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하나님을 경외하라[기도하며말씀을듣고순종하는것이지혜로움]/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8. 00:01

061119 하나님을 경외하라 (12:9-14)

성경본문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신대륙을 개척할 때 16세기영국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월터 로리경에게 “신대륙을 탐험하고 그것을 우리 땅으로 만들라”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월터 로리는 사람들을 모아서 험한 항해 끝에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그리고 그곳에 사람들을 내려놓고 정착하게 자리를 잡아주고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시 갔을 때 보니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죽었어요. 미지의 땅에 가서 색다른 기후와 조건 속에 삶의 뿌리를 내린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지요. 거듭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신대륙에 간다고 하는 것은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지요. 함부로 갈 수 없는 것이지요.

1620 영국이 정치적 혼란과 종교적 혼란에 빠져있을 때 청교도 중에서 신앙을 깨끗하게 지키며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필그림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102명이 4,800킬로미터가 떨어진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가기로 작정 합니다. 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억압받지 아니하고 우리의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겨보자 하고 건너간 것이지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가을과 혹독한 겨울을 넘기고 봄을 맞았을 때, 함께 갔던 사람 중에 절반은 죽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습니다. 원주민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토종 곡식을 받아서 그것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그 가을에 첫 수확을 거두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수확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오늘 11월 셋째 주일에 해당하는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틀림없이 그들이 치른 희생에 비해서 그 얻은 수확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먹기도 아마 부족한 것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크게 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해주신 하나의 증거로 보고 미래를 내다보고 감사했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어떻게 감사할까요? 우리나라에 미국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므로 한국교회에도 11월 셋째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고유한 추수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는 추석이 있는데 굳이 11월 셋째 주일로 할 게 뭐냐 토착화 시키자 해서 추석에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 좋은 것이지요. 또 추석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햇곡식 햇과일을 내기에는 좀 이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도 역사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초기에 한가위를 맞이하여서 여자들이 길쌈을 하고 잔치를 벌이고 서로 이기고 진 편을 가려서 진 편이 떡을 낼 뿐 아니라 춤을 추고 노래하는데 그 노래를 회소곡이라고 했다. 『언제나 돌아갈꼬』 라고 하는 노래라는 거예요. 왜 원래 신라사람들의 주류는 어딘가 북방에서 왔거든요. 그러니 그들의 추수감사절 그들의 추석을 가지고 들어온 거지요. 우리하고는 날이 잘 안 맞는 거예요. 그것도 밖에서 들어온 것이니까. 그래서 추석하고 추수감사절의 중간쯤 자리를 잡아서 하자. 뭐 다 이유가 있고 설명이 있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본질적인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까요? 우리나라의 추석 때 정확하게 저 유대사람들은 초막절을 지킵니다.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한 주간 명절로 지킵니다. 그래서 다 예루살렘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자기 집 앞에다가 초막을 짓고 그 한주간은 초막에 나가서 생활합니다. 의미가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이 올해도 이런 풍성한 수확을 주셨다 하는 감사의 의미가 있어요. 두 번째는 우리 조상들이 저 광야에서 고생할 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를 지키셨다. 그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 초막에 들어가서 불편하지만 그곳에서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 지혜로운 거 같아요. ? 이 초막절에 한 주간의 명절을 지키면서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 읽는 성경 본문이 있어요. 그게 전도서예요. 근데 전도서하면 뭐가 생각납니까. 첫 구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아니 이게 이 풍성한 수확을 가지고 기뻐하는 추수감사절에 읽어야 될 본문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읽는답니다. 뭐겠습니까. 오늘의 수확에 감사합니다. 과거 광야의 시련 속에서 붙들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읽으므로 본질적인 인생의 모습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더 깊은 뿌리가 되는 감사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지요.

