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너무나 어리석은[사탄공격과 사탄역사의 보편적인형태=유혹중독]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1. 18:49

너무나  어리석은 (대 21:1-8)     설교집Ⅰ<아침마다 새로우니> 2 No.9

성경본문[개역개정]

  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2.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니
  3.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
  4.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드디어 요압이 떠나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5. 요압이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보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

 

 

 

  1. 요압이 왕의 명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
  2.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3.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여러분, 여러분은 친구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또 여러분의 이웃은 몇 명입니까? 2004년 한국 종합 사회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이웃 숫자는 일본이나 미국보다 많습니다. 이웃의 숫자는 한국인은 5.29, 일본인은 3.98, 미국인은 3.17명입니다. 한국 사회가 조금 더 열려있는 거 같죠? 또 친구 숫자에 있어서도 한국인은 10.44, 일본인은 6.67, 미국인은 7.91명입니다. 여기서 친구라고 하는 것은 동창, 동호인, 같은 교회 식구를 친구라고 하고 이웃은 자기 집 가까이 함께 머물며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친구와 이웃 사이엔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 남자들은 평균 12.95, 여자들은 8.22, 즉 활동 범위에 따라서 친구 수가 다릅니다. 월 소득이 400만원 이상인 사람은 친구가 13.65명이고 월 소득이 100만원 미만인 사람은 6.41명입니다. 친구를 만나면 돈을 써야 하니까 돈이 없으면 친구를 사귈 수가 없지요. 돈이 없으면 있던 친구도 멀어지게 되지요. 그러니 자기의 활동범위와 능력에 좌우되고 있습니다. 자아중심적인 선택이지요. 이웃은 20십대의 경우 2.96, 30대는 5.79, 60대는 6.5, 나이가 많을수록 이웃이 늘어나고, 전문대졸 이상이 3.35, 중졸 이하의 경우 5.9, 학력이 낮아질수록 이웃이 늘어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친구는 나 중심으로 내가 선택하고 내가 만나고 우리끼리 어울립니다. 수준이 비슷해야 어울립니다. 그러나 한 공간 안에 함께 어깨를 부딪히고 사는 이웃은 다 아파트에 살면서 문 걸고 살거든요. 힘 떨어지고 나이 들고 자기의 약함을 알면서 서서히 문을 열고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성경은 누가 당신의 이웃이냐를 물었습니다. 또 당신은 오늘 고통 당하는 저 사람의 이웃이 되고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참 미스테리한 말씀입니다. 다윗이 그 나라에 백성의 수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칼을 뺄만한 남자 20세 이상의 숫자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군대를 헤아린 거예요. 그랬는데 그 부하 장수가 만류합니다. ‘임금님 이 모든 백성이 다 임금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임금님의 종이 아닙니까? 새삼 세어서 무엇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윗에게 내 땅에 살고 있는 군대 숫자를 헤아리고 그 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불 같은 욕망이 일어나서 부하들을 다 동원해서 그 수를 세어보니 157만 명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그 일이 다 끝난 다음에 다윗이 하나님께 제가 범죄하였나이다.’ 성경을 보니 하나님이 그것을 괘씸하게 여기셨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구 조사하는데 뭐 그리 괘씸하게 여길 게 있을까요? 거기에는 정치적인 관점 외에 하나님과 그 사이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이제까지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숫자를 믿고 군대의 숫자를 의지하려고 하는 그의 마음을 하나님이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벌주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옵션을 거셨어요. 3가지 선택을. 하나는 온 나라가 3년 동안 기근에 시달리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석 달 동안 쿠데타가 일어나 그가 쫓겨 다녀야 하는 것, 마지막은 3일 동안 전염병이 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고민하다가 그 중에 3일 동안의 전염병을 선택합니다. 사실은 얼마 전에 이미 3년의 혹독한 기근을 겪었던 그 뼈 아픈 경험으로 더 이상 기근은 원치 않으며 또 얼마 전에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서 나라가 뒤집어졌던 그 쓰라린 상처와 아픔을 기억하기에 쿠데타도 싫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전염병으로 이스라엘  백성 7만이 죽습니다.

