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도> 김석범 작가가 9월17일 경기도 파주 비무장지대 안 캠프 그리브스 유스호스텔에서 서울시 은평구가 제정한 제1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받았다. 은평구 제공
[토요판] 르포김석범과 3박4일2015년 제1회 4·3평화상 시상식에서 <화산도> 작가 김석범은 ‘학살자 이승만’을 비판했다. 박근혜 정부는 ‘입국거부’로 되갚았다. 한국행이 막힌 그를 2016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만났다. 오사카(‘평생 4·3을 쓰도록 결박된 운명’)에서 도쿄(‘정치적 협격을 당해왔다’)로 2박3일을 동행하며 그와 <화산도>의 일본 무대를 따라갔다. 김석범이 지난 16일 제1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서울 은평구 제정) 수상을 위해 방한했다. 입국거부 2년여 만이었다. 공항 입국장에서 출국장까지 그의 3박4일 ‘서울행’을 함께했다.그를 ‘다시’ 만났다.
1년6개월 만이었다.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였다. 9월16일 오후 3시15분 그가 김포공항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눈앞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그가 한참을 더듬어 기억의 한 조각을 찾아냈다. 그가 92년(1925년 출생) 동안 쌓아 올린 기억의 두께에서 그 얼굴은 점 하나가 되기에도 너무 흐렸다.
“아, 한겨레.”
지난해 3월 도쿄에서 작별하며 김석범은 말했었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소.”
고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 ‘다시 한국행’이 가능할지 그는 가늠할 수 없었다. 숙소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그는 많이 피곤해했다. “전날 잠이 오지 않아 2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다”고 했다. ‘다시’를 얻는 데 걸린 2년여의 시간이 그의 마음이 눕는 것을 방해했는지도 몰랐다.
“공기가 괜찮으면 좀 나아지겠지.”
그는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공기’가 달라져 있길 바랐다. 미세먼지 펄펄 나는 하늘의 공기가 아니라 비판을 허용치 않는 “권력의 탁한 공기”였다.
9월16일 김포공항에서 숙소인 서울 광화문 호텔에 도착한 김석범 작가가 호텔에서 일정을 마치고 나가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인사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올동 말동 했는데…” “저게 삼각산(북한산)인가? 삼각산이야?”
차창 밖으로 산이 보일 때마다 그가 묻거나 읊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가던 예조판서 김상헌(1570~1652)의 시에 그가 심경을 실어 말했다.
“올동 말동 했는데 다행히 올 수 있게 됐네.”
2015년 4월 김석범은 제주도에서 제1회 4·3평화상을 받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수상 연설에서 그는 제주도민 학살 위에 세워진 이승만의 단독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새누리당 쪽에선 “반대한민국적 발언”이라 날을 세웠고, 보수언론은 “북의 대변자”라며 공격했다. 박근혜 정부의 행정자치부는 수상자 선정 과정을 감사하라고 요구했고, 외교부와 주일본 한국대사관은 그의 한국 입국을 금지했다. “한국에 가기 위해 구걸하진 않겠다”던 그에게 삼각산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었다. 김석범은 한국을 다녀갈 때마다 기행문을 발표했다. 2016년 3월과 4월 두 차례 월간 <세카이>에 ‘그 사태’를 썼다. 제목이 ‘마지막 한국행’이었다.
서울 은평구가 제1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 소식을 알렸을 때 김석범은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 문학상 담당자들이 일본으로 찾아가 설득했을 때에야 그는 마음을 돌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젠 다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에 그는 “힘을 얻었다”고 했다. 은평구의 입국 협조 요청에 외교부는 “추진하시라”고 답했고, 주일본 한국대사관은 “잘 다녀오시라”며 허가증을 내줬다. ‘한국에 불리한 발언을 해선 안 된다’는 부대 조건도 이번엔 없었다. 그의 길을 막았던 정부가 무너진 뒤에야 ‘마지막’의 빗장이 풀렸다.
김석범은 스스로를 4·3에 묶었다. “4·3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평생의 문학과 삶으로 대결해왔다. <화산도>는 그 집대성이었다. 1976년 일본에서 연재를 시작해 2015년 한국어판(전 12권·보고사)으로 완역되기까지 40년이 걸렸다. “이승만 정부 수립의 희생양으로 바쳐진 제주”가 한국의 오늘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200자 원고지 2만2천장에 꾹꾹 눌러앉혔다. 일본이 1983년 ‘오사라기 지로 상’(아사히신문사)과 1998년 마이니치예술상(마이니치신문사)을 수여하며 <화산도>를 평가할 때 정작 한국은 그의 문학에 냉담했다.
