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믿음의 글

[스크랩]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 신앙간증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4. 12. 23:47
국민일보 | 기사입력 2005-10-16 16:07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의 문학은 단명했다. 언제든지 작품을 쓰면 그만이지,문학적 단명이 웬말이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김승옥을 현역 작가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80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먼지의 방’ 일부가 신군부의 검열로 삭제되자 그는 펜을 던졌다. 이후 사반세기동안 그는 무진의 안개속에 잠긴 듯 여전히 말이 없다. 기나긴 절필의 세월과 작가의 온전한 침묵에도 불구,후배 소설가들과 문학 청년들은 그가 남긴 주옥같은 단편소설로 갈증을 달랬다. 소설가 신경숙이 작가 수업을 할 때,‘무진기행’을 노트에 한자 한자 옮겼을만큼 그의 단편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편의 시였다. 김승옥이 20대에 글에서 멀어져 빈둥거리고 있을 때,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던 이어령이 그를 호텔에 감금하고 거의 반강제로 글을 쓰게 하여 단편을 하나 썼는데 그게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서울의 달빛 0장’이다.

그런 김승옥이 어느날,비몽사몽간에 하나님과 조우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세간에 퍼졌을 때 저으기 당황한 것은 문단 내부였다. 4·19혁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환치시키면서 전후 세대문학의 무기력증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문학사적 평가를 받은 김승옥이 더 이상 문학 텍스트를 생산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배신감 때문이었다.

1981년 4월27일 새벽,그는 잠자리에서 하나님의 손을 느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서울 강남구청 옆 해청 아파트 4층 자택이었다. “내 왼쪽 허리 위 공간에 하얀 손이 팔목까지만 나를 향하여 보라는 듯 떠 있는 것이었다. 백옥처럼 하얀 빛깔로 약간 크고 손가락이 쭈욱 쭉 뻗은 남자 손이었다.…어리둥절해 앉아 있는데 내 오른손을 뻗치면 닿을 만한 방안 허공에서 약간 울림이 있는 아주 굵은 음성으로,뚜렷한 한국어로 ‘하느님이다’는 말씀이 들려왔다.”(산문집 ‘내가 만난 하느님’에서)

해소수를 보낸 어느날,영화각본을 쓴다고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는 어떤 기운에 온 몸이 휩싸인 채 입에서 방언(方言)을 터뜨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후 김승옥의 세계관은 완전히 바뀌어 주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40일 금식기도,인도 선교사로의 소명….

하지만 시련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세종대 국문과 교수로 강단에 선 지 3년만인 2003년 2월,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주위 사람들은 더욱 속을 쓸어내렸다. 치료 끝에 퇴원은 했지만 더듬거리는 언어 장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월 100만원이 넘는 통원 치료비를 대느라 살림이 쪼들리는 바람에 에니메이션을 전공하러 유학을 떠났던 아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설가의 말년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혼자 거동할 만한 깜냥은 되어 그는 요즘 외출이 잦다.

외출은 늘 아슬아슬하다. 어눌한 말투 때문에 휴대폰은 아예 갖고 다니지 않지만 길거리에서 사람을 붙들고 메모지를 보여주거나 손짓을 해가며 행선지의 위치를 묻는 일이 허다하다. 주로 가는 곳은 출판사나 동창회 모임,그리고 옛 지인들과의 모임이다. 한 출판사의 S씨는 “어떤 학생으로부터 ‘김승옥’이라는 분이 메모를 보여주며 길을 묻는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면서 “생활이 어려운 듯 선뜻 택시도 타지 못하고 전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오다 길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어떤 지원책이 없을까요”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S씨의 음성에서 김승옥이 헤갈을 하던 낯선 길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슴거린다.

무신론 시절에 쓴 그의 빛나는 소설은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을 직접 들은 그가 더 쓸 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왜 그에게서 말까지 빼앗아갔는지,하늘의 뜻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승옥은 앞으로 남은 삶에서 무엇을 더 증거하게 될 것인가. 하늘은 언어를 드러낼 때 무엇이라도 떨어뜨리는 것인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천재의 언어가 유난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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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 1 - 죽음에 대한 공포

[시련극복 나눔터]에 김진우형제님이 올리신 글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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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하나님

김 승 옥
소설가·세종대 교수

간증을 하는 이유
 무신론자였던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혜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며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 글을 쓴다. 
 너무나 뜻밖으로 크나 큰 하나님의 은혜을 받은 초기의 몇 가지 이야기를 이 글에 쓰고자 한다.
 1981년 4월 26일 새벽, 하나님께서 내 영안(靈眼)을 여시고 그 분의 하얀 손으로 내 명치를 어루만져 주시며, "누구냐?"고 묻는 내 질문에 분명히 한국말로 "하나님이다."고 대답하시는 체험을 했다. 
 그 해 12월 어느 날 이른 아침, 아침기도 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 영혼이 내 육체를 떠나 새카만 상태 즉 하늘(영혼세계) 속을 매우 빠르게 날아가는 경험을 하였다.
 1982년 11월 하순 어느 날 오후, 하나님의 음성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1983년 10월 어느 날 오전, 워커힐 쉐라톤 호텔 일실에서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의 전신이 내 옆에 발현하셨다.
 이런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된 이후 깨닫고 변화된 내 사고방식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이 내 간증이 되겠다. 

 내 체험이 다소 특이하기 때문에 듣는 분들 중에서 특히 믿음 없는 분들은 '소설가니까 아마 소설을 쓰고 있나 봐!' 그런 말을 할 정도여서 간증하기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으면서 간증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다메섹 가던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 만난 체험을 얘기하니까 베스도 총독이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하던 그런 성경말씀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하나님 만난 체험을 나 혼자 간직하고 말았을 것이다. '바울이 미친놈 취급을 받으면서 간증하고 다녔다면 나도 미친놈 소리 좀 듣지 뭘.' 용기를 짜내어 여기 저기에서 간증을 하곤 했다. 그러나 심지어 어느 기독교 방송국에서 간증하고 나오니까 담당목사가 슬그머니 "하나님은 인간이 볼 수 없다고 되어 있는데..." 몹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일 때는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했다. 요한일서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하는 말씀 때문인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존재라고 설교하는 목사님들을 이따금 보곤 한다. 하나님을 오직 마음으로만 믿는다는 뜻으로'믿음'의 뜻을 한정시키는 것 같다.  나는 방송국 사회자에게 슬그머니 "목사님께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시라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말하고나자마자 금방 후회가 되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하는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수훈 중 한 말씀인데 마치 내가 마음이 청결한 자여서 하나님께서 당신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자랑하는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도 있다는 성경말씀이 있지 않은가!' 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환기 시켜드리겠다는 뜻인데, 이거 참 주제넘게 건방진 소리를 하고 말았다고 몹시 후회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큰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신 것인데 말이다. 바울도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죽이려 가던 크나 큰 죄인이기에 그 미친놈 같은 열성적인 마음을 옳은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신 것이라고 봐야 하듯이 나 역시 스스로는 구원 받기 어려운 크나 큰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 것일 텐데 말이다. 
 
 하기야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하나님 만났다는 얘기가 이상할 수밖에 없다. 내가 무신론자이던 시절에 하나님 도움으로 병이 나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종교 팔아서 돈버는 사기꾼의 앞잡이'라고 상대를 내심 경멸하며 '종교란 윤리적인 생활을 하자는 사회적 운동이죠.' 점잖게 떠밀어 버리던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인간의 일은 인간끼리 할 테니 하나님은 가만히 좀 계십시오' 하던 프랑스 어느 시인의 시 한 줄을 좋아했던 나였다. 가령 함께 술집 다니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나 하나님 만났어."하고 말한다면 나 역시도 '미친놈, 술 좋아하더니 결국 돌았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간증을 듣는 사람들의 온갖 착잡한 표정에 대하여 나는 그저 '저 사람 표정이야 당연하지 뭘! 그저 제발 날 미친놈 취급만 하지 말아다오.' 그런 생각으로 버틸 뿐이다. 
 그러나 각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체험한  믿음 깊은 분들은 간증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또하나 신입생이 늘었군!' 반가운 마음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야말로 하늘세계의 영원한 법칙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끼리 서로 반가워 끌어안고 술집으로 가듯이 믿음을 가진 이들끼리는 서로 서로의 간증이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결국 끼리끼리 모여서 살게 하는 것이 내세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의 운명이기에 예수님께서 첫째 명령으로 '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고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닮지 않으면, 세상을 개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나서도 하나님의 밝고 창조적인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운명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시작과 종말은 이 '유유상종'이라는 우주법칙 때문인 것이다.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이유는 마음의 고통 없이 영원히 사는 팔자가 되자고 권하는 것이다. 성경공부하자고 권하는 이유는 하나님 사고방식을 나도 가지자고 권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니 권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미친놈 소리를 듣더라도 한번쯤 '인간에게는 육체와 분리되는 영혼이 있고 인간을 사랑하시며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더라'고 내가 40세가 되어서야 알게된 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성장과정
  하나님을 알게 되어 해결된 가장 큰 내 인생문제는 죽음의 문제이다. 
 살아오면서 존재에 대한 수많은 의문 때문에 마음이 항상 답답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암담했던 문제는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죽음처럼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없었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나는 1945년 광복돠던 해에 귀국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전남 순천시에서 성장하였다. 1948년, 내가 여덟 살, 국민학교 1학년 때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가 적화되어 토착적인 남로당과 함께 여수 순천 등지를 점령하고 적화활동을 시작하자 진압군이 포위하고 토벌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우익이다 좌익이다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총살되었다. 삼십대 초반이던 내 아버지도 그 사건 속에서 돌아가셨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시대이기 때문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공포심 밖에는 없었지만 그러나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존재란 사실이 절실한 나의 인생문제가 되어 버렸다. 왜 인간은 태어날까? 일단 태어났으면 영원히 살아야할 것이 아닌가? 죽어 없어질 바엔 아예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한편 좌익이다 우익이다 나누어서 서로 죽이는 이유가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어른들의 설명이다. 생각이 다르면 서로 죽여야 하는 게 인간이란 말인가? 좋은 생각이란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생각일 텐데 사람을 죽여야하는 생각이란 결국 나쁜 생각이 아닌가? 도대체 어떤 생각이 가장 좋은 생각인가?
 그 3년 후, 내가 열 한 살이던 국민학교 4학년 때, 두 남동생 아래로 하나 밖에 없던 세 살짜리 여동생이 심한 열병으로 갑자기 죽었다. 내가 항상 업고 다닐 만큼 사랑했던 여동생이 죽고나자 죽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에 대하여 슬픔이 지나쳐 미칠듯한 분노조차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제 말을 몇 마디 배워 "오빠, 밥 먹자."하던 아이, 추운 겨울날 땅에 파묻힌 아이를 생각하면 어디서건 나는 눈물부터 쏟아졌다. 왜 사랑하는 한 가족이 영원히 함께 살지 못할까? 그 보다 더 허무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언젠가 죽고 만다면 무슨 일이건 성취한다는 게 무슨 뜻이 있다는 말인가?
 여동생이 죽은 이후 나는 장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뭔가 희망을 걸고 참으로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다. 여동생과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세상에 홀로 남아 어린 아들 셋 키우시느라고 고생 많으신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했다. 방학중엔 새벽기도도 다녔고, 평소엔 저녁식사 후 동생들 데리고 찬송가 여러 곡을 부르고서 공부를 하곤 했다. 믿음생활 덕분에 비교적 성실한 소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학생회장으로 당선되기도 하고 학교 대표 배구선수도 하고 학교 교지도 편집하고, 후회 없는 소년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들어도 인간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어떤 실감을 가지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죽으면 땅에 파묻는데 도대체 천국간다는 게 무슨 뜻인가? 영혼이 간다는데 도대체 영혼이란 게 뭔가? 마리아라는 숫처녀가 남자교섭 없이 예수를 낳았다는데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얘기인가? 남자교섭 없이 애를 낳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남자 여자 사이에서 애 낳는 일이 그렇게 죄스런 일인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데 이런 동화 같은 얘기를 과연 믿어도 좋은가? 또 믿는다고 해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님은 '누가 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밀어 더 맞으라'고 가르치는데, 글쎄, 마주 싸우지는 않을 수 있지만 왼쪽 뺨까지 내밀어야 한다는 건 나에게는 좀 무리한 당부이다.  이런 식의 의문이 소년시절 항상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교회출석을 그만두고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또는 무신론자로 변하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김진우