여러분, 아니 어떻게 다윗이 잘못했는데 애꿎게 백성 7만이 죽어야 합니까? 이게 현실입니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므로 유대인 60만뿐 아니라 2차 대전의 결과 6천만 명의 인구가 죽었습니다. 처칠은 이렇게 말했어요.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지게 되어 있다.’ 여러분, 우리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도 처칠의 말에 공감합니다. 국민 수준과 딱 맞는 대통령알고 보면 그들을 욕할 것도 없습니다. 백성들이 제대로 투표하지 못하고 자기의 권리를 막걸리 한 사발, 흰 고무신에 다 팔아먹고 지역을 좇고 자기 욕심을 좇으면서 자기 나라를 갈가리 찢어놓은 것이지요.

오늘 주목해야 할 내용은 사단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려고 다윗을 부추겼습니다. 교회라면 사단의 공격목표는 어디까지나 목사입니다. 목사가 무너지면 교회는 어쩔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늘 기도하실 때 여러분 자녀를 위해서 먼저 기도하십시오. 자녀를 위해 기도하신 후에 저를 위해 잠깐 기도해주십시오. 참 중요한 것이지요. 여기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혹 우리 주변에도 볼 수 있습니다. 무당 같은 경우에도 신이 들려야 초능력적인 그런 모습을 보게 되지요. 또 한 가지 형태는 억압당하는 형태가 있어요. 약물중독에 빠진다든지 어떤 사람은 여자에 빠진다든지 자기 능력으로 헤쳐 나오지 못합니다. 그 마음과 생각을 단단히 묶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감기만 걸려도 감기귀신이 들렸다거나 예배시간에 좀 졸았다고 졸음귀신이 들어왔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나는 빼고 모든 책임이 귀신에게 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단 역사의 보편적인 형태는 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사단이 다윗을 부추겼어요. 다윗이 오랫동안의 내란과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이제 겨우 평화를 찾습니다. 이제야 내 군대가 얼마인가 헤아려보자. 그것을 가지고 이 나라가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탄탄히 세우자. 하나도 틀리지 않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달리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느냐? 다윗에게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나라를 세워서 이제 하나님 앞에 커다란 성전을 세워 드려야지. 이것이 바로 다윗의 꿈이었습니다. 다윗의 야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고 다윗이 결정적으로 실수할까 봐 지금 사단에게 뒤흔들리는 다윗의 실태와 이 범죄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놀라운 손길을 펼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미국의 신학자이며 유명한 목회자입니다.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참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사단이 하는 일은 추상화 시키는 것이다. 이런 유혹에 빠지지 말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영혼을 가지고 나가는 그것보다는, 사람을 많이 모아서 많은 프로그램을 내어놓고 교회 이름을 드러내며 많은 사람을 동원하고 오라 가라 하고 앉으라 서라 하고 돈을 내라 하고, 이러한 것을 통해서 거룩함으로 감추어진 목사의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목사도 죽고 성도들도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은 자기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고 상당수의 교인들은 여기에 이미 길들여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이 드러나시면서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하느니라하셨을 때 제일 먼저 반대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주님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 날까지 3년을 주님을 좇아 다니고 이제 주님이 왕이 되시면 내가 장관이 되고 내가 한 번 보란 듯이 출세를 해야 할 터인데 십자가에 죽으시다니 내 인생의 계획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여러분, 베드로가 이렇게 되었다면 사단은 우리의 좁은 생각, 우리의 야망, 우리의 숨겨진 동기, 그것을 충분히 이용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니 바나바라 하는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드립니다. 그 소문이 퍼져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사람이 자기들도 땅을 팔아가지고 절반은 숨기고 절반을 내어다가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것이 전부냐?’ ‘이것이 전부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사단에게 농락당해 본 경험이 있는 베드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어찌하여 네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려하느냐?’ 재산을 절반이나 내놓고도 죽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역사 속에서도 부흥이 일어나고 한참 역사가 일어날 때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데도 안 죽으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게 다행입니까? 아니면 불행입니까? 신앙은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필요에 따라 나중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에게 순간순간 속아 넘어가는 이런 연약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오히려 은혜로 갚으시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회개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회개하며 하님 앞에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저의 교만을 용서해주십시오. 저의 불신앙과 저의 불순종을 용서해주십시오. 가슴을 찢으며 회개할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십니다. 네가 예배하는 그 자리가 예루살렘 성전 터가 되리라. 하나님이 그토록 아끼시는 하나님의 성전을 어디에 세우시길 원하십니까? 야망이 불타는 그 위에 그런 인간 무리 위에 세우려 하시지 않습니다. 정말로 자기의 거짓을 깨닫고 거짓된 신앙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 그 신앙고백 위에 영원한 성전의 기초를 세우십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가십시다. 그리고 하루하루 밝은 얼굴로 살아갈 때 진정한 신앙의 감사가 있고 열매가 있고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일에만 매어서 살다 보면 나중의 인생이 처참합니다.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뜨거운 사랑의 만남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대궐 같은 집에서 부부로 법적 관계로 살지만 남남이어서 각각 다른 방에서 사는 인생이 뭐 그리 행복합니까? 허름해도 서로 사랑하며 그 식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바로 그렇게 살려고 결혼하고 사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공부를 하라는 학문기관이 아닙니다. 은밀히 구제를 하는 기관도 아닙니다. 구제도 하지만 구제를 위한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친교기관이 아닙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사귀고 서로 어우러져서 재미있다?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 면이 있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무언가 이적을 체험하는 신비주의 기관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곳입니다. 나를 만나시는 그 하나님을 뜨거운 마음으로 만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눈을 열고 이제는 내 옆의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About Schmidt>라고 하는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이 영화를 보니까 보험회사 부사장이던 Schmidt씨가 66세에 은퇴를 했어요. 화려한 송별회가 열렸어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송별회를 하고 이제 집에 들어와 피곤한 몸으로 잠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침대에서 눈을 떴습니다. 더 이상 그는 회사에 다니지 않습니다. 무료한 일상이 시작됩니다. 그래도 열심을 내어 이제까지 일하면서 감추어 놓았던 중요자료를 다 모아 후임자에게 가져다 줍니다. 후임자가 정중히 인사를 하며 받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빠서 긴 시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오다 보니 뭘 하나 빠뜨리고 나온 게 생각이 나요. 그래서 돌아가 보니 후임자가 자기가 이제까지 보물같이 아끼던 자료를 쓰레기통에 막 버리고 있는 것이 유리창에 비치는 거예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거지요. 그래 집에 들어와 날마다 TV나 보고 너무나 지루해 합니다. 그러다가 구제 기관에서 나오는 TV 광고를 보게 됩니다. ‘당신의 사랑과 관심, 한 달 22$이면 연약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심풀이로 신청서를 한 장 씁니다. 자기소개 란도 적당히 써서 보냅니다.

