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믿음을 더하소서[태양과달이멈춘사건,머슴출신목사=조선의바울]/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4. 10:26

061008 믿음을 더하소서 (17:5~10)

성경본문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성경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특히 여자를 지으실 때 아담을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를 지었다. 자 그렇다면 남자의 갈빗대와 여자의 갈빗대의 숫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자는 여자보다 하나 적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진 않죠. 똑같죠. 그렇다면 성경이 틀렸습니까. 정답은 성경은 과학이 있지만 과학책이 아니고 역사가 있지만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쓰신 연애편지에요. 연애편지라고 이해할 때에 가장 정확한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오류가 없다.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눈으로 보면 성경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성경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구원받는데 아무런 오류가 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서로 다른 부분이 있게 되는 거죠.

최근에 호주의 창조과학회에서 창조과학측면에서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들을 몇 가지를 지적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태양과 달이 멈춘 사건. 여러분, 혹시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1960년대 NASA의 우주과학자들이 인공위성을 띄우면서 그 궤도를 산출하기 위해서 10만년 전의 태양과 달의 궤도를 측정하다 보니까 하루가 비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좀처럼 찾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 중에 믿음이 신실한 어떤 사람이 그 실마리는 여호수아 10장에 있는 사건 속에서 숨겨져 있다.’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백성들과 전쟁을 합니다. 그 전투에서 적을 물리칠 때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이렇게 외칩니다. “태양아 멈추어라. 달도 멈추어라. 그래서 그날 거의 종일토록 태양이 중천에 머물렀다 하는 그런 기록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과학자들이 연구해보니까 그것은 23시간20분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면은 거의 들어맞았는데 나머지 40분은 어디 갔느냐?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또 찾아냈는데 열왕기하 20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됐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해요.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내 생명을 살려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노라. 너의 생명을 15년 연장하겠노라’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해시계의 그림자가 10도 물러가게 하겠다’ 그런 기록이 있어요. 그 해시계 그림자가 10도 물러가는 것은 40분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잃어버렸던 하루를 되찾았다는 것이죠. 아마 교회를 열심히 다니신 분들은 한두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제 잘 들어야 되요. 여기서 졸면 큰일 납니다. 이게 오류라는 거예요. 그래서 1997년에 NASA에서 공식적으로 ‘우리는 그런 얘기 한적 없다’ 이렇게 부인했어요. 많은 교회의 설교강단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하나의 과학적 증거로 이러한 것들을 자주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누가 시작 했는지 모르지만 근거도 없는 소위 황색언론이 됐어요. 지어낸 이야기가 되어버렸어요. 아마도 과도한 열심이 그렇게 돼버린 거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버린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에요. NASA에서는 뭐라고 얘기했느냐. ‘지금의 물리학으로는 그 사건을 설명할 수 없다.’ 현재까지 이것이 정답입니다. 태양도 멈추고 달도 멈췄다면 지구의 자전이 멈췄다는 것인데 그것은 지금의 물리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여러분, 언젠가 물리학이 더 발전하면 밝혀질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뉴턴의 물리학을 가지고 세계를 이해했는데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뉴턴’의 물리학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되는 많은 것들을 보다 더 폭넓게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것이 또한 모든걸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또 누군가 더 연구해서 더 새로운 원리를 내어 놓겠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과학적으로 또는 문자적으로 성서를 접근하면 오류가 있어요.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름을 서로 다르게 쓰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연대가 틀린 경우도 있어요. 사람 숫자를 잘못 이야기한 것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그런 오류는 있을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를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간증하는 생생한 증거가 되겠죠.

불이 났어요. 그 현장을 보았어요. 여러 사람이 봤습니다. 각자 집에 가서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날 그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아마도 죽은 사람 숫자가 틀릴 수도 있고 그 상황이 달라질 수 있고 이야기의 전개가 달라질 수 있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보았지만 그 사건이 있었다고 하는 것 그것은 더 분명해지는 것이죠.

