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새 언약의 일꾼(질그릇 같은 인생,마중물,몰입)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1. 14:40

2009 8 30 주일예배

새 언약의 일꾼

(고후 3:3-6)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것이며 돌판에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것이라

4.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같은 확신이 있으니

5.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1. 그가 또한 우리를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이번에 한국에 나갔을 때 부산 해운대에 갔었습니다. 한국 CBMC대회가 해운대 벡스코(BEXCO)에서 열렸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부산을 다시 방문하고 해운대를 가보았는데요. 한국이 얼마나 빨리 변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한눈에 보여주는 자리였습니다.

  `피터 드라커' <넥스트 소사이어티>라는 책의 서문에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급격한 변화를 겪은 나라는 미국이 아니고 한국이다.'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20년 동안 무섭게 변할 나라 역시 한국이다.' 그랬는데 마치 예언이라도 한 것 같이 그 사람이 예측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더라구요.

   몇 달 전 해운대에 신세계백화점이 문을 열었어요. 신세계백화점을 가보니 `세계에서 제일 큰 백화점'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광고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 옆에 있는 롯데백화점이 하루아침에 구멍가게가 돼버렸어요. 그러나 과연 그게 좋기만 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나지를 않더라구요.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모든 것이 다 있고 원스톱 쇼핑을 할 수 있는 백화점은 우리의 무한욕망을 상징한 것이고 그 이면에는 무한경쟁이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명품도시라고 하는데 과연 그 한복판에 있는 고층아파트에 살면 명품인생이 되는 것인가.

   이번에 나가서 영화를 한 편 봤어요.“무슨 영화를 보면 좋겠냐?”했더니 <해운대>라는 영화를 추천하더라구요. 마침 해운대에 내려갈 일도 있고 해서 봤습니다. 이제까지 제작된 한국의 재난영화 중에서 잘 만들었다는 평을 듣고 있고 얼마 전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지요. 2004년 인도네시아 아쩨에서 있었던 쓰나미를 해운대하고 접목을 시켜서 해운대가 쓰나미에 뒤덮여 무너지는 상황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해운대라는 현장에 갔을 때 영화의 내용하고 그럴듯하게 연결이 됐어요. 상당히 상징적이었어요. 쓰나미는 오지 않겠지만 이미 무한욕망의 쓰나미에 해운대가 다 떠내려가고 있더라구요.

   이런 물음이 떠올랐어요.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던진 물음이 있잖아요. `쿼바디스 도미네' 라틴어예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우리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현대인으로 살아가면서 현대문명을 다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파트라는 주거환경 속에 사는 현대인이 그것을 다 부정하고 지리산 속에서 살겠다고 한다면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은 그리 지혜로운 선택은 아니죠. 우리는 어차피 도시문명 한복판에서 살아가요. 자카르타도 마찬가지죠. 그렇다면 이러한 공간과 시간 속에 사는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바로 그런 고민과 물음에 답을 주는 본문이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3장의 말씀이에요. 배경은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예요. 당시에는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어요. 교양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는 통일된 환경 속에 살고 있어요. 다양한 문화와 가치가 막 어우러져있어요. , 그런데 이제 히브리 종교를 가지고 고린도에 들어와서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지금 사도바울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지금 혼란에 빠졌어요. 그 안에는 이방인도 있고 유대인도 있어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목소리들이 다양하다 못해 갈등이 일어났어요. 분열이 됐어요. 베드로가 가르쳐주는 걸 따라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게바파라고 했어요. 즉 전통적인 모세 율법과 할례와 안식일 규례를 그대로 고수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반대로 바울파가 있었어요. 사도 바울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에요.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자유로워졌다고 얘기하면서 모든 율법을 폐기하려고 했어요. 더 나아가서 방종이 되어 버렸어요.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요, 하나님의 질서 속의 자유인데 임의로 해석하고 자기 편한 데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아볼로파가 있었어요. 젊은 지식인, 학자였던 아볼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었어요. 헬라철학을 신앙과 연결시키면서 그것으로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던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세상의 학문을 활용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스도파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 사람들은 신비주의자였어요. 종교마다 가지고 있는 신비적 경험을 절대적 가치로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어요.

   , 이렇게 혼란한 교회를 향해서 사도바울이 편지를 쓴 거예요. `너희 모두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지금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면서 이렇게 비유합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고 그리스도는 새 언약이다. 모세율법, 즉 유대의 전통적인 신앙생활에 관한 모든 것들은 옛 언약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았어요.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기초가 됐어요. 그러나 율법은 뭐예요? 그건 거울과 같은 거예요. 우리가 그 앞에 서보니 우리의 허물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율법 자체는 거룩하지만 그 거룩함 앞에 선 우리는 허물이 다 드러나요. 죽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율법을 인하여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건지는 생명이다. 율법은 거룩하고 하나님이 주신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인간을 새롭게 하고 온전케 하는 그리스도야말로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이냐. 어떤 것이 더 영광스러운 것이냐 라고 말합니다.

