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나는 누구입니까?[하나님이=보내셨고,함께하시며,기뻐하시는자]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7. 08:47

060205 나는 누구입니까? (3:11-15)

성경본문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니라

 

신라의 일곱 번째 임금이었던 일성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3대 유리왕의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리왕이 죽을 때에 그는 너무나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왕위는 탈해라고 하는 총리로 권력을 쥐고 있던 자에게 넘어 갔습니다. 그리고 탈해가 40년 가까이 왕위에 있다가 죽자 드디어 왕권이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었는데 정치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번에는 왕위를 이복동생인 파사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왕위계승 일 순위였는데 그것을 놓치는 순간, 왕에게 가장 거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왕이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일상이 숨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몸을 낮추고 허리를 굽히고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해 10여 년 은둔생활 끝에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더 이상 여기서는 숨 막혀 죽겠다.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거지요.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왕에게 나는 신라의 왕자요. 그래서 일본 왕이 땅을 허락하여 시골에 파묻혀서 살면서 일본 여자와 결혼을 하고 40년을 살게 된 것이지요. 신라에서는 파사가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또 계승합니다. 그는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이 여든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는 두고 온 고국도 마냥 그리워 할뿐이지 돌아갈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낚시하며 세월을 보내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신라로부터 사절이 옵니다. 두려움에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그들이 일성에게 절하며 말합니다. 왕이 죽었는데 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기에 이제 왕위를 계승할 자는 바로 당신입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나이 팔십에 신라의 왕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 거지요.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거지요. 비록 몸은 노쇠했습니다만 나이 팔십이 되었습니다만 이제 왕위가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 동안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하고 죽이려고 했던 놈들 이제 내가 왕위에 올라서 손을 봐야 되겠다. 근데 가보니까 다들 죽었어요. 다 늙어 죽었어요. 자기가 팔십이니 그리고 왕위에 올라서 나라를 20년을 더 다스리고 100세에 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작 비극은 그 다음에 있는 거예요. 그가 왕위에 있는 20년 동안 신라에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이 끊이지 않는 거예요. 이제는 백성들이 고통 당하는 그 모든 고통의 죄 값을 지게 된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왕이 부덕해서 이런 것이다 라고 이해했으므로 그는 다리를 뻗고 잘 수 없는 불안과 염려와 근심 속에 20년을 보내고 죽게 된 거지요. 80년 오매불망 기다렸던 그 보좌의 실체는 너무나 무거운 인생의 고통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100세를 살았습니다. 장수 했습니다.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이 없는 거지요.

