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발자취를 따르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4. 18:31

061126 발자취를 따르라 (벧전 2:18~25)

성경본문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 한반도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는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여러 가지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이라고 해서 만주를 중심으로 펼쳐질 정치적 변화를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는 거죠. 그 첫 작업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해석하고 끌어들이는 것이죠. 그래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 왕조의 변두리 국가들이었다 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우리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것을 반박하고 대비하는 여러 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고구려와 발해를 다루는 대하드라마들의 등장이죠.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 위대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어요.

저도 한때 <주몽>을 봤습니다. 그래서 그 몇 줄 안 되는 원래 이야기를 가지고 작가가 참으로 창의적으로 써내려가고 있구나, 재미있구나 했는데 어느 회부터인가 좀 지나치다 라는 느낌을 가지게 됐어요.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환타지로 나가버렸어요. 요즘에는 보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시청자들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얼마 전에 대하드라마들을 평가한 글을 보았더니 이런 말들을 합니다. 하나는 너무나 우연의 연속이어서 별명이 ‘납치사극’ 이렇게 부르더라고요. 이번에는 누가 납치되고 그 사람이 풀려나니까 이번에는 또 다른 누가 납치되고 해가지고 이야기가 영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또 어떤 드라마는 너무나 갑작스레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그 세트를 만들 때 합판으로 성을 꾸민 것이 드러나서 별명이 ‘합판사극’이 되었어요. 급하게 만들다가 이런 헛점이 다 드러나 버린 것이죠. 최근에 시작한 드라마에 대해서는 정통사극이다 이런 평을 해요. 역사를 헤쳐 나가는 개인과 집단이 하늘로부터의 우연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력과 지혜를 모으고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것이죠.

신앙이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만 모든 일이 하나님 손안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 나간다고 하는 표현은 맞습니다마는 하나님은 우리의 참여와 반응도 중요시 여기십니다. 기적으로만 일관된 삶,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삶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역사를 올바로 보고 헤쳐 나가기를 기대하시는 거죠. 왜 그러냐. 납치사극, 합판사극이 재미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그 목적이 뭐냐?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땅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그러한 위기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 시작했는데 웃고 떠들다가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신앙생활을 재밌게 하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언젠가는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이 차례차례 불러 가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돼요.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 같이 내 신앙의 고백과 중심은 항상 분명해야 돼요. 그 안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나누고 베풀며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인간의 열심에만 기초하는 것도 아니요. 그저 하나님이 부으시는 은혜만 따라가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바른 신학에 기초한 신앙이어야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고 고난을 발판으로 삼아서 더 성숙한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바른 신학의 핵심이 뭐겠습니까. 그 첫 번째는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주도하시고 나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에 응답하며 따라가는 것이죠. 내 인생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마는 엄밀히 말하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데 내가 거기에 응답하며 가는 거예요.

, 우리가 ‘은혜 받는다’는 표현을 쓰지만 그 은혜 받는다고 할 때 초점이 무엇이어야 되겠습니까. 오늘 당장 내 문제가 해결되고 내가 복을 받는 것,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은 신나는 일일는지는 모르나 은혜의 핵심을 놓친 거죠. 은혜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나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것이죠.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 그게 은혜 받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의 동기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의 깊은 사랑에 감격해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우리 신앙의 동기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구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또 내게 주신 남편, 아내, 이 환경을 날마다 고쳐주십시오 할 것만이 아니라 내게 주신 이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오늘 이 남편을 만나게 하셨다면 내 생각을 넘어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죠. 그의 어려움까지도 감당하면서 살아가겠노라 하는 것이 건강한 신앙의 자세에요. 오늘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는 하나님이 나의 유익을 위해서 주셨다고 하는 고백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신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특별히 성령은 여러 가지로 역사하시지만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기초요 바른 신학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하나님은 많이 배운 사람만 쓰십니까. 아니요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도 쓰셔요.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쓰신 분들이 있어요. 영국에서는 ‘스펄전’목사를 쓰셨어요. 똑같은 시대에 미국에서는 ‘무디’라고 하는 분을 썼어요. 두 분은 너무나 대조적이에요. 스펄전 목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17살에 벌써 설교를 시작했어요. 그가 첫 설교를 했을 때 회중들이 깜짝 놀랐어요. 뭐 말씀도 은혜로웠겠지만 한 노인이 와서 물었답니다. “도대체 당신 몇 살이요? 17세에 하나님이 그를 들어서 설교자로 쓰셨어요. 두 분은 모두 다 60세 안팎의 결코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대설교가였으며 학자였습니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국을 새롭게 하셨어요.