믿음과 과학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믿음은 영적과학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믿음에는 영적 원리가 있어요. 그리고 그 원리를 우리 실생활에 적용하면 분명한 결과가 나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얻는 거예요. 예수 이름, 그 안에 담겨있는 영적 원리가 많습니다. 우리가 비록 그 깊은 것을 다 모른다 할지라도 마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 할머니가 눌러도 문이 열리고 애가 눌러도 문이 열리듯이 항상 문이 열려요. 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엘리베이터의 원리를 우리가 다 모른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의 둘째 딸이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기숙사에 1년 있었는데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 학생 아파트를 얻어서 학교 밖으로 나갔습니다. 차로 10분 이상 떨어진 거리이기 때문에 도저히 걸어 다닐 수는 없는 거죠. 또 주일날 마음대로 교회를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꼭 차가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차는 어떻게 해서든 내가 해결해 주는데 너는 운전할 줄 모르지 않느냐. 그랬더니 자기가 운전면허를 따겠대요. 주어진 시간은 열흘 밖에 없었어요. 그럼 열흘 동안 어떻게 운전면허를 따느냐. 그래서 제가 미국 애리조나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우리 딸이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랬더니 그러면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해라. 그래서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되기 전 열흘 동안 친구 집에 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작전이 시작된 거예요.’열흘 만에 운전면허 따기.’ 친구가 어떻게 했느냐 하면 골프장에 데려갔어요. 하루 종일 카트를 가지고 운전의 기본을 가르쳐줬어요. 그리고는 자기 차로 옮겨서 배우게 한 거예요. 한편으로 배우면서 접수해가지고 필기를 보고 실기를 보고 떨어졌대요. 전화가 왔어요. 여기서는 기도하면서 매일 전화합니다. 어떻게 됐냐. 떨어졌어요. 그래, 힘내라. 열심히 해라. 우리가 기도하고 있다. 또 떨어지니 좀 불안해지죠. 기회가 한 번 더 있다. 세 번 떨어지면 당분간은 안 되니까 충분히 연습하고 와라 해서 기간을 넓게 두는 거지요.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기 직전, 마지막 세 번째 시험에서 합격했어요. 드디어 면허를 땄어요. 땄습니다. 그래서 돌아갔어요. 어떻게 됐을까요. 당장 차를 사가지고 몰고 다니는 거예요. 며칠 전에 제가 통화했어요. “어떠냐?” “살 것 같아요.” 차가 발인 미국에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이제는 교회도 갈 수 있고, 학교도 마음대로 갈 수 있고, 살 것 같대요. 차는 제가 마련해줬습니다만 운전은 자기가 해야 하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어요. 거기에는 오묘한 영적인 원리가 있어요. 만물 창조가 있습니다. 인간 창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만한 인간의 타락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이 있어요.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이에요.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모든 설교는 한마디로 압축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우리 인생의 해답이다. 예수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물음에 대한, 이 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비록 그 성경의 복잡한 내용을 다 모른다고 할지라도 문제를 갖고 절박하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응답받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찾으셔요. 이것이 적용이에요. 받아들이고 그대로 할 때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죠.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제자들이 구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너희가 저 뽕나무더러 저 바다 속에 심겨져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죠. ‘저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 그러면 그 말한 대로 될 것이다.

저의 큰 딸이 지금 대학졸업반인데 초등학교 때 경험한 일을 뒤늦게 얘기했어요. 저희가 한 때 태릉에 살았거든요. 중랑천 다리를 건너가다가 얘가 주일학교에서 들은 말씀이 생각났어요. 바로 이 구절이에요. ‘산이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 그러면 말한 대로 되리라.’ 그래서 얘가 다리 위에 서가지고 태릉의 불암산을 바라보면서 “중랑천에 빠져라” 그랬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는 거예요. 다시 한 번 기도하고 했는데도 여전히 안 빠지더래요. 그래서 그게 부끄러워서 차마 얘기 못하고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얘기하더라고요.