오늘 모세가 비슷합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 구사일생 극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모세라 했어요. 물에서 건져 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숨겨진 은혜가 있었지요. 그가 애굽 왕국에서 애굽의 학문을 배우고 애굽의 왕자로 자라나게 됩니다. 나중에 자기의 신분을 알게 됩니다. 이번에는 히브리인을 구출해 내는 하나의 혁명가로서의 걸음을 결단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고 살인하게 되고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쫓겨 납니다. 그는 목동이 됩니다. 처가살이 합니다. 한 여인을 만나서 아이를 낳아 그 아이의  이름을 붙이기를 그 뜻이 내가 이방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모세의 자기 삶에 대한 이해가 거기에 다 실려 있습니다. 나그네 인생이로구나. 그래서 가수 최희준씨의 ‘하숙생’은 참 철학적인 노래예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저는 2절이 더 좋아요.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그러나 모세가 나이 여든에 아무런 소망 없이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거지요.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모세는 그 동안 날마다 물었던 그 물음을 던지는 겁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그리고 당신은 누구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마틴 기어의 <귀향> 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는데요, 그것은 16세기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건 한 재판관의 기록을 영화화 한 거예요. 프랑스의 한 시골에 13살에 장가든 마틴이라고 하는 청소년이 있었던 거지요. 12살짜리 신부하고 살았는데 갈등이 많았어요. 동네 사람들과도 갈등이 많았어요. 끝내는 도둑 누명을 쓰고 어느 날 집을 나가 버렸어요. 행방불명이 됐어요. 잊혀진 사람이 됐어요. 그러다가 8년 만에 홀연히 또 나타났어요. 청년이 되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변했어요. 성실한 사람이 되었어요. 아내를 아끼는 사람이 되었어요. 동네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동네 일을 잘 돕는 사람이 된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칭찬을 합니다. 저를 좋아 합니다. 그러나 뭔가 좀 어색한 구석이 있었어요. 의문은 좀 가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좋게 변했으니까 더불어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 스페인 전쟁터에서 한 사람이 그 마을에 들어옵니다. 그 마을에 머물고 있다가 이 마틴을 보게 된 거지요. 그리고는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틴이 아니에요.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이에요.” 그 실체를 폭로하는 거지요. 저는 전쟁터에서 마틴과 함께 있었던 사람인데 마틴은 전쟁터에서 큰 상처를 입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치료받고 있는 중이에요. 저 사람은 그 사람과 같이 옆에서 먹고 자고 전투하던 친구였는데, 마틴의 이야기를 낱낱이 다 듣고는 마치 자기가 마틴 인양 찾아온 거예요. 그의 실체를 폭로하는 거지요. 그의 거짓이 들어난 순간 그는 그 나라의 법에 따라서 교수대에 오르게 됩니다. 사형 당하게 된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증명서는 한 마디로 ‘너는 누구냐?’ 그거는 내가 나를 증명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라든지 국가라든지 관청에서 증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저 사람이 교회를 제대로 나오고 고해성사를 받았는가. 또는 저 사람은 혹 범죄자가 아닌가. 저 사람은 군인이 아닌가. 혹 전염병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이런 여러 가지 목적으로 조사하고 살피기 위해 국가기관이나 교회에서 너는 누구냐 라고 물었던 거지요. 그리고 여기에 원칙이 있습니다. 부정의 원칙이에요. 이 울타리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내 쫓기는 거예요. 사람을 차별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간혹 T.V 뉴스를 통해서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의 애환을 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하는 사람들이 분명 뿌리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얻지 못하므로 인해서 우리와 얼굴은 똑같고 유전자도 똑같지만 그들은 엄청난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 개인의 정체성은 위태롭습니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아는 거 같지만 내가 말하는 거 가지고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요. 법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그 규정에 맞아야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혹시 ‘수지 김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그만 남편에게 맞아 죽은 사람이잖아요. 홍콩에서... 그 남편이 자기의 죄악을 딱 덮어버리려고 그 여자를 간첩으로 몰았잖아요. 그 때 또한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 상황에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서 간첩 사건으로 만들었잖아요. 죽은 사람도 기가 막힙니다만 하루아침에 간첩의 집안이 된 그 집안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풍비박산 났어요. 부모들은 너무나 충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일가친척들은 간첩의 집안이라는 그 누명과 오해로 말미암아 그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뒤늦게 사실이 폭로 되었을 때에 이미 빼앗겼던 그 세월을 누가 대신 갚아줄 수 있습니까? 참으로 무서운 것이지요.

오래 전에 독일에 한번 갔다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빨리 비행기를 타고 가야 되는데 말이지요. 여권 검색대에서 뭐가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더니 사무실로 저를 데리고 가는데 아 이거 참, 말도 잘 안되고 이거 큰일 났어요. 다행히 그 사람이 뭘 잘못 안거지요. 자기네들끼리 뭐라뭐라하더니 이거는 아무 이상 없는 거다. 그래서 여권을 되돌려 주는 바람에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만, 만약에 그런 일들이 꼬여가지고 시간이 지체되고 비행기를 놓치게 되고 일이 엉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권을 분실했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나를 어떻게 얘기할 수 없는 이 기가 막힌 현실. 오늘날에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건 은행의 신용카드예요. 그거 없으면 어디 가서 지내기가 너무 불편한 거지요.

