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무모한 사랑 [자위를 하다가 어머니께 들킨 아들,탕자의 비유]/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7. 09:36

060212 무모한 사랑 (3:14-21)

성경본문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생각하고 계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지금 당신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나에 대해 실망하실 거야. 하나님이 나에 대해 화를 내실런지도 몰라요. 내가 저지른 그 죄악을 보고 기억하고 계실 거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 생각으로 말미암은 결과는 아주 비극적인 거죠. 한 아들이 자위를 하다가 그만 어머니가 그것을 보게 되었어요. 어머니가 막 질책을 합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모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할 때에 자녀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 되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습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는, 스스로 몸을 숨기게 되고 뒤로 물러가게 되는 그런 결과를 낳게 되는 거죠. 원래 청소년이 몸이 자라면서 그런 성적인 욕구와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죠. 정상적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 문화가 그러한 성적인 것을 너무나 사적인 공간에 밀어 넣어 버리고 금기시하는 까닭에, 더구나 종교적인 윤리를 가지고 덮어씌우는 바람에 많은 젊은 아이들이 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더 발전해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죄의식으로 발전하게 되고 하나님 사이의 벽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두려운 하나님, 이런 이미지를 가지게 될 때 그의 신앙은 어떻게 될까요? 참 오래 전에 제가 청년수련회를 인도할 때 한 여자청년이 저에게 와서 상담을 했었습니다. 내용인즉, 하나님이 너무 무섭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무서운가? 그 여자청년이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자살을 했어요. 분신자살 했어요. 그리고 몇 년 후에 오빠도 그렇게 죽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교회를 나가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여자청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다. 그래서 보통 남들이 하지 않는 십일조도 꼬박 꼬박 하는데 그것이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이걸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어떤 재앙과 저주가 나에게 또 닥칠지도 모른다고 하는 큰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이해할 때, 그 사람이 겉모습으로는 열심히 노력합니다. 땀 흘립니다. 그러나 그 동기는 인정받지 못할까봐 내버려질까봐 하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그리고 이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인정을 얻으려고 하는 아주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죠.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에요. 늘 긴장하게 돼요. 그리고 두려움이 있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얘기하는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가 아버지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내 몫으로 떼어 놓은 그것을 미리 주십시오. 못돼 먹은 아들이죠. 그러나 아버지가 그 몫을 내어줍니다.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와는 영영 연락이 닿지 않는 먼 나라로 가서 사업을 하겠다고 뭘 차려놓고, 사업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접대하고 술을 마시고 하다가 나쁜 친구들을 만나서 사기를 당해서 다 날려버리게 됩니다. 나중에는 남의 나라 사람 밑에 들어가서 돼지를 치게 됩니다. 그 나라 문화 속에서 돼지를 치는 일은 아주 천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일은 아주 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죠. 돼지를 칩니다.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게 됩니다. 처절한 실패 속에서 이제 비로소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너무나 좋으신 분이었어요. 그는 그가 거느린 하인들조차도 절대 굶기는 법이 없는 인자하신 아버지였어요. , 내가 여기서 굶주려 죽게 되었구나. 이제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 집에 돌아가리라. 가서 아버지께 내가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빌리라. 그리고 혹시 아버지가 더 받아주실 수 있다면 나를 저 하인 중에 하나같이 여기고 쓰시더라도 내가 아버지 집에서 살겠노라. 그리고 돌아오는 거죠. 그리고 돌아올 때 저 멀리 아버지 집이 보이는, 아직도 멀지만 이미 아버지는 날마다 문 밖에서 그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아들의 모습이 보이기가 무섭게 쫓아와서 두 팔로 그 아들을 맞이하죠. 더러운 냄새가 나고 몰골이 흉측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그를 끌어안습니다. 종들을 부릅니다. 빨리 이 아들을 깨끗이 씻기고, 새 옷을 꺼내어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그리고 빨리 가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내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았고 죽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 아니냐.

여러분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이죠. 하나님의 모습이에요. 내 맘대로 살고자 하고 처절하게 실패한 그 아들을 내치지 아니하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 , 이 풍악소리가 울릴 때 일하다가 돌아온 큰아들이 이게 웬일인가 하고 하인에게 묻습니다. 하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그 순간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아버지에게 달려가 항의합니다. 나는 이 날 이 시간까지 아버지 집에서 날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동안에도 한번도 내 친구들을 초청해서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 본 일이 없는데, 아버지 유산을 잘라가지고 나아가서 창기들과 함께 다 털어먹은 저 망나니 같은 놈이 돌아왔는데 어떻게 저 놈을 향해서 잔치를 벌일 수가 있습니까? 그 때 아버지가 말하지 않습니까? 얘야, 너는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러나 저 녀석은 이제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이고 잃어 버렸다가 되찾은 아들이 아니냐? 어찌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

