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조용한 정복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8. 09:38

061210 조용한 정복 (12:9-21)

성경본문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이는 선지가 이사야로 말씀하신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바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2005년 인구주택 총 조사 정부통계에 의하면 종교인구는 237만 명이 증가했습니다. 그 내역을 보니 카톨릭인구는 220만이 증가하고 불교인구는 40만 명이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개신교는 14만 명이 감소했습니다. 그러니까 새로 종교를 믿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카톨릭으로 갔다는 얘기이고 또 개신교에서 줄어든 많은 사람들은 다 카톨릭으로 갔다는 얘기에요.  얼마 전에 그것을 가지고 심포지움이 열렸습니다. 거기서 카톨릭의 성장요인은 첫째는 높은 결속력 중앙조직이 있고 신부들도 순환근무를 하고 또 어느 성당이나 큰 차별 없이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다 수용하고 또 옮겨가더라도 그 지역의 성당에 등록 할 수 있는 이런 제도, 또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고. 또 지난 우리 민주화 역사 속에 카톨릭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 그리고 또 현대인들에게는 종교 다원주의 열린 종교로 비춰진 점들이 성장 요인이다라고 설명 되었습니다. 그럼 기독교 감속원인은 뭐냐 압축해서 말하면 지나친 성장 논리에 끌려갔다. 좀 심하게 말하면 교회인지 시장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시장원리에 매몰됐다. 교인의 숫자 헌금 건물의 크기를 가지고 경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느 한 신부가 이러한 지적을 했습니다. 우리 카톨릭은 거리에 나가서 전도를 한다 던지 신방을 한다 던지 하는 것들도 다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일상적이고 장기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합니다 .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제까지 나온 이야기를 압축한다면 활기차지만 시끄럽고 가볍고 피곤하다. 그러나 천주교에는 조용하지만 성스럽고 관용적이다. 이미지 싸움에서 진 거에요. 어찌 이것만이 전부겠습니다. 내용의 문제는 또 별개의 문제로 나중에 논의하더라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비춰진 거에요.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가지고 논쟁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종교 속에 아주 큰 두 가지 기둥을 얘기한다면, 하나는 성전이요. 성전에 딸려있는 여러 가지 제사와 규칙이겠죠.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율법과 규칙 중에 가장 중요시하는 안식일 규례라고 하겠어요. 그런데 오늘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가면서 배가 고파서 밀을 까부른 것을 가지고 고소합니다. 왜 안식일에 금하는 일을 했느냐. 밀을 까부른 것은 타작을 한 거 거든요. 노동을 한 것이거든요. 그러면 규례를 어긴 것이다라고 본 것입니다. 심지어는 오늘 뭐라고 고소 하느냐면 예배당에 들어갔는데 한 편 손 마른 여인을 발견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틀림없이 저 여인을 고쳐줄 것이다 짐작하고 그 것을 가지고 고소합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율법에 메이다 보면 이렇게 너무나 비상식적인 것들이 목숨 걸만큼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려요. 그 안식일이라고 하는 원래의 뜻은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어떻게 누릴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인데 본질은 이제 온데간데 없어지고 안식일의 수많은 규례를 네가 지키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버렸다는 거죠. 그런데 놀랍게도 거룩하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여기에 빠져버렸어요. 이걸 가지고 옳고 그름을 가리고 여기에 매몰돼 버렸어요. 교회가 잘못 가면 이렇게도 가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하는 참으로 감동적인 책을 쓴 필립 얀씨는 미국 남부교회에서 어린 시절 자라났어요. 그가 자기의 어린 시절 교회를 돌아보면서 통탄 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비밀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구두를 깨끗이 하고, 멋있는 모자를 쓰고 경건하게 나오지만 그 교회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일에는 신문 보지 말아라 안식을 깨뜨리는 일이니까. 주일에는 수영하지 말아라. 주일에는 반바지 차림으로 나오지 말아라 여자들은 화장하지 말아라. 이런 많은 규례를 가지고 서로를 판단하기 바쁘다는 겁니다. 200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이런 오류들 가운데 빠지기 쉽습니다. 안식일에 안식을 얻기는커녕 싸웁니다. 성전을 시장바닥으로 만들었어요. 예수님이 지적 하십니다. 그 안에 악한 마음이 있는 것을 보시고, 어느 한 사람에게 양이 있는데 양이 구덩이에 빠졌다면 그거 당장이라도 끄집어 내지 않겠느냐. 하물며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안식일에 마땅히 저를 고쳐야 할 것이 아니냐? 이런 규례 가지고는 사람의 마음을 고치지 못해요. 원래는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고 우리의 마음이 자유로움을 얻고 기쁨을 가지고 생명이 넘쳐서 살겠다고 시작한 것인데 생명은 다 빠져버리고 건물만 남고 규례만 남고. 그것을 가지고 시시비비하는 악한 마음들만 남았다고 하는 것 이죠.

