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시간을초월하는창조주하나님은영원한존재]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9. 16:08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 21:1-11)     설교집Ⅰ<아침마다 새로우니> 2No.8

성경본문[개역개정]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1.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2.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위에 타시니
  3.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4.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5.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2003년도 국민 정체성 비교연구라는 신문의 발표 내용을 보니까 조사 대상 34개국 중에서 우리 나라가 정치적 영향력을 얼마나 행사한다고 생각하는가를 조사해 본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의식하는, 세계 속에서 한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33위였어요. 힘이 없다는 거죠. 예술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냐? 32위였어요. 그러면 역사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냐? 24위였어요. 전체적인 평가가 우리나라의 국력수준이 10위권에 들어가지만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은 상당히 바닥 수준이에요. 그러나 10개 항목 중에 가장 높은 것이 스포츠예요. 세계에서 한국 스포츠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냐? 14위로 나왔어요. 아마도 2002 월드컵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2002 월드컵의 4강 신화를 생각할 때, 정말 가슴 떨리는 장면은 월드컵 본선도 본선이겠지만 제 기억으로는 개막 직전, 본선이 2주도 채 남지 않았을 때 프랑스와 대결한 시범경기였어요. 그 때 프랑스와 우리가 시합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박지성 선수가 쏜 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도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 바로 1년 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0 5로 패했었거든요. 그것은 98년 바로셀로나 월드컵 때, 네덜란드에 0 5로 패해서 국민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던 그 악몽을 떠올리게 한 사건이었는데, 비록 시범경기이지만 월드컵을 앞두고 또 프랑스와 경기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죠. 대단한 도박이었죠. 제가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신문에서도 그건 너무 무리한 것 아니냐?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2 3으로 졌어요. 그러나 이것은 의미가 있는 숫자 아닙니까?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그 전까지는 본선에서 1승도 하지 못했던 한국이 4강까지 올라가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들을 훈련시켜왔던 히딩크 감독 그 나름의 전략, 특별히 개막 직전에 축구 세계 최대 강국 프랑스와 경기를 갖는, 그것은 단순히 도박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거기에 희망을 불어넣고 활짝 꽃을 피우는, 오죽했으면 나중에 히딩크 감독의 이름을 히동구로 바꿔서 귀화시켜서 대통령으로 세우자는 얘기가 나왔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고난 주간의 시작입니다. 이 타이밍은 히딩크 감독의 타이밍 보다 더 절묘합니다. 지금이 유월절이에요. 유대인에게는 유월절이 우리의 구정과 같습니다. 최대의 명절이에요. 율법에 예루살렘에서 반경 30km 내에 사는 모든 성인 남자들은 당연히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25만 마리의 양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대 일로 잡은 것이 아니라 보통 열명 당 한 마리를 잡았기 때문에 거기에 모인 사람은 대략 250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여러분, 성지 예루살렘을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구 예루살렘이 크지 않거든요. 거기에 250만 명이 모였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숫자예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루살렘에서 십 리도 채 떨어지지 않은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을 연출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들어가는 길목에서 사람을 살리시는 사건을 일으키시므로 단연 예루살렘 성의 최대 화제는 그 사건입니다. 최대의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호기심을 가지게 됩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냐?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펼친 그 사람이 누구냐?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극대화 시켜놓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십니다. 왕으로 들어가셔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호산나를 외칩니다. 자기 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서 그것을 흔들면서 왕이 오심을 환영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나귀를 타고 오셨어요. 왕이라면 말을 타고 들어오셔야 하는데, 왕은 왕이로되 나귀를 타고 오셨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 놀라운 의미가 있어요. 지금 왕을 맞으면서 만세를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놀랍게도 그 사람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반한 것이지요. 여러분, 이번 주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날이기 때문에 성금요일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 인도네시아의 좋은 점이 성금요일이 쉬는 날이어서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금요일에도 주일과 같이 10시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주님이 못박히신 그 시간에 우리도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날은 점심 식사를 준비하지 않습니다.할 수 있으면 그날은 한끼 금식하며 주님을 묵상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의문은 어떻게 한 주간도 지나지 않은 이 짧은 시간에 왕으로 주를 영접하던 사람들이 금요일 아침에는 저를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중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등장한 사보나롤라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역사적인 인물이죠. 피렌체를 7년 동안 종교적으로 지배한 인물이에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을 설교로 무너뜨렸어요. 천주교의 부패와 정치적 혼란과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매주 예배를 드리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냅니다.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갱신을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드디어는 그 도시를 지배하던 전통적인 가문이 무너지고 쫓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개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히기 시작하면서 그 속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끝내는 자기들을 이끌었던 리더를 죽임으로 그의 개혁은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의 사건은 똑 같은 일이 더 함축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루살렘 유월절에는 성전이 중심이 됩니다.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있어요. 정치구도로 말하면 여당이에요. 제사장편을 반대하는 야당도 있어요. 그들은 율법을 붙들고 율법을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이에요. 이들이 야당이에요. 새로운 갱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에요. 또 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그 땅을 지배하는 로마 군인들이에요. 그리고 로마 군인들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헤롯당파들이 있어요. 그 와중에 250만 마리 양을 조달해서 그것을 팔아 떼돈을 버는 장사꾼들이 있어요. 그리고 제사를 드리러 나오는 수많은 무지한 일반 백성들이 있어요. 그리고 또 여기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었어요. 이 편도 아니고 저 편도 아니었어요.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반했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은 저가 여당이든지 야당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로마인이든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가난하든지 부유하든지, 모두 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하나님을 거부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며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축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종교적인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이었고, 제자들조차도 예수를 따를 때 자기에게 오는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지, 주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했고 정말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느 당파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제도를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얘기하고 그 인간 속에 있는 삶의 본질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46년 동안 지어지고 있는 헤롯성전을 보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이 성전을 3일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성경은 말하기를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자기의 죽으심을 예고한 말씀이라고. 죽음으로 성전에서 성행했던 거짓된 종교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지게 하는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에스겔 36 26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율법도 주고 그들에게 많은 선지자, 제사장, 왕을 보내었습니다만 끝내 배반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중요한 결단을 내리십니다. 이제는 내가 내 영으로 너희들 속에 들어가 너희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함께 하리라. 너희들에게 이것을 지켜라 저것을 지켜라 해서 될 일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 마음에 들어가 너희와 더불어 살리라. 여러분, 이것은 아주 새로운 질서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거예요. 왕은 새로운 권력을 갖는 사람이요, 새로운 법을 공포하고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새로운 질서가 여기 나와 있는 거예요.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말씀하셨어요. ‘내가 이제 죽음으로 으뜸이 되리라. 왕이 되리라. 내가 이제 죽음으로 새로운 삶의 질서를 펼치리라.’