여러분, 우리는 둘째 아들에게도 공감이 가지만 사실은 첫째에게 더 공감이 갑니다. 나 같아도 둘째 같은 놈에게 잔치를 벌여주지는 않을 거예요. 쫓아내든지, 하인같이 부려서 정신을 좀 차리게 하든지 하겠어요.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초점은 둘째보다 첫째에게 있습니다. 첫째는 망나니 같은 둘째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 또한 어떠합니까? 아버지 집에서 그 울타리 안에서 자기를 통제하며 삽니다. 그러나 첫째 역시 사람이기에 둘째와 똑같이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시퍼렇게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을 내버려 둘 경우에 자기의 삶이 무너지고 울타리가 무너지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두려움이 있기에 철저하게 자기를 통제합니다. 일에 얽어 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철저하게 자기를 쳐서 복종을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기쁨이 없어요. 둘째가 돌아왔을 때 분노하는 것은 그저 둘째를 향해 분노하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억누르고 자기를 애써 다스리는 자기의 모습을 향한 분노에요. 사실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 화를 내는 게 겉으로 보면 이치가 딱 맞을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다 자기를 향한 분노예요. 그게 더 우리의 모습이죠. 알고 보면 큰아들이야 말로 아버지의 인정과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쳐 일하는 사람이었어요. 둘째는 나가서 호되게 실패함으로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돌아왔지만, 아직 첫째는 실패할까봐 그 두려움을 억누르고 자기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죠. 본질에 있어서는 똑같은 거예요. 이제는 오히려 둘째가 앞서 나가는 거예요. 그는 이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완전히 두 손 들고 항복했어요. 그 사람을 이제 전적으로 수용해요. 그러나 첫째는 아직도 갈등 속에 있어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도 나의 멋있는 모습, 근사한 모습, 내가 잘하는 것을 가지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생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얼마나 부질없는 노릇인지요. 나의 조그만 노력과 나의 몸부림과 인정과 잘난 멋 때문에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니 탕자는 둘이에요. 하나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 헤맨 탕자가 있고 또 하나는 집안에 머물고 있는 탕자인 것이죠.

그러나 이제 큰아들이건 둘째 아들이건 아버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두 팔 벌려 저를 받아 줍니다. 첫째도 받아 주고 둘째도 받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더 잘 한다고 풍성해지고 우리가 못한다고 하나님이 깍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행위에 좌우되는 사랑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그분의 성품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둘째를 받아 주시는 사랑, 인간의 계산으로는 차라리 이건 무모한 사랑이에요. 도대체 계산이 없는 사랑이에요.

제가 지난 주간에 수마트라 람뿡의 STTsyalom 신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었는데요, 제가 큰 은혜를 받았어요. 이번엔 또 어떤 은혜를 받았느냐 하면, 첫날 월요일 저녁에 출발을 해서 강의를 하고 피곤해서 밤 10시에 잠자리에 누웠어요. 그런데 사실은 한 새벽 3시까지 잠을 못잤어요. 그 호텔에서 밤 11시까지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그 시끄러운 소리가 다 들려요. 또 모기가 있어요. 그런데다 저는 에어컨이 안 맞는데 일행이 있어서 에어컨을 틀었어요. 얼마나 뒤척거리고 헤맸는지 꼭 나중에 제 느낌에 관속에 갇힌 것 같더라고요. 누가 나를 묶어서 집어 넣었는데 나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정신은 말똥 말똥 살아있는데 몸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그런데 같이 가신 분은 머리를 대기가 무섭게 코를 골고 주무시더라고요. 둘이 같이 잠을 설쳤다면 모든 외적인 것에 원인을 돌릴 수 있겠지만 똑같은 상황에 저분은 저렇게 코를 골며 주무시는데 나는 잠을 설치고 있으니 내가 죄인이구나. 그러면서 하룻밤 단잠을 자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가! 새롭게 알았어요.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그날 잠을 못 잤는가? 물론 몸이 좀 피곤해서 오히려 잠을 못 잤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제 마음에 첫째같이 두려움이 있었나 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여러분 목회하는 것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사실 누가 목사가 되겠다고 하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그거 어려운 거예요. 생명이 타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켰으니까 하는 거예요. 그렇게 출발했는데 이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거죠.

제가 람뿡 신학교 강의를 마치고 목요일에 돌아왔는데 제 책상에 책이 한 권 배달돼있었어요. 그 책을 읽고 주말에 큰 은혜를 받았어요. <Surrender to Love - 사랑에 항복하다, 그 사랑에 두 손 들다> ‘데이빗 배너’라고 하는 영성심리치유가의 책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뭐냐? 하나님의 그 사랑에 온전히 항복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성경을 창조하셨다. 물론 창조과학회에서는 그 안에도 놀라운 창조의 과학이 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시로 표현한 거에요. 그 창조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하늘로부터 이 우주에 내리 덮이는 그 사건을 표현한 것이죠.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런데 여기 인간의 실패가 있습니다. 그런 사랑 속에서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해보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가 있어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울타리를 부수고 나아갔을 때에 인간은 놀랍게 철저하게 실패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이웃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나 자신과의 관계도 깨어져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잖아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만나고자 하는 그런 갈망이 있어요. 그러나 또한 놀랍게도 우리는 살면서 찢기고 멍들고 그런 아픔이 우리 안에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 우리가 온전히 항복하고 나아가기를 두려워합니다. 싫어합니다. 들으나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거죠.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만나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