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지금 응답되는 말씀[하나님은시간을초월하신분이므로지금응답됨]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7. 11:58

060611 지금 응답되는 말씀 (4:14-22)

성경본문[개역개정]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옛날 한국교회 초기에 서양선교사님들이 예배를 인도하고 마무리 축도를 합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축도를 하는데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통 이렇게 나가는데, 아 이게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지금’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애를 쓰다가 ‘시방은...’ 했답니다. 뜻은 똑같아요. 사전에 보면 똑같습니다, ‘바로 이때’. 언어가 참 어려운거죠.

여러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 나사렛 회당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거예요. 이사야의 말씀을 펴시고 이사야611절과 2절의 말씀을 읽으셔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그 말씀을 다 읽으시고 마지막에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 말씀이 이루어졌느니라. 이 예언이 지금 이 시간 성취되었느니라.” 엄청난 얘기거든요. ‘지금 오늘’

과거는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없어진 것은 아니죠. 과거는 오늘에 녹아있는 거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내 안에서 미래가 움트고 있는 것이죠.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항상 오늘이요, 항상 지금이죠. 지금의 의미를 놓친다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 말씀을 했는데 싸움이 일어난 거예요. 왜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놀랍게 여기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우리하고 같이 이 동네에서 살던 그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저가 어려서 자라나고 일하고 하는 것을 우리가 다 보았는데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느냐?” 뭐 당연한 반응인 것 같아요. 또 이것을 다른 말로 얘기하면 지금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시간표를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자기 시간표를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이에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인생은 얼마만큼 왔습니까? 얼마만큼 남았습니까? 지금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이걸 안다면 그 사람은 자기 인생의 시간표를 알고 있는 거예요. 다른 말로 얘기한다면 성령의 비밀을 아는 자와 성령의 비밀을 모르고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환경에 매여 사는 사람과의 갈등이요, 싸움이에요. 그저 말다툼하고 끝난 게 아니에요. 계속 읽어 보면 이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이 서 있는 그 높은 산 벼랑으로 끌고 가서 저를 떨어뜨려 죽이려 했어요. 왜 그러냐?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아주 심각한 문제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하셨을까요?

남녀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부부가 됩니다. 그래서 결혼해 살아서 20, 30년이 됩니다마는 좀처럼 해결하기 어려운 게 부부싸움이에요. 밥을 잘 먹다가도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확 바뀌는 거예요. <남녀대화법>이라고 하는 책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는 뇌의 구조가 다르다는 거예요. 알고 싸우면 좀 낫겠죠. 남자는 ‘사냥꾼 뇌 모드’라는 거예요. 여자는 ‘파수꾼 뇌 모드’라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들 같으면 누군가 잘못했다면 가서 한대 때리고 끝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여자들의 방식으로는 그런 게 아니에요. 일이 자초지종이 어떻게 되었는지 세세히 알아봐야 돼요. 그래서 꼬치꼬치 묻는 거예요. 그런데 남자들은 아무리 내가 잘못했더라도 잔소리로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아내들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분명히 남편하고 얘기했는데 뒤에 가서 물어보면 못 들었다고 하거든요. 뻔뻔스럽게. 그런데 남자를 이해하면 서로가 잘못이 아니에요. 남편이 지금 신문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뭐라고 얘기하면 안 들립니다. 사냥꾼은 지금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 타겟만을 보고 있어요. 지나가는 것들은 들리지 않아요. 말했어요. 그러나 듣지 못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남편의 주의를 끌어당긴 다음에 정말 중요한 얘기니까 신문도 내려놓고 잠깐 TV도 끄고 그리고 이야기를 전달해야 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요. 중요한 내용은 메모지에 써서 남편이 앉는 책상이나 컴퓨터 앞에 딱 붙여 놓아서 항상 환기시키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또 부부동반으로 밖에 나가면 집에서는 안 그러더니 남의 여자에 대해서는 친절하거든요. 그 때 현장에서 혈기를 부리고 화를 내면 남편이 이해를 못합니다. “저 여자가 오늘 왜 저러나?” 뇌 모드가 다른 거예요. 그럴 때는 조용히 집에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돌려서 얘기해도 안돼요. 직접화법으로 분명하게 얘기해야 돼요.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만큼 먼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어요.” 당당하게 분명하게 얘기해야 남자들이 “아, 그렇구나”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 권하는 말이 있어요. 부부가 어디 외출하려고 하면 늘 초장에 그만 화를 내게 하는 일들이 생기잖아요. 남편은 벌써 다 준비하고 문간에 서서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와.” 그런데 여자분 들은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여자분 들의 뇌 모드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단장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못 다 읽은 신문을 마저 읽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하면서 아내가 나올 때쯤 딱 시간을 맞춰서 나오면서 “다 됐어?”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또 아내가 동창모임을 갔다 옵니다. 그럼 아무래도 “걔는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하던 게 남편은 잘 만나가지고...” 하면서 열 받은 이야기를 할 때, 그 때가 중요해요. “당신이 잘못한 거야.” 이러면 안 된다는 거죠. 여기서는 시시비비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받은 스트레스를 어디선가 풀어볼까 하고 있을 때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맞장구를 치라는 거예요. “그래,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몰라” 이렇게 맞장구를 쳐서 아내의 마음을 풀어주라는 거예요. 그래야 더불어 같이 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려고 하는 것, 그것은 욕심이라는 거예요. 남자가 그렇고 여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순간순간 배려하되 끝까지 욕심을 부리지 말아라. 여러분, 고린도전서 81절에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남자를 위하고 여자를 이해했을지언정 아는 것으로 그친다면 사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제 이것을 덮을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한 거예요.