제목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 2 - 성경은 믿을 수 없다.

성경에 대한 불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고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성경을 한번도 완독하지 못했다. 신약성경의 공관복음만 자주 읽었고 목사님 설교 때 지적해준 말씀이나 읽었을 뿐이다. 명색이 크리스찬이 성경 한번도 완독하지 못했다는 게 내심 항상 부끄러웠다. 내년 고3이 되면 대입고사 준비 때문에 시간이 없어 그 두꺼운 성경을 읽을 여유가 없을 터이다. 그래서 2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일 다 제쳐두고 성경을 완독했다. 약 2주일간 읽으니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아멘까지 빠짐 없이 다 읽었다. 
 그런데, 성경을 다 읽고나니까 오히려 전에 없던 큰 의심에 빠져들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자기가 만난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 성경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전우주의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음성으로, 특히 이스라엘의 특정인에게 이스라엘 말씨로 얘기하셨다는 사실을 도저히 긍정하기 어려웠다. 아하, 성경은 알고보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책이었구나. 이스라엘의 건국신화에 권위를 붙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다 붙였구나.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단군신화라는 훌륭한 건국신화가 있지 않은가.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어느 민족이건 건국신화에 하나님 권위를 갖다붙이는 건 항다반사 아닌가. 결국 성경 믿고 교회 다닌다는 건 이스라엘 민족의 독선적인 우월감에 우리가 철모르고  박수치고 있는 꼴 밖에 아니지 않은가. 그런 의심이 깊어지는 것이었다.
 특히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거신다는 사실을 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고2 쯤 되고 잡다한 독서로 과학적인 체 하던 나로서는 하나님이란 우주를 창조한 특수한 에너지로서 우리가 편의상 의인화하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책이라고 규정하고나니까 나와 기독교는 아무 관계가 없어지고, 서울에 와서 대학에 다닐 때는 딱 한번 새문안교회에 가서 예배 한번 보고는 아주 남이 돼버렸다. 서울대 불문학과 학생시절엔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 특히 싸르트르와 카뮈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탐독했고 유럽의 휴매니즘에 경도했다. 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이른바 작가가 되고 보니 60년대 엉망진창인 우리 사회를 문학작품으로 묘사하기에는 차라리 상대적 가치관이 더 올바른 기준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들이 몸을 팔아야만 하고 남자들이 사기꾼이 되어야만 하는 생활조건 속에서 교회의 가르침은 그야말로 구두선에 불과해 보였다. 
 25세 젊은 나이에 동인문학상을 받는 등 문학적 성공을 보였으나 내 개인의 생활은 방황 투성이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개인들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었다'는 말씀이 있다.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 소질과 재능을 주었으므로 그 일을 천직으로 받아들이고 평생 그 길만을 가는 사람은 나중에 반드시 넉넉한 경제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외길을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러나 불신자는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황과 형편, 호기심과 욕심에 따라 직업도 자주 바꾸고 일도 많이 벌이며 방황한다. 얼핏 보면 사는 게 화려하고 재미있어 보이지만 남는 것은 오히려 적자 뿐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소설을 쓰다가 영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소설 가지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또 영화 쪽이 소질에 더 맞는 것 같았다. 영화감독을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신혼아내가 영화계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보고는 적극적으로 말리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바람이날 게 뻔해 보였던 모양이다. 대종영화상 각본상도 받고 내가 감독한 김동인 원작소설 '감자'가 스위스 르카르노 영화제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아 르몽드 신문에 크게 소개되기도 해서 영화쪽에 대하여 상당한 의욕과 자신감을 가지고 돌진하고 있는데 아내의 반대가 필사적이어서 영화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겨울여자' '영자의 전성시대' '장군의 수염' 등 시나리오만 쓰는 일로 후퇴했는데 영화감독 그만두게 한 일 때문에 아내에게 풀리지 않는 불만이 오래동안 잠복하기도 했다. 소설 쓰는 일만 가지고선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나는 월간잡지 샘터사의 편집부장으로 들어갔다.   
 아들 둘이 태어나자 그 동안 잠시 잊고 있던  죽음의 문제가 내 마음의 밑바닥에 육중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첫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며 밤늦은 시각에 병원복도에서 서성이다가 내 얼굴 특징을 닮은 아기가 산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세계의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겠지만, 생명에의 깊은 감동, 존재의 신비한 위상 앞에서 지극한 찬탄과 거의 절대적인 자아탈피의 겸손을 느꼈다. 이렇게 위대한 탄생들인데 왜 인간들은 전쟁을 벌이며 서로 죽이는 것일까? 왜 질투하고 비판하며 서로 상처를 입히는 것일까? 인간은 참으로 영원히 살아야 할 고귀한 존재들인데. 갓난아기를 보며 그런 느낌에 싸여 있을 때 한편으로 떠오르는 것은 죽음의 문제였다. 언젠가 우리는 죽음으로써 영원한 망각 속에서 마치 없었던 것처럼 흩어져 버리고 '없음'이 돼 버릴 게 아닌가. 태어나고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는가. 아이가 사랑스러울수록 죽음으로 인한 허무감이 더욱 짙게, 확고하게 마음의 밑바닥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 허무감은 내 삶의 큰 몫으로 항상 나를 따라 다녔다.

술에 의지하며
 70년대 유신시대가 시작되자 나에게도 예상 밖의 사태가 많이 생겼다. 대학동창이며 비교적 가까운 친우였던 시인 김지하가 '오적'이라는 풍자시를 발표하여 집권층을 비판하고 그에 덧붙여 많은 문학인들이 집결하여 유신철회청원운동을 벌이자 유신당국은 김지하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며 체포하려 나섰다. 피해 다니던 김지하는 마지막에 나를 찾아와서 "더이상 숨어지낼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내 소재를 대라는 당국의 요구에 고통받고 있다. 박정희가 나를 죽일 작정한 것 같다. 내가 내일 자수해서 남산(중앙정보부)으로 들어갈 테니 네가 밖에서 문학인들을 모아 내 구명운동을 해주기 바란다." 그는 남산으로 들어가고 나는 박태순, 이문구 등 많은 문학인들을 끌어모아 김지하구명운동을 벌여나갔다. 한승헌 황인철 변호사를 세우고 재판 때마다 나는 변호사측 증인이 되어 법정에 나가 '김지하의 평소 언행으로 보아 빨갱이 아니다.'고 증언하곤 하였다. 이런 사건으로 한승헌 변호사는 법조계에서 쫓겨나야만 했고 나에게는 감시가 붙기도 했다. 문학인들에게는 참으로 황막한 유신시대였다. 정보원의 감시 속에서 불안감 때문에 문학인들은 술만 늘었다. 나 역시 선천적으로 못마시는 술에 의지하게 되었다. 문인 친구들과 모여 술이라도 마시는 시간이 불안을 벗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유신시대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고 감옥에 갈 사람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런 중에 아주 절친한 친구 세 사람이 모두 술 때문에 연속적으로 죽었다. 영화감독 이만희 선배와 영화촬영기사 장석준씨 그리고 대학동창이던 영화감독 하길종형이 불과 몇 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주 만나고 자주 술집에 가던 분들이기에 다음 번은 내 차례로구나 기다리며 깊은 허무감에 빠져들어갔다. 
 