그러나 미국의 경우에는 또 달랐어요. 무디는 너무나 가난한 집에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그런 형편에서 자라났으며 17살에 가난을 떨쳐버리고자 집을 떠나서 외삼촌 집에서 구둣가게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무디’에게 하나님이 강한 은혜로 임하셨어요. 그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주일학교를 시작한 거죠. 하나님이 거기에 부흥을 부어주셨어요. 그래서 그는 24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안수 받지 않았어요. 평신도라는 얘기죠. 잘생긴 사람도 아니에요. 기록에 의하면 교양 있는 사람도 아니에요.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에요. 심지어는 그는 무뚝뚝한 사람이었고 무례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한 교수가 그의 집회에 참여해서 설교를 들어본 다음에 무디를 만나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이 하는 것을 보니 이건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합니다. ? 좀 심할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당신의 자격조건으로 봐가지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이렇게 많은 심령을 일깨우고 부흥을 일으키는걸 보니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무디가 웃으면서 그랬답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마 지금 우리 한국에서 무디와 같은 케이스를 찾으라 한다면 아마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님을 들 수 있겠죠. 그 분은 경상도 깡촌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서 어려서부터 교회 새벽종지기로 새벽종을 치면서 신앙을 배운 사람이죠. 그래서 스스로 자기의 목회를 ‘머슴목회’라고 말합니다. 자기 또래 친구들 중에는 실제로 머슴도 있었어요. 그 분의 설교는 설교학자들이 보는 관점으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설교에요. 그러나 많은 분들이 너무나 은혜를 받고 구수한 된장찌개를 먹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신대원시절에 일주일에 한 번씩 채플이 있는데 3년 동안 많은 분들이 오셔서 말씀을 하셨지만 아주 또렷하게 기억나고 은혜 받은 말씀이 김삼환 목사님 말씀이에요. 원래 신학생들이 교만하거든요. 어지간한 사람이 와서 얘기해봐야 듣지도 않거든요. 그런데 몽땅 다 은혜 받았어요. 카리스마적인 목회죠. 뭔가가 있는 거죠. 그 뭔가가 뭐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체험했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죠.

반면에 스펄전 목사님 같은 분을 꼽으라면 소망교회에서 목회하셨던 곽선희 목사님이에요. 그분은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부잣집 아들이었어요. 어려움을 모르고 지냈던 분이죠. 그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만약에 목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의사나 기술자였을 것이다.” 집안에 있는 시계는 남아나는 것이 없이 다 뜯었다가 결합했답니다. 과학자죠, 사실은. 어떤 분은 그럽니다. 우리나라 한국교회 1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탁월한 설교자다. 정말 그렇습니다. 배운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건드리는 그런 말씀을 하시죠. 그 분의 목회는 신학적인 목회에요. 그 분의 주장은 뭐냐. 건강한 신학, 그것을 분명히 알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 건강한 목회가 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의 체험과 그 감성을 얘기한다면, 이 분은 그 체험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하는 것을 성경으로 밝혀내어서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다음에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조화되어서 삶의 실천으로 드러내는, 건강한 지성에 바탕을 둔 신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그러니까 이런 분도 쓰시고 저런 분도 쓰셔요.

그런데 여기에 공통점이 있어요. 남다른 고난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김삼환’ 목사님 책을 읽어보니까 그 분은 너무 가난했고 또 목회를 시작해서도 너무나 목회가 어려웠어요. 여러 번 목회에 실패하셨어요. 또 건강하지 못했어요. 그것이 다 고난이겠지요.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겠지요. 그 분의 고난 중에 재밌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목회가 안 되는 중에도 한 가지 즐거움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둑을 좋아하셨던 모양이에요. 바둑이 아마추어 2급이래요. 바둑판에 앉으면 모든 시름을 잊는 거죠. 그래서 늘 바둑을 즐겨 두셨는데 어느 날 그 마음에 ‘내가 하나님 말씀보다 바둑을 더 사랑하니 이건 안 되겠다, 바둑을 끊어야 되겠다.’ 그리고 작심을 하고는 바둑판을 치웠답니다. 그런데 끝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또다시 끄집어내가지고 그 판 앞에 앉아있더라는 거죠.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기에 그 바둑판을 꺼내다가 도끼로 두 쪽을 내고, 두 쪽만 내면 나중에 또 붙여 쓸 테니까 그것을 쪼가리로 패가지고 다 불태워 버리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답니다. ‘하나님, 이걸 내가 제발 끊게 해주십시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보다 이것이 앞서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 분의 주장은 그거예요. 목사는 그저 강단에 서서 설교하고 말씀을 준비하는 그 취미보다 더 좋은 취미를 가지면 안 된다. 그런 얘길 하시더라고요. 공감합니다. 그게 고난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골프하기를 좋아하시죠. 좋습니다. 하세요. 기도하시면서 하세요. ‘하나님, 내가 오늘 비록 이걸 치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 말씀이 이 재미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방법이 있어요, 여러분. 그러려면 말씀을 펴야 되고요, 말씀을 읽어야 되고요, 말씀을 즐겨 들으세요. 환경을 그렇게 만드세요.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다’라고 말했을 때 그 묵상이라는 것은 물론 깊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마는 원래 그 단어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개가 오랜만에 뼈다귀 하나를 얻었어요. 혼자 먹으려고 저 구석으로 물고 들어가서 거기다가 감춰두고 그것을 핥아먹고 부숴먹고 나중에는 다 깨어먹는 것을 말해요.