이제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치셨어요. 이적을 나타내셨어요. 이적을 나타냈건만, 그를 고소하려던 사람들의 마음은 더 닫혀버렸어요 그들은 이 이적을 본 다음에 본격적으로 어떻게 해야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도 오늘 말씀을 계속 읽어보면. 예수님께 나와서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이심을 증거하는 이적을, 표적을 행하시오. 기적을 드러내 보시오. 이렇게 요청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적을 봤으면 하는 그런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뭔가 하나님의 증거를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본다고 다 믿지 않아요. 오늘 주님이 말씀하셔요. 오늘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뭡니까. 심판을 말하는 거죠.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 들이었어요. 유대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들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 이였어요. 그러나 이 선지자라고 하지만 선지자 같지도 못한 요나가 가서 어거지로 하나님이 너희의 죄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 말 한마디를 던졌을 때에 온 성의 왕과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하고, 무릎을 꿇고 재에 앉아서 회개하므로 구원을 얻었다. 이방인들도 그 못난이 같은 선지자의 한마디 말씀에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날마다 성전에 와서 날마다 제사를 드리고 날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듣는다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너에게 무엇을 더 주어야 되겠느냐. 완악한 마음을 깨뜨려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선언하셔요. ‘나는 안식일의 주인다. 나는 성전보다 더 큰이다. 그러니 내게 나아와 말씀을 듣고 배우라.’ 그거죠. 그러면서 너희가 정말로 주님의 뜻을 알았더라면 이런 실수를 이런 악을 행하지 않았을 터인데. 주님의 뜻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건 아주 역설적인 표현이죠. 옛날에 구약시절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을 제사 드린다고 그랬어요. 왜 하나님이 예배를 원하시지 않겠어요. 예배를 원하시지만 예배하러 나올 때 그저 예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 사랑을 나누는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하시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셨어요. 예수님은 그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서 이적을 행하시는 법은 없어요. 한편 손이 말라 고통 당하는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면서 저를 고쳐주셨고 또 하나는 저를 고쳐주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전하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이적을 보여주셨어요.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해도 말씀과 관계없는 체험은 우리를 더 혼란케 해요. 어떤 체험을 했다면 반드시 그것이 말씀 안에서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을 살펴야 되는 거죠. 결국 그 이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심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말씀이요 그 사랑을 이루시는 이적이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 성전을 떠나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저를 죽일까 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갔어요. 특별히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어요. 나도 고쳐주십시오. 예수님이 그들을 다 고쳐주십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절대로 가서 이야기 하지 말아라. 내가 고쳤다고 이야기 하지 말아라. 고침 받은 것으로 감사하고 그저 나를 따르라. 이렇게만 말씀하셨어요.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어요. 왜 그랬느냐 하면.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아니거든요. 아직 말씀을 많이 더 전하셔야 하거든요. 그런데 벌써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3년 공생애의 자기의 시간표를 가지고 있으셨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시간표가 있는 거에요. 호기를 부리면서 내가 이런 이적을 행했다 하시지 않았어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어요.