1980년에
 1979년 10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 가장 신뢰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 당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처절하고 극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절대권력을 가지고 국민 위에 군림했던 두 거인. 그러나 이제 보니 역사를 움직이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 박정희와 김재규 두 사람을 그 동안 장난감 갖고 놀 듯 사용했던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독재자를 그의 심복이 제거하고 그 심복 또한 제거 당한다는 극적인 현실은 국민들에게 허무감과 신비감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역설(逆說)을 통하여 인간의 무의미를 깨닫게 하는 역사적 사건은 얼마나 많았던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그런 깨우침을 얻는 사건이었다.
 야당을 탄압하고 많은 지식인들을 반체제분자로 낙인찍으면서 20년 동안 구축해놓은 나름대로 질서와 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체제 안에서 이익을 얻었던 계층은 우상을 잃은 당황감에 두려워했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고난을 견뎌야 했던 계층은 승리감으로 열광했지만 한편으로는 초월적이고 엄정한 역사의 운행을 확인하며 역시 신비한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4.19에 참가했던 나로서는 그 다음 해 5.16 군사혁명을 당하면서 우리나라가 동남 아시아나 남미 정도로 정치적 후진국에 불과했던가 하는 허탈감을 가슴 아프게 느꼈었다. 경제적으로 비록 가난하지만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만은 선진민주주의 국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군대가 하루아침에 조용히 민주주의를 박살내 버리는 것을 보고 깊은 열등감을 나는 느꼈었다. 4.19로써 민주주의를 처음 실현한 국민의 자긍심을 훼손하고 국민을 천민으로 만들어 버린 저열한 깡패라고 나는 박정희 장군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민선 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나는 학우들과 반대로 박정희 장군에게 투표했다. 내 눈에는 당시 이른바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미국의 원조물자를 나눠먹는데 경력이 붙은 장사치들로 보일 뿐이었다. 차라리 촌티 나는 박정희의 애국심이 닳아빠진 정치인보다는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 70년대 유신시절에도 나는 박대통령에 대한 이중적 평가가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한강에 다리가 계속 새로 놓이고 고속도로가 생기고 아파트단지가 우렁차게 번져나가는 등 눈에 띄는 경제건설을 보면서 박대통령의 추진력을 나는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 야당을 탄압하고 문화활동을 제약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독재를 강화해 나가는 면에 대해서는 정치인이 아니라 마피아 두목 같은 혐오감을 버릴 수 없었다.
 어떻든 박대통령의 시해사건으로 나는 한숨 돌리게 되었다. 민주화가 될 터이고 그러면 김지하 시인도 석방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나의 30대는 김지하에게 약속했던 그의 구명운동에 내 마음을 모두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소득도 없이, 김지하는 10년째 감옥생활이고 내 처지만 피폐해졌을 뿐이었다. 술에 의지하며 희망 없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희망이 생긴 것이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던 1980년 초, 나는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을 쓰게 되어 그 초고 집필에 들어갔다. 77년에 제1회 이상(李箱)문학상을 받은 소설 한편 쓰고는 그 이후 전연 소설을 쓰지 못했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되었으니 소설가인 나도 본래 내 자리로 돌아와 소설을 많이 써야겠다고 결심하며 모처럼의 신문연재 준비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광주사태가 터졌다. 공수부대가 갑자기 광주에 가서 거리에서 민간인들을 마구 학살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박대통령의 심복들이 벌인 분풀이 광기(狂氣)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은 참으로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이른바 신군부(新軍部)가 정권을 잡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 이내 알려졌지만 군(軍)과 민(民)을 적대관계로 만드는 그런 집권수단이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이 어리석은 일이었다. 온 국민이 분노했다. 나 역시 얌전히 소설을 쓰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밤 늦게 술에 취해서 온 아파트가 떠나가라는 듯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부르짖기도 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불쑥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외침이 저절로 나왔다.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이 게재되기 시작했지만 분노와 충격 때문에 소설이 잘 써지지 않았다. 군검열에서 몇 줄씩 잘리기도 했다. 유신시절 10년 동안의 젊은 지식인들 이야기이니 계속 써봤댔자 나와 신문사만 골치 아프게 생겼다. 연재 15회만에 소설연재를 중단해 버렸다.
 석방되리라고 기대했던 김지하도 풀려나올 기색 없이 계속 옥살이었다. 마침 어느 날 순천향병원 앞 '가을'이라는 술집에서 대학선배 이영일씨(최근 민주당 대변인)를 만나게 되었다. 이 선배는 당시 국보위(國保委) 위원으로 전두환정권 창립에 가담하고 있었다. 나는 이영일 선배에게 따졌다. "김지하 이젠 석방하시오. 보증인을 만들어서 보증 세워서라도 우선 석방시켜 주시오. 김지하가 나한테 이런 말 한 적 있습니다. 독방에 3년 갇혀 있으면 정신이상증세가 생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그 점이 가장 걱정된다구요. 그런데 지금 몇 년쨉니까? 나 같은 사람이라도 보증인으로 인정된다면 내가 보증인 될 테니, 석방되면 정치활동 시키지 않을 테니 석방 시켜 주시오." 학생시절부터 김지하를 잘 알고 있는 이 선배는 나와 헤어지자 곧바로 허문도씨를 찾아갔다. 허문도씨는 전두환장군의 비서로서 정권창출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영일 선배의 권고를 듣고 그들은 지학순 주교 등의 보증을 받아 김지하를 석방했다. 김지하가 석방되자 나의 유신시대는 끝났다는 안도감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 3 - 하얀 손을 보다.

