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네가 어디 있느냐[역할충돌,포르노와 예술품여부는 생각이결정]/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7. 10:58

060305 네가 어디 있느냐? (3:8-19)

성경본문[개역개정]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몇 해 전에 큰 인기를 모았던 대하드라마 <왕건>에서 정작 왕건보다 더 주목을 끌었던 궁예역을 맡았던 김영철이라고 하는 탤런트가 있지요. 그는 새로운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연기했다. 그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얼마나 연기에 몰두했던지 외눈 궁예역을 하느라고 안대를 대고 연기를 해서 멀쩡하던 시력이 아주 나빠지고 고생을 했다 하는 뒷얘기도 있어요. 그가 그래서 인기를 얻게 되니깐 곧 이어서 다른 드라마의 주연을 맡았어요. 그로서는 흔치 않은 기회였어요. 그 제목이 <위기의 남자>였어요. 보신 분이 혹시 계실는지 몰라도 아주 재미있었어요. 문제는 왕건의 궁예역을 하다가 갑자기 중년에 흔들리는 남자 역을 하는 데서 역할 충돌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드라마라는 게 제작자와 연출가와 배우가 이렇게 만들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이 브레이크를 많이 걸었다고 해요. , 이런 역은 내가 못하겠다. 이런 장면은 못하겠다. 이전에는 관심법으로 사람의 마음까지 뚫어본다는 그런 왕의 역할에 너무 깊이 몰두한 나머지 갈대같이 흔들리는 남자의 역할을 하려니까 그게 잘 용납이 되질 않는 거지요. 그런 것을 심리학적으로는 직업적 패르소나에 빠졌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패르소나’ 라는 말은 그리스어거든요. 고대 그리스에 연극배우들이 썼던 가면을 패르소나 라고 해요. 탈춤에서 각시 탈을 쓰고는 각시노릇을 하고 또 승려 탈을 쓰면 승려 노릇을 하고 하듯이 이 탈을 바꿀 적마다 역할이 바뀌는 것과 같이 이걸 페르소나라고 하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의 삶에 사장님, 선생님, 이게 다 패르소나이지요. 심리적 가면이지요. 사회에서 기대되는 역할들이지요. 내가 그 자리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패르소나와 그 가면을 쓰고 있는 자기는 다른 것이지요. 그걸 잘 구분하지 못할 때, 거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그게 심해지면 정신병이 되는 거예요. 그 유명한 GE에 전 회장이었던 잭웰치가 두 번째 이혼을 당했는데 이혼사유가 뭐였냐면 그 아내가 말하기를 회사에서나 사장이지 집에 와서도 사장노릇을 하려거든 누가 그 비위를 맞추느냐고 아내가 이혼한 거 아닙니까. 그건 뭐예요. 자기 역할 페르소나에 너무 충실하다보니까 집에서 조차 진정한 자기를 들어내지 못한 거지요.