여러분, 이것은 하나의 강조법이죠. 성지순례를 가서 제가 겨자씨를 봤는데 너무 작아요. 그걸 보존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잃어버렸어요. 너무 작아서, 너무 가벼이 날려서. 그렇게 작지만 그러나 그 작은 믿음, 실천, 순종이 우리의 삶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거예요. 믿음은 영적인 과학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더하겠습니까.

여기 주님께서 비유를 들었어요. 한 주인과 종을 비유로 들었어요. 어느 주인에게 종이 있다. 종이 나가서 양도 키우고 또는 밭도 갈고 그러다가 집에 돌아오면 언제 주인이 종을 위해서 밥상을 차려주는 법이 있느냐. 종은 또 집에 들어오면 주인을 위해서 상을 베풀어야 된다. 주인이 다 먹은 다음에 저 구석에서 먹는 거죠. 그렇게 하지만 불평하지 않는 거죠. 오히려 말하기를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자세로 하나님을 믿을 때 그에게 믿음을 더 하신다 그런 말이에요.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믿습니까.

제가 처음 안수 받고 저 대구의 큰 교회의 부목사로 갔는데요, 그 곳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습니다만 늘 잊지 못하는 한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른아홉 살 난 의사 선생이 암으로 죽은 거예요. 저는 얼굴도 잘 몰랐어요. 왜냐하면 제가 갔을 때는 그가 이미 깊이 병들어 있다가 죽어서 장례식에 따라간 것뿐이니까.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참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경북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가장 촉망 받던 사람이 기껏 공부를 마치기가 무섭게 병이 든 거예요. 그렇게 병석에 있다가 끝내는 목숨을 잃은 거예요. 정말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어요. 우리를 언제 부르실는지 몰라요.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배운 것이 많고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그 날은 아무도 바꿀 수 없어요. 솔로몬이 말했습니다. ‘날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고 인간이 수고하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에요. 내 생명의 주인이에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오만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하루는 내 의지와 노력으로 쟁취한 게 아니에요. 눈을 뜨는 순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아침에 눈 뜨고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 오늘도 이렇게 새 날을 주신 것 너무나 감사합니다. 오늘을 마치 마지막 날 인양 그렇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며 살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런 주인이기에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죠. 절대적인 왕이므로 그 앞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두 번 놀란 적이 있어요. 하나는 자기 고향에 가서 말씀을 전했는데 아마 예수님도 자기 고향사람들이 환영하면서 뜨겁게 맞아줄 줄 아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 사람이 누구냐.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저 형제들이 우리와 다 더불어 살고 있지 않느냐. 저가 누구길래 저런 얘기를 하느냐’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예수님이 기이히 여기셨다. 놀랬다는 말이에요. 그러나 또 한 번 놀래신 적이 있어요. 로마의 백부장이 어느 날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유대 장로들을 보내서 말합니다. ‘제 종이 병들었습니다. 오셔서 병을 고쳐 주십시오.’ 장로들이 와서 말합니다. “그 백부장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돕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칭찬하고 “그를 위해서 그 종을 고쳐주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했더니 백부장이 말하지 않습니까. “주여, 오시지 마십시오. 제가 감히 주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주님이 거기서 명령하셔도 여기서 종이 고침 받을 줄 믿습니다. 저는 군인입니다. 제 아래에는 부하가 있고 제 위에는 상관이 있습니다. 명령 받는 대로 시행합니다. 주님이 그곳에서 말씀만 하셔도 나을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깜짝 놀랐어요. “내가 온 이스라엘을 다녀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많은 유대인들을 만나도 이런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도다.

여러분, 자기 종을 사랑하고 위하는 그 마음도 귀하지만 사실은 피정복자인 나사렛 예수 앞에서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무릎 꿇는 믿음은 참 귀한 믿음이죠. 예배를 잘 드리는 비결이 있습니다. 더도 말고 5분 먼저 와서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나서 예배를 드리는 것하고 허겁지겁 오는 것하고는 다른 거예요. 정말 다른 거예요. 그 마음의 자세 하나가 삶을 바꾸는 것이죠.