나에게 오신 하나님
 동아일보 소설연재 중단으로 가장 괴로운 사람은 내 아내였다. 수입이 없어진 것이다. 지난 수년 동안 변변찮은 인세와 집을 줄이면서 간신히 버텨왔었다. 이젠 남편이 자기 할 일 되찾아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그만 펜을 놓아 버리니 절망적인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남편은 또다시 술만 마셔댄다. 
 어느 날부터 아내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하늘 같이 믿던 남편을 믿을 수 없게되니 하나님을 믿겠다고 교회에 나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있어야 믿는 것이지 있지도 않은 하나님 믿어 보아야 시간 낭비일 뿐이지' 그러면서도 교회 다니는 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교회에서 뭔가 위로 받는 게 있다면 다행이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젠 나한테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다. 남편이 고집쟁이여서 아내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기에 다른 분을 모셔다가 남편에게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내의 초청으로 어떤 부부가 우리 집에 왔다.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부부인데 안식년 휴가를 얻어 고국에 다니러 왔다는 것이다. 남편은 내 눈에 익은 분이었다. 대학생 시절 캠퍼스에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학생시절에도 수염을 기르고 있었던 특징 있는 얼굴이다. 통성명은 처음 하는 것이지만 그 분도 내 얼굴이 낯익다고 했다. 남편은 방규환씨, 아내는 김성한씨였다. 
 이 부부가 뉴욕 순복음교회의 독실한 신자들인데 한국 방문한 김에 나 한 사람이라도 전도하고 말겠다고 작정한 표정으로 매주 일요일만 되면 우리 집에 와서 교회 가자는 것이다. 산책하는 셈치고 자기네와 교회 함께 가면 예배 끝난 다음에 술 사준다는 것이었다.  
 다시 외국으로 떠날 분들이기에 말대접이나 해드리자고 나는 그들을 따라 교회로 갔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였다. 순복음교회에 대해서 나는 별로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60년대 중반, 내 신혼시절에 나는 갈현동에 살고 있었는데 서울 시내 출입을 하게 되면 버스가 서대문을 지나게 된다. 순복음교회가 당시 서대문에 있었다. 그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울면서 기도하고, 손뼉치며 찬송 부르고, 목사는 병자들 병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자랄 때 경건하고 엄숙한 장로교회에 다녔던 나로서는 이 순복음교회가 바로 이단이구나 그런 단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단교회'에 억지로 따라나와 앉아있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긍정적 사고방식 강의 같은 설교는 들을만하지만 "신도들 중 무슨 병 무슨 병이 지금 고쳐졌습니다"고 선언할 때는 무슨 무당 보듯이 불신감이 되살려지는 것이었다. 다 아는 찬송가지만 나는 따라부르지 않고 기도할 때도 나는 눈을 뜨고 앉아 있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나에게 교회란 어리석거나 교활한 자들의 사교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교회에 정말 따라가 주고 싶지 않은 주일엔 나는 그 대학선배 부부가 우리 집에 도착하기 전에 슬쩍 외출해 버리기도 했다.
 1981년 1월부터 그런 식으로 교회에 끌려다녔는데 어느 덧 4월이 다 가고 있었다. 미국에 곧 돌아갈 줄로 여기고 있던 선배부부는 아직도 가지 않고 나에 대한 전도에 열중한다. 나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어지간히 많이 하고 있는 듯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은 4월 26일이었다.
 4월 26일 주일날 6부 예배에 우리는 참석하고 있었다. 워낙 신도 숫자가 많기 때문에 2시간씩 부를 나누어 예배를 드리는데 6부 예배는 오후 4시에 시작되어 5시 반에 끝나는 예배였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난 다음에 결신자(決信者) 일어서라는 예배순서가 있다. 앞으로 예수 믿기로 하고 이 교회 교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것이다. 근처에 대기하던 교회 임원들이 결신자에게 카드를 주면 거기에 이름 주소 등을 적어 줌으로써 교인으로 등록되는 것이다. 
 그 날 결신자 순서에서 문득 목사님이 눈을 지긋이 감은 상태로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성령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영접해야만 할 사람이 이 자리에 두 사람 있는데 일어서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고집을 부리며 예수 영접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느낌이 확신처럼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나는 얼른 부인했다. 아하, 저 목사님이 저런 식으로 최면을 거는구나. 이 자리에 2만 명쯤 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데 아직은 예수 믿겠다고 결정이 안된 분이 두 명 아니라 2십 명 아니 2백 명도 있을 수 있는데, 두 명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사로잡는 그 말을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난 몇 달 동안 결신자 시간에 목사님이 한번도 이런 식의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뭔가 '성령의 말씀'이 있긴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슬며시 드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결신하겠다고 일어서지 않고 예배가 끝나서 교회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자꾸만 명치 있는 데가 마치 체한 것처럼 답답하며 한 가지 생각에 집중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이 교회에서는 걸핏하면 성령님 어쩌구 하는데 도무지 성령이 무엇인지 난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국민학생일 때 교회에 처음 가서 신약성경에 써있던 예수님-'원수를 사랑하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도 돌려 대라'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느꼈던 그 충격적인 감동을 잊을 수는 없다. 여순반란사건, 육이오 동란 등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원수가 되어 죽이고 죽는 현실을 보아온 나에게는 예수님의 그 평화를 지향하는 가르침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감동을 주는 가르침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했었다. 집안 심부름 때문에 이 십리 인적 없는 시골길을 걸어갈 때마다 찬송가를 되풀이하며 소리 높이 부르곤 했다. 찬송가를 부르고 가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예수님이 내 앞에서 인도해 주는 듯한 느낌조차 가지곤 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내 마음만은 시원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충동이 교회 문 밖을 나서면서부터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예배가 끝나면 선배 부부와 우리 부부 네 사람은 여의도 광장을 가로질러 가서 '음식백화점'이라는 빌딩 안에서 음식을 사먹곤 하는 게 예사였다. 그 날도 여의도 광장을 건너가는데 사람은 우리 밖에 없고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나는 '예수님을 정말 좋아한다'는 고백을 토로하고 싶은 충동을 더 견디지 못하고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마치 산에 가서 '야호!'하듯이 있는 힘을 다 하여 외쳤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렇게 외치고나니까 명치를 답답하게 하고 있던 것이 쑥 빠져나가며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었다. 같이 가던 일행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울증에 빠져 지내는 사람이 이젠 이상해져 버린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장난이었던 듯 씩 웃고 말았지만 그 고백으로 마음은 편했다. 물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다'고 외쳤지만 그 뜻은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을 존경하고 따르겠다는 정도의 뜻이지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어지거나 앞으로 교회에 계속 다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날 밤, 평소의 습관대로 밤 12시 반까지 독서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내는 내 옆에 먼저 잠들어 있었다. 서울 강남구청 옆 해청아파트의 4층이었다. 형광등 불을 끄고 잠이 들었는데 아마 새벽 서너 시경에 문득 잠이 깼다. 잠이 깬 내 눈에는 캄캄한 어둠만이 보였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보안등 불빛 때문에 방안의 물건들이 희미하게라도 보이는 법인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칠흑 같은 어둠 뿐이었다. '정전이 된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내 왼쪽 허리 위 공간에 하얀 손이 팔목까지만 나를 향하여 보라는 듯 떠있는 것이었다. 백옥처럼 하얀 빛깔로 약간 크고 손가락이 쭈욱쭉  뻗은 남자 손이었다. 도둑이 들었구나, 나는 공포를 느끼고 잠이 깨지 않은 체 몸을 굳히고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깬 사실을 상대가 알면 칼이라도 푹 찔러올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손도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떠있는 것이다. 마치 나에게 자세히 보라는 듯. 현관문 등 모두 잘 잠궜는데 이 도둑은 어디로 들어왔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 손을 자세히 살폈다. 혹시 아내가 내가 차버린 이불 덮어 주려고 내밀고 있는 손이 아닐까? 그러나 그 손은 힘차게 보이는 남자 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손 생김새가 너무 잘 생겼다. 어디 한 군데 흠 잡을 데 없이, 의지하고 싶을 만큼 강하고 든든하게 생긴 것이다. '야, 그 손 완전하게 생겼구나. 남자 손이라면 저렇게 생겨야지. 미켈란제로 조각품 같은 손이로구나' 그렇게 찬탄하는 느낌으로 감동하고 있으니까 그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손이 꿈틀 움직이더니 내 배를 향하여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 다가오는 속도에서 느껴지는 것은 지극한 온유함과 겸손이었다. 마치 잠자리 잡으러 가는 손길처럼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내 속셔츠를 들추고 들어와 내 명치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쓸어주는 것이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 배 쓸어주듯 그렇게 사랑이 가득한 느낌이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도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순한 도둑 같으니 한번 잡아 봐야겠다고 용기를 내어, "누구야?" 낮게 외치며 내 오른 손으로 명치 위의 그 손을 덮쳤다. 그리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사람 손이 내 손에 잡혀야할 텐데 손에 잡히는 아무런 물질이 없다. 그리고 상반신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 눈이 또 떠지는 것이었다. 눈을 뜨고 캄캄한 어둠과 하얀 손을 보고 있었는데 또한번 눈이 떠지는 것이다. 그 두 번째 떠지는 눈이 바로 내 평소의 육안(肉眼)이었다. 불빛이 희미하게 비쳐들어 있고 물건들이 보이고 옆에 자고 있는 아내가 보인다. 그리고 앞엣 눈으로 본 어둠과 손은 종잇장 뒤집히듯 숨어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찌 된 일 인가? 내가 꿈을 꾼 것도 아니고, 왜 눈이 두 번씩 떠지는가? 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어리둥절해 앉아 있는데 내 오른 손을 뻗치면 닿을만한 방안 허공에서 약간 울림이 있는 아주 굵은 남성 음성으로, 뚜렷한 한국어로 "하느님이다."는 말씀이 들려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손이 하나님의 손이었단 말인가? 그러니까 앞에 떴던 눈이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보기 위한 내 영안(靈眼)이었단 말이구나. 물질인 육체의 눈으로는 물질세계를 보게 되어 있고 하나님은 영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로구나. 영안은 내 맘대로 뜨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뜨게 해주셔야만 뜰 수 있는 것이구나. 인간은 육체와 영혼 두 개가 겹쳐 존재하는구나. 하나님은 내 바로 안쪽에 존재하시는구나. 육체로는 지구 위의 삶을 살고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것이 인간의 삶이구나. 그 둘이 조화되지 못할 때 병이 들고 죽게 되는구나. 영원하신 우주의 하나님이 어찌 나 같은 놈을 아시고 이 아파트 골방까지 나를 찾아주셨나! 너무나 놀랍고 놀랍다. 여의도 광장에서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한다'고 외쳤기 때문인가? 작년 광주사태 때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고 부르짖었기 때문인가? 아내와 선배부부가 하도 기도해대기 때문인가? 어린 시절 교회 다닐 때부터 항상 보살펴 주시고 계셨던 것일까? 아, 하나님이 한국말을 쓰시다니! 그제야 고교생 때 성경을 완독하고나서 이스라엘말을 쓰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으로 성경책은 이스라엘인들의 독선적인 역사책에 불과하다고 단정하고 내가 무신론자가 돼버린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나님의 인격성, 인간의 언어로 개인에게 말을 거시는 하나님,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을 의심했던 나의 과오를 정통으로 뒤집어 놓으시는 것이었다. 성경이 진실이었구나.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인간이 어떻게 시작되어 이제까지 살아왔는지 항상 간절히 알고 싶었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믿을 수 없는 미개족의 전설처럼 여기고 지내왔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수천년 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 다윗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거시다니! 살 희망을 잃어 버리고 가정문제, 직업문제, 국가문제 등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나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 모습을 보여 주셨구나! 
 인간의 잘잘못을 모두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정말 계셨구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주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라면 우리가 사랑하는데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몸을 태울 만큼 사랑하고 사는 것을 왜 주저할 것인가? 사랑으로 심판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젠 정말 두려울 게 없다. 혼란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다. 내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감사를 어떻게 표현하란 말인가. 창밖에 날이 환히 새고 있었다.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 4 -술,담배중독에서 해방되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손에 관하여 몇 가지 쓴다.
 내 명치를 다정하게 쓸어주시던 하나님의 손은 왼손이었다. 왼손인지 오른손인지에 대해서는 한동안 무심코 지내왔는데 구약성서의 시편(詩篇)에 나오는 '하나님의 오른손'이라는 표현에 비해보니 나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손은 왼손이라는 사실이 자꾸만 의식되기 시작했다. 다윗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오른손은 '권세(權勢)를 주시는 손'이라는 뜻임을 알겠는데 나에게 보여주신 왼손은 무슨 뜻인가? 이 궁금증이 풀린 것은 몇 년 후였다. 천국에 다녀왔다는 미국의 펄시 콜레 목사가 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읽다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오른손과 왼손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성서적(聖書的) 지식이 아니기에 여기 함부로 쓰는 것이 옳지 않은 게 아닌가 염려하면서도 그 뜻이 그럴 듯하다는 느낌 때문에 여기 적어본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권세를 뜻하고 왼손은 자비(慈悲)를 뜻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당신의 왼손을 보여주시고 내 배를 쓸어주신 하나님은 바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당신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자기 입으로 예수를 주(主)로 시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이른다고 하였는데, 여의도 광장에서 내가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합니다!"고 외친 사실이 하나님의 용서를 이끄는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 죄 없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 이유는 죄인들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는데 내 경우가 바로 뚜렷한 그 증거가 된다는 인식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를 나의 주로 모심으로써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나의 죄가 용서함 받고 나에게 하나님과의 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사귈 수 있음이 모든 인생고(人生苦)에서 해방되는 지극한 구원이 아닌가! 예수의 십자가 고통이 나를 구원하신 것이다! 죄사함! 참으로 성경에 쓰인 문자가 나에게 현실적인 사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관해서 쓰고 싶은 얘기가 또 있다. 
 그날 밤, 마치 배탈난 손자의 배를 쓸어주고 있는 할아버지처럼 내 명치를 천천히 쓸어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나는 도둑인 줄 알고 내 오른손으로 덮치며 "누구야?" 낮게 외치며 상반신을 일으켰을 때 내 오른쪽 머리 위 방안 허공에서 들려오던 아주 굵은 남성 음성은 "하느님이다"는 한국어였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몇 차례 들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결코 얼버무리거나 애매모호한 발음이 결코 아니다. 간결 명료하고 뚜렷한 발음이다. 