제가 심방가서 가끔 이렇게 집을 둘러보면서 웃음이 나올 때가 있어요. 이렇게 소파가 있지 않습니까? 일인용 소파는 그 집주인이 앉는 자리거든요. 목사라도 함부로 거기 가서 앉으면 큰일 나는 거지요. 어떤 집은 애들은 절대 그 자리에 못 앉게 하지 않습니까. “얘, 아버지 앉는 자리다.” 그러나 그렇게만 머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정신과의사들이 말합니다. 환자가 있는데 환자를 치료하려 할 때 환자의 상태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경우는 보호자가 즉 아버지거나 그 남편이 군인, 교사, 목사일 경우에 잘 안 고쳐진다고 그래요. 왜 이런 역할들은 워낙 자기의 역할과 그 군인 정신이라든지 어떤 도덕 이라든지 목사 같은 경우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거기에 붙들려 있어서 좀처럼 자기를 못 벗는 거지요. 그래서 교사 아내는 남편을 애 부리듯이 부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역할 구분이 안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래서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왜 그러냐. 이걸 구분 못하면 자기를 잃어버리게 돼요. 흔히 중년의 위기가 온다. 한 사십 넘어 살면 이제 밖에서 성공을 했든지 실패를 했든지 그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이제 자기를 돌아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다 뭐냐? 이 만큼 이루어 놓았는데 이게 과연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을 묻게 되거든요. 이제까지 내가 쌓아놓은 것과 그리고 이 속에 있는 나는 많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어느 일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일본 남자들은 세 명의 엄마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첫째는 낳아준 엄마, 그 집에 있는 아내라는 엄마, 그리고 술집의 엄마가 필요하다. 그 일본 남자만 그렇겠습니까? 그 무슨 말 이예요? 아내라는 엄마 그 앞에서는 흔들림 없는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 앞에서는 당당한 아버지이어야 하는 거지요. 그는 주어진 역할이 있습니다. 그 역할에 충성하지만 그러나 남자일지라도 그가 인간이기에 누구에겐가 의존하고 싶은 본능이 있는 거지요. 누구에게. 아내들에게 그런 이야기하면 괜히 실없는 사람이라는 소리 들어요. 아내들이 이해가 모자라는 거지요. 자꾸 술집으로 내모는 거지요. 의존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그걸 보통 어떻게 해석하느냐.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는 친구, 남자끼리의 관계. 거기 가서 자기를 열어 놓는 거지요. 그래서 의리라고 하는 것을 어떤 분은 해석하기를 남자들의 의존 욕구가 좌절된 형태로 나타난다. 남자끼리 견고하게 서로를 다짐으로써 훗날 우리 가정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이 뒤처리를 다 부탁할 수 있는 일종의 보험을 든다 그래요. 보험을 든다. 하기는 저희 아버님도 마지막 돌아가실 때 장례와 모든 것은 그 아무개 목사님에게 부탁해라. 나중에 그 분에게 말씀드렸더니 깨끗하게 정말 멋있는 장례식을 마무리해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두고두고 그게 맞았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지요.

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위기는 반드시 사람이 겪어야 될 하나의 고비예요. 그래서 이것을 잘 극복할 때에 그 뒤의 삶이 더 융통성 있고 더 여유가 있고 감성적이 되고 더 생동감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거예요. 누구나 겪게 되는데 그것을 잘 소화해 낼 때 그 삶이 오히려 더 축복의 삶이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도 그렇게 말합니다. 여기 하나님 앞에선 남자와 여자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세요. 남자에게 “네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네 앞에 내어 놓을 것이다.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며 일해야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며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일에 매여 있는 인생이지요. 여자에게는 흔히 우리가 세 남자에게 매여 산다고 하지 않아요. 어릴 때는 아버지에 매여 살고 그리고 결혼한 이 후에는 남편에게 매여 살고 늙어가지고는 아들에게 매여 사는 인생.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오늘 묻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래서 저는요 집에 늘 들어가면 신발을 벗지 않습니까? 그 옆에 신발장이 있어요. 늘 제가 신발 놓는 그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는 절대 다른 신발 놓으면 안돼요. 그건 제 자리예요. 이 집의 주인은 나라고 하는... 저는 그 신발장. 우리 아내의 신발이 놓여 있어도 씩 웃으면서 치웁니다. 건방지게 왜 여기에다 신발을 놔... 손님이 거기에 신발을 놔도 그건 못마땅해요. 아니 거긴 내 자리인데...