오늘 누가복음을 읽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아서 제가 꼭 하고 싶었던 본문이 바로 누가복음 4장이에요.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사람의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육신을 입고 태어납니다. 그는 어린아이의 과정을 거칩니다. 12살에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에게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는 순간 그에게 들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에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게 바로 영적인 새로운 탄생이에요. 하나님의 부르심이에요. 이게 소명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순간이에요. 사실 세례는 여기에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광야에 들어가 40일간 금식하면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인생에서 겪는 모든 시험을 압축해서 설명한 거예요. 그 광야의 유혹을 통하여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내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발견하는 거예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귀의 유혹을 대적하고 이기신 거죠. 그 내용이 뭡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다. 떡 먹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필요한 것들을 얻어서 자녀들을 가르치고 길러야 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뜻이죠. 그러나 또 하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내 삶 속 깊이 들어와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단이 시험하지 않습니까? ‘너 자신을 저 높은 이스라엘 성벽 꼭대기에 올려 세우고 한번 네 몸을 저 아래로 던져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해서 네 발이 떨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실 것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종 부리듯 하면 안돼요. 그저 나의 필요를 따라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는 거예요. 그러기에 응답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내 생명의 주인이에요. 정말 하나님 앞에 내가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내 마음에 모셔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 앞에 승복해야 돼요. 그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게 돼요. 그럴 때 내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여지는 거죠. 세상의 권세를 다 보여주면서 말합니다. 마귀가 말하기를 ‘내게 절하라,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만 경배하고 높이라.’ 이게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이제는 성령으로 충만해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고향에 돌아옵니다. 나사렛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합니다. 이사야 611, 2절의 말씀을 읽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러니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철저하게 성령의 사람,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인간적인 모든 조건을 가지고 살지만 성령을 온전히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 이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말씀이에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께 일어났던 그 사건이 이제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의 삶 속에 다시 재현됩니다. 이게 바로 초대 교회의 역사에요. 요즘 얼마나 어렵습니까?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해고됩니까?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해쳐나가야 되겠습니까? 사람이 애쓰고 노력하는 것, 필요하죠. 그러나 ‘내 안에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라고 하는 그 비밀을 알지 못한다면 성경은 심하게 이렇게 말했어요. ‘예수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지금 내 안에 함께 하신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요. 고향 사람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에 충만한 모습을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나사렛 촌구석에서 태어났는데 네가 어떻게 메시야가 되겠느냐?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를 이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메시야가 나타날 때 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될 것을 이 날까지 기다리며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그것을 위해서 율법을 날마다 붙들고 외우고 다니고 있는데 어떻게 나사렛 촌구석에서 나타난 네가 우리의 메시야가 된다고 하느냐?’ 인간조건에 얽매여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어요.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안에 오셨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어요.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성경에 이루신 바로 이 사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번연히 알면서도 죽음을 향해서도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이런 용기와 이런 승리를 아시고 나갔어요. 자기 시간표를 알고 나갔어요. 예수님께서 자기가 죽을 것까지도 알고 나가셨어요. 그러니 한 순간에 눈에 보이는 실패가 아니에요. 시합을 하다 보면 질 때도 있잖아요. 그러나 진정한 선수는 질 때 낙망하는 게 아니죠. 이겼다고 교만하는 게 아니죠. 그의 분명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서 하나씩 하나씩 나아가는 것이죠. 우리 인생을 하나님 안에서 확연히 내다보고 그것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죠. 우리는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가는 거예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지금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내가 집을 다 팔고 차를 다 팔아가지고 교회에 갖다 바치면 천당에 가나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아니요’ ‘그럼 내가 매일 나와 가지고 교회 청소를 열심히 하면 천당에 가나요?’ ‘아니요’ ‘그럼 내가 개, 고양이 동물들을 예뻐하고 사랑하면 천당에 가나요?’ ‘아니요’ ‘그럼 어떻게 해야 천당에 가나요?’ 그랬더니 5살짜리가 ‘죽어야 돼요.’ 여러분 이게 진리예요. 애는 우스개로 말했죠. 내 안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살아계셔요. 그걸 알지 못하고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열심으로 살려고 하는 그 나의 자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야 돼요. 성경적 표현으로는 네가 그리스도 십자가 아래 죽을 때에 하나님께서 일하셔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요. 그 때 들리는 거예요. 그 때 보이는 거예요. 그 때 깨닫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요 우리민족은 6.25 전쟁 통에도 살아남은 민족이에요.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절망을 얘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소망을 말씀하시면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를 불러서 해골 골짜기를 가잖아요. 거기는 수많은 해골들이 있었어요. 이제는 그 뜨거운 햇빛에 다 말라 부스러지기 직전이에요.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보기에 이 해골들이 살 수 있겠느냐?’ 도저히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자기의 판단과 경험으로는 이것은 이미 죽어버린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마른 해골들이 하나님 말씀에 응답하고 일어나기 시작해서 드디어는 살아있는 큰 군대를 이루었다.

