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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명령(천명)을 받으라 (요21:1-22) / 서대장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2. 28. 05:50

하나님의 명령(천명)을 받으라 (요21:1-22)|말씀………설교원고모음

서대장 | 조회 71 |추천 0 |2017.02.25. 11:22 http://cafe.daum.net/cgsbong/21mg/10906 

하나님의 명을 받으라: 천명( 天命 ) 요211:1-22

주신 말씀 요21장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주님 주시는 은혜 충만히 받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은 12제자중 요한 사도가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한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살다가 산 순교한 요한사도를 통해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대 위임명령을 내리시므로 가장 주님께 가까이 계셨고 가장 오래 살며 복음을 전파한 사랑의 사도 요한을 통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20장 까지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되심과 그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의 구원을 받게 된다는 요한복음을 완성한 후 신구약을 총정리하고 있는 곳이 바로 21장이다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곱 제자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을 재회하며, 아침 식사하는 기사를 통해서 1)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2) 베드로를 안수하여 목양사명을 주시므로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확증시켜 권위를 보장하므로 힘 있게 사역을 감당하도록 돕고 3) 초대교회에 회자되고 있는 요한사도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유언비어에 대해 본인이 분명히 해명하기 위하여 21장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되 어떤 명령을 받고 따라야 할까요?

첫째로 인본주의를 결판내야 합니다. (1-5)

본 단락은 부활하신 예수, 그 예수그리스도의 주권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주권 , 그 주권의 영향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절에서 그 후에(Μετά ταύτα)는 특정한 시간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였음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시고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주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에라는 말이 됩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려 디베랴 바닷가로 나가서 밤새 허탕을 치고 돌아올 때 주님께서 베드로 일행을 찾아오십니다.

3절에서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 다른 제자들도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다시 말해서 생업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보냄을 받은 자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 베드로 일행이 갈릴리에 온 것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함이기에 기다리는 동안 고기나 잡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 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목적은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보여주며 더 나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함께 식사를 한 자로써 새로운 사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이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고기 잡는 일에 익숙했던 어부들이 고기가 많이 잡히는 시간에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도 예삿일이 아니라 이적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15:5말씀처럼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있을 때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자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제자들의 사역에 있어 항상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즉 주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는 영적 사역이 주님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확실한 교훈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4절에서 알지 못한지라 합니다. 성경에서 알다(구약의 야다)는 말은 [오이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고 [기노스코]는 경험적으로 아는 것으로 남녀관계를 통해 서로를 아는 것을 말하며 [에피스타미]는 전문적으로 아는 것으로 어부가 바다를 아는 것 목사 장노가 성경을 아는 것과 같은 전문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 멀지 않은 해변에서 숯불을 피우고 계심에도 알지 못한 것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려 하심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여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못했고(눅24:10), 빈무덤을 보고도 믿지 못했고(눅20:9), 엠마오로 가던 도상에서 말씀을 해석해주던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눅24:16)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 목소리를 듣고 비로소 요한만이 알고 예수시라고 소치칩니다. 배에서 9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아침 어스름한 새벽녁에 지쳐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수 없었고, 목소리를 듣고도 알지 못한 것은 영적으로도 영안이 가리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얘들아(Παιδία) 고기가 없지? ”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을 부를 때 여보게들 친구들이여 하고 부르는게 더 타당하지만 이렇게 아기들을 부르듯 부르신 것은 그들의 신앙이 마치 어린아이의 상태와 같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너희들 아무 고기도 못 잡았지? 부정의문문을 통해 제자들의 사명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 항상 예수님이 동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인본주의의 결론은 없나이다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내 뜻과 내 생각대로 일하고 세상을 살려는 인본주의를 철저히 배격해야 될줄 믿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주권을 인정한 신본주의로 살라(6-11)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합니다. 오른편(δεξιά 데시아)은 유대인들의 통속적 의미로 행운을 가리키는 방향이지만, 여기에서 오른편에 던지라는 것은 어느 방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전문가 그룹인 제자들이 어느 방향에 고기가 있는지 모르고 허탕을 친 제자들에게 고기가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계신 신적 전지성을 가지고 계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십니다. 상식적으로는 언어도단입니다.