제가 지난 주간에 드라마 <토지>에 깊이 빠졌었어요. 모처럼 시간을 내어서 비디오를 빌려서 봤어요. 그렇게 하고 나니까 해외 교포들이 주중에 일을 열심히 하고 주말에 비디오를 산더미같이 빌려서 밤늦도록 보는 것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리고 어떤 장로님이 주일날 기도할 때 실수를 하셨대요. ‘하나님,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들은 대로 나오는 겁니다. 드라마 <토지>의 무대는 동학혁명으로부터 시작해서 8.15해방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격동기입니다. 그 시대에 살아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만도 소설에는 800명이나 됩니다. 거기에는 많은 분들이 나옵니다.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습니다. 누가 주연입니까?

주연과 조연, 연예계에 이런 속설이 있대요. ‘주연과 조연은 타고난다.’ 누군가 아마 조연을 위로하려고 이런 얘기가 나왔겠지요? 조연에도 장점이 있다. 첫째, 언젠가 나도 주연이 될 수 있다는 기대,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주연은 잘 나가다가도 한번 조연으로 나오면 사람들이 한물갔다라고 생각한다. 그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둘째, 이미지 관리를 잘 하면 평생 밥벌이 하는 데는 문제없다. 셋째, 주연처럼 요란한 의상이나 차 등의 품위유지비가 들지 않는다. 넷째, 주연이 겹치기 출연을 하면 난리가 나지만 조연은 겹치기 출연해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다섯째, 주연 같은 경우는 누구랑 차 한 잔만 해도 스캔들이 나고 난리가 나는데 조연은 해외여행을 가도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여섯째, 주연은 잠깐만 쉬어도 슬럼프에 빠졌다느니 은퇴한다느니 하는 소문에 시달리지만 조연은 아무리 쉬었다가 나와도 그런 얘기가 없다. 이게 바로 조연의 장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연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오직 일편단심 주연을 꿈꿉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연입니까? 그러고 보니까 꼭 부자가 주연이 아니더라고요.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주연도 아니더라고요. 작가의 생각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사람, 그 사람이 주연이에요. 예수께서 왕으로 오셔서 새롭게 펼치시는 질서 속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말씀을 깨달아서 그것을 내 마음 속에 가지고 사는 사람, 그 사람이 주연입니다.