하나님의 손에 관해서 또 한 가지 들려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다.
 몇 개월 후, 지금은 온누리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하용조 목사가 1980년 당시 서울 신촌에서 두란노 서원이라는 선교단체를 조그맣게 갖추고 신도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하 목사님 요청으로 나는 거기에서 하나님 은혜 받은 간증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하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들려 주셨다. 
 영락교회에 나가시는 나이 드신 권사님 한 분이 하나님의 손으로 은혜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 권사님은 환자들을 위해서 병을 고쳐 주십사고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인데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손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환자에게는 쭉 편 손을 보여 주시기도 하고 어떤 환자는 주먹 쥔 손을 보여 주시는데, 편 손은 병이 낫는다는 표시이고 주먹 쥔 손은 살지 못한다는 표시라는 것이다. 

 내 명치를 쓰다듬어 주신 하나님의 손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니 다른 얘기가 나왔다. 
 다시 그 날로 돌아가서, 나에게 일어난 기적 때문에 너무나 놀랍고 감격하여 눈물을 쏟고 그토록 알고 싶던 우주와 인생의 비밀을 알게된 흥분 때문에 날이 밝을 때까지 앉아 있다가  나는 아침이 다 되어 잠이 들었다. 아침 9시경 늦잠에서 일어난 나는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받으면서 알콜중독의 습관대로 반주를 위해 소주 한 잔을 입에 댔다. 술방울이 혀에 닿는 순간 무슨 청산가리가 이렇게 쓰겠나할 만큼 술맛이 너무 쓰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도 그 달던 술이 독약처럼 쓰게 느껴지고 그 순간 술에 대해서 온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손길의 의미였다. 나를 치료해 주신 것이었구나! 술을 끊게 해주신 것이었구나.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보약 마시 듯 소주를 마셔댔는데 바로 그 술을 하나님이 끊어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배를 쓰다듬어 주신 것을 나는 살아볼 용기를 주고 격려하기 위해서 그러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술을 한순간에 깨끗이 끊어주신 것이었다. 정말이지 술에 대해서 조금도 미련이 남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망각이 가능할까? 집에 있던 술을 다 버렸다. 하나님이 끊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먼저 세상을 떠난 술친구들처럼 이내 눈을 감았을 것이다. 내 건강은 급속도로 좋아졌다. 나중에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해주시는 대표적인 몇 가지 일 중에 '병을 치료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배우며 감격을 누를 수 없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님께서 내 담배 끊어주신 얘기도 해버리겠다.
 그 무렵 나는 매일 담배를 세 갑 가까이 피우고 있었다. 대학생 때 피우기 시작한 담배가 해가 갈수록 소비량이 많아져서 하루에 두 갑 가지고는 부족하고 세 갑에서 몇 개피 남을 정도로 많이 피워댔다. 하루 종일 담배만 피워대고 있는 꼴이다. 소설가이니까 명상하는데는 담배가 도움이 되겠지 하고 말하는 분도 있는데 담배야말로 피로감(疲勞感)의 원천이다. 처음 한두 대는 도움이 되는지 모르지만 계속 피워대면 머릿속은 금방 피로감으로 젖어 버린다. 소설 쓰기 위해서 담배 피우는 것이 아니라 담배 피우기 위해서 소설 쓰는 체 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술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니코틴 중독은 끊을 수가 없었다. 조용한 기도원(祈禱院)에 가서도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까 목사님이 '목사가 보지 않는 데 가서 피워 달라'고 사정할 정도이니 명색이 하나님까지 직접 만난 신자가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는 꼴은 스스로도 가증스러웠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알았으니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제 의지력으로는 담배를 못끊겠으니 하나님께서 끊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며 담배를 피워댔다. 하나님의 손을 뵈온 지 일년쯤 되던 어느 날, 영화각본을 쓴다고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어떤 기운이 온몸을 휩싸면서 입에서 방언(方言)이 터져나오고 온몸이 참을 수 없이 떨리기도 하였다. 십 여분 이상의 그런 상태가 끝나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책상 위에 놓인 담배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견딜만 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십 분, 이십 분, 한 시간, 두 시간..... 드디어 담배가 끊어졌다. 담배 대신 입에서 나오는 것은 끊임없는 방언이었다. 내 의지로 담배를 끊은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담배가 끊어진 것이다. 특별한 은사 때문인지 그 후로 가령 직장 같은 데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곧 담배를 끊곤 하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그런 예가 많아서 나 역시 신기하게 느끼고 있다.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 5 - 큰 기쁨을 체험하다

회개기도의 중요성
 1981년 4월 말, 하나님의 손을 뵌지 며칠 후, 나는 경기도 파주군에 있는 오산리 금식기도원으로 혼자 갔다. 지금은 현대적이고 거대한 시설로 발전했지만 당시엔 성전도 대형 천막에 지나지 않은, 개척중인 야산 기도원이었다. 기도원 원장은 지금은 소천하신 그 유명한 최자실 목사님이었고 부원장이 지금은 테헤란로에서 강남순복음교회를 담임하는 김성광 목사였다. 최자실 목사님의 아들로서 미국 뉴욕 순복음교회 목사로 있다가 이 기도원 부원장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를 전도한 대학선배 부부와 함께 우리 집에도 오셔서 "기도원에 한번 놀러 오세요. 박수치고 찬송 부르면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좋습니다." 농담처럼 권하기도 했었는데 그 기도원에 꼭 가고 싶었던 것이다. 기도원이라면 병자들 모여있는 불결한 곳이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기도원 가야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나니까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이 기도원이었다. 김성광 목사는 반갑게 마지하며 자신이 쓰던 방을 나에게 쓰라고 내주었다. 
 기도원에는 여기 저기 기도굴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다. 한두 사람이 들어가서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해도 남에게 시끄럽지 않을 공간을 땅 속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도 그 기도굴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눈을 감았다. 1960년 서울에 와서 대학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무신론자가 되어 기도하기를 그만두었었다. 20년만에 처음으로 기도를 해보는 것이다. 무슨 기도를 해야할지 몰랐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 안쪽에 아주 가까이서 다 듣고 계신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을 뿐. 나는 더듬거리며 회개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10계명에 비춰보면서 죄라고 생각되는 모든 기억들을 하나 하나 입 밖에 내어 말하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고 고백했다. 생각나면 한 마디하고 또 생각나면 한 마디 하는 식으로 두시간 정도 기도를 하고 있는데 문득 어떤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말할 수 없이 황홀한 기쁨이 온몸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마치 기쁨이라는 기체가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그 기쁨은 그 어떠한 생리적 기쁨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황홀한 기쁨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간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기쁨, 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느낌, 이 황홀감, 이것이 바로 성령(聖靈)이구나. 세상과 인간은 생명으로 가득차게 느껴지고 참으로 힘차게 살아가고 싶은 의욕감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다. 그 이후 뜻밖의 현상이 생겼다. 가령 방문객을 만나면 그 사람 마음이 다 읽혀지는 것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나를 찾아왔고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그냥 미리 알게 되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점쟁이가 된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 속을 알 수 있는 이 능력,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최초의 인간이 죄짓고 에덴에서 쫓겨나기 이전의 상태 즉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던 무죄(無罪)상태의 영혼이구나. 이것이 바로 예수 믿으면 우리가 받게 되는 '죄사함 받은 영혼' 상태로구나.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죄사함. 마치 때가 낀 거울을 닦듯이 죄로 덮인 우리 영혼을 닦아 영혼세계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죄사함'. 모든 인간을 에덴의 행복으로 회복 시키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무엇인지 나는 알만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다"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인지 알 수 있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며 사죄하는 일이 바로 성령 받는 비결이었다.

 그 해 12월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마악 아침기도를 시작하려는데 내 의식(영혼, 마음, 정신)이 머리통 전체를 통해서 몸 밖으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치약 튜브에서 치약 나가듯이. 몸 밖을 벗어나자 새카만 어둠인데 그 어둠 속을 무슨 로켓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몸을 벗어버린 영혼은 오히려 더 초롱초롱하게 맑고 또렷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몸을 빠져나오다니? 목적지도 모른 채 어둠 속을 날아가고 있으려니 그토록 외로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이구, 이게 하늘세계로 가는 길이구나!' 그런 깨달음이 드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죽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면 되지만 이곳에서는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이 어둠 속을 날아다니고 있어야만 하는가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아니 세상에서 지은 죄 때문에 지옥불길 속으로 가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면서 무서운 공포심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런 공포심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려니까 다음 순간 내 의식은 다시 내 몸 속으로 돌아왔다. 거의 단절이라할 만큼 빠른 속도로 돌아온 것이다. 이 체험으로 나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지는 현상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여동생의 죽음에서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던 죽음에 대한 실제적 해답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명령
 1982년 10월, 나는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하게 되었다. 문화공보부에서 문학인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문학인들 아홉 명에 인솔자로 문공부 직원 한 사람, 도합 10명씩 그룹을 지어 약 2주일 동안 세 나라를 여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현지 문학인들과 교류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관광여행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가난한 문인들에게는 마치 기적처럼 파격적인 행사였다. 그때까지도 우리 국민들의 외국여행이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던 시대였다. 돈이 많은 사람들도 부부가 함께 외국여행을 할 수 없는 제도였다. 해외도피를 할 수 없도록 부부 중 한 사람은 국내에 남아야 한다. 외화(外貨)를 아끼기 위해서도 외국여행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외국의 장학금을 받게된 유학생이나 공직자의 출장, 무역업자의 비지니스 그리고 운동선수의 국제경기참가 정도가 아니면 여권을 낼 수도 없던 시대였다. 아니 달러를 아무나 자유롭게 쓰고 여권이 쉽게 나오는 제도라고 할지라도 가난한 문학인들에게는 외국여행이란 꿈처럼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런데 정부에서 비용을 대어 문인들에게 외국여행을 시켜준다는 것이다. 전두환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민주화 투쟁하는 문학인들 달래느라고 이 행사를 꾸민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문공부 차관이던 실세 허문도씨가 '현대'의 정주영회장에게 비용을 부담시키고 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그 바람에 데모 등을 주도하는 문인들 중에는 이 여행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내가 속한 일행은 소설가 박연희, 이호철, 박완서, 시인 홍윤숙, 평론가 김치수씨 등등, 역시 열 명이 프랑스와 그리스 그리고 인도를 여행했다.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 6 -유럽과 인도의 비교

