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20대 초에 접했던 천주교로 인해 일생동안 천신만고의 괴로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천주학쟁이’라는 딱지가 붙고 나서는 진즉 천주교에서 손을 끊고 천주교와는 반대편에 서서 온갖 행위를 계속했지만, 일만 터지면 정약용은 ‘천주학쟁이’였다는 색깔론으로 비방과 탄압을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으면 지엄한 정조 임금에게 천주교에 관한 자초지종의 전말을 장문으로 작성하여 상소를 올려야만 했겠는가요. 비방 받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자세히 변명하면서 벼슬까지 사직하겠노라는 상소여서 이름이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였습니다.
“…천주교 책 속에는 윤상(倫常)을 헤치고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말이 진실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제사지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라는 대목으로 보면, 1791년 신해옥사 이후 폐제(廢祭) 문제가 급부상되자 깜짝 놀라 천주교와는 완전히 마음을 끊었다는 자신의 생각을 낱낱이 임금께 아뢰어, 임금이 그런 모든 주장에 동의하여 다시는 정약용이 ‘천주학쟁이’라는 비난을 받을 사람이 아님을 국가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정약용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이 되거나, 벼슬이 조금이라도 올라 반대파들의 마음이 불편해지면 곧바로 ‘정약용은 천주학쟁이였다’라는 비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진짜 천주교 신자였다면 신유교옥이나, 황사영백서사건 때 반드시 죽었겠지만, 신자가 아니라는 확증이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천주교에 관계했다는 이유를 들어 유배형을 당했습니다. 18년의 유배살이에도 비방은 끊이지 않았고, 해배한 뒤 18년의 고향집의 생활동안에도 비방은 멈추지 않았던 것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색깔론’은 오늘에도 그 위력이 너무나 셉니다. 모처럼 국민의 기본권 옹호에 소신을 지켰던 법관이 출현했는데, 근거 없는 색깔론을 뒤집어 씌워 헌법재판소 소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은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정당의 소속원 중에서 몇몇 사람이 법을 위반했다면 위반한 범법자야 법대로 처벌할 수 있지만, 정당 자체를 해산시킨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법리의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법리논쟁에서 소수의견을 내었다고 색깔이 다른 법관이라는 ‘색깔론’으로 국회의 부결에 동참한 국회의원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색깔론’에도 지긋지긋 신물이 나는데, 아니 언제까지 ‘색깔론’으로 높은 자격의 소유자들을 매장시키려는지요.
「한겨레신문」사설은 그러한 국회, 국민의 뜻을 배반하고 색깔론에 놀아나는 정치판을 ‘폭주 국회’라는 말로 비난하였습니다. 진보야당이라 자처하는 정당의 소속 의원님들 촛불국민들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요. 당신들마저 색깔론에 동조하여 나랏일을 이렇게 그르친다면 도대체 국민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할까요, ‘적폐정당의 2중대’라는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까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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