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회개의 은총(신학대학장음란사진보관문제로파면,피터의법칙)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1. 22:33

 

090614 회개의 은총

(요일 1:5-10)

5.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1.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2. 그가 가운데 계신 같이 우리도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3.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4.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5.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십 년 전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 신학대학 학장이 파면을 당했습니다. 파면의 이유인즉 그의 사무실 컴퓨터 파일에서 음란한 사진 수백 장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우리들도 늘 인터넷을 하면서 부딪치는 일상의 유혹이죠. 문제는 그러한 죄의 유혹을 받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나중에는 깊이 빠져버렸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았다고 해서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몸을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영적 전쟁입니다.

   탈북자를 아시지 않습니까? 북한의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견디다 못해 탈출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중국을 거쳐 심지어는 동남아를 거쳐 어렵게 또 브로커에게 돈을 써서 남한에 들어왔습니다. 극적으로 찾은 자유예요. 언젠가 신문의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탈북자 한 사람이 너무 힘들다고 북한으로 돌아갔어요. 돌아 간 그 재주도 기막히지만, 아니 어떻게 다시 가야만 했을까? 그러나 그거 남의 얘기 아니에요.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우리들의 형편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영적 전쟁이에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지만 우리는 자아가 있어요. 자아의 속성은 첫 사람 아담이 보여준 바와 같이 내 맘대로 독립해서 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서 살고 싶은 거예요. 그게 자아의 속성이에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우리의 삶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해놓으셨지만 거부하는 거예요. 본성이 죄인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어그러지는 거예요. 그게 죄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타까워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어요. 우리도 자아에 매여서 사는 것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알고 있어요. 내 맘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 하고 돌아섰지만 그러나 온전한 믿음을 보이지 못해요.

   성경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을 양자 되었다고 말해요. 양자예요. 남의 집 아이를 데리고 왔어요. 법적으로는 이 집의 자식이 됐어요. 그러나 유전자부터 시작해서 남의 자식이에요. 나를 닮은 데가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라지만 하나님을 닮은 데가 하나도 없어요.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행하는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예요. 여기에 우리의 갈등이 있어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고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는 정작 마지막 순간에 악을 선택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로마서 719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에요. 우리가 옳다고 인정하는 의를 택하지 않고 악하다고 기껏 인정해 놓고는 마지막에 그것을 택하는구나. 사도 바울이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겠느냐. 이건 불신자의 고백이 아니에요. 예수 믿는 우리들의 고백이에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지만 사단도 역사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가지고 우리를 흔드는 거예요. 영적 전쟁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탈북자같이 어떤 사람은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어요.

   오래 전에 열아홉 살 된 탈북 소년 소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독립영화를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청소년이 탈북 했어요. 우리나라에 왔어요. 배운 게 다르고 생활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달라요. 또 그들이 왔다고 남한사람들이 `웰컴'하고 환영해주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에요. 차별대우를 하거든요. 이 젊은 애들이 가서 일할 만한 데가 없어요. 여자 아이는 노래방에 가서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월급을 받아보니까 세상에, 너무 작은 거예요. 소년 소녀가 그런 서러움과 어려움 속에서 서로 만나요. 마음이 통해요. 좋아하게 되요. 사랑하게 되요. 다른 청소년들 같이 오토바이를 하나 구해가지고 타고 다니면서 마음을 나눠요. 아무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이 차가운 세상에서 서로 위로를 주고받는 거예요. 그러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둘 다 죽었어요.

   그 영화를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해가지고 온갖 고생 끝에 드디어 자유의 땅에 왔지만 제대로 인도받지 못했어요. 또 다른 차별의 벽에 부딪히다가 아까운 청춘들이 꺾였구나. 그런데 이게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 믿고 산다고 하는, 영적 전쟁을 치르는 우리들의 실상이에요. 영적 전투에서 패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를 대표해서 이렇게 고백했어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리오?' 죄에 머물게 되면 삶의 기쁨을 잃어버려요. 감사를 잃어버려요.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마음이 뜨거웠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기쁨을 자꾸 잃어버려요. 그것은 예수 믿은 지 오래되어서 자연스럽게 잃어버리는 게 아니에요. 죄와의 싸움에서 자꾸 무뎌지는 거예요. 더러워지는 거예요. 그때그때 빨리 해결하고 씻어야 되는데 내버려두고 방치하다 보니까 무감각해지는 거예요.

   오늘 성경이 `하나님은 빛이시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말씀해요.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하지 않으셔요. 죄 위에 복을 부을 수 없어요. 죄인에게 역사하실 수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감격을 자꾸 잃어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문제 해결의 길을 여셨어요. 그게 뭐냐? 죄를 자백하는 거예요. 고백하는 거예요. 회개하는 거예요. 회개함으로 정결함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으셨어요.

   제가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현장에 나왔을 때 목회를 잘할 줄 알았어요. 큰 교회의 부목사로 갔어요. 그런데 말이죠, 담임목사님이 하시는 게 눈에 차지가 않더라고요. 왜 저렇게 하시나. 너무 교만했던 거죠.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게 교만이에요. 드디어 저를 단독목회로 내보내셨어요. 그리고 6년 동안 마치 새신랑 장가가는 날 거꾸로 매달아가지고 발바닥 치듯이 그렇게 저를 호되게 치셨어요. 그게 아니더라고요. 목회는 뭘 좀 공부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찾으시는 것은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목회에 실패할 때 `이 목회가 안 되는 것은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변변히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임을 전가하게 되더라고요. 아내를 많이 구박했어요.“왜 기도 하지 않느냐.”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내가 너무 힘들고 어렵다' 라는 말을 바꿔가지고 아내를 비난하고 그에게 내 분노를 쏟는 거죠. 악한 거죠. 드디어 아, 그렇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발견한 거예요. 목사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너무 악하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취하려 하는 이 숨겨진 야망을 발견했어요. 하나님, 내가 너무 악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저는 정말 너무나 악한 죄인입니다. 바로 이런 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준비하신 것을 이제야 새롭게 발견합니다. 오랫동안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한적한 나무 그늘 아래에다 차를 대놓고 하나님께 계속 마음을 쏟으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너무나 어리석었습니다. 악했습니다.'

