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공포 /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1) 간증(Text)
2015.01.0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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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공포
/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1)
간증을 하는 이유
무신론자였던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혜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며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 글을 쓴다. 너무나 뜻밖으로 크나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초기의 몇 가지 이야기를 이 글에 쓰고자 한다.
1981년 4월 26일 새벽, 하나님께서 내 영안(靈眼)을 여시고 그 분의 하얀 손으로 내 명치를 어루만져 주시며, "누구냐?"고 묻는 내 질문에 분명히 한국말로 "하나님이다."고 대답하시는 체험을 했다. 그 해 12월 어느 날 이른 아침, 아침기도 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 영혼이 내 육체를 떠나 새카만 상태 즉 하늘(영혼세계) 속을 매우 빠르게 날아가는 경험을 하였다. 1982년 11월 하순 어느 날 오후, 하나님의 음성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1983년 10월 어느 날 오전, 워커힐 쉐라톤 호텔 일실에서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의 전신이 내 옆에 발현하셨다. 이런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된 이후 깨닫고 변화된 내 사고방식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이 내 간증이 되겠다.
내 체험이 다소 특이하기 때문에 듣는 분들 중에서 특히 믿음 없는 분들은 '소설가니까 아마 소설을 쓰고 있나 봐!' 그런 말을 할 정도여서 간증하기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으면서 간증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다메섹 가던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 만난 체험을 얘기하니까 베스도 총독이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하던 그런 성경말씀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하나님 만난 체험을 나 혼자 간직하고 말았을 것이다.
'바울이 미친놈 취급을 받으면서 간증하고 다녔다면 나도 미친놈 소리 좀 듣지 뭘.' 용기를 짜내어 여기저기에서 간증을 하곤 했다. 그러나 심지어 어느 기독교 방송국에서 간증하고 나오니까 담당목사가 슬그머니 "하나님은 인간이 볼 수 없다고 되어 있는데..." 몹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일 때는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했다.
요한일서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하는 말씀 때문인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존재라고 설교하는 목사님들을 이따금 보곤 한다. 하나님을 오직 마음으로만 믿는다는 뜻으로'믿음'의 뜻을 한정시키는 것 같다.
나는 방송국 사회자에게 슬그머니 "목사님께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시라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말하고 나자마자 금방 후회가 되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하는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수훈 중 한 말씀인데 마치 내가 마음이 청결한 자여서 하나님께서 당신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자랑하는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도 있다는 성경말씀이 있지 않은가!' 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환기 시켜드리겠다는 뜻인데, 이거 참 주제넘게 건방진 소리를 하고 말았다고 몹시 후회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큰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신 것인데 말이다.
바울도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죽이려 가던 크나 큰 죄인이기에 그 미친놈 같은 열성적인 마음을 옳은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신 것이라고 봐야 하듯이 나 역시 스스로는 구원 받기 어려운 크나 큰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 것일 텐데 말이다. 하기야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하나님 만났다는 얘기가 이상할 수밖에 없다.
내가 무신론자이던 시절에 하나님 도움으로 병이 나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종교 팔아서 돈 버는 사기꾼의 앞잡이'라고 상대를 내심 경멸하며 '종교란 윤리적인 생활을 하자는 사회적 운동이죠.' 점잖게 떠밀어 버리던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인간의 일은 인간끼리 할 테니 하나님은 가만히 좀 계십시오' 하던 프랑스 어느 시인의 시 한 줄을 좋아했던 나였다.
가령 함께 술집 다니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나 하나님 만났어."하고 말한다면 나 역시도 '미친놈, 술 좋아하더니 결국 돌았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간증을 듣는 사람들의 온갖 착잡한 표정에 대하여 나는 그저 '저 사람 표정이야 당연하지 뭘! 그저 제발 날 미친놈 취급만 하지 말아다오.' 그런 생각으로 버틸 뿐이다.
그러나 각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체험한 믿음 깊은 분들은 간증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또 하나 신입생이 늘었군!' 반가운 마음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야말로 하늘세계의 영원한 법칙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끼리 서로 반가워 끌어안고 술집으로 가듯이 믿음을 가진 이들끼리는 서로 서로의 간증이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결국 끼리끼리 모여서 살게 하는 것이 내세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의 운명이기에 예수님께서 첫째 명령으로 '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고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닮지 않으면, 세상을 개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나서도 하나님의 밝고 창조적인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운명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시작과 종말은 이 '유유상종'이라는 우주법칙 때문인 것이다.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이유는 마음의 고통 없이 영원히 사는 팔자가 되자고 권하는 것이다. 성경공부하자고 권하는 이유는 하나님 사고방식을 나도 가지자고 권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니 권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미친놈 소리를 듣더라도 한번쯤 '인간에게는 육체와 분리되는 영혼이 있고 인간을 사랑하시며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더라'고 내가 40세가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성장과정
하나님을 알게 되어 해결된 가장 큰 내 인생문제는 죽음의 문제이다. 살아오면서 존재에 대한 수많은 의문 때문에 마음이 항상 답답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암담했던 문제는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죽음처럼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없었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나는 1945년 광복 되던 해에 귀국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전남 순천시에서 성장하였다. 1948년, 내가 여덟 살, 국민학교 1학년 때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가 적화되어 토착적인 남로당과 함께 여수 순천 등지를 점령하고 적화활동을 시작하자 진압군이 포위하고 토벌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우익이다 좌익이다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총살되었다. 삼십 대 초반이던 내 아버지도 그 사건 속에서 돌아가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시대이기 때문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공포심 밖에는 없었지만 그러나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존재란 사실이 절실한 나의 인생문제가 되어 버렸다.
왜 인간은 태어날까? 일단 태어났으면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죽어 없어질 바엔 아예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한편 좌익이다 우익이다 나누어서 서로 죽이는 이유가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어른들의 설명이다. 생각이 다르면 서로 죽여야 하는 게 인간이란 말인가? 좋은 생각이란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생각일 텐데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생각이란 결국 나쁜 생각이 아닌가? 도대체 어떤 생각이 가장 좋은 생각인가?