이제 이 이적보다도 더 중요한 결정적인 사건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그 이적의 사건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이 숨겨져 있어요. 아직 그것들이 다 들어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잘못 비춰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라는 게 얼마나 왜곡 됩니까.  연예인들의 이야기 이런 것들을 기자들이 취재를 하는데, 대부분 취재를 당하는 사람들의 불만은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필요한 대목만 따가지고 얘기한다는 거죠.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도 자기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기를 원하느냐.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잖아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아느냐?’ 그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니까 엘리야 같다고 합니다. 또는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까 예레미야 같다고 합니다. 또는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 중에 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 빗나간 답이에요. 부분적으로는 맞을런지 모르지만 정답은 아니에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답답하셔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아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게 정답이거든요. 그러니 너무 기뻐 얘기 하시면서 뭐라고 합니까. 바욘아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오늘 이 비밀을 알게 한 것은 네 아버지도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이 진리를 말씀하게 하셨도다.

여러분 예수님의 소원은 딱 하나 있었어요. 하나님의 소명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이 자기를 올바로 알기를 원하셨어요. 그것이 자칫 이적 때문에 가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이적을 쫓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가지고 이적을 쫓다가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버리는 그 오류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어요.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아느냐.

<일등 기업의 법칙>이라고 하는 책이 나왔어요. <The Ultimate Question> 영어제목하고는 조금 다르죠. 프래드 라이 킬트라는 사람이 썼는데요. 이 분은 최초로 로열티 경영이라는 것을 말했어요. 로열티 충성도. 고객의 충성도가 경영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다 통계로 해서 계량화 해서 내 놓은 것이죠. 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많은 회사들이 신규 고객을 유치하려고 애를 쓰지만, 기존 고객을 잘 관리하는 것이 4배 이상의 수익을 높이는 방법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회사가 수익을 얻는데 좋은 이익이 있고 나쁜 이익이 있다. 나쁜 이익은 뭐냐. 고객과의 관계를 깨뜨려가면서 얻어내는 이익은 앞으로는 버는 것 같지만 뒤로는 밑지는 짓이다.

제가 글을 보니까 요즘 한국의 은행들이 고객들을 우습게 취급한다는 겁니다. IMF 때 다 망할 것을 나라에서 공적 자금을 집어넣어가지고 겨우 살려내서 합병하고 통폐합해서 26개 은행이 이제 13개가 돼서 경쟁력이 생기고 좀 살만하니까 은행에 가면 그래요. 저도 프라이빗 뱅킹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돈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줄을 서요. 그 줄이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요. 나랏돈으로 말이죠 이제 살만하니까 고객을 홀대하고 있다. 이런 게 나쁜 이익이란 말이에요. 로비를 하고 또 어떤 연구결과를 불리할까 봐 감추고. 이런 것이 나중에 결국은 다 드러나게 될 텐데 .그때 고객들에게 엄청난 부정적 이미지를 준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잘 안 보이는 모양이에요. 미국에서 362개 기업의 고위 임원들을 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회사는 고객을 지향하는 기업입니까 물었더니 96%가 우리회사는 고객을 지향하는 회사다. 그러면 당신의 회사는 정말로 고객들에게 차별된 서비스를 제공합니까. 물었더니. 80%가 그렇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회사의 고객들에게 물어봤어요. 똑 같은 물음을 물었더니, 차별화된 서비스를 받았습니까 그랬더니 8%만이 받았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80% 8%. 착각이죠.

미국기업 평균 이 물음을 다 조사를 해 본 결과 여기에 NPS 지수가 있어요. Net promote score 라고 고객 중에는 그 회사 제품이 좋다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고객이 있어요. 추천고객이 있어요. 반대로 나쁘다 시원찮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하는 비 추천고객이 있어요. 추천고객에서 비 추천고객의 비중을 뺀 것이 이 NPS 지수가 되는데 미국기업 평균은 10%래요. 그러니까 겨우 벌어먹고 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잘 나가는 일등기업들을 조사해보니까 50% 내지  가장 우등한 기업은 80%라는 겁니다. 그럼 100명중에 적어도 90명이 추천하고 다닌다는 거에요. 10명이 부정적으로 말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차이 80%가 그 기업을 지지한다는 거에요. 그러니 기업이 성장하죠. 그래 이분의 이야기 는 이겁니다. 소비자들에게 설문조사 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거 질문 많이 할 것 없다. 다 압축하면 딱 하나만 남는다. The ultimate question. 마지막 물음이 뭐냐. 당신은 이 회사를 이 제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 할 수 있습니까 그 물음이면 끝나는 거죠.

