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부르심을 받은 대로[세계 선교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어요]/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29. 07:21

070225 부르심을 받은 대로 (고전 7:17-24)

성경본문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1.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제가 지난 한 주간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사실은 어제가 제 결혼 25주년이거든요. 제가 오십을 넘겼는데 대략 25년은 그저 혼자 철부지로 살았고 또 멋모르고 결혼한 25년의 삶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삶이었다. 그래서 결혼하고 산 25년은 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날마다 발견한 시간이었습니다.

제주도를 다녀왔어요. 차를 빌려서 제주도 한라산의 1100고지 산 중턱의 도로를 드라이브하니까 꿈꾸는 것 같더라고요. 아쉬웠습니다. 이렇게 눈으로 보면서도 틀림없이 인도네시아에 돌아가면 뭘 봤는지 다 잊어버릴텐데, 한없이 아쉬워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성산일출봉에 올라갔습니다. 늘 가고 싶은 곳인데요. 얼마나 좋은지. 그런데 구정 직후여서 그런지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왔어요. 도대체 여기가 중국 땅인가 할 만큼. 또 그 사람들 목소리가 얼마나 큽니까.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막 떠들어대지요.

그런데 어느 분이 그러더라고요. 제주도에 와서 꼭 봐야 될 데가 있다고. 제주도에서 가장 경치 좋은 데가 어디냐. 섭지코지라고 그러더라고요. 성산일출봉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죠. 이름도 독특하죠. ‘섭지코지.’ 원래 협지코지인데, 협지는 좁은 곳, 코지라는 것은 곶, 튀어나온 부분, 그런 말이 제주도 방언이 됐겠죠. 거기를 갔는데 일고 보니까 <올인>이라는 드라마를 거기서 찍었대요. 거기 가보면 세트장이 있습니다. 촬영 후 태풍에 다 무너졌는데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못 이겨서 다시 지하 1, 지상 1층으로 잘 꾸며놨더라고요. ‘올인하우스가 있더라고요. 거기 들어가 보니까 배우들이 마셨던 커피숍, 포즈를 취했던 자리, 결혼식을 올렸던 장소 등등 다 있어요. 우리에게도 이렇게 해보시라고 요청을 합니다. 거기서 차도 마시면서 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더라고요. 아주 화려한 연출에 정말 달콤한 감동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약속했습니다. 25년 후에 우리 다시 한 번 건강하게 찾아오자고.

많은 사람들이 스타들이 앉았던 그 자리에 앉고 싶어하고 그들이 마셨던 커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것은 답답한 현실의 출구를 찾으려는 열망이죠. 몸부림이죠. 그걸 뭐 나쁘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건 너무 순간적인 거죠. 또 피상적인 것이죠. 그러고 보면 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탈출구라고 할 수 있어요. 야곱의 사닥다리죠. 오늘이 눈물로만 가득한 현실이 아니라 눈물을 닦고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로 이어진 사닥다리가 놓여있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죠. 문제는 우리 신앙은 그런 관광지 명소 같지 않은 거죠. 감추어져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잘 안보여요. 찾아야 된다고 했어요.

제가 이 번에 나가 있으면서 국립박물관에 들렸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전을 하더라구요. 로코코시대로부터 19세기 초까지의 풍경화를 전시하더라구요. 한번 쭉 둘러봤습니다. 그런데 보니, 그림설명 시간이 30분간 준비되어 있어요. 또 영상으로 보여주는 시간이 15분 있어요. 저걸 한번 들어가 볼까. 들어가서 봤습니다. 제가 무릎을 쳤어요. 역시 해설을 듣고 그림을 생각해보니 , 그 그림에는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 그랬구나.’ 그림의 배경, 그림 자체의 설명, 그림의 의미, 그리고 역사적인 가치까지 다 묶어서 그 짧은 30분에 맥을 이어서 설명해주는데 그림 보러 왔지만 그림만 보고 왔으면 완전히 돈 낭비할 뻔했어요. 이게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니에요. 듣는다고 다 듣는 게 아니에요.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발견하는 거에요. 그것을 사도바울은 부르심이다그런 표현을 해요.