   여러분, 죄를 범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는 회개하지 않는 죄에요. 우리가 늘 죄를 범하는 걸 하나님께서 모르시지 않아요. 알고 계셔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어요. 너의 연약함을 네가 알지 않느냐? 그것을 고백하라,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라. 내가 십자가의 은혜로 너를 다시 새롭게 하리라. 밖에 나가서 놀던 애들이 집에 들어오면 새 옷 입혀 보냈어도 한나절만 놀고 들어오면 온통 먼지투성이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고 그리고 마련한 저녁밥을 먹이는 거잖아요. 그거 당연한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도 다를 거 없어요.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나오세요.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지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니요. 내 힘으로는 전혀 할 수 없어요.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에요. 그걸 날마다 바라보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여러분, 왜 회개하지 않느냐 하면 어리석어서 그래요. 무지해서 그래요. 아이가 과자를 먹고 있는데 얼마나 예뻐요. `과자 나 하나만 줄래?' 하잖아요. 아이의 반응을 보는 거 아니겠어요? 뺏어먹으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애가 예쁘니까 아이와 더 교감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만약에 여러분에게 `네 목숨을 나를 위해 내어놓겠느냐' 이렇게 물으시면 여러분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그러나 정말 여러분이 논리적인 분이라면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물음이에요. 목숨을 내놓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면 그냥 그날로 끝인데. 네 재산을 내놓아라,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거둬 가시면 사업도 그날로 무너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건데 굳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의도는 우리의 마음을 한 번 확인해보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맘대로 하실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어요. 목숨도 가져가실 수 있고, 재산도 가져가실 수 있고, 건강도 가져가실 수 있고, 모든 걸 다 하실 수 있지만 단 하나만큼은 우리들에게 남겨놓으셨어요. 그건 우리 마음이에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어요. 억지로 하나님께 끌려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기에 스스로 기쁘게 마음을 드리고, 삶을 드리며 복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거예요. 어린아이보다 그 부모가 훨씬 더 자기 아이의 인생을 위해서 온갖 좋은 것을 다 계획하고 있듯이, 어련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좋은 것을 계획하시지 않겠어요? 이걸 알지 못하는 게 무지요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게 불신앙이죠. 안다 하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게 불신앙이잖아요.

   여러분, 손을 깨끗이 씻어야 식탁에 앉아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듯이, 늘 우리의 마음을 정결히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야만 억지로 끌려가는 게 아니라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또 하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을 쓰셔요. 나 잘났다 하는 사람, 쓰이는 듯 하지만 넘어져요. 회개하는 사람을 쓰셔요. 그래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에. 제가 원래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신학대학원을 들어 가려니까 갑자기 직장을 놓을 수가 없더라고요. 아침에는 신학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야간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니까 시간에 쫓겨 너무 바쁘고 참 힘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신학대학원 채플에 가서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었어요. `하나님, 우리 반 아무개는 아주 똑똑하고 공부도 잘합니다. 하나님 나에게도 기회를 주셔서 공부 잘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까 그 친구를 대하기가 불편하더라고요. 라이벌로 생각을 하니까.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책을 읽다가 깨달았어요. 19세기 영국에 큰 부흥이 일어날 때 어느 목사님이 스펄전 목사의 교회가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속상해했어요. `하나님, 왜 우리에게는 부흥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저 교회만 저렇게 부흥하게 하십니까?' 그랬는데 하나님께서 오래도록 응답하지 않다가 어느 날 그 목사님에게 깨달음을 주셨어요. `너는 누구를 위하여 일하느냐? 다 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고 내가 나눠준 은사를 따라 일하는 것 아니냐.' 이분이 번쩍 깨달았어요. 회개했어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분을 통하여 저렇게 놀랍게 역사하시고 많은 생명을 구원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 교회에 더 놀라운 부흥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바꾸고 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그에게도, 그 교회에도 부흥을 주셨다. 제가 그 글을 읽고 회개했어요. 기도를 바꿨어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친구는 정말 공부도 잘 하고 열심히 하는데 더 지혜를 주시고 길을 열어주십시오. 보니까 교수가 될 것 같은데 훌륭한 교수가 되게 해주십시오.' 진짜 훌륭한 교수가 됐어요. 그거 제가 기도한 덕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그 친구뿐만 아니라 저도 좀 살펴주십시오.'

   여러분, `피터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요. 콜롬비아 대학의 `로렌스 피터'교수가 연구한 거예요. 참 이상하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높은 데 올라가기를 원하는 데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자기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자리까지 올라가서 무능함이 드러나 망신을 당하는 자리까지 올라간다는 거예요. 올라갈 때에는 눈이 멀어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 그 자리에 올라가서는 기어코 추락한다는 거예요. 왜 배운 사람일수록 이렇게 어리석으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사를 따라 지으셨어요. 성격도 기질도 다 다르게 지으셨어요. 우리 나름의 고유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계획해 놓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실패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회개한 사람을 들어서 쓰시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자기가 잘 나서 성공한 거 아니에요. 우리보다 잘 난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만남의 축복을 주실 때에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몰라요.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 가운데 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