최고의 물고기 잡는 전문가들인 베들로 일행이 밤새도록 허탕치고 돌아오는데 깊은 곳이 아닌 낮은 곳 해안가 오른 편에 던지라 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그 말은 하는 분이 예수님인줄 모릅니다. 다만 어느 선지자(목사님)인줄 압니다. 자기 담임목사님도 아닌 분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지요.

밤새도록 지친 몸을 이끌고 이제 배를 대고 조업을 끝내려고 하는데 귀찮게 배 오른편에 던지라하면 통상 “예? 너나 잘하세요...”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인줄 모르면서 다만 선지자의 옷을 입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마치 중고등부 수련회에서 전도실습을 나갔다가 한명도 전도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학생들에게 어떤 선생님 같은 분이 “얘들아 몇 명이나 전도했니?”“ 아니요 한명도 못했어요 ” “그럼 다시 한 번 오른쪽 동네로 가서 전도해 보렴” 하니 어린 학생들이 주루루 달려가 전도하다가 온 동네 애들이 통째로 몰려오는 그런 모습입니다.

인간의 경험에 의지하여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아무 결실도 없었던 제자들이

, 신적 전지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순식간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상황의 반전을 이룬 것입니다.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는데 그물은 찢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히 임하기까지 오래참고 밤새도록 헛 그물질을 한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순종의 결과는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입니다.

인본주의의 결과는 앞에서 [없나이다]라면 신본주의 결과는 [들 수 없더라]입니다. 그물을 들 수 없더라(καί ούκέτι αύτο έλκύσαι ἳσχυ?ν)는 그물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실 영혼을 이끄시는 행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열심 으로 일하실 때가 되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놀라운 부흥의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은 사실을 통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십칸은 200규빗 즉 90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요한이 예수님이신 줄 그때서야 알고 그물을 오른쪽에 던지라 하신분이“ 주님이라”하고 소리칩니다.

사랑하시는 제자의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배를 정박시킬 때 까지 기다릴 수 없어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합니다.

성경에서 사랑은 아가페(희생적 신적 사랑), 필로스(형제의 사랑), 스톨게(가족간의 사랑), 핀란드로피아(자비 긍휼의 사랑)가 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 즉 희생적 사랑이었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중 벗고 있다가 바다에 뛰어 내리면서 겉옷을 두른 후에 뛰어 내린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바다에 뛰어 내리려면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뛰어 내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려면 합당한 준비 즉 옷을 입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 예배하는 것은 벌거벗은 몸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제외한 여섯명의 제자가 배를 정박시키는 동안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먼저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 놓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있습니다. 숯불(άνθρακιαν)이 무엇입니까? 구약에서는 부정적 의미로 지옥 징벌의 의미가 강합니다. 전쟁터에서 화공을 할 때 쓴 숯불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사랑과 용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으신 이유는 바다를 헤엄쳐 온 베드로의 몸을 녹이고 밤새워 고생한 제자들의 허기를 채워 주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 숯불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 안에서 숯불을 쬐다가 어린 소녀가 [이 사람 예수의 제자예요]라 하자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고 저주까지 하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요18:18) 그 숯불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 입니다. 제가 숯불 앞에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과 숯불을 보는 순간 베드로는 죄책감을 느꼈고 예수님은 의기소침해 있는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숯불은 Reconcilation 은 Re 다시 again, con 함께 together ,cilation 뛰다jumping으로 다시 함께 뛰다는 뜻입니다. 화해와 용서를 말합니다.

원수의 머리위에 숯불을 얹으려면 내가 먼저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김정남 독살사건에 VX라는 신경독가스를 사용했는데 손으로 바른 가해 여성이 먼저 구토하고 어지러운 증상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면 자유함을 얻고 용서 받은 자는 회개하고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본을 보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떡과 생선이 있었다는 것은 떡은 땅의 소산을 대표하고 생선은 바다의 소산을 대표하므로 시장한 제자들을 배려한 사랑임과 동시에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후 온 천지만물의 수확을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 생선을 좀 가져 오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적을 통해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 한 것은 하나님의 열심 으로 잡은 고기가 아름답고 풍요로운 식탁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모든 풍요와 즐거움은 단순한 인간적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그물에 가득한 고기를 세어보니 153마리였다 합니다.

왜 하필이면 150마리도 아니고 100마리도 아니고 153마리일까요?

