님의 독특한 습관을 찾아낼 수가 있어요. 학자들이 연구해서 찾아낸 거예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말씀과 행동 가운데 특징적인 게 뭐였느냐 가장 으뜸가는 게 뭐냐 하면 죄사함을 선포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거짓되고 더러운 것을 물리치려 했어요.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세리와 죄인같이 부정한 사람들하고는 상대하지 않는다.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했느냐.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해놓고 그것을 멀리했어요. 음식도 가려서 먹었어요. 여기 이슬람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금기시하지만 그것은 구약에서 빌려 온 거예요. 유대인들도 돼지고기를 금기시해요. 구약성경 레위기 11 7절에 보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돼있거든요. 이것이 그들이 거룩함을 지키는 방법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행하셨어요. 세리와 죄인, 그 사회에서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만나주셨어요. 만져주셨어요. 오히려 저들을 가까이하고 만지므로 말미암아 저들을 거룩케 한다고 생각했어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율법의 울타리 안에 가둠으로써 거룩함을 지키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므로 그 거룩함을 확산시켰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 그들에게 나아가서 친구가 되고 그들의 문제를 들어주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거예요. 죄사함을 선포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인자人子', 이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서 쓴 아주 독특한 용어예요. 사람의 아들,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독특하게 그렇게 표현하셨어요. `인자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왔노라' 그러나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던 거죠. 십자가에 죽기까지 저들을 사랑하셨던 거예요. 예수님을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이었어요.

   며칠 전 뉴스를 보니까 `오은선'이라고 하는 여자 분이 히말라야를 등반하러 출발했는데 히말라야 산맥에는 8,000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14개 있어요. 그녀는 이제 마지막 봉우리를 오르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의 14개의 봉우리를 정복한 여인이 되는 거예요. 참 대단한 일이지만 그야말로 목숨을 건 일이죠. 바로 몇 달 전에 그 사람이 다른 봉우리를 정복했을 때 며칠 사이로 `고미영'이라는 유명한 여성 등반가가 올라가서 등정하고 내려오다가 추락해서 죽었잖아요. 그건 목숨을 건 일이죠. 만약에 히말라야 마지막 봉우리를 올라선다면 세계 최초 14개 봉우리를 모두 등반한 여성이 될 것이고 우리 국민들에겐 엄청난 감동을 주겠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도전을 받아서 나도 한번 올라가야지 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말이에요, 온 국민이 하던 일 다 내려놓고 에베레스트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건 아니죠. 그 의도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로 말미암아 일상에 지쳤던 우리들이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각자 맡은 일에 온 힘을 쏟아 붓는 것이죠. 여기에 참 의미가 있는 거죠.

   그런데 `엄홍길'이라는 유명한 산악대장이 탄식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요즘에는 에베레스트를 올라가는 것이 유행이 되어서 몇 천불씩 돈을 주면 등반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쉽게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 있대요. 그러면서 타락했다고 얘기해요.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주 겸허한 마음으로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나도 거기 올라갔다 왔다라고 하는 자기만족과 자랑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고 있는 거죠.

   저는 이건 또 하나의 재미있는 비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오은선대장과 같이 목숨을 걸고 올라가는 사람은 마치 세례요한과 같구나. 세례 요한은 나실인이었어요. 구약에 나실인이 있어요. 즉 나실인은 술 마셔도 안 되고 시체를 만져서도 안 되고 머리를 깎아서도 안 되고. 왜 그렇게 했느냐,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하나의 살아있는 홍보물이에요. 세례 요한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구별됐어요. 그는 어려서부터 빈 들에 나가서 살았어요. 아주 독특한 사람이죠. 하나님의 율법을 아주 철저하고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죠.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간 자는 비록 가장 어린 자, 작은 자일지라도 세례 요한보다 큰 자다.' 무슨 말이에요?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에요. 예수님이 오시므로 신약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어요. 세례 요한은 마치 사람들에게 장례식에서 곡하는 것과 같아요. 회개를 촉구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살면 망한다. 회개하라고 촉구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요. 함께 울지 않았어요. 율법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죠. 율법주의자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내가 이만큼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율법이나 교회의 규례를 열심히 지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자칫 그것이 자기의 자랑이 되고 의가 되면 안 되는 거죠. 자기 자랑이 될 때 이게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았건만 그걸 다 잊어버리고 자기 열심과 자기 노력을 자기의 의로 삼는 것이죠. 사람은 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거거든요. 남들이 못하는 것을 이룸으로써 자기를 과시하고픈 숨겨진 욕망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까지도 그런 식으로 쓰려고 해요. `다른 사람들은 기도 못하는데 나는 이제까지 새벽기도 개근했다.' 이것도 율법이 될 수 있어요. `누구보다 내가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나는 성실한 사람이다.'

   사실 율법주의에는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요. 성취감을 얻는 방법이기도 해요. 자기만족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한 번 정말 제대로 해보실래요?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세례 요한과 우리를 비교해 보세요. 마치 오은선 대장이 히말라야 꼭대기에 올라가는데 우리는 자그만 찌보다스산도 헉헉거리며 올라가는 것과 똑같아요.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실상을 알아야 하는 거죠.

   또 다시 비유하자면 식당 음식과 같아요. 식당음식이 맛있잖아요. 맵고 짜고 다니까. 그러나 그것은 혀를 속이는 거잖아요. 집에서 밋밋한 밥을 잘 먹는 사람이 건강한 거예요. 그런데 순간 속이는 혀의 감촉을 못 이겨서 그게 맛있는 줄 알고 가는 거죠. 속으면 안돼요. 그만 자기도취에 빠져요. 그러나 정말 해보니까 내 마음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건 어려워요. 그러다 보니 어떻게 돼요. 나도 모르게 자연히 외식에 빠지게 돼요.  겉모습을 꾸미게 돼요. 그게 우리의 한계예요.