“신촌이야?”
김석범이 대학생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보며 물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3월(4개월간)과 직후인 그해 10월(10개월간) 한국에 체류하며 그는 서울에 있거나 다녀갔다. 전쟁과 군사독재로 차단된 그의 한국행 길은 1987년 민주화항쟁으로 다시 열렸다. 42년 만의 입국(1988년) 첫날 그는 신촌에서 대학생들과 술을 마시며 4·3의 한을 노래한 ‘잠들지 않는 남도’(안치환 작사·작곡)를 밤새 불렀다. 종로에서 최루탄 가스를 피해 지하 다방에 들어갔을 땐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을 향해 명패를 집어던지는 노무현 의원을 생중계로 봤다.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 4번째 서울에 올 수 있었다.
오후 4시20분.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에 도착해 방으로 올라갔다. 복도 건너편으로 청와대가 보였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한국에 올 때마다 늘 긴장했는데 오늘은 마음이 편해서 좋아. 저기(청와대)가 바뀌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고.”
‘오사라기 지로 상’ 수상 당시 아사히신문사는 그를 위해 경비행기를 띄우고 한국에 그의 입국을 요청했다. 전두환 정권이 “3·8선과 포항제철 방문”을 입국 조건으로 내걸자 김석범은 “정권 홍보에 동원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한·일 영공 경계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그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한라산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다 돌아왔다. 그가 비판해온 정권에 뿌리를 둔 정치권력들이 오랫동안 그의 목소리를 가렸다. 한국 주류 문단과 언론도 그의 문학을 일본과 제주의 경계 안에 가두며 변방화했다.
한국행 이틀째(17일). 김석범이 헌병의 검문을 통과해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경기도 파주 캠프 그리브스 유스호스텔에서 수상 연설을 했다. 전날 “이번엔 정말 제대로 하겠다”던 이야기를 그가 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모신 친일파들이 뿌린 화근이 후대의 썩어빠진 한국 사회의 뿌리가 된 것이고, 지난번 천만 촛불 데모로 시원히 없어진 박근혜 정권이 그 마지막 모양새입니다.”
그가 “주최 쪽이 내용을 수정하면 수상을 거부하려고 했다”던 그 연설문이었다. 시상식 직후 기자회견에서 그는 “촛불 데모가 만든 민주정권이 아니었다면 나는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의 이번 한국행은 기념적”이라고도 했다.
“<화산도>는 해방공간의 역사와 정치를 정면으로 다뤄요. 그동안 인민과 백성 편에서 역사를 쓰는 일이 어렵지 않았소.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니 이승만 시대, 박정희·전두환 시대, 그 후 지금까지 다 훑어보고 새로운 역사를 건설해봐요.”
그가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내 나이 구십이 넘었단 말입니다. 안 들리니까 앞으로 나와서 물어요.”
1년6개월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일본에서 그는 “본래 천천히 못 걷는 사람”이라며 늘 속보로 앞장섰다. <화산도> 배경이 된 장소를 둘러본 뒤엔 저녁부터 새벽까지 술잔을 놓지 않았다. 나이가 믿기지 않는 에너지를 그는 매 순간 발산했다. 전날 공항에서 다시 만난 그는 “머리가 울려 잘 못 듣고 다리가 저려 걷는 데 불편하다”고 했다.
김석범 옆에서 기자회견을 함께한 소설가 김숨(특별상 수상)이 “제 얘기도 안 들리셨겠다”며 그의 팔을 잡았다. 김숨은 말했다.
“개인의 기억이 역사가 되고 그 기억이 모여 민족과 세계의 역사가 될 텐데, 작가로서 그 기억과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어요.”
김석범의 문학은 기억과의 투쟁이었다. 오랜 세월 4·3은 “말살당한 기억”이었다.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일이었고, 알아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다. 권력이 몰아붙인 “기억의 타살”이었고, 제주인들에게 강요된 “기억의 자살”이었다.
그가 도라산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북녘을 바라봤다. 텅 빈 개성공단을 보며 말이 없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지.”
정부가 바뀌어 그는 한국에 올 수 있었지만 그의 눈에 담긴 남북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 멀어져 있었다.