곽선희 목사님같이 많이 배운 분에게 무슨 고난이 있겠는가? 그분에게도 고난이 있었어요. 10년 동안 많은 분들이 예배에 집중하는데 딱 한 사람만은 눈을 부릅뜨고 한 시간 내내 쳐다본다는 거예요. 안 듣는 거죠. 눈은 떴으나 안 듣는 거죠. 그리고 사사건건 와서 시비를 걸고 얘기한 거죠.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강단에 올라갈 때마다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그 사람이 보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위로하기를 ‘예수님도 날마다 가롯 유다를 앞에 놓고 지내셨는데’ 이것도 고난 아니겠어요? 이것을 통해서 아마도 사람이기에 교만할 수 있는 부분을 꺾으시고 끝끝내 하나님 손에 붙들려 쓰임 받도록 하나님이 하신 거죠.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을 절묘하게 아셔요. 우리에게 가시를 주셨어요. 어려움을 주셨어요. 그것을 뽑아달라고 기도하지만 그것을 뽑는 순간 교만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기에 한 가지는 남겨 두신 거예요. 어떤 분은 그래요, 남편이 십자가라고. 맞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고난도 여러 가지지요. 스스로 자초한 고난도 있지요. 어떤 분이 말이에요, 새벽기도를 갔다 오다가 고구마 밭을 지나는데, 아 글쎄 고구마가 탐스러워가지고 이걸 하나 좀 뽑아 먹어야 되겠다고 하나 뽑았더니 주르륵 하고 나오잖아요. ‘아이고, 주님의 뜻이라면 할 수 없지’ 걷어 가지고 오려다가 주인에게 걸려가지고 늘씬하게 두들겨 맞았답니다. ‘참 하나님의 뜻은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래서 집에 끙끙 드러누웠어요. 아프다는 소문이 목사님에게 들렸어요.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다 들었어요. 목사님이 가서 위로할 말이 없어요. 그래도 목사이기에 안 갈 수도 없고 해서 가서 그저 우물우물 적당히 위로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아, 이 집사님이 하는 말이 가관이에요. “목사님 그저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더래요. 그게 무슨 고난이에요. 스스로 자초한 고난이죠.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 아마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고 기도하고 애쓰면서 당하는 부끄러움. 고난이라면 바로 이것이겠죠.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라. 주님의 고난은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음에도 당하시는 고난이에요.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고난을 이야기할 때 이사야 53장의 그 고난 당하는 어린 양의 말씀을 들어서 말합니다. 그는 양과 같이 잠잠히 그 모든 고난을 당하셨도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읽으셨을 거예요. 그 말씀 속에서 자기의 삶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보셨을 거예요. 그 십자가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셨을 거예요. 예수님의 고난은 양처럼 죽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참는 고난이에요. , 이 죽음 이후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있고, 오늘 내가 아픔을 당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음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죠.