여러분, 어떤 분은 그래요. 이 믿음이라는 것은 말이죠 나 같은 사람은 안돼. 자기 착각에 빠져요.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가 있어요. 부부도 말이죠 가만히 보면 한 사람은 낙관적이고 상대적으로 다른 한 사람은 비관적이에요. 물론 낙관주의자가 더 건강해요. 암 사망률도 낮아요. 수술에서 회복되는 회복도 빨라요. 그리고 산후우울증도 적어요. 낙관주의자가 좋죠. 그런데 말이에요, 미국의 센트럴 미시건 대학에서 연구한 바에 의하면 도박을 가지고 연구를 했더니 낙관주의자는 원래 도박은 어차피 잃게 돼 있잖아요, 그래도 자기가 실제 보다는 더 많이 이겼다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놓친 것도 아슬아슬하게 놓쳤다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도박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비관주의자는 보다 냉정하기 때문에 더 이상 했다가는 망한다 이 시점을 알고 탁 포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도박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이다. 더 현실적이고 냉정한 것이죠. 낙관주의자는 자기 스스로가 과도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서로 배우며 살라고 부부를 하나는 낙관주의자로 하나는 비관주의자로 묶은 거예요. 그게 인간의 조건이에요.

그러나 신앙은 이것과 다른 거예요. 제가 늘 우스개로 말하죠. 아니 저런 요조숙녀 같은 아가씨도 시집가더니 애를 낳더라. 그게 생명의 원리예요.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성령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 그를 인정하고 그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말씀을 들어야 돼요. 베드로 같은 낙관주의자, 그러나 도마 같은 비관주의자 둘 다 실패하는 건 마찬가지예요. 겉으로는 베드로가 믿음이 더 좋은 것 같죠. 아니에요. 둘 다 그리스도를 올바로 성령 안에서 발견하게 될 때 그들은 삶을 드리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게 아니에요. 이 성령의 비밀을 붙드는 거예요. 2006 611일은 지나갑니다. 이건 성경적으로 말하면 크로노스의 시간이에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금이라고 하는 것은 카이로스라고 말해요. 이사야의 말씀이 예수님에게 응답되고 그 말씀을 듣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응답되고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응답되는 것은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제가 그래서 어제 다시 이사야서를 말이죠, 이게 이사야 61장에 있잖아요, 그래서 이사야 40장부터 하나님께서 해방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거예요. 그것을 전부 밤에 읽는데 내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정말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말씀이에요. 말씀이 내게 주시는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릴 때 그 영혼이 강건한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 앞에 기도하세요. 이미 하나님의 성령은 내 안에 계셔요. 내가 말씀을 펴서 읽을 때 그 말씀을 깨닫게 하셔요. 하나님, 내 눈을 열어주십시오. 오늘 말씀은 자유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님의 은혜를 선포한다. 우리의 신앙이 이미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신앙생활이 내 열심, 내 도덕, 내 윤리, 율법을 지키는 이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들어와 나와 함께 하시며 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으며 왜 부활하셨는가, 그리고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신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그 놀라운 영적인 비밀을 발견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이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따라가는 여기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며 살아있는 믿음이 시작되며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다고 하는 사실을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