그 3년 후, 내가 열 한 살이던 국민학교 4학년 때, 두 남동생 아래로 하나 밖에 없던 세 살짜리 여동생이 심한 열병으로 갑자기 죽었다. 내가 항상 업고 다닐 만큼 사랑했던 여동생이 죽고 나자 죽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에 대하여 슬픔이 지나쳐 미칠듯한 분노조차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제 말을 몇 마디 배워 "오빠, 밥 먹자."하던 아이, 추운 겨울날 땅에 파묻힌 아이를 생각하면 어디서건 나는 눈물부터 쏟아졌다. 왜 사랑하는 한 가족이 영원히 함께 살지 못할까? 그 보다 더 허무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언젠가 죽고 만다면 무슨 일이건 성취한다는 게 무슨 뜻이 있다는 말인가?
여동생이 죽은 이후 나는 장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뭔가 희망을 걸고 참으로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다. 여동생과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세상에 홀로 남아 어린 아들 셋 키우시느라고 고생 많으신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했다. 방학 중엔 새벽기도도 다녔고, 평소엔 저녁식사 후 동생들 데리고 찬송가 여러 곡을 부르고서 공부를 하곤 했다. 믿음생활 덕분에 비교적 성실한 소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학생회장으로 당선되기도 하고 학교 대표 배구선수도 하고 학교 교지도 편집하고, 후회 없는 소년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들어도 인간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어떤 실감을 가지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죽으면 땅에 파묻는데 도대체 천국 간다는 게 무슨 뜻인가? 영혼이 간다는데 도대체 영혼이란 게 뭔가? 마리아라는 숫처녀가 남자교섭 없이 예수를 낳았다는데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얘기인가? 남자교섭 없이 애를 낳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남자 여자 사이에서 애 낳는 일이 그렇게 죄스런 일인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데 이런 동화 같은 얘기를 과연 믿어도 좋은가? 또 믿는다고 해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님은 '누가 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밀어 더 맞으라'고 가르치는데, 글쎄, 마주 싸우지는 않을 수 있지만 왼쪽 뺨까지 내밀어야 한다는 건 나에게는 좀 무리한 당부이다. 이런 식의 의문이 소년시절 항상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교회출석을 그만두고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또는 무신론자로 변하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하얀 손을 보다
/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3)
나에게 오신 하나님
동아일보 소설연재 중단으로 가장 괴로운 사람은 내 아내였다. 수입이 없어진 것이다. 지난 수년 동안 변변찮은 인세와 집을 줄이면서 간신히 버텨왔었다. 이젠 남편이 자기 할 일 되찾아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그만 펜을 놓아 버리니 절망적인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남편은 또다시 술만 마셔댄다.
어느 날부터 아내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하늘 같이 믿던 남편을 믿을 수 없게 되니 하나님을 믿겠다고 교회에 나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있어야 믿는 것이지 있지도 않은 하나님 믿어 보아야 시간 낭비일 뿐이지' 그러면서도 교회 다니는 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교회에서 뭔가 위로 받는 게 있다면 다행이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젠 나한테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다. 남편이 고집쟁이여서 아내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기에 다른 분을 모셔다가 남편에게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내의 초청으로 어떤 부부가 우리 집에 왔다.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부부인데 안식년 휴가를 얻어 고국에 다니러 왔다는 것이다. 남편은 내 눈에 익은 분이었다. 대학생 시절 캠퍼스에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학생시절에도 수염을 기르고 있었던 특징 있는 얼굴이다. 통성명은 처음 하는 것이지만 그 분도 내 얼굴이 낯익다고 했다. 남편은 방규환씨, 아내는 김성한씨였다. 이 부부가 뉴욕 순복음교회의 독실한 신자들인데 한국 방문한 김에 나 한 사람이라도 전도하고 말겠다고 작정한 표정으로 매주 일요일만 되면 우리 집에 와서 교회 가자는 것이다. 산책하는 셈치고 자기네와 교회 함께 가면 예배 끝난 다음에 술 사준다는 것이었다.
다시 외국으로 떠날 분들이기에 말대접이나 해드리자고 나는 그들을 따라 교회로 갔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였다. 순복음교회에 대해서 나는 별로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60년대 중반, 내 신혼시절에 나는 갈현동에 살고 있었는데 서울 시내 출입을 하게 되면 버스가 서대문을 지나게 된다.
순복음교회가 당시 서대문에 있었다. 그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울면서 기도하고, 손뼉 치며 찬송 부르고, 목사는 병자들 병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자랄 때 경건하고 엄숙한 장로교회에 다녔던 나로서는 이 순복음교회가 바로 이단이구나 그런 단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단교회'에 억지로 따라 나와 앉아있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긍정적 사고방식 강의 같은 설교는 들을만하지만 "신도들 중 무슨 병 무슨 병이 지금 고쳐졌습니다"고 선언할 때는 무슨 무당 보듯이 불신감이 되살려지는 것이었다. 다 아는 찬송가지만 나는 따라 부르지 않고 기도할 때도 나는 눈을 뜨고 앉아 있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나에게 교회란 어리석거나 교활한 자들의 사교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교회에 정말 따라가 주고 싶지 않은 주일엔 나는 그 대학선배 부부가 우리 집에 도착하기 전에 슬쩍 외출해 버리기도 했다.