여러분, 그러고 보면 신앙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에게 ‘너는 누구냐?’ 라고 끝없이 묻는 거지요. 그런데 대답을 알기가 어려워요. 모세의 경우와 같이 언제는 극적으로 건져낸 자, 언제는 이집트 왕자, 언제는 혁명가, 그러다가 목동, 나그네, 사람의 상황은 끝없이 변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판단은 우리의 상황에 얽매여서 나의 지위와 신분과 능력과 재물과 나의 모든 이것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거는 언제 변할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나는 누구냐.’ 라고 하는 그 물음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내놓고 보여야 해요.

‘하나님 나는 누구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물어 놓고 보니,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그 분이 세상의 여러 가지 기준과 같이 또 흔들린다면, 나의 이해는 온데 간데 없기에 물을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나는 나다.” ‘I am that I am. 인니어 성경을 읽어보니까 ‘Aku adalah aku.’ 우리 개혁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WHO I AM.’ 무슨 말이에요. 너하고 나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라고 하는 차별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나다.’ 네가 죽고 사는 거 내 손안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 역사를 주관하는 자다.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와 내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그는 세상을 만드시고 홀연히 떠나가신 분이 아니에요.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이해했던 하나님은 시계를 만든 시계방 주인같이 시계가 어떤 사람의 손목에 차여 있는지 그건 관심 없어요. 만들어 놓고 그냥 팔았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에요. 시계가 그 안의 작동법을 따라서 그대로 돌아가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고 이해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증거가 뭡니까? 모세에게 지팡이를 주셨어요. 그것은 이적의 지팡이에요.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증거를 주셨는데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이제 네가 애굽에 가서 내 민족을 이끌어 내라. 그리고 이 자리에서 너희가 다시 모여 나를 예배하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증거가 되리라.

여러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증거는 눈을 열고 보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 이게 다 증거이지요. 그러나 마지막 증거라 한다면 마지막 날 눈을 감는 그 순간 하나님이 우리 앞에 새로운 세상을 또 한 번 활짝 열어 주시는 거지요. 증거의 본질은 미래 사건에 있어요. 그러기에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요즘 유행어가 있어요. 2모작 인생을 준비하라는 거예요. 남자 수명이 73세 여자 분들은 80이에요. 그러나 지금 그렇다는 말이에요. 이제 한 20년만 또 지나가면 거기서 수명이 10년 씩 또 늘어난대요. 2모작 인생을 준비하라. 그래서 돈도 준비해야 돼요.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자식들한테 다 쏟아 붓지 말라니까요. 여러분의 노후를 잘 준비해야 돼요. 건강도 잘 준비해야 돼요. 그러나 진짜 준비해야 할 것은 신앙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나이 들면 몸 약해지고 감정 여려지고 자식 손자들은 제 살길 바쁘다고 다 흩어져서 효자 없는 거예요. 기대할 바 없는 거예요. 그래 제가 생각합니다. 하긴 그럼 그렇지 살수록 세상이 즐거우면 누가 천국을 가려고 할까. 이것저것 다 뺏기고 힘 떨어지고, 그저 앉고 일어서는 것도 힘든 그 처지가 되어야 ‘아이고, 하나님’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겠지요. 하나님이 사실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그러나 그 때 탄식과 한탄만으로 하나님이 부르실 날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든든히 설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을 준비해야 2모작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믿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를 들어내신 그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냐 하는 우리의 그 물음에 대해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답을 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셨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 내가 누구냐? 우리가 이름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그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곧 나입니다. 나를 보내셨고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라.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자에게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 라고 말씀하시지요. ‘너는 누구냐.’ 라고 세상 사람들이 묻는 그 부정의 원리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리라. 긍정의 원리입니다.