이 여행은 나에게 참으로 뜻깊은 여행이었다. 하기 어려운 외국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감개 깊은 여행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만든 유럽과 힌두교가 만든 인도를 비교·평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고, 이 여행 후 그리스도께서 한국어 음성으로 내 필생의 사명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중요한 여행이었다는 뜻이다.
 여행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나름대로 목표를 가지고 떠난다.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이룩한 유럽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프랑스와 그리스를 여행하는 동안 그 전원과 정원, 그 교회나 성채, 그 그림과 음악 그리고 사람들에게 스며있는 친절한 표정과 겸손한 풍속 등등에서 역사 깊은 그리스도교의 체취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체취란 세계를 단정하고 상냥하게 잘 손질하는 그런 체취였다. 도로변의 잡초들까지도 사람의 손으로 아름답게 가꾸고 사람들이 사용해야하는 시설들은 사람이 쓰기 좋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세상을 잘 관리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유럽이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 만물을 관리할 수 있는 주인의식, 사자나 호랑이까지도 길들여서 서커스를 시킬 수 있는 관리자 의식, 내가 이 세상 만물을 우리 집 살림처럼 가꿀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긍심은 성경을 배움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하나님 없는 종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자연을 숭배하고 자연과 일치하라는 자연의 노예로 가르친다. 그런 종교 속에서는 사람은 큰 느티나무를 신격화하고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고 코끼리나 소를 신성시하여 인간 이상으로 경외한다. 그러나 유럽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분만이 가지고 계신  능력 즉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막혀있던 관계를 뚫어주어 하나님과 부자(父子)관계를 맺어주는 그 능력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세계,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으로 만들어온 세계였다. 물론 하나님과 반대되는 마귀의 세계 역시 유럽 속에도 있다. 현세가치 지향적인 로마(Rome)의 전통도 유럽의 어두운 면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창조를 그리고 로마가 파괴를 일삼으며 유럽의 역사를 만들어온 셈이다.
 내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로 유럽에 갔더라면 그 모든 역사와 현실들이 기독교의 성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백인들의 우수한 유전적 성향에서 나온 것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종교를 무시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민족주의에 매달린다. 유럽인조차도 예를 들어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실천적 행동인인 히틀러 같은 유럽인도 아리안 민족의 유전적 우수성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선진문명을 만든다고 민족주의를 내세웠을 정도이니 문화를 만들어내는 종교의 힘을 무시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민족주의적 시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백인종의 우수함이 이 선진된 문명을 만들었다고 보게 되면 다른 민족인 나는 주눅이 크게 들었을 것이다. 아시아 사람들 대부분이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매달려 유럽문화를 백인종의 문화라고 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기네 비기독교적 전통문화를 굳이 고집하며 '동(東)은 동, 서(西)는 서'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교가 유럽을 만들었다고 보게 되니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십자가 달린 교회 밑을 걸어가는 유럽인들이 마치 오래 사귄 대등한 친구들처럼 낯익게 느껴지고 거리풍경이나 생활하는 모습 등이 마치 그 속에서 내가 오래 살아온 것처럼 친밀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우리 한국이 하루 빨리 그리스도의 문화로 성숙하게 되면 유럽과 함께 지상에 세워진 그리스도 나라로서 정체성(正體性)을 가지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민족을 초월하는 종교적 정체성, 예를 들어 동쪽의 말레이시아와 서쪽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으로 정체성을 같이 하고 있듯이 그리스도교 자체가 형성하는 사회의 모습이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사회로 존재하는 것이다. 
 유럽이 먼저 그리스도화 하였고 우리나라도 이제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화하고 있고 다른 종교의 나라도 앞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변화해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다시한번 말하지만 인간이 살기 좋도록 자연과 풍속을 계발(啓發)하는 진정한 과학적 나라이다. 그것이 앞으로 이 세계의 역사이다. 전통 종교와 갈등으로 전쟁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한 나로서는 미래의 세계, 인간이 가야할 역사는 불을 보듯 훤히 보이는 것이다. 성경 속에 '원수가 네 발등상이 될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는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세계역사의 진행방향 곧 그리스도 나라의 완성으로 가고 있는 인류의 역사를 분명히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세계인들은 먼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 유럽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고찰하면 후배가 본받아야할 요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서구화(西歐化)를 지향했던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서구의 기독교는 빼놓고 오히려 유럽 속에 잔재하고 있는 부정적인 로마적 요소 즉 폭력에 의한 제국주의만 배워온 게 일본의 큰 잘못이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일본은 원자탄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다시한번 그리스도의 나라인 미국에게 맡겨진 바 되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일본에는 또다시 천황신국적(天皇神國的)인 극우파의 음성이 드높다. 
 요컨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나는 유럽의 역사와 현실이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서 나에게 친밀감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빠리의 몽마르트르 산 위에 서있는 싸크르 꾀르 성당은 프랑스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도한 분의 순교를 기념하여 지은 대성당이다. 우상숭배의 종교를 가진 프랑스땅에 맨처음 기독교를 전도하던 분이 체포되어 도끼로 목이 잘린 장소가 바로 몽마르트르(순교자의 산)이다. 목이 잘린 시체가 자기 두 손으로 떨어져나간 자기 목을 들고 걸어가는 기적을 보고서야 그를 죽인 원주민들이 드디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프랑스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도 우리나라의 천주교인 학살사건과 마찬가지로 쉽지 않게 전파된 것이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입구,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평소에 신이라고 부르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토론하며 설교하던 그 대리석 바위 위에 서자  나는 감동 때문에 엎드려 기도했다. 함께 여행하는 일행들이 광신자 보듯 나를 보든 말든 나는 2천년 전 사도행전시대가 바로 어제 일처럼 현실감으로써 나에게 밀착하는 것을 느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유럽에서도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를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전도인 것 같다.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러 가던 유태교의 광신자 사울(바울의 옛이름)에게 예수께서 친히 모습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범신론과 인본주의적 철학의 그리스를 기독교로 변화시킨 바울 사도가 태어난 것이다. 기독교를 전파하신 분은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 당신이신 것이다. 세상 사람 중에서 심부름할 일꾼을 택하실 뿐이다. 
 
 유럽을 보고 인도에 도착하니까 마치 천국에서 지옥으로 온 듯 전연 다른 사람과 전연 다른 나라를 보게 되었다. 대도시를 가득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빈민들이었다. 적선하라고 손을 내밀며 에워싸는 아이들 때문에 거리로 나서기가 두려웠다. 노동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웠다. 주민 모두가 실업자와 거지들 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1982년 당시 인구 6억 이상이라고 하는데 60퍼센트의 인구가 절대빈곤자라고 했다. 약간의 식량으로 목숨만 유지하고 있는 인구가 4억 5천만 이상이라는 것이다. 20세기 이 문명시대에 왜 이처럼 가난과 질병 등으로 지옥 같은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자연조건, 정치적 조건, 전통문화적 조건, 인종조건 등등 인도인을 속박하고 있는 조건은 많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도인을 해방시키기에 가장 나쁜 조건은 잘못된 종교라고 생각되었다.
 인도국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힌두교라는 범신론적 종교이다. 세상 만물이 신(神)의 형상이라고 믿으며 인간이 각기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사물을 신으로 여기며 예배하고 기도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우상숭배 종교이다. 그리고 윤회설(輪回說)을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죽은 후 그 영혼은 다른 사람의 몸을 통하여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설이다. 그 영혼의 업(業)에 따라서 세상의 신분이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지금 가난하고 병든 원인은 전생의 죄업 때문이고 지금 부유하고 건강한 것은 전생에서 선한 공(功)을 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노동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전생에 죄가 많았다는 증거를 내세우는 꼴이기 때문이다. 좋은 옷 입고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기 좋아한다. 전생에 공이 많은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동에 대한 멸시 풍조가 뿌리 깊이 자리잡게 되고  이 윤회설은 불교에 묻어서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마치 우리 고유의 문화처럼 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팔자(八字)를 믿고 노동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이 윤회설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노동을 신성시(神聖視)하는 기독교와 반대인 종교는 사람들에게서 현실극복의지를 감퇴시킨다. 현실의 나쁜 조건을 개선하려는 힘이 없다. 더러워도 그냥 견디지 청소하려고 하지 않는다. 해마다 홍수가 나도 강에 댐을 쌓으려고 하지 않는다. 땅을 파서 농작물을 심기 보다 남에게 손을 내밀고 '적선(積善)하라'고 외치는데 더 익숙해진다. 윤회설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숙명이라고 받아들이며 견딘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면 이보다는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뉴델리에 있는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분은 집에서 여자 파출부를 세 사람 쓰고 있다. 인건비가 워낙 싸기도 하지만 그 보다도 그 여자들의 종교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한 여자는 유리창 닦는 일만 한다. 전생(前生)의 업 때문에 자기는 유리창 닦는 일만 하게 돼있는 사람이라며 다른 청소는 하지 않고 유리창 닦는 일만 하는 것이다. 한 여자는 책상 등 가구 닦는 일만 한다. 한 여자는 빗자루질과 걸레 일만 한다. 하루 종일 일하는 체 하다가 가곤 한다. 대사관 직원 부인은 "당신들이 그렇게 게으름 피우니까 가난할 수 밖에 없다. 부지런해야 잘 살 수 있다."고 본을 보여주기 위해 손수 청소도구를 들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파출부들은 일을 그만두고 가겠다고 하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생에서 잘한 일이 없어서 청소부로 태어났고 당신은 전생에서 좋은 일을 하여 우리를 부릴 수 있는 신분으로 태어났다. 우리가 당신을 섬기고 일하다가 죽으면 다시 태어날 때엔 당신과 같은 신분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당신 집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이 청소도구를 들고 일하는 것을 보니 내세에 대한 기대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당신 집에서 일하지 않겠다."  그래서 대사관 직원 부인은 청소도구를 놓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윤회설 때문에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힌두교 인도사람들에게 "사람이 죽은 다음엔 그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심판을 받아 영생(永生)의 운명이 결정되고,  부활(復活)이 하늘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이 개인의 운명은 일회적(一回的)인 일이다."라는 것을 설명하여 믿게 하고, 적극적인 노동이 기쁨의 원천이고 생활을 개선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믿고 따르게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영혼에 관한 그런 지식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 인도인들은 숙명(宿命)을 견딜 뿐이지 현실을 개조(改造)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적으로 그들은 네 계급으로 나뉘어 부자유스럽게 묶여있고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계급만이 종교권과 공권력을 독점하고 하층민을 지배하고 있다. 힌두교가 싫은 사람은 이슬람이 되어 있지만 이슬람 인도인들은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로 분리되어 인도와 적대국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인도에 살고 있는 이슬람인들은 소수계층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기독교는 남(南) 인도쪽에 영국이 남겨놓고 간 성공회(聖公會)를 인도 기독교로 개조한 교회들이 소수 있다고 했다. 가톨릭이 수는 적지만 교육사업 등을 알뜰히 경영하며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독교인들을 포위하고 있는 생활조건은 힌두교적일 뿐이다. 
 