그리고 그 집에 머물면서 42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아내와 마지막 날까지 티격태격하며 싸우다 어느 날 돌아와 보니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죽어 있었어요. 이제는 그 넓은 집에 자기 혼자입니다. 은퇴하면 아내와 행복하게 살자고 캠핑 카 멋있는 걸 사놓았습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아내와 떠나보지 못한 채 이제는 그 차를 가지고 반대하는 결혼을 굳이 하겠다는 딸을 찾아서 며칠 동안 차를 몰고 갑니다. 딸을 만납니다. 그 결혼은 안 된다. 그 때 딸이 말합니다.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때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더니, 왜 내가 내 사랑을 찾아서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이제 나타나서 반대하는가필요 없으니 돌아가시오. 딸에게도 거부당하고 그는 차를 몰고 돌아오며 좌절합니다. 도대체 내가 이 날까지 살아오면서 수고했던 그 모든 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문가에 그 동안의 편지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것을 뜯어보던 중에 자그마한 그림엽서를 발견합니다. 알고 보니 자기가 돈을 보내어 후원자가 되었다는 아프리카의 6살 난 꼬마가 그린 그림이었어요. 6살짜리 그림을 생각해 보세요.어떻게 그렸을까? 거기에 두 사람이 있어요. 머리를 그리고 적당히 팔 다리를 그린 두 사람이 서로 손 잡고 있습니다. 거기에 편지가 있었어요. 아저씨가 보내주신 돈으로 눈도 치료하고 이렇게 살고 있다는. 그리고 아저씨가 도와주셔서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그것을 보는 순간 Schmidt씨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 여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구나. 내 인생이 이제는 더 이상 아무 쓸모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이 작은 어린아이를 통해서 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구나.

여러분! 돈을 가지고 사람을 측량하고 학벌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얼굴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필요할 때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겠죠.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지은 바 되었으나 본질을 잃어버리고 허물 많은, 너무나 어리석고 이기적인 나에게 하나님이 이토록 놀라운 은혜로 오늘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 주위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웃을 향해서 관심과 손길을 내어주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신앙마저도 내 입맛대로 하나님을 필요에 따라 부르며 내 욕망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참으로 어리석고 이기적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다윗의 실패와 범죄를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은혜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손길을 새롭게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