1981년 1월부터 그런 식으로 교회에 끌려 다녔는데 어느덧 4월이 다 가고 있었다. 미국에 곧 돌아갈 줄로 여기고 있던 선배부부는 아직도 가지 않고 나에 대한 전도에 열중한다. 나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어지간히 많이 하고 있는 듯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은 4월 26일이었다. 4월 26일 주일날 6부 예배에 우리는 참석하고 있었다. 워낙 신도 숫자가 많기 때문에 2시간씩 부를 나누어 예배를 드리는데 6부 예배는 오후 4시에 시작되어 5시 반에 끝나는 예배였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난 다음에 결신자(決信者) 일어서라는 예배순서가 있다. 앞으로 예수 믿기로 하고 이 교회 교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것이다. 근처에 대기하던 교회 임원들이 결신자에게 카드를 주면 거기에 이름 주소 등을 적어 줌으로써 교인으로 등록되는 것이다. 그 날 결신자 순서에서 문득 목사님이 눈을 지긋이 감은 상태로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성령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영접해야만 할 사람이 이 자리에 두 사람 있는데 일어서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파멸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고집을 부리며 예수 영접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느낌이 확신처럼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나는 얼른 부인했다. 아하, 저 목사님이 저런 식으로 최면을 거는구나. 이 자리에 2만 명쯤 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데 아직은 예수 믿겠다고 결정이 안 된 분이 두 명 아니라 2십 명 아니 2백 명도 있을 수 있는데, 두 명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사로잡는 그 말을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난 몇 달 동안 결신자 시간에 목사님이 한 번도 이런 식의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뭔가 '성령의 말씀'이 있긴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슬며시 드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결신하겠다고 일어서지 않고 예배가 끝나서 교회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자꾸만 명치 있는 데가 마치 체한 것처럼 답답하며 한 가지 생각에 집중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이 교회에서는 걸핏하면 성령님 어쩌구 하는데 도무지 성령이 무엇인지 난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국민학생일 때 교회에 처음 가서 신약성경에 써있던 예수님-'원수를 사랑하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도 돌려 대라'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느꼈던 그 충격적인 감동을 잊을 수는 없다. 여순반란사건, 육이오 동란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원수가 되어 죽이고 죽는 현실을 보아온 나에게는 예수님의 그 평화를 지향하는 가르침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감동을 주는 가르침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했었다. 집안 심부름 때문에 이십 리 인적 없는 시골길을 걸어갈 때마다 찬송가를 되풀이하며 소리 높이 부르곤 했다. 찬송가를 부르고 가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예수님이 내 앞에서 인도해 주는 듯한 느낌조차 가지곤 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내 마음만은 시원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충동이 교회 문 밖을 나서면서부터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예배가 끝나면 선배 부부와 우리 부부 네 사람은 여의도 광장을 가로질러 가서 '음식백화점'이라는 빌딩 안에서 음식을 사먹곤 하는 게 예사였다. 그 날도 여의도 광장을 건너가는데 사람은 우리 밖에 없고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나는 '예수님을 정말 좋아한다'는 고백을 토로하고 싶은 충동을 더 견디지 못하고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마치 산에 가서 '야호!'하듯이 있는 힘을 다 하여 외쳤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렇게 외치고 나니까 명치를 답답하게 하고 있던 것이 쑥 빠져나가며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었다. 같이 가던 일행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울증에 빠져 지내는 사람이 이젠 이상해져 버린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장난이었던 듯 씩 웃고 말았지만 그 고백으로 마음은 편했다. 물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다'고 외쳤지만 그 뜻은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을 존경하고 따르겠다는 정도의 뜻이지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어지거나 앞으로 교회에 계속 가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날 밤, 평소의 습관대로 밤 12시 반까지 독서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내는 내 옆에 먼저 잠들어 있었다.
서울 강남구청 옆 해청아파트의 4층이었다. 형광등 불을 끄고 잠이 들었는데 아마 새벽 서너 시경에 문득 잠이 깼다. 잠이 깬 내 눈에는 캄캄한 어둠만이 보였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보안등 불빛 때문에 방안의 물건들이 희미하게라도 보이는 법인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정전이 된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내 왼쪽 허리 위 공간에 하얀 손이 팔목까지만 나를 향하여 보라는 듯 떠있는 것이었다.
백옥처럼 하얀 빛깔로 약간 크고 손가락이 쭈욱쭉 뻗은 남자 손이었다. 도둑이 들었구나, 나는 공포를 느끼고 잠이 깨지 않은 체 몸을 굳히고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깬 사실을 상대가 알면 칼이라도 푹 찔러올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손도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떠있는 것이다. 마치 나에게 자세히 보라는 듯. 현관문 등 모두 잘 잠궜는데 이 도둑은 어디로 들어왔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 손을 자세히 살폈다. 혹시 아내가 내가 차버린 이불 덮어 주려고 내밀고 있는 손이 아닐까? 그러나 그 손은 힘차게 보이는 남자 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손 생김새가 너무 잘 생겼다. 어디 한 군데 흠 잡을 데 없이, 의지하고 싶을 만큼 강하고 든든하게 생긴 것이다. '야, 그 손 완전하게 생겼구나. 남자 손이라면 저렇게 생겨야지. 미켈란제로 조각품 같은 손이로구나' 그렇게 찬탄하는 느낌으로 감동하고 있으니까 그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손이 꿈틀 움직이더니 내 배를 향하여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 다가오는 속도에서 느껴지는 것은 지극한 온유함과 겸손이었다. 마치 잠자리 잡으러 가는 손길처럼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내 속셔츠를 들추고 들어와 내 명치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쓸어주는 것이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 배 쓸어주듯 그렇게 사랑이 가득한 느낌이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도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순한 도둑 같으니 한번 잡아 봐야겠다고 용기를 내어, "누구야?" 낮게 외치며 내 오른 손으로 명치 위의 그 손을 덮쳤다. 그리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사람 손이 내 손에 잡혀야 할 텐데 손에 잡히는 아무런 물질이 없다. 그리고 상반신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 눈이 또 떠지는 것이었다. 눈을 뜨고 캄캄한 어둠과 하얀 손을 보고 있었는데 또 한 번 눈이 떠지는 것이다. 그 두 번째 떠지는 눈이 바로 내 평소의 육안(肉眼)이었다. 불빛이 희미하게 비쳐 들어 있고 물건들이 보이고 옆에 자고 있는 아내가 보인다. 그리고 앞 엣 눈으로 본 어둠과 손은 종잇장 뒤집히듯 숨어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내가 꿈을 꾼 것도 아니고, 왜 눈이 두 번씩 떠지는가?