 바라나시는 힌두교의 성지(聖地)라고 하는 도시이다. 간지스강변에 수많은 힌두교 사원들이 세워져 있었다. 조그마한 코끼리 우상을 길가에 세워놓고 그 앞에서 손을 비비며 기도하는 노파의 모습, 돌로 만든 남근상(男根像)을 쓰다듬으며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 등등 자기네 우상(偶像)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성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사람들의 우상숭배이다. 살아계시며 인간과 대화하시고자 원하는 하나님을 모른 체하고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며 복받기를 바라는 사람을 하나님은 정말 싫어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택해서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우상숭배하는 자에게는 저주만 있을 뿐이다. 힌두교 속에서 태어난 석가모니도 득도(得道) 후 첫 번째 설법(說法)이 우상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혼의 법칙을 가르치는 불교의 진리는 다시 우상숭배의 종교에 오염돼 버렸고 인도는 도로 힌두교 국가가 돼버렸다. 한국 불교는 석가모니가 깨부수려고 했던 힌두교를 마치 불교의 원형처럼 착각하고 힌두교의 사고방식과 풍속을 많이 도입했었다. 우리 일행의 인도여행을 안내해주던 불교학자인 000교수는 "한국불교가 쇠퇴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석가모니의 원시불교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온갖 잡것들이 불교를 오염했던 것이죠. 대표적인 예로 알렉산더의 세계정복 과정 때문에 불교는 그리스의 아폴로 신상(神像)을 섬기는 우상종교와 타협하여 불상(佛像)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절하며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간다라의 불교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올 때엔 이미 잘못 오염된 불교가 들어왔던 것입니다." 0박사의 설명대로라면 절에서 불상부터 없애야만 석가모니의 뜻에 맞는 옳은 불교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절에서는 큰 부처만들기 시합이라도 하는 것 같다. 시주(施主) 받는 도구로 부처를 사용한다. 아니 돈을 바치면 부처가 복을 내려주리라고 믿으며 신자는 수백 번 절을 한다. "기독교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그런 부활을 했듯이 그런 부활이 불교에는 없었던 것이지요." 
 불교만 가지고 얘기하면 0박사의 말씀이 옳겠지만 그러나 나로서는 메시아 없는 종교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오염될 수 밖에 없고 어쩌다가 소수의 구원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종교는 오히려 인간을 노예화하는 악한 조건이 돼버린다고 생각했다. 불교는 필연적으로 오염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나 다 석가모니가 되지 못한다. 석가모니가 성령(聖靈)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 견성(見性)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건 수도(修道)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석가모니 당신도 "나는 부처(진리를 깨달은 자)이지 미륵(메시아)는 아니다."고 유언했다고 한다. 나 자신은 구원받았지만 남을 구원해줄 능력은 없다. 내가 깨달은 지식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겠지만 제자들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 나와 똑같은 수도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 미륵이 오실 것이고 미륵이 오시면 세상사람들을 누구나 견성해줄 것이라고 마치 성경의 이사야처럼 메시아 예언을 남기셨다. 메시아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모두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것이다. 석가모니도 예언했던 메시아(미륵)가 바로 예수이고 이사야가 예언했던 메시아가 예수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기독교를 접수하지 않으면 불교도 유태교도 오히려 역사에 해독을 끼치는 종교로만 남을 것이다. 진리를 모르던 죄인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겠습니다."는 한 마디 약속으로 성령(견성)을 받아 죄사함 받고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게되는 것이다. 예수는 부처(깨달음을 얻은 분)가 아니라 미륵(구원하시는 분)이신 분이다. 그 증거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 7 -인도인들을 전도하기로 하다.

한동안은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 때문에 힌두교는 벽지(僻地)의 민간 사이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해 힌두교 세력을 뒷받침해 주어 오늘날처럼 부흥시켰다고 한다. 없애야할 우상종교를 기독교 영국이 부흥시킨 것이다. 식민지를 '분열시켜서 지배하는' 방식으로 힌두교를 부활시킨 것이 영국이라고 하니 기독교에 의해서 강대국이 된 영국이 한 짓이 결국 하나님을 조롱하는 짓이었다. 기독교는 개인이건 국가건 강대하게 만든다. 그 힘을 가지고 해야할 일은 기독교 전도이다. 쓰러지려던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렇게 일어섰으니 당신도 예수 믿고 일어서시오,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복음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이 인도에 한 짓은 경제적 착취 뿐이오 우상종교의 부활이었다. 유럽인 속에 숨어 있던 로마적 요소가 마귀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것이다. 마귀에게 굴종하는 자는 멸망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세계 최강의 영국을 거꾸러지게 하시고 제2국가로 쇠퇴할 수 밖에 없게 만드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이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인도의 근대화를 도왔더라면 지구의 역사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라고 나는 여행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간지스 강에는 빨간 천으로 싼 어린이의 시체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른들의 시체는 강변에서 장작불에 태우지만 아이들 시체는 그렇게 떠내려보낸다는 것이다.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유아 사망률이 아주 높다고 했다. 인도인들도 인간인데 배아프게 낳은 자식들이 그렇게 많이 죽으면 그 부모들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려 있겠는가! 어쩌면 인도인들의 영혼은 쓰라린 고통으로 짓이겨져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인도인들에게 성경의 이 말 하나만이라도 가르쳐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이 축복을 인도인들이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알게 된다면 인도는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인들을 위해서 사업을 한다면 어떤 사업이 좋겠는가? 인도에서 가장 값싸고 가장 풍부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햇볕이다. 태양광으로 전기를 만들어 보급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인도여행을 했지만 내가 인도에 복음을 전하러 와야 하겠다고는 전연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인도여행을 마치고 한달 쯤 지난 11월 하순경 어느 날, 시내 외출에서 돌아와 피곤하여 거실 마루에 벌렁 누워있는데 갑자기 약간 비몽사몽 같은 상태가 되며 머리 위에서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 나는 얼결에 "전 영어도 잘 할 줄 모르고 찬송가 악보도 볼 줄 모르는데 어떻게 갑니까?" 그렇게 대답하니까 음성은 꾸중하듯이 "왜 못해! 왜 못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작년 4월에 "하느님이다"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아, 이번 인도여행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여행이었구나! 전두환 정권이 문인들 달래느라고 보내준 여행인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구나! 나에게 그리스도의 유럽과 힌두교의 인도를 보여주고 인도를 복음화하는 일꾼으로 나를 보내시기 위해서 이번 여행을 나에게 시키셨구나. 하나님의 손을 보여주시고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게 하시는 등 여러 가지 특이한 체험을 시키신 이유가 인도전도의 사명을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나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셨구나.
 내가 목숨바쳐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알고나니까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었다. 목표가 있는 자는 준비를 하게 되고 따라서 부지런해진다. 내 인생에 확실한 스케줄이 생긴 것이 아주 기뻤다. 인도를 전도하는 일을 위해서는 흔쾌히 목숨을 바쳐도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남자들의 인생이란 자기 목숨과 바꿔도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찾을 때까지 방황하고 모색하는 과정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만 찾으면 남자는 행복해진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나를 고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행복하게 해주시기 위하여 내려지는 것이라는 점도 깨우쳐졌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가장 원하시는 것을 주시는 분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내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있는 일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지만 내 귀중한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살아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내 목숨 이상으로 가치있는 일, 그것이 내가 알게된 영원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된 것이다.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워커힐에서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았지만 그러나 나는 선뜻 떠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곧바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오히려 인도를 구경했기 때문에 선뜻 "가 보자."하는 생각이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할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우선 성경공부를 해야하고 영어도 공부해야 한다. 인도의 고쳐야할 점들에 대한 공부도 충분히 해야 한다. 경제적 뒷받침도 보장되어야 한다. 국민학교 다니는 아들 둘도 좀 키워놓아야 한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결혼 이후 특히 경제적 고통이 많았기 때문에 아내는 이제 남편이 예수 믿고 착실하게 실용적인 인간으로 변화되어 가령 교회 장로쯤 될 수 있는 경제력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아내가 어떤 사람에게 이젠 남편이 소설 같은 것 쓰지 않고 다른 직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엿들으며 나는 "선교사는 더 고생할 텐데" 혼자서 웃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믿지 않은 사람은 아내인 것 같았다. 결혼 이후 살아오면서 쌓이게 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한(恨)과 당장의 생계적 고충들이 아내의 마음에 풀어지지 않은채 남아서 나를 불신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기쁘게 협력하지 않으면 인도전도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아내는 내가  배부른 장로님이나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나는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씩 금식기도도 했다. '원수가 집안식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교의 출가(出家)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적(公的)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적(私的)인 정서(情緖)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큰 '원수'는 성모 마리아님이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인간에게 한 마지막 부탁이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님을 부탁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나는 앞으로 언젠가 인도에 가긴 가겠는데 우선 급한 것은 가족들 생계와 성경공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두려워지는 것은 인도사람들이 과연 내 말을 믿고 예수를 믿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차라리 가령 인도사람들이 나에게 "당신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모습을 보면 예수 믿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런 일은 할 자신이 있다. 하나님이 계시고 내 영혼은 죽는 게 아니니까 나도 예수님처럼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하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사"고 기도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입으로 아무리 성경지식을 떠든다고 해서 그 완고한 힌두교인들이 돌아서겠는가, 그런 의문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녀들이 있겠지, 그 사람들만 돌아서면 되는 것이다, 성경에도 인간들 중 반은 구원받고 반은 자기네 고집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고 암시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내가 인도전도를 구상하며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지만 그러나 더욱 크게 나르 지배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야말로 막막함이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없애주는 너무나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 옆에 나타나 보여주신 것이다. 