여러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아마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What would Jesus do? 이것은 1897년 미국에서 발행된 책입니다. ‘찰스 쉘던’이라고 하는 청년목사가 쓴 책입니다. 무디 부흥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으로 보기에 과연 그들의 신앙이 건강한 신앙이냐? 멀리 아프리카 선교를 한다고 선교헌금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면서도 정작 주위의 어렵고 불쌍한 이웃은 외면하는 그러한 모습을 지적한 거죠. 이분이 청년목사였기 때문에 자기가 실직한 사람인양 가장을 하고는 많은 사람들을 방문해서 자기의 형편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을 했을 때 믿는 많은 사람들의 무시, 냉대, 무관심에 충격을 받고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 읽어주기 위해서 쓴 소설이에요. 그 소설의 제목이 바로 <In His Steps> ‘그의 발자취를 따라’. 오늘 베드로전서 2 21절 말씀에,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이것이 바로 그 소설의 제목이에요. 그리고 그 소설 주제가 바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할 때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앞으로 1년 동안 결단하고 살아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결과를 우리에게 주시는지 한 번 나누어봅시다 하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2007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해입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는 해에요. 1907년 고종황제가 밀려나고 군대가 해산되고, 나라가 다 해체될 위기에 빠졌을 때 나라를 위해 기도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셔서 교회를 일으키신 사건이 바로 ‘평양대부흥’이에요. 그게 바로 내년에 100주년을 맞게 되요. 한국교회가 새롭게 부흥을 갈구하면서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이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그런 새로움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며칠 전에 어느 기사를 읽고 참 흐뭇했습니다. 우리나라 프로 축구팀 중에 ‘전북 현대팀’이 있어요. 얼마 전 아시아 프로팀끼리 하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했어요. 우리나라 팀으로는 첫 우승이래요. ‘전북현대’라는 팀은 지난 리그에는 꼴찌에서 두 번째 하던 팀이에요. 그렇게 바닥을 치던 팀이 아시아 클럽 전체에서 우승을 해가지고 이제 세계클럽챔피언에 아시아대표로 도전하게 됐다는 거죠.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 거기 보니 ‘최강희’라고 하는 새로운 감독이 부임해서 팀을 추스릅니다. 이분도 국가대표를 한 분이지만 기억 못하시는 것 보니까 그렇게 유명한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분이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유럽의 일류 팀들에 가서 코치수업, 지도자수업을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이 팀을 맡았어요. 그가 어떻게 하느냐. 첫째, 선수들의 역량을 120% 발휘해서 맹훈련을 합니다. 두 번째, 유능한 신인들을 계속 발굴해가지고 잠자고 있던 팀을 일깨워요. 누구라도 이름이 아니라 실력을 가지고 시합에 나갈 수 있도록. 세 번째, 이 팀은 잘하다가도 꼭 후반전 막판에 골을 먹어가지고 스스로 무너지는 게 약점이었는데 이분이 와서 시나리오를 만들어요. 선취골을 넣었을 때, 역전골을 먹었을 때, 여러 가지 상황 속에 어떻게 시합을 이끌어가서 끝낼 것인가 하는 시나리오를 만들고 훈련을 시켰어요. 그리고 나서 시합에 이기기 시작했어요. 우승했어요. 바닥을 치고 꼴찌를 하던 팀, 그 선수들에게 우리도 우승할 수 있고 우승했다고 하는 자부심을 심어준 거죠. 그러면서 말합니다. 연봉 2천만 원, 3천만 원짜리 선수로 살려면 지금 당장 옷 벗고 나가서 장사해라. 여기에 목숨을 걸고 뛰어 연봉이 20, 30억을 논할 만큼 자기를 바꾸어라. 도전을 심어줬다는 거예요. 축구에 ‘올인’하게 만들었다, 우승팀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신앙에도 단계가 있어요. 처음에는 그저 하나님이 없다는 것보다는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만사가 편하지하고 믿을 수 있어요. 추상적 논리. 또는 뭔가 그래도 믿음 쪽으로 기우는 신앙이에요, 이게 출발이에요. 그러다가 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조금씩 느끼게 돼요. 임재를 체험하게 돼요. 한발 더 나아가면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해요. 하나님이 사업을 도와주셨어요. 내 자녀의 진학문제를 해결해주셨어요. 건강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어요. 이적을 체험해요. 신앙이 조금씩 조금씩 깊어져요.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관심을 가지고 읽고 듣고 깨닫게 돼요. 그러나 마지막은 어떻게 될까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사랑하는 두 사람은 그 마음이 내 안에 있고 내 마음이 그 안에 있어요. 사랑하는 두 사람은 크게 말할 필요도 없어요. 온 몸이 귀가 돼서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랑하는 두 사람이야말로 두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두 사람인 거예요. 이게 바로 신앙의 절정이죠.

여러분, 사람이 허약해지면 교만해져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마음을 닫아요. 그러나 진정 힘 있는 사람은 여유 있고 넉넉해지고 겸손해져요. 그저께 한국국제학교 3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는데요, 발표회를 보는데 멋있었어요. 그런데 그 중에 정말 멋있는 게 뭐냐면 유도부가 있더라고요. 유도부 학생이 시험을 보이는데요, 장애물 넘기를 하는데 두 명을 넘고, 세 명을 넘고, 네 명을 넘고, 일곱 명을 엎드리게 하고 그걸 넘는데 얼마나 부드럽게 넘는지 그냥 표범이 훌쩍 건너뛰는 것 같아요. 몸에 하나도 힘을 들이지 않았어요.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이 너무나 부드럽게... 힘 있는 사람은 여유가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은 경쟁자가 없으셨어요. 경쟁심이 없었어요. ? 하나님의 은혜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자기의 삶, 자기의 고난, 자기의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흔들릴 것이 없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일 큰 약점이 열등의식이에요. 나보다 많이 배운 사람, 나보다 돈 많은 사람, 나보다 잘 생긴 사람,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 속에 깊이 들어가세요. 그 안에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라갈까, 우리는 고난을 외면하고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마는 고난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줄 압니다. 오늘 어떤 문제가 있든지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신앙이 건강한 신학 위에, 건강한 신앙고백 위에 그리고 아름다운 순종 위에 놓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