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어리둥절해 앉아 있는데 내 오른 손을 뻗치면 닿을만한 방안 허공에서 약간 울림이 있는 아주 굵은 남성 음성으로, 뚜렷한 한국어로 "하나님이다."는 말씀이 들려왔다. 참으로 놀라운 일 이었다! 그렇다면 그 손이 하나님의 손이었단 말인가? 그러니까 앞에 떴던 눈이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보기 위한 내 영안(靈眼)이었단 말이구나. 물질인 육체의 눈으로는 물질세계를 보게 되어 있고 하나님은 영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로구나.
영안은 내 맘대로 뜨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뜨게 해주셔야만 뜰 수 있는 것이구나. 인간은 육체와 영혼 두 개가 겹쳐 존재하는구나. 하나님은 내 바로 안쪽에 존재하시는구나. 육체로는 지구 위의 삶을 살고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것이 인간의 삶이구나. 그 둘이 조화되지 못할 때 병이 들고 죽게 되는구나. 영원하신 우주의 하나님이 어찌 나 같은 놈을 아시고 이 아파트 골방까지 나를 찾아주셨나! 너무나 놀랍고 놀랍다. 여의도 광장에서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한다'고 외쳤기 때문인가? 작년 광주사태 때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고 부르짖었기 때문인가? 아내와 선배부부가 하도 기도해대기 때문인가? 어린 시절 교회 다닐 때부터 항상 보살펴 주시고 계셨던 것일까? 아, 하나님이 한국말을 쓰시다니!
그제야 고교생 때 성경을 완독하고 나서 이스라엘 말을 쓰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으로 성경책은 이스라엘인들의 독선적인 역사책에 불과하다고 단정하고 내가 무신론자가 돼버린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나님의 인격성, 인간의 언어로 개인에게 말을 거시는 하나님,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을 의심했던 나의 과오를 정통으로 뒤집어 놓으시는 것이었다. 성경이 진실이었구나.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인간이 어떻게 시작되어 이제까지 살아왔는지 항상 간절히 알고 싶었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믿을 수 없는 미개족의 전설처럼 여기고 지내왔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수천 년 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 다윗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거시다니! 살 희망을 잃어 버리고 가정문제, 직업문제, 국가문제 등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나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 모습을 보여 주셨구나! 인간의 잘잘못을 모두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정말 계셨구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주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라면 우리가 사랑하는데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몸을 태울 만큼 사랑하고 사는 것을 왜 주저할 것인가? 사랑으로 심판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젠 정말 두려울 게 없다. 혼란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다. 내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감사를 어떻게 표현하란 말인가. 창밖에 날이 환히 새고 있었다.
술, 담배중독에서 해방되다
/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4)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손에 관하여 몇 가지 쓴다. 내 명치를 다정하게 쓸어주시던 하나님의 손은 왼손이었다. 왼손인지 오른손인지에 대해서는 한동안 무심코 지내왔는데 구약성서의 시편(詩篇)에 나오는 '하나님의 오른손'이라는 표현에 비해보니 나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손은 왼손이라는 사실이 자꾸만 의식되기 시작했다. 다윗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오른손은 '권세(權勢)를 주시는 손'이라는 뜻임을 알겠는데 나에게 보여주신 왼손은 무슨 뜻인가? 이 궁금증이 풀린 것은 몇 년 후였다.
천국에 다녀왔다는 미국의 펄시 콜레 목사가 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오른손과 왼손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성서적(聖書的) 지식이 아니기에 여기 함부로 쓰는 것이 옳지 않은 게 아닌가 염려하면서도 그 뜻이 그럴 듯하다는 느낌 때문에 여기 적어본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권세를 뜻하고 왼손은 자비(慈悲)를 뜻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당신의 왼손을 보여주시고 내 배를 쓸어주신 하나님은 바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당신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자기 입으로 예수를 주(主)로 시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이른다고 하였는데, 여의도 광장에서 내가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합니다!"고 외친 사실이 하나님의 용서를 이끄는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 죄 없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 이유는 죄인들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는데 내 경우가 바로 뚜렷한 그 증거가 된다는 인식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를 나의 주로 모심으로써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나의 죄가 용서함 받고 나에게 하나님과의 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사귈 수 있음이 모든 인생고(人生苦)에서 해방되는 지극한 구원이 아닌가! 예수의 십자가 고통이 나를 구원하신 것이다! 죄사함! 참으로 성경에 쓰인 문자가 나에게 현실적인 사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관해서 쓰고 싶은 얘기가 또 있다. 그날 밤, 마치 배탈난 손자의 배를 쓸어주고 있는 할아버지처럼 내 명치를 천천히 쓸어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나는 도둑인 줄 알고 내 오른손으로 덮치며 "누구야?" 낮게 외치며 상반신을 일으켰을 때 내 오른쪽 머리 위 방안 허공에서 들려오던 아주 굵은 남성 음성은 "하나님이다"는 한국어였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몇 차례 들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결코 얼버무리거나 애매모호한 발음이 결코 아니다. 간결명료하고 뚜렷한 발음이다.
하나님의 손에 관해서 또 한 가지 들려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다. 몇 개월 후, 지금은 온누리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하용조 목사가 1980년 당시 서울 신촌에서 두란노 서원이라는 선교단체를 조그맣게 갖추고 신도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하 목사님 요청으로 나는 거기에서 하나님 은혜 받은 간증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하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들려 주셨다. 영락교회에 나가시는 나이 드신 권사님 한 분이 하나님의 손으로 은혜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 권사님은 환자들을 위해서 병을 고쳐 주십사고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인데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손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환자에게는 쭉 편 손을 보여 주시기도 하고 어떤 환자는 주먹 쥔 손을 보여 주시는데, 편 손은 병이 낫는다는 표시이고 주먹 쥔 손은 살지 못한다는 표시라는 것이다. 내 명치를 쓰다듬어 주신 하나님의 손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니 다른 얘기가 나왔다. 다시 그 날로 돌아가서, 나에게 일어난 기적 때문에 너무나 놀랍고 감격하여 눈물을 쏟고 그토록 알고 싶던 우주와 인생의 비밀을 알게 된 흥분 때문에 날이 밝을 때까지 앉아 있다가 나는 아침이 다 되어 잠이 들었다.
