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칼럼; 설교원고모음

청지기로서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하라 (고후 8:6-9) / 서대장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2. 12. 06:49

청지기로서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하라 (2월 12일 주일 설교)|말씀………설교원고모음

서대장 | 조회 130 |추천 0 |2017.02.09. 11:22 http://cafe.daum.net/cgsbong/21mg/10869 

청지기는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 하라 고후8:6-9

주신 말씀 고후 8:6-9절을 중심으로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큰 은혜의 시간되기 원합니다.

앞 단락 고후8:1-5절은 마게도냐 교회가 보인 구제 연보의 모범에 대해 말하면서 마게도냐 교회가 시련과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됨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성도, 참된 신앙인이라면 주님처럼 가난하게 됨을 몸소 배워 ,주님의 가난하게 되심을 자기 삶으로 증거함으로써 주님과 주님의 사랑을 바로 아는 성도되시기를 원합니다.

본 단락후반부 고후8:10-15절은 구제연보의 완결 권면 및 구제 연보의 의의와 목적에 대한 설명입니다.

재물을 소유한 자들이 이웃을 돕고 베풀고 섬기는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으고 쌓아두기에 급급하게 되면 세상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므로 교회는 주라는 드림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라는 것은 세상 속에서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명령이 아닌 자연스런 의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은 다 청지기입니다.

청지기 직분은 드림입니다.

8:1-5에서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을 말합니다.

마게도냐인들은 받은 은혜가 충만해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자신들의 힘에 넘치도록 드렸다고 강조합니다.

궁핍에 처한 교우들과 함께 나누는 특권을 구하며 성도를 섬기고 교제하기를 바라며 지속적으로 드렸습니다. 자신을 먼저 드리고 자기 소유를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자기 소유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은 마게도냐 성도들의 믿음 언변 지식 열정 사랑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을 본받은 고린도 교인들이므로 구제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란다(7)는 것과 구제 연보 관련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열성에서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이며(8)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부요함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이라(9) 합니다.


청지기로서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하려면 ?


첫째로 모든 면에서 성도의 탁월성을 보여야합니다.(7)

둘째로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해야 합니다.(8)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9)

 

청지기로서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첫째로 모든 면에서 성도의 탁월성을 보여야 합니다.(6-7)

구제에 대한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인 모범에 대해 소개한 후 바울은 본 서신의 수신자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구제연보의 완결을 권면하며 구제 연보의 의의와 목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일년 전에 구제 연보 모금을 시작했는데 어떤 계기로 중단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에 구제 연보를 보내는 것이 시급해졌음을 인식하고, 또 다시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파송하여 구제헌금 모금하는 일을 마치고자 이 은혜로운 사역을 완수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서 드림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서 성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주님의 일, 즉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재정적으로 후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방황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후원하기 위해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특권을 천사들에게 맡기시지 않고 바로 우리 성도들에게 그 귀한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믿음(πίστει)은 삶속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말(λόγω͵)은 복음과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식(γνώσει)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입니다.

간절함(σπουδῇ스프데)은 원래 부지런함이나 근면이란 뜻을 함축하고 있어서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만,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은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하는 영적 자질로서 주 예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해 나가고자 하는 힘과 열심입니다. 성도가 이 간절함이 있을때  주 예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τή έξ ήμών έν ύμίν άγάπη)이란 말은 ‘우리로 부터 나와 너희 안에 있는 사랑에’ 라는 의미로 [우리가 너희에게 고취시킨 사랑에]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이 풍성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 사랑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이 그들 가운데에 풍성하게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누구보다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에 대한 배려인 것입니다.

