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訴訟]=자유 평등 정의

‘전두환 메모’ “공수부대원 사기 죽이지 말라” / 한겨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4. 5. 22:10

‘전두환 메모’ “공수부대원 사기 죽이지 말라”

한겨레 등록 :2017-04-05 19:24수정 :2017-04-05 20:56

 

‘12·12 및 5·18 검찰 수사기록’ 봤더니
임현표, ‘특전사령관이 보던 내용 목격’ 진술
광주 학살 책임 증거중 하나지만 전씨는 부인

임현표 당시 전투교육사령부 교육훈련부장이 봤다고 증언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인 모양. 전두환이란 글씨가 특이했다고 기억했다.
임현표 당시 전투교육사령부 교육훈련부장이 봤다고 증언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인 모양. 전두환이란 글씨가 특이했다고 기억했다.

전두환씨가 80년 5·18 당시 친필 메모를 통해 “공수부대원 사기를 죽이지 말라”고 ‘요청’하는 등 광주학살에 적극 개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광주에는 3공수부대가 투입돼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는 최근 전씨가 <전두환 회고록>에서 “수사와 재판에서조차도 광주사태 때 계엄군의 투입과 현지에서의 작전지휘에 내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집요한 추궁이 전개됐지만 모두 실패했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준다.

임현표 당시 전투교육사령부 교육훈련부장(준장)의 검찰 진술.

임현표 당시 전투교육사령부 교육훈련부장(준장)의 검찰 진술.


5일 ‘12·12 및 5·18 검찰 수사 기록’을 보면, 임현표 당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교육훈련부장(준장)은 “80년 5월23일 낮 12시경 광주비행장에서 전교사 사령부로 비행하던 유에이치-원에이치 헬리콥터 안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친필 메모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이 메모지는 전씨의 광주 학살 책임과 관련해 중요한 ‘증거’의 하나지만, 전씨는 이를 부인했다.

임씨는 “광주비행장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만나 전교사로 가는 도중 정 사령관이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읽고 있기에 이를 옆에서 잠깐 읽어보니 전 보안사령관의 친필 메모였다”고 진술했다. 임씨는 “메모엔 ‘무리가 따르더라도 조기에 광주사태를 수습하여 달라’는 취지의 당부와 함께 전 보안사령관의 사인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소준열 당시 전남북 계엄분소장겸 전교사사령관(소장)도 법정(1996년 7월6일)에서 “5월23일 ‘소 선배, 희생이 따르더라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고 공수부대원의 사기를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적힌 전두환의 친필 메모를 건네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전씨는 회고록을 통해 “무엇보다도 ‘발포명령’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전씨는 정권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진압해 사상자를 낸 범죄(내란죄) 뿐 아니라 5월27일 광주진압 작전 때 발생한 살상행위를 한 혐의가 인정돼 내란목적살인죄로 사형이 확정됐다가 무기로 감형됐다. 내란죄는 내란의 와중에서 폭동(시위진압)을 통해 시민을 살해한 것이지만, 80년 5월27일 새벽 진압작전 실시 명령엔 ‘사람을 살해해도 좋다는 발포명령이 들어있다’는 것으로 대법원은 판시했다. 한 5·18연구자는 “전씨가 검찰 수사에서 5·18 발포 책임자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점을 악용해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두환의 거짓말’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발포 명령자 규명 등 그간 제기됐던 주요한 의혹에 대해 정부 차원의 재조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전씨가 80년 5월 광주에 나타났다’는 증언은 광주 발포 명령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형사처벌의 증거’가 될 수 있는데도 수사 과정에서 묻혀 버렸다. 백남이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참모, 허장환 광주 505보안대 수사관, 헬기 수송군인, 신군부 인사들을 인터뷰한 소설가 등은 “80년 5월 광주에서 전두환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지만, 법원은 이를 전씨의 책임을 묻는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80년 5월20일 밤 광주역에서 발생한 최초 발포와 관련해 ‘실탄배분’을 지시한 지휘라인이 따로 존재했는 지도 밝혀야 한다. 5월21일 금남로 집단발포 하루 전날 밤 11시30분 광주역 근처에서 3공수여단 제3대대가 발포해 6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당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5월20일 밤 10시30분 제16대대에 경계용 실탄 100여 발을 배분한 것을 시작으로 12·15대대에 실탄을 체계적으로 지급했다. 3공수여단은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된 시위대와의 충돌 과정에서 발포해 시민 김재화(25)씨 등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다쳤다. 공식 지휘체계였던 2군사령부의 발포금지·실탄통제 지시가 사실상 묵살됐다.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의 검찰 증언 기록.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의 검찰 증언 기록.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이 비공식 지휘라인에 따라 발포 명령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은 검찰 수사에서 “공수 여단장들이 특수부대라서인지 31사단장이나 전교사사령관보다 현지에 내려와 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자주 만나 상의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형식상은 정식 지휘계통에 복종하였지만 실제로는 다분히 정호용의 지시에 따랐다고 판단한다”고 진술한 바 있다. 한 5·18연구자는 “3공수여단 부대가 실탄을 배분한 것이 사실상 발포명령과 같았는데,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 등 공식 지휘라인에선 광주역 발포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이는 육본-2군-전교사-31사단-공수여단이라는 정식 지휘계통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정호용 특전사령관-공수여단으로 공수부대 지휘가 이뤄졌다는 의혹과 맞물려 있다”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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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89479.html?_fr=mt2#csidx44161fc7075b64387866a27750b860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