TV의 주연은 얼굴이 잘 생겨야 하지만 하나님의 주연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두에게 열려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죽더라고요. 부지기수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죽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죽었다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발견할까? 제가 죽었다가 눈을 뜨는 순간 다 우리가 같이 모여 있어요. 분명히 나 먼저 죽었는데. 다 같이 모여 있어요. 그것을 과학적으로 얘기한 글이 있습니다.

2005 3 10일자 신문에 실려 있는 서울대 물리학과 제원호 교수의 칼럼을 봤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의 가치>라는 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어라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엄청난 에너지의 폭발로 인하여 빛이 생기고 거기에 물질이 생기고 그리고 시간이 생깁니다. 영원은 시간이 필요 없는 곳인데 이제 거기에 빛과 물질이 생김으로 시간과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안에 태어난 우리도 시간 속에서 자라나며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죽습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 밖에는 이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시간 안에 있는 인간과 시간 밖에 있는 창조주가 과연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이 분이 이것을 아주 명쾌하고 재미있게 설명을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바로 여기의 답이랍니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차를 타고 갈 때 기찻길 옆에 있는 풀도 보고 꽃도 보고 지나가지 않습니까? 바퀴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떻겠습니까? 뭐가 있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휙 하고 지나가버립니다. 빨리 움직이는 관찰자에게 시간은 짧게 짧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제 그 속도가 빛의 속도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여러분, 빛이 뭡니까? 1초에 30 km를 가니까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돌아요. 우주의 절대적인 속력이죠. 어떤 물체도 그것을 넘어 설 수 없는 속력이지요. 빛의 속도로 달리는 자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그저 늘 그 앞에 머물러 있는 영원한 현재가 되는 것이죠.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1987 8 23일 발견한 밝은 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별빛을 1987A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것을 연구해보니 그것은 17만 광년, 지구의 시간으로 17만 광년이에요. 17만 년 전에 시작되어서 지구에 다가온 빛이라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시간이지요. 그러나 그 빛의 속도로 똑같이 움직이는 관찰자가 볼 때 그것은 늘 현재라는 시각이에요. 그 앞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요. 같이 있어요. 영원한 존재예요. 이것은 시간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시간 안에 갇혀 있지만 시간 밖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날마다 눈을 뜨는 순간 내게 다가오는 이 빛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계심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토록 짧은 인생 속에 세대를 나누고 지역을 나누고 이해관계에 얽매여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이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뭡니까? 죽음을 내어놓고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끝없이 지켜주시는 그 사랑.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시간 속에 왕으로 들어오시고 하나님의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늘 이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는 과거 현재 미래를 겪어가는 이 시간 속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 죽기 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절호의 기회인 것이죠. 죽은 다음에는 아무리 부모 형제라 할지라도 이미 끝난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바로 놀라운 창조주 하나님의 새로운 삶의 윤리인 것이지요.

여기 예수님을 따르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로 와서 묻지 않습니까? ‘주님, 아 글쎄 우리 형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 유산을 다 가로채어 갔습니다. 동생인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좀 오셔서 형에게 말씀을 해 주십시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재판관이나 너희들의 재산을 나누는 사람으로 세웠느냐? 너희 마음에 그 모든 욕심을 버려라.’ 물론 판사나 변호사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래야 질서가 유지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한들 그 안에 진정한 삶의 행복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서 비유를 들지 않으셨습니까? 어리석은 부자예요. 한 해 농사를 지어서 어마어마한 것을 거둔 부자가 어떻게 하면 창고를 더 늘여서 이 모든 것으로 다 채울까? 그러다가 다 끝난 다음에는 , 내 영혼아, 이제 모든 일이 끝났으니 마음 편히 쉬어라.’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속에 들려주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이 밤에 내가 너의 영혼을 불러가리라.’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토록 재물을 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어리석고 어두운 자의 종말을 보세요.

남북 전쟁 때에 북군이 밀리고 있을 때 링컨이 부하 장군들과 더불어 기도합니다. 한 장군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야 할 텐데…’ 그 때 링컨이 말합니다.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기를 기도합시다. 이 위기의 상황 속에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 편에 바로 서도록 그 지혜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여러분,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고난주간을 가장 올바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겸손한 삶이요, 겸손한 신앙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 같지만 성전 안에서 양과 비둘기와 소를 팔러 나온 그런 자들같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의식을 행하면서도 자기의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부르지 않게 하시고 진리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속에 담겨있는 사랑과 은혜로 새로운 삶의 눈을 열게 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지혜와 꿈과 겸손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