지난 목요일은 전 세계적으로 보졸레누보 라고 하는 프랑스 와인을 마시는 날이었어요. 아셨어요?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0시에 전 세계 일제히 시판됩니다. 제가 예전에 서울강남에 살고 있을 때 보니 보졸레누보를 안마시면 촌사람 취급을 당해요. 다가오기도 전에 와글와글 뜨근뜨근해요. 이거는 프랑스 중부의 보졸레지방에서 만들어내는 포도주인데 햇 포도를 가지고 그 해 만들어낸 것이지요. 하나의 마케팅이지요. 전 세계 동시에 출시한다. 같은 시간에 전 세계 함께 내놓는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한국은 프랑스하고 얼마나 멀어요. 비행기로 공수해 왔잖아요. 그래 정작 프랑스에서는 몇 천 원 짜리가 우리나라에서는 그럴듯한 식당에서 십 만원가까이 했던 거 같아요. 열풍이 일었죠. 그러니 당연히 가격에 거품이 끼게 되지요. 그런데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요즘엔 그거 시들해졌대요. 이제 사람들이 다양한 와인들을 마셔보니까 가격에도 거품이 있고 품질에도 거품이 있다 이렇게 판단이 든 거예요. 이제 완전히 시들해 졌어요. 제가 그 기사를 보면서 가격에 거품이 낀 건 분명하지만 그거보다 그저 새 것을 찾아 헤매는 그 인생에 거품이 끼었구나. 뭔가 새로운 것을 그렇게 목말라하고 찾는 것을 스노비즘(snobbism)이라고 하잖아요. 누가 영화 봤다는데 아주 잘 되었다더라 그거 못 보면 바보취급 당하는 이런 풍토. 교회는 어떻습니까. 신앙 생활하는 교인들의 기대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눈다면 하나는 이적일 것이고 하나는 응답일 것입니다. 이적은 사람이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것을 내가 좀 보았으면 하는 기대지요. 또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내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줄 것이다 라고 하는 기대지요. 뭐 그 기대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극단화되는 것이 문제지요. 하나님은 정작 보이시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애매한 건 목사예요. 그 목사만 보이거든요. 그에게 이적을 요구하고 응답을 요구하고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는데 뉴스를 보니까 베어벡 축구 대표팀 감독이 참 여러 가지 구설수에 많이 올라있는데 저는 그의 어려움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마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급합니까. 오늘 당장 있는 시합은 이유를 불문하고 이겨야 된다 라고 한다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예요.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다가 아니에요. 이건 이겨야 돼. 이번에는 일본하고 시합 하니까 이겨야 되고, 우승을 작년에 했으니까 이번에도 이겨야 되고. 어려운 거지요. 자칫 이렇게 휘둘리다 보면 우리의 신앙은 건강한 믿음으로 가지 못하고 마술이 되어 버려요. 마술과 믿음의 공통점은 모두 초자연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지만 차이점은 뭐냐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이에요. 인격적인 응답이에요. 그러나 마술은 조작이에요.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이단 시비가 나고 있는 교회의 TV에 방영되었습니다. 추적 프로그램에서 이런 건 문제가 있지 않느냐 라고 방영한 장면을 보았어요. 예배하는 장면이었는데 예배가 쇼가 돼버렸어요. 막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로부터 내리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신다고 하는 것을 마치 아주 워커힐 쇼같이 아주 화려하게 현란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사람들을 그렇게 몰고 가버렸어요. 거기 그런 장면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그렇게 기대를 가지도록 만들어 버렸어요.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분리가 되면 안돼요. 우리가 많이 기도한다고 합니다만 정말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 그분 자신에게 있는가 아니면 그분이 주시는 그 손끝에 매달려있는 축복에 있는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는 성공. 위험한 겁니다. 이건 또 하나의 우상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전도서가 쓰여지게 된 거예요. 하나님이 전도서를 하나님 말씀에 넣으셨다면 다 이유가 있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신앙이 극단화 됐어요. 하나는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아서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파헤쳐서 알 수 있다. 이런 흐름이 일어났어요. 하나님이 보실 때 이거 얼마나 교만한거에요.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자 하지요. 그런 열망이 잘못된 건 아니죠. 그러나 기억하세요. 우리는 그러다가 언젠가는 죽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파헤치다가 그분의 거룩함을 잃어버렸어요. 또 하나의 흐름은 마지막 종말을 강조하고 최후의 심판을 강조하고 그 불벼락을 면하기 위해서 헌신해야 되고 모든 것을 다 쏟아야 된다고 종교적인 열심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곳에서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허물을 덮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실종돼 버렸어요. 어떻게 할까요. 그래서 오늘 전도서에서 이 말씀을 던져주시는 거예요. 전도서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신앙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네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 모든 인생은 언젠가는 죽는다. 이걸 피해가는 사람은 없어요. 두 번째 그 눈으로 볼 때,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거예요. 만물은 다 반복되는 거예요. 아무리 새로운 아이디어인줄 알았지만 알고 보면 다 옛사람이 생각해낸 거예요. 신선한 것 인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면 다 낡아 떨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후대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 세 번째 그리고 세상은 불합리하다는 거예요. 한 사람이 땀 흘려 쌓아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어받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다 털어 먹을 수가 있어요. 이 얼마나 기가 막혀요. 그러니 아들을 믿고 전 재산을 물려준다 하지만 스스로 속는 거지요. 과연 이것을 가지고 잘 할지 어떻게 압니까. 네 번째는 인간의 지혜로는 이 세상 만물이 돌아가는 이치를 아무리 연구하고 연구해도 알 수 없다. 그러니 결론이 어떻게 나겠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게 전도서 첫마디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더 깊이 읽어보면 그 한복판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첫째, 인생은 죽지만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공이시다. 둘째, 만물은 헛되이 돌아가는 것 같으나 이 만물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셋째,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불합리한 것 같으나 최후의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넷째,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으나 모든 것은 하나님 손안에 있다. 여기에서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을 경외할 때 이제 더 이상 모든 것이 헛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이 내게 나누어 주신 복이 있어요. 분복(分福)이 있어요. 그러므로 그 복을 선물로 받아서 그것을 누리며 기뻐하며 사는 사람 그 사람이 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안산제일교회 고훈목사님이 계셔요. 이 분은 시인인데 그런데 사실 이분은 건강치 못해요. 병약한 분이에요. 그리고 이분이 수십 년 전에 개척목회를 할 때 너무 어려웠대요. 그때 사례를 만원을 받았대요. 화폐가치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상당히 어려운 거지요. 그 어려움 속에 어느 날 쌀이 다 떨어져 가지고 드디어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배고파서 우리 일찍 잡시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밤10시에 인기척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나가 문을 열어 보니까 거기에 누가 쌀과 여러 가지 찬거리를 놔두고 갔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 그걸 가지고 밥을 지어서 밤11시에 두 분이 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기도하다가 눈물을 쏟았다고 해요. 그러면서 목사님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기도문을 이제까지 수천 번을 외웠건만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는 그 기도의 참뜻을 이제 알았다. 그러면서 한 끼에도 얼마나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가 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렸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한 끼의 식사에 감사를 회복해야 돼요. 그런데 그분이 5년 전에 위암에 걸리셨어요. 그래 지금 계속 투병중이에요. 그 사모님의 고백입니다. 지금 그 교회는 큰 교회지요. 그러나 큰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위암 걸려 항암치료를 받고 늘 하루하루가 종말인양 마지막을 향하고 있는데. 그 사모님의 고백이 ‘내가 이제까지 가난하고 어렵다고 하지만 그저 남편만 의지하고 남편의 그늘 속에서 오늘까지 살아 왔는데 이 남편을 하나님이 먼저 불러 가시면 나는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을 고민하고 갈등하며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셨다. ‘네가 죽음을 맛보아야 또 새로운 부활을 맛볼 수 있으리라.’ 이제까지 내가 주를 믿는다 하고 예수부활을 믿는다 했지만 그것보다는 내 계산, 내 욕심, 내 생각으로 꽉 차서 평생을 살았구나. 비로소 이제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부활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붙들게 되었고 이제는 언제 불러 가시든지 주님 앞에 나를 내어 드릴 준비가 되었다.

