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무지한 자의 열망[고통진작알면그길선택안함=모호함의 은총]/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5. 08:49

061203 무지한 자의 열망 (10:35-45)

성경본문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국 사회는 시간의 속도보다 더 빨리 변화하는 것 같습니다. 유행도 진화 합니다. 한동안은 꽃미남을 찾더니 얼짱 문화가 지나가고 그 다음에는 몸짱이 지나가고, 동안,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예쁘고 젊은 얼굴을 선호하더니 드디어 요즘은 쌩얼이라고 합니다. 그래 쌩얼이 뭐냐 그랬더니 맨얼굴. 이제 하도 고쳐 가지고 얼굴들이 다 똑같으니까 비교가 안돼요. 그래서 연예인들의 학창시절의 얼굴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찾아 인터넷에 띄워 가지고 꾸밈없는 얼굴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공미에 지쳐 자연미를 추구하는 거지요. 그렇다고 여자들이 가만있나요. 거기에 대한 대응책이 뭐냐, 누드화장이랍니다. 누드화장이란 뭐냐 하면 화장을 했는데도 안 한 것 같은 화장. 그래 돈도 많이 들어가고 시간도 많이 들어가요. ,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것이 하나의 열풍을 일으킨다면 그 사회는 과연 건강한 사회겠는가. 그리고 우리의 이 짧은 삶이 그런데다가 그렇게 돈과 시간을 투자할 만큼 그렇게 한가한가.

며칠 전에 <인간극장>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30대 주부가 나오는데 올해 서른여섯이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3년 전 어느 날 남편과 어린 딸들과 더불어 밥을 먹다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의식을 잃었어요. 병원으로 실려 갔어요. 뒤늦게 의식이 깨어났을 때는 기억을 다 잃어 버렸어요. 갑작스레 온 치매지요. 그리고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 그 기억이 마디마디 다 끊어지고 깨어지고 잊혀지고 이제 남은 것마저 점점 희미해지는데 남편조차도 때로는 남편으로 잠깐 다가왔다가 또 이제 낯선 남자로 느껴집니다. 마지막 남은 기억은 이제 8, 6살 된 딸들과 나누었던 사랑의 기억만이 남아 있어요. 애만 그저 조금 기억하는 거예요.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을 뒷바라지해야 할 주부가 하루아침에 여섯 살짜리보다 못한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으니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가정이 겪는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지요. 남편은 아내를 돌보고, 아이들을 돌보면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주중에는 치매환자 병원에 데려다주고 주말에만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지요.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적어질수록 점점 가족조차도 기억에서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여섯 살짜리 딸이 엄마가 됐어요. 엄마는 숟갈을 들었는데 이걸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잊어버렸어요. 볼펜을 들었는데 이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다 잊어버린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안에 분노도 있고 답답함도 있고 괴로움도 있습니다. 때때로 웃기도 하지만 그 감정표현 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아요. 그래서 여섯 살짜리 딸이 엄마같이 밥 먹여주고 씻지 않겠다는 엄마를 목욕탕으로 데려가서 씻겨주고 잠자지 않겠다는 엄마를 달래서 재워 주고 삽니다. 그 고통이란 말할 수 없지요. 그런데 서른일곱 된 남편이 아내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더 이상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거예요. 아내를 데리고 뒷산에 올라갑니다. 벤치에 앉아서 말합니다. “이제는 내 이름도 모르고 애들 이름도 모르고 그러나 아무 상관없어. 그건 괜찮아. 이름을 잊어버린다고 안타까워 하지마. 그저 마음으로만 기억해 줘. 그리고 이제까지 나를 만나서 이렇게 살아준 거 그리고 두 딸을 낳고 길러준 거 너무 고마워. 내가 더 해주고 싶지만 더 해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이 마음만 알고 있으면 돼.” 그때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아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립니다.

여러분, 저는 그 프로를 보면서 내내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어요. 인생이 뭔가? 한순간에 사람은 저렇게 될 수 있는 거구나. 그게 인생이죠. 그런 원치 않는 고통과 고난이 왔을 때에 외면하지 아니하고 내버리지 아니하고 내 힘껏 당신을 지켜주고 돌봐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어려움을 끌어안는 것. 그것이 사랑이로구나.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칫 우리의 신앙 속에서도 무지함이 드러날 수 있어요. 오늘 열두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몰래 찾아 왔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있는데 그만 제자들은 착각을 했어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이제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왕이 되실 것이다 라고 기대하고 다른 제자들 모르게 예수님께 나와서 청탁을 넣는 것이지요. ‘주님이 이제 곧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게 되실 터인데 그때 우리 형제를 하나는 우측에 하나는 좌측에, 하나는 우의정에 하나는 좌의정에 하나는 써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정치도 그렇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리지만 늘 그 실세라는 게 있잖아요. 그 사람의 직함이 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대통령의 마음을 잘 읽는다고 하는, 또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다고 하는 실세가 있어요. 그게 대통령의 아들일 수도 있고 먼 친척일 수도 있는데 여기 야고보와 요한은 어떤 사람이냐.