여러분, 그러나 나를 확인하고 나를 들어내는 자리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아버지 앉는 소파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사실 대부분의 집에 가보니까 방이 세 개예요. 여기 구조가 그래 제가 속으로 ‘아이고, 큰일 났다. 왜 그러냐면 방 세 개면 보나마나 부부가 하나 쓰고 아들 하나 주고 딸 하나 주고 그러면은 남자들은 도대체 어디 가란 말이에요. 그 안방이 남자들 방입니까? 엉덩이 하나 붙일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래 저도 사실 며칠 전에 이사를 했는데 이렇게 방 배치를 하다 보니까 제 방이 없어요. 내가 좀 은근히 은밀하게 들어앉아서 홀로 생각하고 깊이 홀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꼭 필요한 거예요. 그런 남자가 혼자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반드시 있어야 돼요. 물리적인 공간이 있어야 하고 심리적인 공간이 있어야 돼요. 거기서 정말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물어봐야 돼요. 꼭 필요해요. 밖에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물론 가족들에게도 잘해 주어야 하지요.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라도 나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여러분, 큰일 났어요. 이사하셔야겠어요. 아니 방 세 개로 어떻게 쪼개겠어요. 어떤 분들은 베란다에서 담배 한대 피우면서 거기가 자기의 공간이 되고 어떤 분은 화장실에 앉아 있어요. 또 여자 분들은 어떠세요. 안방을 다 차지했다고 거기가 다 자기 공간입니까? 아니요. 예전에 한 때 우리 여선교회에서 자기 책상 갖기 운동이 있었어요. 여자 분들에게 책상이 필요해요. 안방이 넓은 거 자기가 차지하는 거 같아도 그게 아니에요.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자그마한 자기공간을 확보해야 돼요. 왜 그러냐. 우리는 아차하면 일에 매이고, 사람에 매이고, 일상에 매이고 자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내 뜻대로 내 멋대로 내 맘대로 사는 것 같으나 그러나 알고 보면 매여 사는 노예 같은 인생이에요. 자유함이 없어요.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도 없어요. 그 오늘 말하잖아요. 하나님이 물으니까 “저 여자가 그랬습니다.” 여자에게 물었더니 “뱀이 그랬습니다.” 책임을 전가하지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원래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었지요.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에 이끄시고 에덴을 다스리게 하시고 생물의 이름을 짓게 하시고 그것으로 그들의 이름이 되게 하시는 권세도 주셨지요. 아담과 하와가 더불어 살 때에 이는 나의 뼈 중에 뼈라. 이는 나의 살 중에 살이라. 이거 최고의 연애시예요. 여러분, 연애할 때 이런 얘기 들어 보셨어요? 이런 얘기도 안 들어보고 덜커덕 허락하신 분들은 참 생각이 좀 모자라는 거예요. 이 얘기가 나올 때까지 좀 애를 태우시고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책임감이에요.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로다. 분명한 방향이 있어요. 그리고나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 이게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여기 유혹이 들어왔습니다. 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같이 되리라. 사단의 유혹이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그렇게 먹는 순간 눈은 밝아졌는데 눈이 밝아지는 순간 하나님같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홀로 벌거벗은 채 서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순간 그 두려움과 그 외로움과 그 공포를 이길 길이 없게 된 거지요. 그 벌거벗는다고 하니까 생각이 납니다. 흔히, 어린 아이들은 엄마들이 목욕탕을 데리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아주 어리면 남자 아이든 여자아이든 여탕에 다 데리고 다니잖아요. 저도 가만히 생각해 봤어요. 몇 학년까지 여탕에 다녔는가? 그랬더니 좀 제법 커서까지 여탕에 다녔더라고요. 탕에 들어간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분명히 목욕탕 간다고 엄마를 따라 나섰던 기억은 나더라고요. 그런데 여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좀 철이 덜 들어가지고 그러다가 10대에 와서 성적 호기심을 가질 때에 공교롭게 저희 뒷집이 술집이었어요. 요정이었어요. 그래 화장실을 가다 보면 그 집에서 술 먹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우리 화장실과 저쪽 집이 어떻게 붙었는지 몰라도 여름에 보면 여자 분들이 목욕하는 물소리가 들리는데 그것을 숨어서 들으면서 굉장히 마음으로 죄의식을 가졌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성적 호기심 그 자체는 절대 나쁜 것은 아니지요. 그 인간의 본능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어두운 구석에서 죄의식을 함께 느꼈던 그것을 기억합니다.