오늘 여러분이 여기 나와 앉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나오셨지만 이걸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이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어요. 잡아 끄는 손길이 있었어요. 부르심이 있었던 거죠.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한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라고 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이에요. 그런데 모여보니 얼굴이 다양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시간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모든 것이 달라요.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로 엮어내는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어떤 나이 든 사람이 해병대 복장을 아주 멋있게 차려 입었어요. 선글라스를 끼고 교통순경들이 쓰는 빨간 지시등 같은 것을 들고 군인자세를 취하더니 말이죠, 사람들이 다소 긴장해서 쳐다보니까 전도를 하더라고요. ‘여러분 명절을 맞이해서 좋은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시고 꼭 교회에 나가시기 바랍니다.’ 아주 명령조에요. ‘반드시 교회에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제가 탄 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이 자리에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계시다면 천국만 있다고 얘기하지 마시고 지옥도 있다는 것을 반드시 얘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라고요. 제가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또 언젠가는 어떤 여자 분이 타셨는데, 이 분은 전철 안을 쭉 지나가면서 앉아있는 사람들 무릎을 툭툭 치고 지나가요. 그러면서 교회나가세요. 예수 믿으세요.’ 그렇게 한 바퀴 돌고는 가시더라고요. 참 다양하지요. 분명 그들이 은혜를 체험했고 하나님을 만났으니 그렇게 하지 맨 정신으로 그렇게 하겠어요. 누가 돈 준다고 하겠어요. 그거 못 하는 거에요. 물건은 팔아도 그 얘기는 돈 받아도 못 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거든요. 전 생각했어요. 그러나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뭔가 내가 하나님께 부름 받았고 받은 은혜가 있고 내게 익숙한 방법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나에게는 맞는 방법이었어요. 그러나 과연 듣는 사람들에게도 맞는 방법이었을까. 과연 의사소통이 되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어요. 과연 효과적인 방법이었을까. 문제는 소통이에요. 커뮤니케이션.

사도바울 당시에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전통 유대인의 방식 대로 할례를 받느냐,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느냐, 이런 것들이 굉장히 큰 문제였어요.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당신이 할례자인 유대인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느냐 굳이 무할례자가 되지 말아라. 당신이 할례를 모르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믿었느냐 그렇다면 굳이 할례를 받으려 하지 말아라.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내가 만난 하나님, 그 분의 계명을 올바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마다 문화가 달라요. 예배문화가 다른 거에요. 틀린 게 아니고요, 뭐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니에요. 문화의 문제에요. 왜 이렇게 하느냐. 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깨끗하게 듣기 위해서.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가려고.

최근에 전 세계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한 영화가 있어요. <바벨>이라는 영화죠. 멕시코의 이냐리투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미국 L.A. 상류층의 한 부부가  부부간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멀리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어요. 모로코 산지를 관광버스로 지금 지나가고 있어요. 부부가 대화를 나누는데 서로 마음의 벽이 잘 무너지지 않아요.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이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졸던 여자의 목에 맞은 거죠. 피를 쏟는 거예요. 난리가 났습니다. 갑자기 의사를 찾을 수가 없어서 급히 현지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서 가까운 마을로 차를 몰고 갑니다. 동네 의사를 부르고 애를 쓰면서 미국 대사관에 연락을 해서 빨리 우리를 구해달라고 요청을 하지만 좀처럼 응답이 없습니다. 이런 소식들이 전해지면서 전 세계 긴급 뉴스로 미국인이 테러리스트에게 테러를 당했다고 뉴스가 나갑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것은 모로코 산지에서 염소를 치면서 살던 가족 중에 그저 나이 십여 살 되는 형제가 말이죠, 집에 새로 들여 온 총을 가지고 서로 누가 잘 쏘는지 내기를 하다가 그만 저기 멀리 가는 버스를 향해서 쏜 것이 발단이 되었던 거죠. 그 총은 모로코 사람이 일본인 사냥꾼에게서 감사의 대가로 선물 받은 총이었어요.

이야기는 모로코에서 미국으로 또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 총을 준 일본인은 도쿄의 호화로운 고층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만 아내를 잃었고, 딸과는 깊은 갈등에 몸부림치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어요. 또 거기다가 이번에는 L.A미국인 부부의 아이들을 맡고 있는 멕시코인 가정부 아줌마가 자기 아들의 결혼식이 국경 넘어 멕시코에서 있어서 지금 빨리 가야 되는데 이 아이들을 맡아 줄 베이비시터를 결국은 찾지를 못해서 할 수 없이 아이들을 태우고 조카의 도움을 받아서 국경을 넘어가 결혼잔치에 참여해서 하루 잘 지내고 술 취한 조카가 운전한 차를 타고 다시 국경을 넘어 오다가 문제가 생겨요. 막 쫓고 쫓기는 사건이 생기고 아이들과 더불어 사막에 버려집니다.