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 8 -40일 금식기도

1983년 10월, 나는 워커힐 쉐라톤 호텔에서 장기간 투숙하고 있었다. 나에게 영화각본을 쓰라고 영화사에서 그 호텔에 투숙시킨 것이다. 집중해서 빨리 끝내달라고 으레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에게 호텔투숙을 원하는 것이다. 영화감독 배창호씨가 감독할 영화였다. 호텔 방안에는 트윈 베드가 놓여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설 수 있는 공간을 두고 일인용(一人用)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다. 유리창쪽 침대는 내가, 입구쪽 침대는 배감독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어느 날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이 생겼다.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 방문중에 북한측 테러를 당한 사건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예정보다 몇 분 늦게 목적지에 도착한 덕분에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시한폭탄의 폭발로 대기하고 있던 한국측 정부요인들이 많이 사망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과 관계하여 간증하고 싶은 얘기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그 사건이 생긴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오전 10시경, 아침식사를 함께 했던 배감독은 시내외출하고 나는 내 침대에 발을 뻗고 베개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성경을 읽고 있었다. 참 재미나게 성경을 읽고 있는데 문득 내 바로 옆, 침대와 침대 사이의 공간에 하얀 옷자락이 보이는 것이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내 옆에 바싹 서 있는 것이다. 고개를 쳐들어 올려다 보니 대리석으로 빚은 듯 하얀 머리털, 하얀 얼굴, 하얀 수염을 기르신 분이 나를 지긋이 내려다 보고 서계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이구나!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참으로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그 눈빛은 참으로 여러 가지 표정을 담고 있었다. 책망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격려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할아버지가 말썽꾸러기 사랑스러운 손자를 내려다 보시듯이 그런 지긋한 눈빛으로 조용히 내려다 보고 서계시는 것이었다. 오전 햇볕이 환히 들어오고 있는 호텔 방안에서 영안(靈眼)이 아니라 내 육안(肉眼)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위엄 때문에 마치 무거운 바위가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 듯한 조심스러운 느낌이 나에게 밀려들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저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했던 마음이 실감되었다. 그 사랑과 위엄, 그 결백함 앞에서는 나는 숨어야할 죄인일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기 황송해서 상반신을 세우고 반듯이 바로앉아 마치 꾸중맞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무슨 말씀이 계시겠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씀도 없이 조용했다. 잠시 후에 슬그머니 돌아보니 사라지고 안계셨다.
 왜 나에게 당신 모습을 보여주셨을까? 아마도 인도전도의 사명에 확신과 자신감을 나에게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함께 한다, 용기를 내라,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 날 이후 인도전도에 대한 불안감은 없어졌다. 거꾸로 한국에 남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순종의 죄책감이 더 깊어질 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 옆에 서 계시니 빛깔만 하얀색일 뿐 보통 사람과 똑같은 모습이오 옷이었다. 1미터 80센티 정도의 키에 보통 사람과 같은 얼굴이었다. 만지면 말랑말랑하게 느껴질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늘세계에서 물질세계로 당신 몸을 자유롭게 나타내시는 분. 부르면 응답하시는 분. 나는 국민학생 시절부터 기독교에서 가장 의심스럽고 궁금했던 것이 처녀 마리아의 임신과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81년도 4월에 하나님의 손이 내 명치를 쓰다듬어주신 이후 하나님이라면 처녀가 임신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하여는 부활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금해했다. 내가 본 하나님의 손은 첫째, 영안으로 본 것이오, 둘째, 그야말로 손만 본 것이다. 이 경험으로써 부활이란 영안으로 볼 수 있는 하얀 영적인 몸이라고 나는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까지 찾아오시고 음식도 드셨다고 쓰여 있는 것이다.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어떤 상태의 몸일까? 그런데  이제보니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분이 서계시니까 그 몸에 가리워져 그 뒤에 있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 아주 인간과 같은 체질의 몸이었다. 다만 그 하얀 빛깔로 보아 지상의 물질이 아닌 영적인 물질이라는 것으로 짐작될 뿐.
 요컨대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 주시기도 하고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이다. 마치 자녀를 항상 염려하시는 집에 계신 아버지처럼 항상 당신을 주님으로 모신 인간들을 보살피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또한번 야무지게 체험한 것은 그 다음 해, 1984년 6월이었다. 

40일 금식명령
 1984년 6월, 나는 '건강시대'라는 월간잡지 주간(主幹)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여성문제로 인하여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눈 한번 딱 감으면 바람을 필 수 있는 그런 유혹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방안에 누워 있는데 아주 가느다랗지만 아주 또렷한 발음으로, 마치 먼 곳에서 내려보내는 말씀이 또렷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광야에 나가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철저히 회개하라. 여호와의 명령이다." 
 아아, 내 마음을 항상 보고 계셨구나!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 밀려왔다. 음성이 들리지 않고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듣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처럼 보고 믿은 자는 하나님이 안보이면 의심이 들며 다시 죄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게된 사람들의 믿음이 더욱 올바르게 굳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한달 치 잡지 편집을 미리 해놓고 휴직을 하고 금식을 시작했다. 서울 서초동 신동아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플라스틱 물통에 생수를 받고 비닐 돗자리를 들고 성경 찬송가 들고 버스로 몇 정거장만 가면 나오는 우면산 솔 숲 속으로 간다. 지금 예술의 전당이 지어진 그 솔숲이다. 나무가 우거지고 행인도 드물어서 하루 종일 성경 보고 명상하고 기도하기에 좋은 산 속이었다. 일주일 정도 금식은 기도하기 위해서 몇 차례 해본 적이 있어서 금식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40일 금식도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 죽이실 거라면 그런 명령 내리지도 않으셨을 테니까. 물만 마시며 15일이 지나자 걷기가 힘들 만큼 무릎이 약해지고 머리뼈와 뇌가 따로 노는 듯해졌다.
 금식 20일이 되자 새로운 걱정이 밀려 들었다. 월간잡지란 주간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식품회사를 하고 있는 내 고등학교 후배가 내 능력을 믿고 돈을 대며 발행하고 있는 잡지였다. 창간한지 얼마 안되어 한 호 한 호를 정성스럽게 만들지 않으면 경쟁이 심한 잡지 시장에서 낙오하기 좋은 것이다. 다음 호 준비 때문에 도저히 회사 일을 몰라라 하고 지낼 수가 없었다. 나는 금식을 중단하고 미음을 먹기 시작하며 잡지사 일로 돌아갔다. 
 잡지 일은 잘 되어 나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심한 죄책감에 빠졌다.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단 하루도 금식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불순종이다.  10월이 되자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회사에 사표를 내고 다시 금식으로 들어갔다. 20일 금식을 마치고 솔 숲 속에서 나는 큰 목소리로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세 번 외치고 기도했다. 지난번 20일과 이번 20일, 합해서 40일 금식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였다. 산에서 나오는데 갑자기 황홀한 기쁨이 나를 감쌌다. 81년도 4월, 하나님 손 만난 직후, 파주 오산리 기도원에서 회개기도할 때 성령 받으며 황홀해지던 그 황홀감이었다. 미음을 머기 시작하며 일주일쯤 되던 어느 날 새벽, 깊이 잠들어있었는데 손이 내 오른 팔 어깨쪽을 꼬옥 붙잡고 흔들며 나를 깨우는 것이었다. 눈을 뜨고 보았지만 아무 형태는 보이지 않는데 손은 나를 붙잡고 일으켜 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아버지의 사랑 같은 느낌이 나에게 밀려들며 음성이 아닌 말씀이 한 마디 한 마디 또박 또박 또박 내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내가 입으로 받아서 발음할 수 있는 그런 오묘한 말씀이었다. 이런 음성을 성경에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라고 표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시험이 다가 오니 깨어 일어나 기도하라"
'시험 당할 즈음 시험을 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주님은 당신에게 의지하는 자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철저히 보살피시는구나. 나에게는 진실로 나를 보호해 주시며 영생으로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이다.

 간증을 여기서 일단 맺는다. 날마다 삶이 간증거리인데 한이 없이 쓸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이마다 간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간증이 더욱 믿음을 돋구워 주기를 바랄 뿐이다.                                                                                 <끝>                      


 


 

출처 : 불거토피아
글쓴이 : 동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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