성경을 면밀히 보면 예수님의 사촌 동생들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처음에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고 곧바로 다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다고 하는 기록을 봐서 예수님의 친척이면서도 일찍 부름받은 제자 중에 하나예요.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께서 오천 명에게 떡을 먹이시기도 했지만 그 중에서 70명을 추려가지고 둘씩 짝지어 전도를 보내셨어요. 70명 중에서 다시 12명을 추려가지고 항상 데리고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보여 주셨어요. 그러나 진짜 중요한 시간에는 세 사람을 불렀어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그 자리에 있게 하시고 또 변화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변화되는 현장에 있게 하시고 심지어는 마지막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열 두 제자가 다 갔습니다마는 나머지 제자들은 기다리게 하시고 셋을 데리고 겟세마네 바위에 가셨어요.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이렇게 부탁하셨어요.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담아 두셨던 거지요.

그랬으니 야고보와 요한이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어부출신의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어서 이 두 사람의 별명은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천둥같이 불같이 급한 성격이라고 했어요. 한 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사마리아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서 쉬기를 원하셨어요. 그러나 마을사람들이 저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예수님 저런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둡니까. 당장 벼락을 내려서 불이 떨어지게 하십시오.”라고 하다가 야단맞은 적도 있어요. 그러고 보면 수제자라고 자칭하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사이에 충분히 갈등이 예상돼요. 누가 정말 예수님의 신임을 받는 자냐. 그래서 이제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께 나와서 청탁을 넣은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이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구나.’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가는데 왕의 보좌에 앉는 줄로 착각하고 있어요. 예수님 좌편 우편에 앉겠다고 말해요. ‘너희가 과연 내가 마셔야만 하는 이 쓴 잔을 마실 수 있고 내가 받아야 하는 이 고난의 세례를 정말 받을 수 있느냐.’ 귀로는 뭔가 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욕심에 매이니까 3년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진리를 들었으나 깨닫지 못했어요. 3년을 알아듣는 듯하나 알지 못해요. 그리고 더더욱 이적을 보았습니다만 그 이적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적을 자기욕심을 만족시켜주는 하나의 도구로 본 것이지요.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었죠. 초대교회가 부흥하고 사마리아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저들을 위해 기도했더니 성령께서 저들에게 임하셨어요. 저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어요. 그것을 지켜보던 시몬이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내게도 그런 능력을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든지 그 사람이 다 성령을 받게 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의 검은 마음을 보았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바꾸려고 하는구나. 너는 네 돈과 함께 망할 것이다 라고 말해요. 그래서 교회역사 속에 그러한 것을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시몬이즘이라고 해요. 시몬이즘이라고 하는 것은 성직매매에요. 돈을 주고 성직을 사는 거예요. 교회역사에 보면 자격도 안 되는데 돈을 주고 추기경 자리를 사고 수도원장 자리를 사고 주교 자리를 사고 이렇게 했던 거예요. 교회가 타락했을 때. ,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요. 그걸 말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이 달라요. 예수님이 말씀하셔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회사생활을 하신다면 누구나 다 사장을 바랄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사장이 될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겠지요. 그는 아주 특출나야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방식은 모든 사람이 승리할 수 있는 방식이에요. 정말 으뜸이 되고자 한다면 남을 섬기는 종이 되어라. 그러면서 예수님 말씀하셔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죽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서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고 구원이 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얼마나 자기 욕심에 매여 사는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심스런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나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게 하신거지요.

여기 보세요. 야고보와 요한은 지금 자기들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다고 생각 했습니다만 주님이 보실 때에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주님을 따라오고 있어요. 뭘 구하는지도 모르고 따라오고 있어요. 뒤집어 생각하면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있는 거예요. 여자 분들은 한 남자가 좋아가지고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애를 가졌어요. 애를 낳아 보니 어떻습니까. 해산의 고통이 어떻습니까. 아기 낳는 순간에 진통하면서 남편을 욕하는 분도 있다고 그래요.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면 그러겠어요. 그거 진작 알았으면 결혼했을까요. 남자들은 군대 가서 여러 가지 서러움을 겪기도 하잖아요. 가도 되고 안 가도 된다면 과연 그 어려움을 기쁘게 선택하겠어요. 모르길 망정이지.