바울의 열정적인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사랑을 유감없이 받은 고린도 교인들이므로 고린도 교인들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에 큰 사랑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히13: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말씀처럼 삶이 예배가 되고 제사가 되는 귀한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기뻐하시고 두 손 벌려 환영해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로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해야 합니다.(8)

교인들에게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에 동참하도록 강요하고 명령할 수 있을 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 즉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 받고 이방인 교회를 많이 개척하고 양육하고 성장시켰기에 , 사도적 직권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명령하거나 억지로 하도록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구제헌금에 동참하기를 기대한 것은 , 자발적인 뜻과 동기에 의해 드려진 연보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합당한 제물의 드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연보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처럼 그 연보가 율법의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여 기쁨으로 즐겁게 드리는 것을 받으시고 흠향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만을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드릴 때 두 가지에 기초해서 드려야 합니다.

먼저 드리는 일은 잊어버리고 궁핍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토대가 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드리는 일은 세상 곳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그들을 도우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주 예수께 대한 사랑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드림은 희생적으로 드리는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본을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인들을 생생한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우리 역시 마게도냐 교인들처럼 자원하여 즐겁게 기쁨으로 희생적으로 드림으로 모든 불신세상 사람들과 이웃들에게 생생한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앞에 있는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물건 사러 사람이 오면 [저 위에 있는 ㅇㅇ 교회 목사님 정말 설교 잘 하십니다. 꼭 한번 가보세요 ]하고 전도를 하더랍니다. 하루는 그 교회 집사님이 물건을 사고 있는데 똑 같은 말씀을 하더래요. 그래서 사장님 우리 교회 언제 와 보셨어요? 우리 목사님 설교 들어 보셨어요? 하고 물으니 [아니 난 가게 때문에 한번도 못가봤어요]하더랍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목사님 설교 잘 하시는지 아세요? 하니 하는 말

“전에 목사님 계실 때는 그 교회 장노 권사들이 외상을 가져가면 함흥차사였는데 이 목사 오고 난 다음부터는 물건 값도 깍지도 않고 현금주고 혹시 외상 가져가면 달라고 하기 전에 가지고 오니 얼마나 설교를 잘하면 성도들 삶이 저렇게 바뀌었겠어요?” 하더랍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고 얼마나 많은 기도시간을 갖고 있는가 즉 그 사람의 신앙척도는 바로 그 사람의 행동하는 모습으로 평가받는 줄 알아 삶이 구별된 성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8절에서 사랑의 진실함(άγάπης γνήσιον)은 사랑에 있어 거짓됨이 없이 참된 것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모금액수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사랑의 진실함 곧 연보를 통해 진실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구제 연보의 의의는 오직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데 있다 합니다.

여기서 증명하고자 함이로다(δοκιμάζων도키마존)는 금속 종류를 불에 넣어 그것의 순수함의 정도를 시험해 보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 마게도냐인들이 보여준 간절함과 고린도 교인들이 지닌 사랑의 진실함을 상호대조 비교하여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이 진실한지 여부를 시험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바울이 따뜻하게 격려하면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간절함을 본받아 고린도 교인들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향해 관대함을 넓혀 사랑의 진실함을 드러냄으로 믿음을 확증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듯 행함 없는 사랑도 진실되지 못한 것입니다.

정녕 사랑은 정서적인 반응이지만, 나를 희생하는 의지적인 결단과 구체적인 행동없이는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행동이 결여된 사랑 고백은 자칫 거짓된 것으로 인정되기 쉬운 법입니다.

사랑한다면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을 듣고 연민과 긍휼의 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 기도하며 작정한 그 연보를 방해자들의 음모로 보내지 못한 것을 이제 그 사랑을 진실함을 보여 분에 넘치도록 보내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여 주셨듯이 ,사랑의 행동을 직접 보여주고 , 필요를 채워주며,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주님과  한 마음으로 맡겨주신 이웃과 한 몸을 이루어 냄으로써 참 사랑을 증명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셋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9)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부요하게 하심처럼 성도도 이웃을 부요하게 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빈곤과 비천을 이기신 것처럼 성도도 빈곤이나 비천을 이겨내야 합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자발적 희생적으로 힘에 넘치도록 참여했던 것은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은혜를 기억하라 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는데, 너희도 남을 위해 가난하게 될 수 없겠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부요함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에 귀 기울여야합니다.