아침 9시경 늦잠에서 일어난 나는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받으면서 알코올 중독의 습관대로 반주를 위해 소주 한 잔을 입에 댔다. 술 방울이 혀에 닿는 순간 무슨 청산가리가 이렇게 쓰겠나 할 만큼 술 맛이 너무 쓰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도 그 달던 술이 독약처럼 쓰게 느껴지고 그 순간 술에 대해서 온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손길의 의미였다. 나를 치료해 주신 것이었구나! 술을 끊게 해주신 것이었구나.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보약 마시듯 소주를 마셔댔는데 바로 그 술을 하나님이 끊어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배를 쓰다듬어 주신 것을 나는 살아볼 용기를 주고 격려하기 위해서 그러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술을 한 순간에 깨끗이 끊어주신 것이었다. 정말이지 술에 대해서 조금도 미련이 남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망각이 가능할까? 집에 있던 술을 다 버렸다. 하나님이 끊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먼저 세상을 떠난 술친구들처럼 이내 눈을 감았을 것이다. 내 건강은 급속도로 좋아졌다. 나중에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해주시는 대표적인 몇 가지 일 중에 '병을 치료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배우며 감격을 누를 수 없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님께서 내 담배 끊어주신 얘기도 해버리겠다. 그 무렵 나는 매일 담배를 세 갑 가까이 피우고 있었다. 대학생 때 피우기 시작한 담배가 해가 갈수록 소비량이 많아져서 하루에 두 갑 가지고는 부족하고 세 갑에서 몇 개피 남을 정도로 많이 피워댔다. 하루 종일 담배만 피워대고 있는 꼴이다. 소설가이니까 명상하는 데는 담배가 도움이 되겠지 하고 말하는 분도 있는데 담배야말로 피로감(疲勞感)의 원천이다. 처음 한두 대는 도움이 되는지 모르지만 계속 피워대면 머릿속은 금방 피로감으로 젖어 버린다. 소설 쓰기 위해서 담배 피우는 것이 아니라 담배 피우기 위해서 소설 쓰는 체 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술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니코틴 중독은 끊을 수가 없었다. 조용한 기도원(祈禱院)에 가서도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까 목사님이 '목사가 보지 않는 데 가서 피워 달라'고 사정할 정도이니 명색이 하나님까지 직접 만난 신자가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는 꼴은 스스로도 가증스러웠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알았으니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제 의지력으로는 담배를 못 끊겠으니 하나님께서 끊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며 담배를 피워댔다. 하나님의 손을 뵈온 지 일년쯤 되던 어느 날, 영화각본을 쓴다고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어떤 기운이 온몸을 휩싸면서 입에서 방언(方言)이 터져 나오고 온몸이 참을 수 없이 떨리기도 하였다. 십 여분 이상의 그런 상태가 끝나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책상 위에 놓인 담배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견딜 만 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십 분, 이십 분, 한 시간, 두 시간..... 드디어 담배가 끊어졌다. 담배 대신 입에서 나오는 것은 끊임없는 방언이었다. 내 의지로 담배를 끊은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담배가 끊어진 것이다. 특별한 은사 때문인지 그 후로 가령 직장 같은 데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곧 담배를 끊곤 하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그런 예가 많아서 나 역시 신기하게 느끼고 있다.
큰 기쁨을 체험하다
/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5)
회개기도의 중요성
1981년 4월 말, 하나님의 손을 뵌지 며칠 후, 나는 경기도 파주군에 있는 오산리 금식기도원으로 혼자 갔다. 지금은 현대적이고 거대한 시설로 발전했지만 당시엔 성전도 대형 천막에 지나지 않은, 개척중인 야산 기도원이었다. 기도원 원장은 지금은 소천하신 그 유명한 최자실 목사님이었고 부원장이 지금은 테헤란로에서 강남순복음교회를 담임하는 김성광 목사였다. 최자실 목사님의 아들로서 미국 뉴욕 순복음교회 목사로 있다가 이 기도원 부원장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를 전도한 대학선배 부부와 함께 우리 집에도 오셔서 "기도원에 한번 놀러 오세요. 박수치고 찬송 부르면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좋습니다." 농담처럼 권하기도 했었는데 그 기도원에 꼭 가고 싶었던 것이다. 기도원이라면 병자들 모여있는 불결한 곳이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기도원 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나니까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이 기도원이었다. 김성광 목사는 반갑게 마지 하며 자신이 쓰던 방을 나에게 쓰라고 내주었다.
기도원에는 여기 저기 기도굴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다. 한두 사람이 들어가서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해도 남에게 시끄럽지 않을 공간을 땅 속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도 그 기도굴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눈을 감았다.
1960년 서울에 와서 대학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무신론자가 되어 기도하기를 그만두었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기도를 해보는 것이다.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 안쪽에 아주 가까이서 다 듣고 계신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을 뿐. 나는 더듬거리며 회개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10계명에 비춰보면서 죄라고 생각되는 모든 기억들을 하나 하나 입 밖에 내어 말하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고 고백했다. 생각나면 한 마디하고 또 생각나면 한 마디 하는 식으로 두 시간 정도 기도를 하고 있는데 문득 어떤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말할 수 없이 황홀한 기쁨이 온몸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마치 기쁨이라는 기체가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그 기쁨은 그 어떠한 생리적 기쁨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황홀한 기쁨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간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기쁨, 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느낌, 이 황홀감, 이것이 바로 성령(聖靈)이구나. 세상과 인간은 생명으로 가득 차게 느껴지고 참으로 힘차게 살아가고 싶은 의욕감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다.