사실 저는 군 생활하다가 은혜를 받았어요. 당시에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님 설교집을 다 읽었어요. 그로부터 말씀을 깨달으며 죄사함의 자유를 누렸지만 한편 ‘야, 나도 앞으로 목회를 해가지고 이런 큰 교회 목사가 되어야겠다.’ 했어요. 일면 좋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마는 그 안에 자기 동기가 있었어요. 크고자 하는 자기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목사가 돼가지고 목회를 해보니까 너무 힘들어요. 정말 너무 힘든 거예요. 당장 모든 걸 다 내던져버리고 싶더라고요. 그러니 그 고통을 진작 알았다면 절대 목사 된다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몰랐지요. 모르고 자기욕심에 스스로 속았지요. 한편으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자기욕심에 매여서 왔던 거지요. 그 욕심이 산산 조각이 나고 깨어지게 된 거지요. 생각해보면 거기까지 이끄시는데도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있었어요.

야고보와 요한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언젠가 너희는 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야고보는 열두제자 중에 첫 번째 순교자가 됐어요. 그리고 그 동생 요한은 열두제자 중에 마지막 순교자가 됐어요. 역시 예수님의 사촌형제요 그를 누구보다도 가까이 알았고 현장에 가까이 있었고 많은 은혜를 받았던 그들이었기에 그들 몫을 하나님이 감당하게 하셨어요. 자기 욕심에 매이면 실패할 것을 아셨기에 그들이 알지 못한 채 따라왔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성령으로 깨닫게 하시고 나중에는 욕심에 매여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자기를 드리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셨지요. 그게 바로 ‘모호함의 은총’이예요. 어떤 분은 그러죠. ‘주님 내게 좀 확실한 것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주님을 기쁘게 따라 가겠습니다.’ 스스로 속지 마세요. 끝을 알면요 아마 다 도망갈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조금씩만 보여 주시는 겁니다. 오늘 주시는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야 돼요.

며칠 전에 선물을 하나 받았어요. 리차드 용재 오닐이라고 하는 비올리스트의 최근에 나온 〈눈물〉이라고 하는 앨범을 받았어요. , 그걸 듣는데 비올라는 사실 처음 들었는데 좋더라고요. 바이올린이 소프라노라면 비올라는 앨토 같아요. 아주 편안하고 튀지 않고, 눈물이라 그랬어요. ‘그는 비올리스트로는 최초로 유일하게 쥴리어드 대학원에 입학한 사람이고 지금 세계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아티스트다이렇게 평가 받아요. 그런데 그의 기교나 연주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면 참 놀라워요.

6.25전쟁 통에 한 6살짜리 여자 아이가 미국에 입양 갔습니다. 근데 이 여자아이는 정신지체아이죠. 그런 아이를 미국 부모가 입양했어요. 그를 정성껏 키웠어요. 그가 성숙했을 때 어느 날 어떤 남자가 그를 유혹해서 임신을 시켰어요. 그리고 아이를 낳아요. 그 아이가 바로 용재 오닐이에요. 사생아로 태어났어요. 그러나 그 미국인 양조부모는 그 아이를 정성껏 길렀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지능이 부족해요. 자기 몫을 다 못해요. 이 넉넉지 못한 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닐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제 중학교 올라갈 때부터 이 아이가 악기에 재능을 보이니까 할머니가 차를 태워서 데려다주면서 늘 이야기 합니다. ‘열심히 해야 된다. 그래서 너는 네 엄마를 도와주고 지켜줘야 된다.’ 엄마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엄마를 지켜줘야 하는 그런 처지에 넉넉하지 못한 경제 형편에 열심히 노력해서 오늘을 이루게 된 것이지요. 흔히 그러잖아요. 부모에게 대들면서 ‘누가 나를 낳으라고 그랬어요.’ 원망하고 불평하잖아요. 여기 놀랍게도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세상에 왔건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요. 그리고 그 부족한 엄마와 더불어 사랑을 나누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신앙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성숙한 신앙 인격을 이루어 가는 것. 예수 믿는 참 의미이지요. 교회 봉사도 중요해요. 그러나 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기쁨을 가지고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이지요.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어 일할 때 자칫 우리의 열심과 헌신 속에 감추어진 우리만의 동기가 있고, 욕망이 있습니다. 이 거짓을 다 버리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하시고 온 성도들의 후원을 얻고 지지를 받아 세워진 하나님의 일꾼들 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새롭게 모든 것을 시작하고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예배하며 우리에게 주신 삶을 값있게 살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 감사함으로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