신앙이란 영적 원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앎을 통해서 신앙이 바로 서게 되는 요인은 되지만,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원리에 능통하고 영적인 체험도 있고 믿음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도 풍성함도 있었지만, 깨달음대로 살지못하므로  온전한 성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삶에 적용되지 못하는 앎이나 지식 깨달음은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불교처럼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인 것입니다.

말씀을 바로 알고 그 말씀대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은혜는 성도들이 얼마나 타인들에게 관대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표본이라 할 것입니다.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은 깨달음으로 우리 모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그 깨달은 것이 생생하게 구현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난하게 되심을 알았다면, 우리도 주님의 가난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옷 입고, 먹고 마시라는 말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을 드린 희생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닮으라는 말은 말습관, 거름걸이, 먹는 모습등을 흉내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속마음 즉 희생의 정신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사 자기를 버려 종의 형체를 취하신 그 성육신 사건인 것입니다.(빌2:6-8 )

고린도 교인들은 누구나 성례와 바울의 설교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듣고 고백했기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Χάριν카린)는 상대방에게 무엇을 해줄만한 아무런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주는 사랑이라 합니다.(핫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한 자라 하십니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하셨으며 그 모든 것들이 그 안에서 일치를 이루며 (골1:15-), 창세 전에 있었던 그리고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셨으며(요17:5-)아버지와 한 분(요10:30)이시기에 부요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께서 죄악되고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은 성육신을 통해서 그 부요함을 포기하시고,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갖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6-8)

예수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할 절대적인 부라면 예수님의 가난 역시 절대적 가난으로서 이 세상 누구도 주님이 체험하신 것과 같은 극심한 비참함에 빠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극심한 비참함에 빠진 것이 다름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인 너희를 위하여 죽음에서 구원하시려고 감수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만들고자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요하신(πμούσιο)은 풍부하게 만들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부요하며 앞으로 더욱 부요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부요하신 자이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 자신의 속성과 존재성과 충만함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1:1-3)

예수님이 부요하신 분이라 하심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 안에 거하셨음을 말합니다.(유24-25)

예수님이 부요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 가운데 하나님의 찬란하기 그지없는 영화로움 속에 거하시고(딤전6:16),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지니셨을(약1:17) 뿐만 아니라 천상의 모든 존재들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계4:6) 분이심을 믿으시기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의 연보 태도는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의 전례를 고스란히 본받은 것입니다.

가난하게 되심은(έπτώΧευσεν엡토큐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며 모든 신들 가운데 참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이 되시고자 하늘의 모든 영광과 존귀함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가난하게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셨으나 한 겸손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주님이시지만 육과 혈을 취하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시면서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습니다.

주권자이신 주이심에도 종이 되셨습니다.

완전한 분이셨으나 죄의 희생이 되셨습니다.

생명 그 자체이시면서 사람의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부요한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인해 우리가 부요하게 된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요하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양자가 되는 권세를 받았고,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됨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무궁토록 주님과 더불어 살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려 주시기 위하여 크나큰 희생을 기꺼이 감당하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궁핍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희생하고, 우리가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처럼 세상에서 절박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모든 것을 베풀어야 된다는 진리를 믿게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조차 내가 가진 물질과 명예와 권력과 학력과 외모를 남이 가진 그것과 비교해서 가난함을 느끼며 살아 갑니다. 상대적 빈곤 박탈감

그러나 바른 성도는 가난한 자 같으나 사실은 예수로 인하여 부요한 자인줄 확실히 믿습니다. 천국의 영광과 영생을 소유한 부자들입니다.

성도가 부요한 것은 생명을 소유하며, 미래에 대한 보장이 있으며, 누구보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고 함께 해 주시는 친구되신 주님이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부요한 자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아 멘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