그 이후 뜻밖의 현상이 생겼다. 가령 방문객을 만나면 그 사람 마음이 다 읽혀지는 것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나를 찾아왔고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그냥 미리 알게 되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점쟁이가 된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 속을 알 수 있는 이 능력,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최초의 인간이 죄짓고 에덴에서 쫓겨나기 이전의 상태 즉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던 무죄(無罪)상태의 영혼이구나. 이것이 바로 예수 믿으면 우리가 받게 되는 '죄사함 받은 영혼' 상태로구나.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죄사함. 마치 때가 낀 거울을 닦듯이 죄로 덮인 우리 영혼을 닦아 영혼세계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죄사함'. 모든 인간을 에덴의 행복으로 회복 시키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무엇인지 나는 알만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다"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인지 알 수 있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며 사죄하는 일이 바로 성령 받는 비결이었다. 그 해 12월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마악 아침기도를 시작하려는데 내 의식(영혼, 마음, 정신)이 머리통 전체를 통해서 몸 밖으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치약 튜브에서 치약 나가듯이. 몸 밖을 벗어나자 새카만 어둠인데 그 어둠 속을 무슨 로켓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몸을 벗어버린 영혼은 오히려 더 초롱초롱하게 맑고 또렷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몸을 빠져 나오다니? 목적지도 모른 채 어둠 속을 날아가고 있으려니 그토록 외로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이구, 이게 하늘세계로 가는 길이구나!' 그런 깨달음이 드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죽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면 되지만 이곳에서는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이 어둠 속을 날아다니고 있어야만 하는가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아니 세상에서 지은 죄 때문에 지옥불길 속으로 가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면서 무서운 공포심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런 공포심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려니까 다음 순간 내 의식은 다시 내 몸 속으로 돌아왔다.
거의 단절이라 할 만큼 빠른 속도로 돌아온 것이다. 이 체험으로 나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지는 현상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여동생의 죽음에서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던 죽음에 대한 실제적 해답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명령
1982년 10월, 나는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하게 되었다. 문화공보부에서 문학인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문학인들 아홉 명에 인솔자로 문공부 직원 한 사람, 도합 10명씩 그룹을 지어 약 2주일 동안 세 나라를 여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현지 문학인들과 교류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관광여행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가난한 문인들에게는 마치 기적처럼 파격적인 행사였다. 그때까지도 우리 국민들의 외국여행이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던 시대였다. 돈이 많은 사람들도 부부가 함께 외국여행을 할 수 없는 제도였다.
해외도피를 할 수 없도록 부부 중 한 사람은 국내에 남아야 한다. 외화(外貨)를 아끼기 위해서도 외국여행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외국의 장학금을 받게 된 유학생이나 공직자의 출장, 무역업자의 비지니스 그리고 운동선수의 국제경기참가 정도가 아니면 여권을 낼 수도 없던 시대였다. 아니 달러를 아무나 자유롭게 쓰고 여권이 쉽게 나오는 제도라고 할지라도 가난한 문학인들에게는 외국여행이란 꿈처럼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런데 정부에서 비용을 대어 문인들에게 외국여행을 시켜준다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민주화 투쟁하는 문학인들 달래느라고 이 행사를 꾸민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문공부 차관이던 실세 허문도씨가 '현대'의 정주영회장에게 비용을 부담시키고 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그 바람에 데모 등을 주도하는 문인들 중에는 이 여행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내가 속한 일행은 소설가 박연희, 이호철, 박완서, 시인 홍윤숙, 평론가 김치수씨 등등, 역시 열 명이 프랑스와 그리스 그리고 인도를 여행했다.
인도인들을 전도하기로 하다
/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7)
한동안은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 때문에 힌두교는 벽지(僻地)의 민간 사이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해 힌두교 세력을 뒷받침 해 주어 오늘날처럼 부흥시켰다고 한다.
없애야 할 우상종교를 기독교 영국이 부흥시킨 것이다. 식민지를 '분열시켜서 지배하는'방식으로 힌두교를 부활시킨 것이 영국이라고 하니 기독교에 의해서 강대국이 된 영국이 한 짓이 결국 하나님을 조롱하는 짓이었다. 기독교는 개인이 건 국가 건 강대하게 만든다. 그 힘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은 기독교 전도이다. 쓰러지려던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렇게 일어섰으니 당신도 예수 믿고 일어서시오,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복음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이 인도에 한 짓은 경제적 착취뿐이오 우상종교의 부활이었다.
유럽인 속에 숨어있던 로마적 요소가 마귀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것이다. 마귀에게 굴종하는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세계 최강의 영국을 거꾸러지게 하시고 제2국가로 쇠퇴할 수밖에 없게 만드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이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인도의 근대화를 도왔더라면 지구의 역사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라고 나는 여행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간지스강에는 빨간 천으로 싼 어린이의 시체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른들의 시체는 강변에서 장작불에 태우지만 아이들 시체는 그렇게 떠내려 보낸다는 것이다.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유아 사망률이 아주 높다고 했다. 인도인들도 인간인데 배 아프게 낳은 자식들이 그렇게 많이 죽으면 그 부모들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려 있겠는가! 어쩌면 인도인들의 영혼은 쓰라린 고통으로 짓이겨져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나는 인도인들에게 성경의 이 말 하나만이라도 가르쳐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1장에 나오는 이 지옥을 벗어날 것이다.
인도인들을 위해서 사업을 한다면 어떤 사업이 좋겠는가? 인도에서 가장 값싸고 가장 풍부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햇볕이다. 태양광으로 전기를 만들어 보급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인도여행을 했지만 내가 인도에 복음을 전하러 와야 하겠다고는 전연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인도여행을 마치고 한 달쯤 지난11월 하순경 어느 날, 시내외출에서 돌아와 피곤하여 거실마루에 벌렁 누워있는데 갑자기 약간 비몽사몽 같은 상태가 되며 머리 위에서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
나는 얼결에 "전 영어도 잘 할 줄 모르고 찬송가 악보도 볼 줄 모르는데 어떻게 갑니까?"그렇게 대답하니까 음성은 꾸중하듯이 "왜 못해! 왜 못해!"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작년4월에 "하느님이다"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아, 이번 인도여행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여행이었구나! 전두환 정권이 문인들 달래느라고 보내준 여행인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구나! 나에게 그리스도의 유럽과 힌두교의 인도를 보여주고 인도를 복음화하는 일꾼으로 나를 보내시기 위해서 이번 여행을 나에게 시키셨구나. 하나님의 손을 보여주시고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게 하시는 등 여러 가지 특이한 체험을 시키신 이유가 인도전도의 사명을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나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셨구나.