   또 율법은 돌에다 새긴 것이에요. 문자예요. 여기 보면 의문儀文이라고 했어요. 이게 한자가 좀 어려워요. 의문이라는 말은 뭘 묻는다는 말이 아니고 의식과 글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율법과 안식일과 수많은 규례들을 말하는 거죠.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 이것저것 교회에서 하라고 권하는 것이 많이 있죠. 그게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죠. 필요한 것이죠. 도움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보다 본질적으로 앞서는 것이 있다. 그게 뭐냐, 영이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책에 새겨놓고 벽에 새겨놓고 돌에 새겨놓는다 한들 그것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죠. 돌비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도 영광이라면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서 변화를 일으킨다면 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놀라운 것이냐. 이것을 누가 이루시느냐,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이루신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인데 이제  드디어 그 율법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냐.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나는 새 언약의 일꾼이다. 내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뭔가를 잘해서가 아니다. 내게 자격이 있지 않았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저는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데 이유가 있어요. 반만년 역사 속에 고려시대에 태어났으면 전 별로 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조선시대에 태어났어도 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바로 오늘 이 시대에는 한국인으로 사는 게 제일 멋있어요. , 지금 하나님이 한국을 들어 쓰시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님께서 한국과 한국교회와 한국인을 들어서 일하고 계시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요. 인도네시아에서 살다가 가끔 한국에 들어가 보면 눈에 띄게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돼요.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시는구나.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보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교회가 되어야 돼요. 오늘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다', 그랬어요.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봐야 하는 것이죠.

   이번에 해운대를 보고 느낀 바가 많습니다마는 소망을 발견했어요. 그것은 부산 해운대 벡스코라고 하는 집회장소가 있잖아요. 이번에 한국 CBMC대회가 있어서 참석을 해보았는데요, 시설 잘해놨더라구요. 이제 한국은 무슨 시설이든지 세계에 뒤떨어지는 게 없어요. 다 멋있고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나 건물만 덩그러니 크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CBMC라는 것은 크리스챤 기업인들의 모임이에요. 4천명이 넘게 모여서 23일 동안 어떻게 주님을 섬길 것인가 하는 것을 함께 논의하고 말씀을 듣고 은혜 받는 자리였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23일 동안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그건 한국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제는 개교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대적인 사명이 있어요. 교회와 교회가 연합하고 특별히 평신도 기업인들이 주도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어서 새로운 교회를 펼쳐 나가고 있어요. 소위, 일터교회라고 말해요. 우리의 기업현장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다. 참 놀라운 발견이에요.

   사도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하면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함께 그 일터에서 교회를 시작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 여러분의 일터가 교회예요. 그게 새로운 추세예요. 그러므로 교회도 열려있는 교회가 돼야 돼요. 연합해야 되구요, 함께 일해야 돼요.

   그 대회 중에 여러 강사들을 모셔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거기 오신 분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자기가 만난 하나님,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고백해요. `, 이 대회는 살아있는 대회구나. 사람만 북적북적 거리고 모인 수를 자랑하고 세를 과시하고 우리를 봐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구나.' 이러기에 한국이 소망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한 걸음 더 내다봐야 됩니다. 오늘날 한국이 겪는 모든 것들을 수십 년 전에 미국은 이미 겪었어요. 앞서나가고 있어요.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방향은 지금 현재 미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가늠해 볼 수 있어요.

   부산에 KTX를 타고 가면서 책을 한 권 사서 읽었습니다. <오두막>이라는 소설이었어요. 지금 미국의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하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예요. 기존 전통과 질서에 대해서 거부하는 시대예요. 상당히 상대주의화 된 시대예요. 이제는 개인들이 자기를 간섭하고 구속할 만한 모든 것을 다 거부하려고 해요. 교회의 많은 규례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아요. 미국에도 부흥하는 교회가 있습니다마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를 떠나 자기 홀로, 자기 내면의 문제를 찾으려 하고 있더라구요.

   <오두막>이라는 소설은 2009 3월 현재 미국에서 600만부나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뭔가 의미가 있죠.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린 딸을 유괴 당했어요. 어린 딸을 찾아 헤매던 아버지가 끝내는 그 딸이 미국의 국립공원 깊은 곳에 누구의 손도 미치지 않는 오두막에서 피살된 것을 발견합니다. 시체도 찾지 못했어요.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워 견디다 못해 하나님께 묻는 거죠.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주어지는 겁니까?' 몇 개월이 지난 후에 자기 혼자서 그 현장을 찾아가는 거죠. 자기의 아픔과 상처가 있는 깊은 산 속 오두막에 들어가는 이야기예요. 추운 겨울에 오두막에서 홀로 쓰러져 있다가 대 반전이 일어나요. 상상의 세계가 펼쳐져요. 봄이 돌아오고 오두막은 아주 따뜻한 집이 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야말로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새롭게 이야기를 펼쳐나가요. 거기서 웬 뚱뚱한 흑인여자를 만나게 돼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분이 하나님이에요.