이제 그 명령에 순종한 종이 말합니다. 그 일을 피곤하게 다 하고도 말하기를 “저는 그저 쓸모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저를 아껴주시고 사랑하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단순히 그가 나의 주인이기에 복종해야 할 대상이기에 복종한다가 아니고 그 마음에 주인을 향한 깊은 신뢰가 있어요.

여러분,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는 놀랍게도 머슴출신이었어요. 1901 514일 감리교 목사로 ‘김창식’이라고 하는 분이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어요. 이 사람은 너무나 가난한 집에 태어났어요. 그 가난을 견디다 못해 15살에 가출을 했어요. 떠돌아다니면서 머슴일도 하고 마부도 하고 장돌뱅이도 하고 지게꾼도 하고 이러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나이 서른에 늦장가를 들어가지고 색시와 함께 그래도 고생스럽지만 서울에 올라가 살자  하고는 서울로 올라온 거예요.

그런데 마침 그때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그게 1888년입니다. 그러니까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온 지 이제 한 3,4년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이들이 불쌍한 거지같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고아원을 시작하는 거죠. 또 학교를 시작하는 거죠.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립니다. ‘저 양코배기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다. 저거 몰래 잡아먹는 것이다.’ 이런 소문을 퍼뜨렸는데 참 희한하죠.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분노한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와 학교를 때려 부수고 고아원을 때려 부수고 하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그걸 ‘영아소동’이라고 해요. 애기 잡아먹는다고. 이 김창식이라고 하는 사람도 그 이야기를 듣고 분개했어요. 그리고는 내가 기필코 증거를 찾아내서 이놈들을 쫓아내야 되겠다. 그러다가 그 때 막 한국에 들어온 ‘올링거’라고 하는 선교사가 집에 하인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는 그 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는 그 선교사의 집 마당을 밤낮 쓸면서 어디 지하방이나 어디에 혹시 애를 잡아놓고 잡아먹지 않는가 눈을 부릅뜨고 날마다 지킵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자기가 의심을 받으면 안되니까 아주 열심히 일하면서 틈을 노렸던 거죠. 소위 위장취업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런 낌새를 발견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그가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선교사가 부엌에서 요리사로 일하라고 했어요. ‘옳지, 잘됐다. 내가 좀 더 깊숙이 들어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봐야겠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선교사들은 국왕의 부름을 받아서 국왕과 대면하고 조언하는 지체 높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집에 돌아오면 자기 같이 낮고 천한 하인들을 무시하지 않고 아껴주고 돌봐줍니다. 드디어 그는 발견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라고 하는 비밀이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해요. 그 집에 들어가서 머슴으로 일한 지 2년 만에 자청해서 세례를 받게 돼요. 계속해서 공부해서 목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선교사들의 편지에 보면 ‘김창식이(Kim Chang Siky)’ 영문자 y가 하나 더 붙어요. 선교사들이 잘 몰랐던 거죠. ? 머슴으로 일할 때 주위 사람들이 창식이, 창식이하고 불렀던 것을 선교사들이 저 사람 이름은 ‘창식이’로구나. 거기다 성을 붙여서 ‘김창식이’.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쁘게 여겼다고 합니다. 나 같은 머슴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셔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시는구나. 그의 별명은 ‘조선의 바울’이었다고 합니다. 왕년의 장돌뱅이 실력을 그대로 발휘해가지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또 다른 교회를 세우고, 한평생 125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48개의 예배당을 건축한 그런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항상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겸손한 마음,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때 날마다 살아 움트는 믿음이 샘솟을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우리가 믿는 자이기에 날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늘 간구합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겨자씨같이 작을지라도 살아있는 믿음, 순종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일 때에 뽕나무가 바다에 심겨지는 것 같은 놀라운 이적들이 내 삶 속에 풍성히 펼쳐지리라 말씀하셨사오니 믿음으로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시고 주의 증거를 붙드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