여러분, 우리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헛되다고 밖에는 얘기할 수 없어요. 인간 최고의 지혜자였던 솔로몬의 결론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기에 모든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하나님이 간섭하시기에 거기에 새로운 소망이 있는 것이지요.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감사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 이지요. 오늘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것이 인생의 본분이다. 오늘 세례 받는 분들이 계세요. 제가 그랬어요. 우리가 뭘 많이 알아서 아멘 하면서 세례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을 배워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기회를 감사함으로 받는 거예요. 사실은 자격도 없는데 입양하는 거예요. 제가 초등학교 1,2학년 때 제가 시골에 살았을 때 방학이 되면 서울로 올라오잖아요. 얼마나 가슴 벅찬지 몰라요. 큰 이모님 댁에 가면 꼭 만두를 사줘요. 집에서는 좀처럼 먹기 어려운 것이거든요. 제가 만두 좋아하는걸 아시고 꼭 만두를 사주세요. 전 방학만 되면 만두 먹을 재미에 서울 올라가기를 기다렸는데, 그 두 분에게는 자녀가 없었거든요. 어느 날 부모님이 우리형제들을 쭉 부르더니 “너희 중에 누가 저 큰 이모님 댁에 양자로 갈래.” 한 번 그저 던져 보신거지요. 근데 제가 맏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만 손을 들었어요. “제가 갈래요.” 만두 먹으려고. 그랬더니 우리 어머님이 “너는 안돼” 자격 없는 거예요. 저는 만두 하나에 남의 집에 가려고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우리 인간의 지혜 인간의 능력으로 헤아릴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는 그 사건을 우리 인생한복판에 이루어 주시고 그 예수를 부르고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생을 주셨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을 시작하는 거지요.

오늘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감사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기도하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거는 또 다른 거예요. 마치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있는 것이지만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운동하는 거지요. 이왕에 한 평생 삶을 받아서 태어났다면 힘 있게 살아야지요. 살면서 병들어 가지고 남의 짐이 되면 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그게 아니라 건강해 져서 다른 사람들을 붙들어주고 도와주고 세워주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한 교수님이 기독교 신앙 클라스에서 학생들과 이야기하다가 학생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이야기 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 여학생이 말해요. “저는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삽니다.” 그랬더니 같이 수업을 듣던 친구들이 깜짝 놀랐어요. 다른 학생이 그 학생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듣는 거야.” 그 학생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다양하게 말씀하셔. 설교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도 말씀하셔. 사건 속에서도 말씀하셔.” 또 다른 학생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 이 학생이 씨익 웃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응, 그거는 들어보면 알아.” 자기엄마 목소리는 들어보면 아는 거예요. 익숙한 그 목소리는 들어보면 알아요. 우리가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 내게 하나님의 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다면 그 말씀은 내 안에 쏙쏙 들어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새겨지는 것입니다.

사실은 설교를 잘한다 못한다 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요. 객관적으로는. 그러나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듣는 말씀은 다 아멘이 되고 다 은혜가 되는 법이에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입맛이 살아 있어야 돼요. 입맛 죽은 사람에게는 다 소용 없어요. 산해진미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 입맛이 살아 있어야 돼요. 건강해야 돼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 그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올 한 해에도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땀 흘리고 수고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만족하고 자만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형통할 땐 기뻐하고 곤고할 땐 깊이 기도하며 생각하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