9월16일 숙소가 마련된 호텔 복도에서 김석범 작가가 맞은편의 청와대 쪽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문영 기자
“싸울 때는 싸워야지”김석범은 1925년 10월 일본 오사카 이카이노(현재 명칭 이쿠노)에서 태어났다. 뱃속에 그를 가진 어머니가 제주에서 오사카로 밀항해 그를 낳았다. 이카이노는 4·3을 피해 밀항한 제주인들의 집단 은거지였다. 살육의 조국에서 도망쳐 차별과 핍박의 땅에 목숨을 의탁해온 그들의 시간이 <화산도>에 응축돼 있다. 그 시간은 김석범의 시간이기도 했다.
“남북 어느 한쪽에 살았다면 나는 살아있지도 쓰지도 못했어요. 원수의 나라 일본에 있었기에 <화산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국행 사흘째(18일). 기념 심포지엄 기조강연(은평문화예술회관 숲속극장)에서 김석범이 말했다. 그는 한국인도, 북한인도, 일본인도 아니었다. 패전국 일본이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은 재일 한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부여한 ‘조선적’을 고집했다. 남·북·일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국적을 찾아 떠나도, 남과 북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를 회유해도, 김석범은 분단된 나라 어디에도 속하길 원치 않았다. 그는 무국적자였고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백성으로 남았다. 그의 소설을 일본 문학의 하위로 두려는 땅에서 김석범은 지배자의 언어(일본어)로 조선을 썼다. ‘조선을 다루는 문학이 보편적일 리 없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 작가·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인식과 싸우며 그는 상상력과 비타협으로 <화산도>의 보편을 이뤄냈다. 교조주의에 반발하며 스스로를 죽이는 소설 속 이방근은 그의 분신이었다.
“안 들려서 말이지.”
김석범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한국 문인과 학자들의 <화산도> 토론을 꼼짝 않고 응시하던 그가 패널들 사이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이 땅에 더디게 도착한 <화산도>의 운명과 앞날에 그는 가만히 귀 기울였다.
한국행 마지막날(19일). <화산도>를 번역한 김환기 교수의 요청으로 동국대에서 학생들과 만났다. 증손자뻘 학생들 앞에서 그는 “나흘 일정 동안 가장 기쁜 시간”이라며 울먹였다.
“이 시대는 여러분이 촛불로 만든 거예요. 싸울 때는 싸워야지. 기회가 오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서 기회를 잡아당겨야지.”
3박4일 동안 김석범은 자주 목이 메었다. 입국 첫날 그는 “종로 뒷골목과 인사동 포장마차에 가고 싶다”고 했다. “죄다 아스팔트밖에 없는 땅에서 그나마 골목이 남아 있는 곳들”이었다. 빡빡한 일정 탓에 바람을 이루지 못한 그는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말했다.
“나쁜 정권일 땐 눈물이 나도 절대 안 울어. 그건 패배야. 운다는 건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야.”
지난해 일본에서 만났을 때 그는 “<화산도> 이후의 이야기로 새 소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91살에서 92살이 되는 사이 그는 장편소설 <바다 속으로부터>(海の低から)를 매달 <세카이>에 연재(200자 원고지 80장 분량)해왔다. 한국에 오기 직전 12회째 원고를 잡지사에 넘겼다.
“소설 마감(내년 4·3 전 완결 목표) 때문에 당장 쓸 수 있을진 모르지만 적당한 시점에 이번 방문을 기행문으로 쓰겠다”고 했다. 제목은 ‘속(續)한국행’으로 정해뒀다.
“지난번 글(‘마지막 한국행’)이 거짓말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기분 좋다고 써야지. 더 이상 올동 말동 안 해도 된다고 써야지. 촛불이 오염된 공기를 태워버려 맛있는 공기 먹고 왔다고 써야지. 이제 정치가 잘 해서 더 맑은 공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써야지. 건강이 허락되면 내년 4·3(70주년) 땐 제주에 가고 싶다고 써야지.”
오후 3시40분. 그가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입국 때마다 재발급받아야 하는 1회용 ‘대한민국 여행증명서’가 여권 대신 그의 손에 있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9월17일 제1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받은 김석범 작가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은평구 제공
9월17일 문학상 시상식을 마친 김석범 작가가 도라산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북녘을 바라보고 있다. 이문영 기자
9월18일 기념 심포지엄 기조강연을 마친 김석범 작가가 <화산도>의 성취를 토론 중인 단상으로 올라가 문인과 학자들 사이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이문영 기자
9월19일 출국하는 김석범 작가의 손엔 여권 대신 1회용 ‘대한민국 여행증명서’가 들려 있었다. 이문영 기자