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 현안을 검토한 정황이 담긴 이른바 ‘캐비닛 문건’이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50)의 지시로 작성됐다는 법정 증언이 나왔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증거로 제출한 해당 문건들과 문건 작성자의 메모 내용을 공개했다. 삼성 측은 ‘이건희 회장 와병 뒤 나온 언론보도를 참고한 내용일 뿐, 경영권 승계를 도우라는 지시로 작성된 게 아니’라며 특검에 맞섰다.
2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김진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49) 등 삼성 전·현직 임원들의 공판에 이영상 대검찰청 범죄정보1담당관(44)이 증인으로 나왔다. 이 담당관은 민정비서관실 선임행정관으로 근무하던 2014년 7~9월 사이 당시 민정비서관이던 우 전 수석의 지시로 삼성 관련 문건들과 메모를 작성했고 증언했다. 그는 ‘민정비서관실 선임행정관으로 근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정비서관에게 ‘삼성에 대해 검토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냐’는 특검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 담당관은 우 전 수석의 지시를 받고 이른바 ‘삼성 보고서’ 작성에 들어갔다. 특검은 당시 이 담당관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기재한 A4 용지 2장 분량의 메모를 공개했다. 지난 14일 청와대가 해당 메모를 발견했다며 공개한 ‘삼성 경영권 승계 국면→기회로 활용’ ‘삼성의 당면 과제는 이재용 체제 안착. 윈윈 추구할 수밖에 없음’ 등의 내용 외에도 ‘삼성의 당면 과제 해결에는 정부도 생생한 영향력 행사 가능’ ‘지배구조 흔들 수 있는 경제와 법안’과 같은 내용이 새로 드러났다. 이 담당관은 “제 자필로 작성한 게 맞다”고 인정했다.
특검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캐비넷에서 발견된 각종 문건들도 제시했다. <국민연금 의결권 조사> <지주회사 제도 개선>이란 제목의 보고서 외에도 <보험업법 일부 개정안>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의 문건들이 이 담당관이 관리한 클리어파일에 들어있었다고 특검은 밝혔다. 특검은 이 같은 문건들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현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을 검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담당관은 자필 메모 내용들과 문건들을 종합해 우 전 수석의 승인 아래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민정비서관이 최종적으로 기조를 결정하고 보고서를 승인한 것이 맞냐’는 특검의 질문에 “그렇다”며 “제가 임의로 혼자서 작성한 것은 없다”고 답했다.
다만 이 담당관은 ‘민정비서관으로부터 경영권 승계 관련해 구체적 지시를 받았나’는 질문에는 “제 기억으로는 삼성에 대해 검토해보라는 내용 이상의 지시가 있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우 전 수석이 “삼성에 대해 검토해보라”고 지시한 이유, 보고서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는지 여부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이 부회장 측은 우 전 수석이 이 부회장 경영권 승계를 도와주라며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게 아니라고 맞섰다. 이 담당관은 ‘이건희 회장 와병에 따른 경영권 승계 문제를 다룬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변호인 측은 ‘국민연금 의결권 관련 문건을 받을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계획을 들었냐’고 물었고, 이 담당관은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 부회장 측 주장에 대해 특검은 “이 담당관이 민정비서관에게 ‘추상적 지시’를 받고 경영권 승계 관련 내용을 구체화했지만, 우 전 수석의 ‘피드백’을 거쳤음에도 보고서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다”며 결국 우 전 수석도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 검토를 중점에 두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담당관도 “중간에 검토 방향이 크게 변경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날 이 담당관에 대한 증인신문은 이 부회장 측이 이 담당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부동의해 진행됐다. 재판부는 문건 작성을 지시했다는 우 전 수석에 대해서도 오는 27일 증인신문할 계획이다. 다만 우 전 수석이 본인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유 등으로 불출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