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지난 연말에 출간된 미셸 레리스의 자서전 <성년>(유호식 옮김, 이모션북스)을 읽었다.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이민아 옮김, 이후, 2002)에는 서평이 실려 있지만, 국내 필자들에겐 이 책이 아직 눈에 안 띄었는지 여기저기 뒤져봐도 다른 서평을 찾기 힘들다.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이 루소 이후 전형화된 근대적 자서전과는 달리, 저자 스스로 ‘초현실주의적 콜라주’ ‘포토-몽타주’라고 이름붙인 파편화된 글쓰기 방식에 그 독창성이 있다고 한다. <성년>은 이상한 책이다. 이렇게 자신을 찌질하게 묘사하는 자서전을 본 적이 없다. 저자 레리스(1901~1990)는 ‘포스트모던적인 인류학의 영웅’이며 시인이자 프랑스 초현실주의 운동의 일원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자신의 성취에 대해선 최소한의 언급조차 없다. 대신 자신의 볼품없는 외모와 성적 무능력, 소심함과 게으름과 비겁함과 교활함, 자기 시대의 격류와는 동떨어진 시시한 몽상과 터무니없는 두려움의 고백으로 가득하다.이런 걸 솔직함의 결정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여기엔 두 가지가 없다. 하나는 자신의 실패와 결함을 신비화함으로써 일종의 비극성을 부여하려는 의지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캔들에 미학적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스캔들을 축소하려는” 시도가 없다.정확히 말하면 레리스는 그 두 가지 유혹에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솔직한 고백의 원조라 할 만한 루소의 <고백록>도 그 유혹을 피해가지 못했고, 레리스 역시 종종 그 유혹에 시달린다. 다른 점은 레리스가 그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별것 아닌 사건들로 짜인 옷감을 마법과도 같은 내 관점을 이용하여 아름답게 물들인다. … 한 번에 비워버린 술잔은 나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주정뱅이 수준으로 격상시킨다.”솔직함에는 용기만 필요한 게 아니다. 솔직함의 언사에 담긴 자기기만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탐문하는 고도의 지적 긴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완벽한 자기탐문이 가능할까.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자기기만 없이 자아가 성립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완전한 자기고백은 불가능한 기획이다. 다만 레리스는 자신의 용감한 고백이 “이미 열려 있는 문을 깨부수고 들어가는 일”이 아닌지, 읽는 이가 지칠 만큼 묻고 또 묻는다. 그 광적인 집요함에는 모종의 숭고함이 있다.왜 이런 이상한 자서전을 쓰게 된 것일까. 서두의 ‘투우를 통해 고찰한 문학론’에 나오는 레리스의 답은 이렇다. “(이 책은)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참여시키려고 애쓴 그런 문학이었다.” 이 평범해 보이는 문장에서 ‘온전히’라는 단어에 자꾸 눈이 간다. ‘온전히’를 위해 그는 피를 흘려야 했고 흘리고 싶었을 것이다. 투우에 비해 턱없이 시시하다고 느낀 자신의 문학 행위, 자신의 삶을 그렇게 해서라도 다독이고 싶었을 것이다. 수전 손택과 역자가 공히 지적하는 ‘자기존중감의 결여’는 그러므로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레리스는 지금 스스로 ‘공모자’라고 칭한 친구를 찾고 있다.나의 내부에서 나를 괴롭히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들의 목록이 있다. 그 목록은 나쁜 세상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치통과도 같은,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너무 시시하고 창피해서 입 밖에 꺼내고 싶지 않은 그 목록의 전부와 사례들을 이 책에서 본 느낌, 그래서 내 치부를 완전히 들킨 느낌이다. 그래서 징그러운데도, 이상하게 다정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