교회도 마찬가지겠죠. 당신은 교회를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그 교회는 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는 하나 더 나가야 합니다. 그저 교회를 자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고백하느냐. 나는 예수를 누구라고 고백하느냐. 그 물음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을 때 당신의 인생은 행복합니까? 그 물음에 예스라고 대답 할 수 있고, 그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예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도 쉐포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는 자수성가한 100만장자구요 돈을 많이 번 사람이라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라고 하는 부자 되는 법에 대한 책을 많이 쓴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 지구상에 모든 사람들의 재산을 다 압류해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300만원씩 나누어 주자. 그래도 단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그날 저녁에 벌써 많은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돈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200만원은 벌써 다 나갔을 것이다. 일주일만 지나면 벌써 빈부격차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한 달만 지나면 부자와 가난한 자로 쫙 벌어질 것이다. 일년만 지나면 지금과 같이 다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부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뭐냐, 부자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부터 바꿀 때에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그렇게 말했어요. 돈 벌고 부자가 되는 것도 생각부터 바꿔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자기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안식일의 주인이다. 성전보다 더 큰이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사랑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꺼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래서 종 내는 모든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갈망하고 소망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오늘도 예수님은 오늘도 조용히 사람의 마음을 만나시고 마음을 두드리시고 마음을 여시고 그 마음을 정복해 가시는 거에요.

얼마 전에 중국에서 올해 중국을 감동시킨 가장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습니다. 거기 주인공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저우리 홍이라고 하는 20대 여성이에요. 2002년에 유방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6개월 밖에 못산다는 판정을 받았어요. 이렇게 어려울 때 남편은 도망가 버렸어요. 2살배기 딸을 안고 살아가야 돼요. 이 암과 싸워 많은 고통을 겪어요. 치료비로 많은 빚을 졌어요. 도저히 안되겠다 이제 학교에 갈수도 없고 집에 갇혀 있는데 인터넷 옷 가게를 열었어요. 통증으로 괴로워하다가도 조금 괜찮을 때 얼른 열어서 가게를 관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게 뭐 매출이 시원치 않죠. 그런 어려움 가운데 있는데 한 누리 꾼이 그 사실을 알고 그의 내용을 다 듣고는 인터넷에 올린 거지요. 그리고 그가 병으로 투병하는 모습을 사직으로 찍어서 다 올린 거죠. 그게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지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거기에 들어와서 그 내용을 보고는 그 사람에게 옷을 주문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중에는 병원에 찾아와서 그를 위로해주고 그를 만나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죠. 드디어 그가 그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다가 2006년 지난 3월에는 더 이상 가게를 운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제 그나마도 할 수 없어서 문을 닫게 됐어요. 그러자 그 지역 TV 방송국에서 대신 일할 봉사자들을 찾는다. 그랬더니 수 백 명이 대신 그 가게를 돌봐주겠다. 그리고 지난 4월에 그가 눈을 감게 됩니다. 죽게 된 것이지요. 어린 딸을 남겨두고.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 어린 딸을 내가 기르겠다고 자청한 사람이 1300명이나 되었다는 것 입니다. 뭘 말하는 것 입니까. 사실은 우리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이런 일들이죠.

사랑과 희망이야 말로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것을 갈망하는 우리의 내적인 갈망이 있는 거죠. 형식이나 의식이나 이런 껍데기를 가지고 덮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 이야말로 예수님이 찾는 것.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나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자.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성령에 이끌려 묵묵히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고 이것을 배우는 것이 신앙이요, 여기에 우리의 삶의 진정한 희망이 있는 것 이지요.

기도.

하나님, 화려하고 활기차고 웃고 떠드는 것을 통하여 삶의 위로를 얻고 안식을 찾으려 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보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서 성령의 음성을 세미한 가운데 듣고 고통이 있을지라도 사랑과 희망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가는 여기에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오늘에 살고 남은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