제가 서울 압구정동에 살 때, 일식집을 한 번 갔었어요. 이 집은 다른 일식집 하고는 달라요. 온통 벽에다가 마라톤에 관한 사진과 메달과 이런 거를 걸어 놨어요. 그래 얼핏 이 집은 음식을 파는 집이냐 뭐 하는 집이냐. 마침, 주인이 계시더라고요. 써빙을 하시길래 아니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간증을 하셨어요. 자기가 다 죽게 되었었는데 친구의 권유로 마라톤을 이판사판이니까 한 번 해보자 하고 그저 자기 몸을 맡기고 마라톤을 했는데 아, 그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마라톤 완주를 할 뿐만 아니라, 일 년 365일 주말마다 우리나라에서 마라톤 대회가 얼마나 많이 열립니까.  그것을 쫓아 다니면서 마라톤 광이 된 거예요. 그러면서 말하는 거예요. 내가 잃었던 건강을 찾았다. 건강을 찾았고 삶의 자신감을 찾았다. , 간증을 하더라니까요. 마라톤 간증.

여러분, 예수를 만난 사람의 간증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홍명희 시인이에요. 그가 벌써 마흔이 넘었는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중증 장애인이에요. 말도 잘 못하잖아요. 그의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거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40여 년을 방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스스로 단 한번도 자기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입이 제대로 열려지지 않아 말이 제대로 되지 않는 그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남이 가진 것을 내게 주시지 않았지만, 남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비밀을 내게 주셨다. 여러분,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죄에 대하여 죽고 나의 욕심과 불확신과 불순종과 무지에 대하여 결단을 내리고 떨쳐버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가 되었을 때, 이런 변화가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어떤 분들이 그래요. 산을 좋아하신다고 일 년에 한두 번 산에 올라가는 것도 물론 좋아하시는 거지요. 그러나 매주 등산하는 사람이 산을 좋아한다고 하는 말과 무게가 다른 거지요.

제가 한 18년 만에 저희 대학 저희 과 후배이면서 제가 고등학교 교사 시절에 일 년 동안 같이 학생들을 지도했던 그 후배를 한 3주전에 인도네시아에서 만났어요. , 어떻게 왔느냐고 그랬더니 방학이라 인도네시아에 여행을 왔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한 2주 후에 다시 자카르타로 올 터이니, 그 때 만나자고... 그러더니 2주 인도네시아를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하더니 온 것이지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는데 13년째 방학만 되면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는 거지요. 어지간한 나라는 벌써 다 가봤더라고요. 제가 고등학교 세계사를 가르치다가 그만두고 신학교를 들어왔다가 그 후에 영국 대형 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로제타스톤이라든지 이런 것을 보면서 탄식했던 것은 “야, 이걸 내가 보고 가르쳤어야 되는 건데...” 그저 백과사전에 있는 것을 가지고 가르친 다음에 와서 보니까 아쉽더라고요. 그런데 13년째 이 나라 저 나라를 다 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가르치고 방학이면 또 다니고... 세상에 만고강산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또 없구나 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느냐. 볼수록 새로워진다. 더 놀라운 것은요, 10살 밖에 안 된 자기 아들을 데리고 다니더라고요. 그래, 네 아버지도 대단하지만 너는 정말 복을 타고 났구나. 그런데 아이가 얼마나 의젓한지 2, 3주를 따라다니는데 아빠한테 잔소리를 안 하고 싫다는 소리, 집에 가자는 얘기를 안 해요. 아이가 지혜롭고 얼마나 똑똑한지... 그리고 20일째 아직 김치를 안 먹었는데 잘 버티고 있어요.

여러분, 내가 주를 올바로 믿을 때, ‘내가 누군가.’ 하는 물음을 주님께로부터 분명히 받을 때, 내 자녀에게 그런 복이 있는 거예요. 유산을 물려줄 일이 아니에요. 내가 깨끗하게 믿고 건강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 후대에게 값진 선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하나님이 보내셨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하나님이 오늘 기뻐하시는 자로다. 이것이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이 날까지 살면서 내가 누구인가. 스스로 답하지 못했던 우리의 무지와 불신앙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나를 보내셨고 지금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