결혼하고 독일 뮌헨에 갔을 때에 오래 전 얘기예요. 그 우리 선배 목사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뮌헨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다가 어느 날 공원을 가더라고요.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공원 울타리를 빙 돌아서 막 꺾는 순간에 푸른 잔디밭이 쫙 펼쳐지는데 거기에 몽땅 들어 온 사람이 다 벗고 누워 있는 거예요. 누워있고 운동하고 공통점은 다 벗었다는 거예요. 그 우리는 그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데 눈을 어떻게 둘지 몰라가지고 쩔쩔매다가 왔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옷 입고 들어갔으니까. 그런 경험을 했어요. 그 후에 몇 년밖에 안 되었어요. 독일에 다시 갈 일이 있었어요. 그러더니 그 때는 사우나를 하러 가자고 그래요. 그래 사우나를 하러 몇 사람이 갔는데 아따 독일 사우나는 또 다르더라고요. 알고나 가십시오. 독일 사우나는요 혼욕이에요. 여자 분들은 원하면 여자분들끼리만 사우나로 갈수가 있어요. 그러나 별다른 요구를 안 하면은 그냥 공동 사우나에요. , 에덴동산이 따로 없더군요. 그런데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전혀 표정이 안 바뀌어요. 태연해요. 편안해요. 자연스러워요. 한국 사람들만 막 낯이 뜨거워 가지고 어찌할 줄을 몰라서 사우나에 들어갔다가 저 인공 호수같이 꾸며놓은 물탕에 들어가 있다가 우리끼리 몇 마디하고는 또 사우나 들어가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벌거벗은 게 문제가 아니에요. 생각의 문제지요. 문화의 차이이지요. 사고방식의 차이이지요. 그러니깐 정말 누드를 봤을 때 이게 포르노냐 예술이냐 라고 하는 것은 보는 사람의 시각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것을 봐가지고 음욕이 일었다. 그건 포르노지요. 그러나 그것을 보았을 때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 오히려 그 안에서 생명의 약동과 경외를 느낀다면 그렇게 느끼게 한다면 그건 예술품이지요. 생각의 차이입니다.

무엇이 선악이냐?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선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 어떤 것을 쥐었든지 하나님을 외면하고 섰을 때 그것이 악이 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내가 주체하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면 악이 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그래요. 왜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막지 않으셨는가? 애들이 그런 물음을 많이 하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네가 이것을 먹으면 죽는다 라고 경고하셨어요. 그러나 인간의 그 마지막 행위를 막지 않으셨어요. 왜냐면 인간에게는 소중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자유라는 건 인간의 본질이에요. 자유 없는 인간은 이미 죽은 것이에요.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길 원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막 무릎을 꿇고 엎드리게 하지 않으세요. 여러분, 여러분 집에서 여러분 자녀가 밤낮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무릎 꿇고 그러면 좋겠습니까? 만약 그걸 즐거워한다면 그 분이 이상한 거지요. 그게 아니지요. 그런 한 번의 큰 실패를 통해서 결과적으로 잃었던 그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지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지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의 사건이 우리에게 얼마나 생명과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자유의 한계를 알게 된 거예요. 이 자유라는 게 무한정한 자유는 이미 자유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 있을 때 자유가 자유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 노인 대학 봉사도 그렇습니다만 자기 시간을 내어서 자기 돈을 들여서 수고하면서 봉사할 때 겉보기에는 매이는 거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그 마음에 기쁨이 있을 때 그거는 자유를 얻은 것이지요. 정말 돈 주고 살 수 없는 귀한 자유를 얻은 거지요. 교회는 참 신비하잖아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밤 낮 가서 예배 드리고 돈 내고, 자기 돈 내어 일하고, 그러면서도 그게 좋다고 하고 그게 기쁘다고 하고 그게 부족하다고 하니 세상의 논리와 하나님의 방법이 이렇게 다른 것이지요.

오늘 하나님께서 자유를 잃었던 인간들을 향해서 그 유혹했던 사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너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를 보내신 하나님은 참되시다.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이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그가 나를 홀로 두지 않으셨다. 이 얼마나 자유한 사람의 고백입니까?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붙들면 자유함이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그러나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 너희가 진정으로 자유하리라. 여러분, 오늘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그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면서 오늘을 사는 것. 그게 자유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 스스로 어두운 가운데 들어 앉아있을 때가 많은 우리들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느냐. 우리의 눈물을 씻겨주고 우리의 무지함과 우리의 강퍅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빛을 비춰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잃어 버렸던 자유를 그리스도 안에서 되찾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생명 같은 자유로 오늘을 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를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고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게 하시고 도와야 할 사람을 도우면서 살게 하시고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오늘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