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를 맞으면, 으레 영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알프레드 테니슨(1809~1892)의 ‘종소리 울려 퍼지라(Ring out)'로 시작되는 그의 장시(長詩)를 떠올린다. 시의 내용은 요약되어 교회 찬송가로도 운율에 맞춰졌다. “종소리 크게 울려라 저 묵은해가 가는데, 옛것은 울려 보내고 새것을 맞아들이자”로 시작되는 이 찬송은 시기와 분쟁, 옛 생각을 울려 보내고 순결한 삶과 새 맘을 맞아들이며, 흉한 질병과 고통, 탐욕과 전쟁은 울려 보내고 평화를 맞아들이며, 기쁨과 넓은 사랑과 참자유 행복 누리게 이 땅의 어둠을 보내자고 축복한다. 그 가사의 절절함이 부르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하고 송구영신의 의미를 깊게 해 준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테니슨의 그 ‘종소리’에 담긴 염원이 이뤄지기를 먼저 기원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때가 때인 만큼 새해를 맞아 좌우명처럼 떠올린 것이 성서의 한 구절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는 복음서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일절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의식주 문제와 관련된 교훈이다.
이 강론은 먼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당부로 시작한다. 의식주를 걱정하지 말라는 이 권고는 공중의 새와 들판의 꽃을 사례로 들어 풀어간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지만 너의 하늘 아버지가 기르지 않느냐 너희는 새들보다 귀하지 않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길쌈도 아니 하지만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답지 않느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을 아신다.”
의식주 문제에 대한 강론을 끝내면서, 경제 문제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지 않고는 해결점이 없다고 강조라도 하듯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쳤다. 당시 헤롯 왕조와 로마 제국 그리고 성전(聖殿) 체제 등 삼중의 조세수탈로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협에 처했던 민중을 향해 예수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의식주와 관련, ‘그 나라와 그 의’를 강조함으로 경제문제에까지 가장 비현실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성서가 말하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말한다. 의식주의 경제 문제까지도 하나님의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방법으로 접근해야만 해결된다는 가르침이다. 경제적인 문제라 해서 주판알을 먼저 튀기지 말고 그 전에 ‘그 나라의 질서와 정의’를 강구하고 그 원리에서 풀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이다.
문제는 예수가 오늘 이 땅에 온다면 2천 년 전에 고난받는 유대 민중을 향해 강조했던 그 강론을 그대로 외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인들이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보다 먼저 강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가 한국의 상황을 접하더라도 그렇게 외칠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의 해결도 ‘비경제적’ 방법처럼 보이는 이 원리에 해답이 있다고 본다. 특히 새누리 정권의 무능·무책임·부정·부패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 더 근원적인 접근도 수십 조를 더 풀어서 경기를 부양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그 나라와 그 의’를 찾는 데에 두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나라와 그 의’의 원리에 따르지 않으면 그 막대한 국부(國富)와 자원도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나라와 그 의’는 어떻게 현실에 적용될 수 있을까. ‘그 나라’는 어떤 나라를 이룩할 것인가에 대한 목표를 의미하고, ‘그 의’는 이를 이룩하는 방법이요 원리라고 본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비단 경제 문제에만 적용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를 나라 되게 하는 목표요 원리이며, 사회를 사회되게 하는 정의로운 가치관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나라이며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나라다. 민중들이 그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며 그들의 민주적인 합의가 우선적으로 이뤄지는 나라다. ‘그 나라’는 백성의 위임을 받은 권력이 군림하지 않고 종복(從僕)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나라다. ‘그 나라’는 노동의 가치가 어떤 재화보다 더 인정되고, 약자의 생존권이 보장되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가 제대로 대접받는 나라다.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나라’는 남북이 화해·평화·통일을 이룩하는 나라다.
‘그 의’는 ‘그 나라’를 이룩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요 방법이다.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예레미야 5:1)고 예언자 예레미야가 외친, ‘정의와 진리’가 바로 ‘그 의’라고 본다. 그 ‘정의와 진리’는 바로 국방의 요체이기도 했다. 국부와 자원도 부정부패의 온상이 된 까닭은 백범 김구는 『나의 소원』에서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백범이 이룩하려는 나라는 바로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려는 이념에서 가능했다고 본다.
오늘날 한국이 처한 혼란한 상황은 지도자와 국민이 ‘그 나라와 그 의’를 제대로 추구하도록 요구한다. 오늘의 곤궁함은 ‘그 나라’에 대한 원대한 목표가 없고, ‘그 나라’를 이룩하려는 가치관으로서의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소리가 사방에서 함성으로 들린다. 번영을 구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다운 나라를 꾸려보자는 존재론적인 몸부림이다. 가라앉고 있는 경제를 부흥시키자는 데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국가 시스템 자체를 어떻게 개혁 재건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는 지혜의 말에 귀기울어야 한다. 지혜자는 다시 말한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14: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