   그러면서 내 안의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다른 사람을 비판하게 돼요. 여기 율법주의자들이 세례 요한이 율법을 온전한 마음으로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뭐라고 합니다. 오히려 거부해요. 잘한다고 하지 않고 심지어는 귀신들렸다고 말해요. 그리고 예수님같이 율법을 넘어서서 사랑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이해하기는커녕 `저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좋아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판해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은 그만큼 잘못된 거예요. `나는 이렇게 하는데 너는 뭐하나.'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서 요란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바로 그 부분에서 잘못된 거예요. 내 안에 숨겨진 분노가 있어요. 그거는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가 아니에요. 알고 보면 나를 향한 분노예요. 내가 지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지키라고 있는 율법이지만 알고 보면 율법은 그것을 지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내게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솝우화에 어떤 사슴이 냇가에 가서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거기에 자기 얼굴이 떠오르는데 자기 뿔이 얼마나 멋있는지 스스로 황홀해졌어요. `내 뿔이 이렇게 멋있구나. 내가 이렇게 멋있는 사슴이구나.' 그러다가 그만 눈길이 그만 자기 가느다란 다리에 머물렀어요. 뿔에 비해서 다리는 너무 보잘것없어요. 너무 부끄러워요. 이 다리를 숨기고 싶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빵하고 총소리가 났어요. 사냥꾼이 나타났어요.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뿔이 나무에 걸렸어요. 그래서 잡혀서 죽었어요. 우리가 살면서 언제 넘어지느냐 하면 내가 자랑하는 것 때문에 넘어져요. 내가 부끄러워하고 연약함이 있는 것,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돼요.

   몇 년 전 <인간극장>에서 봤습니다. 어떤 한 가정의 이야긴데 삼십대 중반도 채 넘기지 않은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어요. 밥상머리에서 가족하고 밥 먹다가 푹 쓰러졌어요. 며칠 동안 고열로 시달리다가 깨어났는데 진단 결과 놀랍게도 치매 증상이 나타났어요. 얼마나 빨리 진행되는지 급속하게 자기의 일들을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남편과 어린 두 딸이 있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남편이 벌어먹고 살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주중에는 치매병원에 맡기고 주말에 가서 데리고 와서 아이들과 같이 지내는데 바보가 다 돼가요. 다 잊어버렸어요. 이제 겨우 애들에 관한 기억만 남았어요. 심지어는 남편에 관한 기억도 다 잊어 버려서 때로는 낯선 남자인줄 알고 무서워해요.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딸이 둘이 있는데 아홉 살과 여섯 살이에요. 아홉 살 딸은 벌써 커서 엄마가 그렇게 변한 것에 대해서 수용할 수 없어요. 그 현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외면해요. 엄마가 집에 왔어도 엄마와 상대하지 않아요. 너무 버거우니까. 마지못해서 엄마를 도와야 할 일이 있고 아빠가 시키면 얼른 해주고 또 가버려요. 여섯 살짜리 아이가 오히려 그 바보 같은 엄마의 엄마가 됐어요. 여섯 살짜리가 데리고 잠을 재워요. 밥을 먹여요. 씻겨줘요.

   어느 날 남편이 조용히 아내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가요.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합니다.“여보, 이제 조금 있으면 당신이 내 이름도 애들 이름도 다 잊어버리겠지.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아. 걱정하지 말아. 이제까지 나와 함께 살면서 이렇게 예쁜 딸들을 낳아주고 살아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감사해.”그리고 아내 손을 잡아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정신이 없는 아내가 그 말을 알아들었어요. 조용히 눈물을 흘리더라구요.

   여러분, 일상의 은총을 기억해야 돼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몰라요. 주님은 신앙생활을 일상과 분리돼서 뭔가 남이 하지 않는 고상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먹고 마시고 더불어 살아가는 그 속에 주님이 함께 하셔요. 이게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에요.

   며칠 전에 우리 아파트에서 저녁에 운동을 하고 막 들어오는데 로비에서 우리 교회 나오는 꼬맹이를 만났어요.“너 어디 갔다 오니?”아마 가족들이 저녁을 먹고 오는 모양이에요.“엄마 아빠 어디 계시니?”그랬더니 애가 신나서 뒤돌아가서 목사님 만났다고 전한 것 같아요. 제가 얼굴이나 보고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오질 않아요. 그래서 나가보니까 남자 분만 엉거주춤 서 계시는데 얼굴이 좀 벌게요. 절 보더니“목사님, 우리가 오늘 맥주 한잔 했습니다.”그러시더라구요.“아, 그래요.”꼬마에게 물었어요.“근데 엄마는 어디 갔니?”“엄마는 부끄럽다고 도망갔어요.”제 마음에 참 고맙더라구요. 왜 고맙냐, 생각해 보세요. 둘 다 도망가면 나중에 어떻게 만나요. 너무 민망하죠. 그렇다고 둘 다 벌겋게 같이 서 있으면 또 얼마나 민망해요. 남자가 십자가를 지고 앞에 나타나고 여자는 제가 갈 때까지 뒤에서 숨어 기다리고. 목사의 체면을 살려주느라고. `, 이 집 역할분담 한번 확실하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일 열심히 하는 거는 좋은데 집에 가서 다투고 싸우느니 차라리 정말 기분 좋은 날은 부부가 한잔 하면서 사랑하는 게 백 번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여러분, 한걸음 더 들어가세요. 우리 주님이 사람들과 더불어 포도주를 즐겼다고 하셨고 나중에 제자들과 함께 포도주를 나누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였어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식탁에는 놀랍게도 십자가의 사랑이 담겨 있어요. 그 마음으로 우리를 품어 주셨어요.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