내가 목숨 바쳐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알고 나니까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었다. 목표가 있는 자는 준비를 하게 되고 따라서 부지런해진다. 내 인생에 확실한 스케줄이 생긴 것이 아주 기뻤다. 인도를 전도하는 일을 위해서는 흔쾌히 목숨을 바쳐도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남자들의 인생이란 자기목숨과 바꿔도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찾을 때까지 방황하고 모색하는 과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 찾으면 남자는 행복해진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나를 고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행복하게 해주시기 위하여 내려지는 것이라는 점도 깨우쳐졌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가장 원하시는 것을 주시는 분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내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 있는 일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지만 내 귀중한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살아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내 목숨이상으로 가치 있는 일,그것이 내가 알게 된 영원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것이다.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워커힐에서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았지만 그러나 나는 선뜻 떠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곧 바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오히려 인도를 구경했기 때문에 선뜻 "가보자."하는 생각이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우선 성경공부를 해야 하고 영어도 공부해야 한다. 인도의 고쳐야 할 점들에 대한 공부도 충분히 해야 한다. 경제적 뒷받침도 보장되어야 한다. 국민학교 다니는 아들 둘도 좀 키워 놓아야 한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결혼 이후 특히 경제적 고통이 많았기 때문에 아내는 이제 남편이 예수 믿고 착실하게 실용적인 인간으로 변화되어 가령 교회 장로쯤 될 수 있는 경제력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아내가 어떤 사람에게 이젠 남편이 소설 같은 것 쓰지 않고 다른 직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엿들으며 나는 "선교사는 더 고생 할 텐데" 혼자서 웃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믿지 않은 사람은 아내인 것 같았다. 결혼 이후 살아오면서 쌓이게 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한(恨)과 당장의 생계적 고충들이 아내의 마음에 풀어지지 않은 채 남아서 나를 불신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기쁘게 협력하지 않으면 인도 전도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아내는 내가 배부른 장로님이나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나는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씩 금식기도도 했다.
'원수가 집안식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교의 출가(出家)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적(公的)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적(私的)인 정서(情緖)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큰 '원수'는 성모 마리아님 이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인간에게 한 마지막 부탁이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님을 부탁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나는 앞으로 언젠가 인도에 가긴 가겠는데 우선 급한 것은 가족들 생계와 성경공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두려워지는 것은 인도사람들이 과연 내 말을 믿고 예수를 믿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차라리 가령 인도사람들이 나에게 "당신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모습을 보면 예수 믿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런 일은 할 자신이 있다.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하니 저들을 용서해주십사"고 기도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입으로 아무리 성경지식을 떠든다고 해서 그 완고한 힌두교인들이 돌아서겠는가, 그런 의문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녀들이 있겠지, 그 사람들만 돌아서면 되는 것이다, 성경에도 인간들 중 반은 구원받고 반은 자기네 고집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고 암시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내가 인도 전도를 구상하며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지만 그러나 더욱 크게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야말로 막막함이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없애주는 너무나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 옆에 나타나 보여주신 것이다.
40일 금식기도
/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8)
2007.01.11 11:53
1983년 10월, 나는 워커힐 쉐라톤 호텔에서 장기간 투숙하고 있었다. 나에게 영화각본을 쓰라고 영화사에서 그 호텔에 투숙시킨 것이다. 집중해서 빨리 끝내달라고 으레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에게 호텔투숙을 원하는 것이다. 영화감독 배창호씨가 감독할 영화였다. 호텔 방안에는 트윈 베드가 놓여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설 수 있는 공간을 두고 일인용(一人用)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다. 유리창쪽 침대는 내가, 입구쪽 침대는 배감독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어느 날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이 생겼다.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 방문 중에 북한 측 테러를 당한 사건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예정보다 몇 분 늦게 목적지에 도착한 덕분에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시한폭탄의 폭발로 대기하고 있던 한국측 정부요인들이 많이 사망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과 관계하여 간증하고 싶은 얘기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그 사건이 생긴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오전 10시경, 아침식사를 함께 했던 배감독은 시내외출하고 나는 내 침대에 발을 뻗고 베개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성경을 읽고 있었다. 참 재미나게 성경을 읽고 있는데 문득 내 바로 옆, 침대와 침대 사이의 공간에 하얀 옷자락이 보이는 것이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내 옆에 바싹 서 있는 것이다.
고개를 쳐들어 올려다보니 대리석으로 빚은 듯 하얀 머리털, 하얀 얼굴, 하얀 수염을 기르신 분이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서계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이구나!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참으로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그 눈빛은 참으로 여러 가지 표정을 담고 있었다. 책망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격려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할아버지가 말썽꾸러기 사랑스러운 손자를 내려다보시듯이 그런 지긋한 눈빛으로 조용히 내려다보고 서계시는 것이었다. 오전 햇볕이 환히 들어오고 있는 호텔 방안에서 영안(靈眼)이 아니라 내 육안(肉眼)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위엄 때문에 마치 무거운 바위가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 듯한 조심스러운 느낌이 나에게 밀려들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저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했던 마음이 실감되었다. 그 사랑과 위엄, 그 결백함 앞에서는 나는 숨어야 할 죄인일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기 황송해서 상반신을 세우고 반듯이 바로 앉아 마치 꾸중 맞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무슨 말씀이 계시겠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씀도 없이 조용했다.