   여러분, 이 책에서는 기존의 하나님 관념을 깨뜨리는 거예요. 이제까지 키 크고 잘생긴 백인을 중심으로 모든 교리와 신학적 해석이 이루어 졌다면 이러한 틀을 깨버리고 새로운 관점에서 신앙을 조명해요. 그들의 만남 속에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물음을 이야기로 하나씩 풀어가요.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에 관한 교리, 종말, 고난, 성령의 역사 등등 복잡한 내용들을 자그마한 소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주 정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줘요. 그 사람이 딸을 잃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자기 상처로 지은 오두막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이야기예요.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정말 질그릇 같은 인생이에요. 그러나 오늘 고린도후서 4 7절에 보면 우리의 질그릇 같은 인생 속에 보물이 담겨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을 진정 가치 있게 하는 보물이라는 말이에요. 이게 미국의 신앙흐름이에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예배로 모여 말씀을 듣습니다. 한편 저는 여러분의 기업이 하나님의 교회가 되도록 여러분이 상상력을 가지고 그 교회의 일꾼이 되고 주인공이 되어 일하시기 바래요. 또 하나, 함께 모여서 노래하고 찬양하는 것도 참 아름답고 중요하지만 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돼요. 속사람이 회복되고 건강해져야 돼요. 그럴 때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해요. 고린도전서 3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교회예요.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의 교회예요. 우리가 모여 예배하는 이곳도 하나님의 교회예요. 이제 남은 건 딱 하나예요. 믿음으로 뛰어드는 거예요.

   <아웃 라이어>라는 책이 있는데요, 아웃 라이어라는 말은 어느 분야의 최고가 된 거장들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1만 시간의 법칙',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가 되려면 적어도 1만 시간 그 일에 몰입한 경험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하루에 3시간씩 그 일에 푹 빠져서 십 년을 보내야 그 일에 훤한 경지가 열린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실 거기까지 가지도 않아요. 이거는 똑똑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누구라도 다 그렇게 돼요. 이미 여러분이 다 경험했어요. 여러분 모두 사랑의 경험이 있잖아요. 그래서 결혼 했잖아요. 그거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너무나 멋있는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리스도께 다가가야 돼요. 그에게 마음을 두어야 돼요. 옛날엔 펌프로 물을 퍼 먹었잖아요. 이 펌프는 마중물이 필요해요. 한 바가지 물이 필요해요. 그것만은 버리면 안돼요. 그건 항상 준비했다가 그 물을 붓고 펌프질을 해야 쓰고도 남을 엄청난 물을 끌어 올릴 수 있어요. 그 마중물만큼은 내가 준비해야 돼요. 뭐든지 처음부터 좋은 거는 연애하는 것 외에는 없어요. 눈이 맞아서 시작하는 연애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고 다른 일들은 다 눈물을 흘리면서 씨 뿌리는 경험이 꼭 필요한 거죠. 그러나 자그만 한 바가지 물로 인해서 풍성한 물을 얻는 결과를 생각한다면 그까짓 수고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죠. 몰입해야 돼요. 뭘 하든지 몰입해야 돼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쓰실 때에 모세도 그랬고 심지어는 예수님까지도 40일 동안 하나님과 단둘만의 만남을 꼭 경험하게 하셨어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려야 돼요. 그래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뭘까. 제가 경험한 방법은 설교집을 읽는 거예요. 그거는 번개탄 같은 거예요. 예전에 한국에서 연탄에 불붙이려면 어떻게 해요. 번개탄 사다가 밑에 깔고 불을 붙이잖아요. 그렇죠. 번개탄이 필요해요. 집중해서 한권만 읽어 보세요. 마음에 불꽃이 일어날 때까지 하세요. 설교 테이프를 들어도 돼요. 40일까지 가지도 않아요. 내 마음에 불이 붙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거예요.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영이시다.' 유령이시라는 말이 아니에요. 주님은 시간과 공간과 모든 조건을 넘어서서 내 마음 가운데 오시는 분이시다. 과거의 십자가 사건을 끌어오셔서 오늘 내 문제의 해결이 되게 하신다, 그런 말이에요. 주님은 영이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엘리자벳 브라우닝'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지상에는 하늘나라로 가득 차있다

모든 평범한 나무들이 하나님과 함께 불타오른다

그러나 볼 줄 아는 자만이 신발을 벗으며

다른 이들은 나무 주변에 둘러 앉아 검은 딸기나 줍는다

 

하나님의 세계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려 있어요. 하나님이 역사하셔요.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가는 것, 그것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