가는 곳마다 의사소통이 안 돼요. 언어의 장벽이 있어요. 국경의 장벽이 있어요. 계급의 장벽이 있어요. 인종의 장벽이 있어요. 이것이 사람들을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해요. 오해에 빠지게 해요. 사건을 키워요. 그러나 언어가 통하고 인종이 같고 심지어는 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장 무서운 장벽은 마음의 벽이었다는 거죠. 그 부부가 피를 쏟는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두 사람만이 홀로 남게 될 때에 비로소 가치를 발견합니다. 서로의 연약함 속에서 서로의 필요를 새롭게 느껴요. 그리고 피를 쏟는 자리에서 화해를 하게 돼요. 화해의 실마리를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여러분 이 ‘바벨’이란 단어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에서 가져온 거예요. 바벨이란 뭐예요? 혼돈이란 말이에요. 혼잡해졌단 말이에요. 미국 L.A.의 부유한 주택, 일본 동경의 그 화려한 고층아파트, 모로코 산지에 뚝 떨어져 사는 가정, 멕시코 사람들의 결혼파티, 문화는 다양하지만 놀랍게도 공통점은 너와 나 사이에 벽이 있다는 거예요. 이걸 넘어서지 못하는 거예요. 상처를 주고받는 거기에 갈등이 있고 원망이 있고 증오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건은 인류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바벨탑 사건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는 거죠. 하나님과의 소통이 우선이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하면 이웃과 부딪히게 돼요. 갈등하게 돼요.

오늘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분명한 생각이 뭐냐. 당신이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인도네시아 사시는 분들의 마인드, 참 재밌어요. 여기서 십 년, 이십 년 사셨는데도 대화를 나눠보면 꼭 한국에 가겠대요. 그러나 적어도 오늘은 여기에 마음을 붙이고 사세요. ? 하나님이 나를 여기 보내셨으니까. 뭔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단 하루라도. 소중한 하루에요. 하나님이 불러주신 거예요.

사실 우리 목사님들끼리 하는 우스개인데요, 미국목회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이런 우스개가 생겼어요. 저 뉴욕에 있는 미국 동부가 제일 어려운 모양이에요. 미국 동부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의 꿈은 그저 미국 중부 시카고 같은데 가서 목회했으면 좋겠대요. 미국 중부 시카고에 있는 목사님들의 바램이 뭐냐면 L.A 같이 미국 서부, 한인들이 많은 곳에 가서 목회했으면 좋겠대요. L.A에서 목회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니까 태평양 건너 한국에 돌아가서 목회했으면 좋겠대요.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물었더니 이게 웬일이에요. 미국 가서 목회하고 싶대요. 그래서 이게 돌고 도는 모양이에요. 다 수요와 공급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게 왜 그렇겠어요. 교인들이 미국에 살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그걸 교회에 와서 다 쏟아낸다는 거예요. 그러니 목사가 무슨 재주가 있어요. 함께 머리가 터지는 거죠.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네가 종이냐. 주님 안에서는 자유인이다. 아내에게 매였느냐, 아내의 종입니까. 어떻게 바꿀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으로 아내를 섬기면서 사세요. 또 네가 자유인이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값으로 너를 사서 너의 주인이 되었으니 너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뜻을 붙들고 살아라. 거기에 해답이 있는 것이죠.

이번에 어떤 선교사님을 만났어요. 우리 선배 선교사님인데 뉴질랜드에서 20여 년 선교를 하셨어요. 그곳 원주민이 마리오족이거든요. 그들이 서양사람들의 수백 년의 지배에 모든 걸 다 빼앗기고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분이 들어가셔서 20여 년 그들의 의식을 일깨웠는데 이번에 사상 최초로 마리오 당을 만들어가지고 국회 선거에 진출해서 국회의원에 다섯 사람이 당선되었더라구요. 대화를 나눠보니까 한국에 있을 때 구로에서 도시산업선교회 같이 근로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노동자 사역을 하시다가 가신 분이셔요. 부르심이 모두 그렇게 다른 거예요. 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들어서 쓰시는 거예요.

오늘은 3.1절 기념 예배입니다. 1919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일본의 억압 속에 전국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조직이라는 게 교회밖에 없었어요. 사실 그때 교인은 전 국민에 비하면 한줌밖에 안 됐어요. 그러나 온 교회가 참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와는 달리 서양인의 앞잡이가 아니라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인의 교회로 거듭나게 된 거죠. 그것이 있었기에 한국교회의 부흥이 있었고 오늘 세계 땅 끝까지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하나님이 한국 사람들을 쓰시는 거예요. 한국교회와 해외 한국교회와 한인 선교사들을 쓰시는 거예요.

전 이 생각만 하면 너무 행복해요. 얼마나 감사해요. 학교 다닐 때 앞에 나가서 상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요. 딱 그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서 쓰시는 거예요. 도대체 한국사람들의 뭐가 그렇게 장점이기에 쓰실까. 하나님 앞에 뭐가 그렇게 예쁘게 보였을까. 열정이죠. 자기 것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놓는 열린 마음이죠. 세계 선교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어요. 그러나 출발은 내 가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내 아내를 사랑하면서 시작합니다. 내 남편을 섬기면서 시작하는 것이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르심,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라.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마음껏 예배할 수 있도록 교회와 신앙공동체와 좋은 이웃들을 주시고 또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부르신 이 자리에서 가족과 이웃과 일터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소중한 하루, 소중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