잠시 후에 슬그머니 돌아보니 사라지고 안 계셨다. 왜 나에게 당신 모습을 보여주셨을까? 아마도 인도전도의 사명에 확신과 자신감을 나에게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함께 한다, 용기를 내라,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 날 이후 인도전도에 대한 불안감은 없어졌다. 거꾸로 한국에 남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순종의 죄책감이 더 깊어질 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 옆에 서 계시니 빛깔만 하얀색일 뿐 보통 사람과 똑같은 모습이오 옷이었다. 1미터 80센티 정도의 키에 보통 사람과 같은 얼굴이었다. 만지면 말랑말랑하게 느껴질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늘세계에서 물질세계로 당신 몸을 자유롭게 나타내시는 분. 부르면 응답하시는 분. 나는 국민학생 시절부터 기독교에서 가장 의심스럽고 궁금했던 것이 처녀 마리아의 임신과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1981년도 4월에 하나님의 손이 내 명치를 쓰다듬어주신 이후 하나님이라면 처녀가 임신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하여는 부활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금해했다. 내가 본 하나님의 손은 첫째, 영안으로 본 것이오, 둘째, 그야말로 손만 본 것이다. 이 경험으로써 부활이란 영안으로 볼 수 있는 하얀 영적인 몸이라고 나는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까지 찾아오시고 음식도 드셨다고 쓰여 있는 것이다.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어떤 상태의 몸일까?
그런데 이제 보니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분이 서계시니까 그 몸에 가리워져 그 뒤에 있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 아주 인간과 같은 체질의 몸이었다. 다만 그 하얀 빛깔로 보아 지상의 물질이 아닌 영적인 물질이라는 것으로 짐작될 뿐. 요컨대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 주시기도 하고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이다. 마치 자녀를 항상 염려하시는 집에 계신 아버지처럼 항상 당신을 주님으로 모신 인간들을 보살피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또 한 번 야무지게 체험한 것은 그 다음 해, 1984년 6월이었다. 40일 금식명령 1984년 6월, 나는 '건강시대'라는 월간잡지 주간(主幹)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여성문제로 인하여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눈 한번 딱 감으면 바람을 필 수 있는 그런 유혹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방안에 누워 있는데 아주 가느다랗지만 아주 또렷한 발음으로, 마치 먼 곳에서 내려 보내는 말씀이 또렷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광야에 나가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철저히 회개하라. 여호와의 명령이다."
아아, 내 마음을 항상 보고 계셨구나!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 밀려왔다. 음성이 들리지 않고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듣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처럼 보고 믿은 자는 하나님이 안보이면 의심이 들며 다시 죄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믿음이 더욱 올바르게 굳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한달치 잡지 편집을 미리 해놓고 휴직을 하고 금식을 시작했다. 서울 서초동 신동아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플라스틱 물통에 생수를 받고 비닐 돗자리를 들고 성경 찬송가 들고 버스로 몇 정거장만 가면 나오는 우면산 솔 숲 속으로 간다. 지금 예술의 전당이 지어진 그 솔숲이다. 나무가 우거지고 행인도 드물어서 하루 종일 성경 보고 명상하고 기도하기에 좋은 산 속이었다. 일주일 정도 금식은 기도하기 위해서 몇 차례 해본 적이 있어서 금식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40일 금식도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 죽이실 거라면 그런 명령 내리지도 않으셨을 테니까. 물만 마시며 15일이 지나자 걷기가 힘들 만큼 무릎이 약해지고 머리뼈와 뇌가 따로 노는 듯해졌다.
금식 20일이 되자 새로운 걱정이 밀려들었다. 월간 잡지란 주간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식품회사를 하고 있는 내 고등학교 후배가 내 능력을 믿고 돈을 대며 발행하고 있는 잡지였다. 창간한지 얼마 안 되어 한 호 한 호를 정성스럽게 만들지 않으면 경쟁이 심한 잡지 시장에서 낙오하기 좋은 것이다. 다음 호 준비 때문에 도저히 회사 일을 몰라라 하고 지낼 수가 없었다. 나는 금식을 중단하고 미음을 먹기 시작하며 잡지사 일로 돌아갔다. 잡지 일은 잘 되어 나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심한 죄책감에 빠졌다.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단 하루도 금식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불순종이다. 10월이 되자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회사에 사표를 내고 다시 금식으로 들어갔다. 20일 금식을 마치고 솔 숲 속에서 나는 큰 목소리로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세 번 외치고 기도했다. 지난번 20일과 이번 20일, 합해서 40일 금식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였다. 산에서 나오는데 갑자기 황홀한 기쁨이 나를 감쌌다. 1981년도 4월, 하나님 손 만난 직후, 파주 오산리 기도원에서 회개기도 할 때 성령 받으며 황홀해지던 그 황홀감이었다. 미음을 먹기 시작하며 일주일쯤 되던 어느 날 새벽, 깊이 잠들어있었는데 손이 내 오른 팔 어깨쪽을 꼬옥 붙잡고 흔들며 나를 깨우는 것이었다. 눈을 뜨고 보았지만 아무 형태는 보이지 않는데 손은 나를 붙잡고 일으켜 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아버지의 사랑 같은 느낌이 나에게 밀려들며 음성이 아닌 말씀이 한 마디 한 마디 또박 또박 또박 내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내가 입으로 받아서 발음할 수 있는 그런 오묘한 말씀이었다. 이런 음성을 성경에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라고 표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시험이 다가 오니 깨어 일어나 기도하라"
'시험 당할 즈음 시험을 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주님은 당신에게 의지하는 자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철저히 보살피시는구나. 나에게는 진실로 나를 보호해 주시며 영생으로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이다.
간증을 여기서 일단 맺는다. 날마다 삶이 간증거리인데 한이 없이 쓸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이마다 간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간증이 더욱 믿음을 돋궈 주기를 바랄 뿐이다. <끝>
/내가 만난 하나님
김승옥 소설가·세종대 교수
[출처] 죽음에 대한 공포 /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1)|작성자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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