1+2+3+...17=은 153입니다. 17은 10+7입니다. 10은 구약의 십계명을 말합니다. 7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온전하심을 뜻합니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의 총량을 말합니다. 총량 불변의 법칙에 의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는 헤알릴 수 없이 많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만세전에 예수님께서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성취해 가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더니 즉 신본주의 신앙의 결과는 [이같이 많으나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더욱 충만해 지고 결코 부족함이나 빼앗김이 없는 줄 믿습니다.

셋째로 너는 나를 따르라 (12-22)

12절에서 예수님은 조반을 먹으라(하루 두끼 먹던 시절이므로 첫 번째 식사)며 식사를 준비하고 제자들을 섬기는 예수님의 본을 보이시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수난 전에 제자들의 발을 닦으신 섬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장면으로 언제나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모습을 통해 세상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자세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식사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되 사랑을 확인하고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15-17절은 베드로에 대한 사랑의 사명 부여입니다.

사랑은 관심. 배려. 희생. 섬김. 관계(교제)입니다.

15절에서 나를 이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하느냐며 아가페 사랑으로 묻습니다.그러나 베드로는 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신적인 사랑인 아가페의 희생적 사랑을 할 수 없어요. 단지 형제를 사랑하는 필로스 사랑을 하겠다 답합니다.

전에 같으면 내가 이 사람들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죽을지라도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던 베드로가 이제 기가 푹 죽어 형제 사랑으로 사랑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그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다정하게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 부르던 그 부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로 불러 주신 그 말씀대로 다시 한 번 사명을 부여해 주시기 위해 불러 주십니다.

잘 못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먼저 용서하고 용납하고 품어주라 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떻게 사랑할 것이냐 묻고 난 다음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Βόσκε τά άρνία μου) 합니다.

 어린양은 떠먹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는 떠먹이듯 그렇게 양육하라 합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함인데,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여기에서는 꼴을 먹이고 관리하는 데 까지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새끼양은 젖병에 우유를 넣어서 먹이되 큰 양 어미양은 새끼를 낳고 젖을 짜고 털을 깍듯이 그렇게 치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아가페스오하며 묻자 베드로는 한결같이 필로세라 합니다. 명령은 내 양을 치라는 것입니다.

포이마이네(Ποίμανε) 성숙한 성도는 자기 털과 젖과 고기까지 주인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써 포이마이네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먼저 목양하다 다음은 회초리를 들고 길들이다, 세 번째 회초리로 때리다, 네 번째 콕콕 정곡을 찌르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회초리도 감당하고 콕콕 정곡을 찌를 때 회개하고 돌아서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17절에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고민합니다.

내가 대답을 잘못했나?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나? 행동을 잘못했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혀 가시는 날 하나님의 헌신적인 사랑은커녕 인간적인 사랑의표현도 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근심하여 슬퍼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가파오라고 두 번 물은 뒤 베드로가 대답한 필로세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묻습니다.

이 물음이 예수님의 두 번째 인카네이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어 형제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겠어? 하고 다정하게 묻습니다. 나를 죽기까지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큰 소리 땅땅 치더니 환난이 오자 어려워지자 꽁지 빠지게 도망가더니 어째 이제 형제의사랑은 잘 할 수 있겠어? 하고 묻습니다.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것은 내 열매를 주인에게 드린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늙은 양은 내 양을 먹이라 합니다. 다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늙은 양은 먹이라 합니다. 늙은 양은 섬겨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너도 나를 닮아 사랑하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훈련을 통해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라는 3대사역을 말씀한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을 닮아 이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나를 따르라(Άκολούθει μοι아콜로데이 모이) fallow me!입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육군보병학교에 나를 따르라 동상이 있었습니다. 솔선수범하는 초급장교를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때는 몰랐는데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공격할 때 단도를 아이성을 향해 들어 올리자 매복한 군사가 일제히 아이성을 점령한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더라구요.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선교명령 대 위임명령으로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라 합니다. 예수의 제자로써 철저하게 살고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예수님과 동거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음 제자의 삶은 예수께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시는 때에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각오나 혈기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허락하심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가신 그 길을 뒤를 좇아야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주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인본주의를 결판내야 합니다. (1-5)

둘째로 하나님 주권을 인정한 신본주의로 살라(6-11)

셋째로 너는 나를 따르라 (12-22)

내 생각과 판단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을 묻고 주님께서 인도하신대로 순종하며 살되, 주님께서 본을 보여 주신 그 모습 그대로 살기로 작정하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축복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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